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남동생에 대한 내용은 카를 루트비히(1833)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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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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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9D7CC><colcolor=black>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Erzherzog Carl, Herzog von Teschen | |
이름 | 카를 루트비히 요한 요제프 라우렌티우스 (Carl Ludwig Johann Joseph Laurentius) |
출생 | 1771년 9월 5일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
사망 | 1847년 4월 30일 (향년 75세) |
오스트리아 제국 빈 | |
배우자 |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타 (1815년 결혼 / 1829년 사망) |
자녀 | 마리아 테레지아[1], 알브레히트, 카를 페르디난트[2],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마리아 카롤리네, 빌헬름 프란츠 |
아버지 | 레오폴트 2세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
형제 |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2세, 페르디난도 3세, 알렉산더 레오폴드,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터,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3]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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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이자 프란츠 2세와 페르디난도 3세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테셴의 공작이기에 흔히 카를 대공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연합군 사령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친동생이라는 당시 지휘관들 중에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4] 같은 신분을 가진 콘스탄틴 대공이나 비슷한 신분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고위 귀족 출신 장성들과 달리, 뛰어난 전술과 전략적 식견을 보유하고 있었던 인물이다.[5] 때문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하나였다고 평가된다.[6]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둔 몇 안되는 군인 중 하나.2. 생애
2.1. 유년기와 초기 경력
카를 루트비히 대공은 부황 레오폴트 2세가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던 시절, 그의 3남으로 태어났다. 날 때부터 병약하였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뇌전증을 앓았고, 그 증상은 성장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였다.[7] 후계자가 없던 고모, 테셴 여공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 남편 알베르트 부부에게 입양된 그는 부친의 영지였던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렌체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던 빈, 그리고 양부이자 고모부가 총독으로 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부모는 본래 카를이 성직자의 길을 가게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군에 들어간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개시되자 고모부가 담당하고 있던 저지대 주둔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였고,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8]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하여 네르빈덴 전투 등에서 공훈을 세웠다. 무훈을 계속 세운 결과, 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까지 역임하였다.[9]
2.2. 나폴레옹 전쟁기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는 크게 세 방향에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북이탈리아였고, 하나는 저지대, 하나는 남부 독일이었다. 이 중 저지대와 남부 독일 전선은 라인강 유역으로 크게 묶여 있었다. 카를 대공이 라인 강 방어선을 책임지게 된 1796년 당시, 프랑스군의 라인 방면 공격군 사령관은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바티스트 주르당이었다.라인에서의 무훈을 세운 후, 건강 악화로 인해 사령관에서 사임하였다.
1809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대육군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스트리아 내부에서는 프랑스 제1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것을 바라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이끌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바그람 전투에서는 혈투 끝에 패배했다. 이후 추격해온 오귀스트 마르몽의 프랑스군에게 다시 패배하여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제의하였지만, 이 휴전 협상으로 인해 형인 프란츠 2세와의 사이는 나빠지게 되었다.
2.3. 은퇴와 말년
츠나임 휴전 이후, 카를 대공은 완전히 은퇴하였다. 그는 이전부터 진행하던 전술서나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한 기록 등을 남기는 데 집중하였고, 군으로 복귀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형인 프란츠 2세가 프랑스의 영토에서 부르고뉴와 알자스 지역을 따로 분리시켜 오스트리아의 괴뢰국을 세우고 그곳의 영주로 내세우려 했으나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반발로 실패하였다.1815년, 카를은 44세의 나이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10]의 헨리에타 공녀와 혼인하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녀는 1797년생으로, 대공보다 무려 26세나 어렸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그녀는 대공과의 사이에서 7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고, 황제 프란츠를 비롯한 카를의 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신교도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던 풍습인 크리스마스 트리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빈 궁정에 가져온 것도 그녀였다. 카를은 그녀를 위해 바덴에 여름 궁전을 새로이 지어 주기도 하였다. 카를의 생활은 그녀와 아이들을 통해 안정되었다. 이 시기인 1822년 양부이자 고모부인 테셴 공작 알베르트가 죽자, 그는 유산과 작위를 계승하였다.
