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무라 다케오(奥村 武雄: 1920년 2월~1943년 9월 22일)
1. 개요
일본의 전투기 조종사2. 생애
2.1. 수병 출신 비행병
다이쇼 시대에 후쿠이현에서 태어난 오쿠무라 다케오는 격추수 54기로 일본 해군의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 탑 클래스의 무공을 세운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살아있을 때 계급은 상등 비행병조였으나 전사한 후에 1계급 특진되어 비행병조장이 되었다.2.2. 중일전쟁에서 데뷔
1935년(쇼와 10년)에 일본 해군의 신병 훈련소 중 하나인 쿠레 해병단(呉海兵団)을 통해 입대했다. 원래는 수병으로 근무했으나 조종원을 지망하여 1938년(쇼와 13년) 2월에 규율이 엄격한 일본군에서 가장 혹독하기로 악명높은 조종 연습생 과정을 통과해 9월에 42기로 수료했다. 첫 자대로 제14항공대(第十四航空隊)에 배속된 그는 1940년(쇼와 15년) 10월 7일에 중국의 쿤밍을 공습하는 96식 육상공격기의 직엄대로 처음 실전 출격을 경험했다. 고후쿠다 테루후미(小福田晧文 : 1909~1995) 대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 오쿠무라 다케오가 함께 비행한 7대의 제로센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접근해온 중국 공군의 I-15 전투기를 13대나 격추시켰는데, 오쿠무라는 이 데뷔전에서 무려 4대의 적기를 잡아내는 놀라운 전공을 세웠다. 약관 스무살의 신참 조종사는 첫 교전에서 에이스 문턱에 성큼 다가서게 되었다.2.3. 태평양 전쟁 개전
태평양 전쟁이 터진 후인 1942년(쇼와 17년) 8월 24일에 항공모함 류조(龍驤)의 함상전투기 대원으로 참전한 그는 2차 솔로몬 해전에서 과달카날 근해의 미 해군 함선들을 공격하는 97식 함상공격기를 엄호하기 위해 장거리 출격을 감행한다. 이 날, 모함인 류죠는 미 해군의 함상폭격기 18대와 함상공격기 9대의 합동 공격을 받고 대파되었다가 결국 침몰하게 된다.이 전투에서 오쿠무라 병조는 몇 대의 미군기와 동시에 교전을 펼치고 격추도 하는 등 나름의 활약을 했지만, 모함을 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8월에 라바울에 기지를 전진 배치시킨 타이난 해군항공대(11월부터는 251해군항공대로 개칭)에 전속되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출격하며 미군들과 싸우던 그는 12월 10일에 잠시 본토에 돌아갔는데, 이때까지 그의 격추수는 14대를 헤아리고 있었다.
2.4. 라바울 항공대
1943년(쇼와 18년) 7월, 제201해군항공대로 소속을 옮긴 오쿠무라 다케오는 다시 라바울 기지로 돌아갔다. 그는 해군의 비상 활주로를 겸하고 있던 부인 기지로 가서 작전에 참가했다. 9월 14일에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 부대가 부인 기지로 접근해오자, 오쿠무라는 기지 방어를 위해 긴급 출격했다. 그는 이날의 교전에서 무려 10대의 격추를 보고했는데, 그 내역은 B-24 중폭격기 1대, F4U 1대와 5대의 F6F, 그리고 미 육군 소속의 P-40 전투기 2대와 마지막으로 SBD 1대였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온 오쿠무라에게는 11항함 사령관인 구사카 진이치(草鹿任一) 제독이 직접 무공훈장을 수여해주었다.오쿠무라는 9월 22일에도 뉴기니 폰반도 레틴 곶 앞바다를 통과하는 연합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러가는 아군 폭격기들을 엄호하기 위해 출격하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가와이 시로(河合四郎) 대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서 귀환한 동료 전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쿠무라 다케오는 50대가 넘는 P-38과 P-40의 합동 공격에 맞서는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항공대장은 전사한 오쿠무라가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2계급 특진과 금치 훈장 추서를 상신했지만, 이 서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