카를과 헨리에타 일가의 행복한 생활은 14년밖에 가지 못했다. 1829년, 성홍열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던 헨리에타는 그 병에 옮아 앓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카푸친 교회의 황실 봉안당에 안치되었다. 이는 개신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카푸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헨리에타를 봉안당에 안치할 수 없다"며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츠 2세가 "헨리에타는 평생을 남편의 가문과 함께 살았으니, 죽어서도 함께할 권리가 있다"는 칙명을 내리면서 이를 무마시켰다. 결국 헨리에타는 황실 봉안당에 안치된 유일한 신교도가 되었다.
아내의 사후, 카를은 남은 아이들의 교육을 스스로 책임지고 아내의 몫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847년에 그는 빈에서 숨을 거두었고, 황실 봉안당에 먼저 안치된 아내의 곁에 안치되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Queen of the Two Sicilies) | 1816년 7월 31일 | 1867년 8월 8일 | 페르디난도 2세 슬하 9남 4녀[11] |
1남 | 테셴 공작 알브레히트 대공 (Archduke Albrecht, Duke of Teschen) | 1817년 8월 3일 | 1895년 2월 18일 | 바이에른의 힐데가르트 공주[12] 슬하 1남 2녀 |
2남 |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 (Archduke Charles Ferdinand) | 1818년 7월 29일 | 1874년 11월 20일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13] 슬하 3남 1녀[14] |
3남 | 프리드리히 대공 (Archduke Frederik) | 1821년 5월 14일 | 1847년 10월 5일 | |
2녀 | 마리아 카롤리네 대공비 (Archduchess Maria Carolina) | 1825년 9월 10일 | 1915년 7월 17일 | 오스트리아의 라이너 페르디난트 대공[15] |
4남 | 빌헬름 프란츠 대공 (Archduke William Francis) | 1827년 4월 21일 | 1894년 4월 29일 |
4. 여담
- 손자 프리드리히 대공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이었으며, 카를 슈테판 대공은 황립 및 왕립(k.u.k) 해군의 대제독이었다.
[1]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두 번째 왕비이다.[2] 알폰소 12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프리드리히 대공, 오이겐 대공의 아버지이다.[3]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로 유명한 인물이다.[4]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자 러시아 근위대의 지휘관이였던 콘스탄틴 대공 정도만이 카를 대공과 대등한 위치였다.[5] 다만 콘스탄틴 대공은 독립적인 지휘관으로 활동하진 않고 예비대인 근위대를 주로 지휘했다.[6] 나폴레옹과 굵직한 전투를 치른 장군들은 아서 웰즐리,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미하일 쿠투조프등 몇 명 있었지만, 혁명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나폴레옹과 가장 많이, 지속적으로 싸운 건 카를 대공이 거의 유일했다.[7] 이러한 점은 뒷날 그의 전략에도 영향을 주었다.[8] 혁명기 프랑스의 장군. 지롱드당에 속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혁명군의 첫 승전과 같던 발미 전투의 주역이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장악하기까지 하였으나,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흐르고 중앙에서 몽테뉴파가 세력을 확대하자 위기감을 느껴 쿠데타를 꾀했다. 그러나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당했고, 본인은 연합군에게 투항하였다.[9] 그러나 이후 저지대는 결국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 그는 오스트리아령 저지대의 마지막 총독이 되었다.[10] 현재 룩셈부르크를 다스리고 있는 가문이다. 더 정확히는 현재의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모계 조상이다.[11]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안눈치아타 등[12]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4녀.[13] 숙부 요제프 대공(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의 7남)의 4녀로 친사촌이다.[14]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프리드리히 대공, 오이겐 대공 등[15] 숙부 라이너 요제프 대공(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의 10남)의 4남으로 친사촌이다. 사르데냐의 왕비 아델라이데의 남동생이기도 하다.[16] 총 8남 4녀를 두었는데, 첫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소생의 외아들인 마지막 왕 프란체스코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인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가 명목상의 왕위를 계승했고, 양시칠리아 왕가의 계보는 알폰소의 후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녀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어머니이다.[17] 차남 카를 페르디난트의 장녀. 카를 페르디난트의 아내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는 카를 루트비히의 동생 요제프 안톤의 딸로 친사촌 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