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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오페라 작전 | |
작전 당시의 항로 | |
당시 작전을 묘사한 상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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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 공군이 제작한 관련 영상 |
1981년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핵무장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가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겨냥하여 실시한 공군 중심의 군사 작전.
일명 '오페라 작전'(Operation Opera)라고도 불린다. 공습 대상이 이라크였던 점을 빗대 '바빌론 작전'(Operation Babylon)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혼용되는 듯. 이란군에 의해 1차, 이스라엘군에 의해 2차로 폭격이 이루어졌는데 일반적으로 그냥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혹은 '오시라크 공습'이라고만 하면 거의 이스라엘군에 의해 실행된 2차 원자로 폭격 작전을 의미한다.
2. 배경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주도 아래 1975년~1976년에 걸쳐 프랑스와 이탈리아로부터 각각 연구용 원자로, 핵연료 재처리 시설 등을 구매하여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핵시설 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미 1950년대에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무기 금수조치가 내려진 이스라엘에 핵무기 연구용 원자로를 제공하고 공동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바 있으며[1] 1973년 1차 석유 파동 후 안정적 석유 공급처 확보가 절실한 상황에서 사담 후세인이 저렴한 가격에 장기간의 석유 공급을 조건으로 원자로 판매를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대량의 무기 판매처를 확보하는 측면도 있었으며 이탈리아도 프랑스와 같은 이유로 핵연료 재처리 시설 판매를 승인했다.당시 프랑스가 제공한 연구용 원자로의 명칭은 '오시리스'(Osiris)였는데[2] 프랑스는 이라크에 제공할 원자로에 오시리스와 '이라크'(Iraq)를 합친 '오시라크'(Osirak)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연구용 원자로는 프랑스 엔지니어 이브 지라드가 무기 제작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특별히 설계한 원자로였고[3] 프랑스는 이를 근거로 평화적 연구목적뿐이라며 판매를 강행했다.
건설 당시의 오시라크 원자로 |
하지만 이란과 이스라엘은 진작부터 이라크의 원자로 도입, 건설이 핵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만약 프랑스의 주장대로 핵무기를 만드는 데 직접 사용되지 못하더라도 이라크가 핵무기 제작을 위한 모든 기술과 인력을 얻게 되는 데다 이미 인도가 캐나다에서 건설해 준 연구용 원자로(CIRUS)를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한 사례가 있었다. 애초에 이스라엘도 프랑스에서 지어준 원자로를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라서 프랑스의 오시라크 원자로 건설이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것임을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본인들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저농축 핵연료 사용 요구를 거절하고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93%) 72kg의 판매를 강행했으며 특히 이라크가 해당 원자로의 지하에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건설하고 이들 시설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상시 사찰, 감시 대상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자 이라크의 핵개발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1979년 프랑스에서 제작 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 코어를 폭탄 테러로 파괴하고 1980년에는 이라크의 핵 프로그램 책임자인 아야 엘 마샤드[4]를 파리의 호텔에서 살해했지만[5] 이라크의 원자로 도입을 몇 개월 늦출 뿐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이스라엘과 이란은 오시라크 원자로를 직접 폭격해 무력화하는 군사작전에 나서게 된다.
3. 사전 작업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원자로 무력화 작업은 이란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원자로 및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부터 구입하기로 한 1975년부터 이미 이에 대한 대처에 긴밀히 협력해 왔고 폭격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이란과 이스라엘은 1979년 이란 혁명 전까지 이라크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친미 국가로서 비공식적인 동맹관계였고 이란 혁명 후에도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내내 비공식적인 협력을 지속하였다. 이란은 혁명으로 금수조치된 미국제 무기와 부품의 공급이 필요했고 두 국가는 호전적인 이라크 견제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6]
3.1. 이란 공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1차 폭격
벼려진 검 작전Operation Scorch Sword
이란 혁명 직후 혼란을 노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이스라엘은 이란에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을 종용했고[7] 이란에게도 이라크가 전쟁을 걸어온 이상 핵 능력은 반드시 없애야 했기 때문에 폭격작전을 실행한다. 하지만 미국, 프랑스 등 서방 정보기관들의 방해로 오시라크 원자로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었던 데다 폭격 직전 이스라엘과 시리아 정보기관이 오시라크 원자로에 이미 연료봉이 주입되어 가동 중일 수 있다는 정보를 수집하였기 때문에 원자로를 제외하고 연구소, 통제실, 우라늄 농축기 등의 시설만 폭격해 무력화하는 작전으로 진행되었다.
1980년 9월 30일 8발의 Mk.82 폭탄과 2발의 AIM-7E-2 스패로우로 무장한 4대의 F-4E가 이란-이라크 국경 지역에서 공중급유한 뒤 초저공으로 침투했고, 그중 2대는 반대쪽인 바그다드의 발전소를 폭격하여 기만작전을 수행하고[8] 다른 2대는 오시라크 원자로 주변 건물과 시설에 16발의 Mk.82를 투하하고 초음속으로 이탈하여 이란으로 귀환했다.
당시 이라크군은 SA-6 지대공미사일 포대 1개, 프랑스제 롤랑드2 단거리 지대공미사일 포대 3개[9], 대공포 40문으로 오시라크 원자로 주변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란 공군의 F-4E가 공습할 때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10]
이라크와 프랑스는 이란의 공격이 실패였으며 거의 피해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에 있던 프랑스 기자의 사진을 보면 500파운드 폭탄 16발에 의한 주변 시설 파괴는 확실히 확인되었다. 다만 원자로 본체는 공격받지 않았을 뿐더러 파괴된 주변 건물들도 콘크리트 구조물 건설 단계였기 때문에 주요 장비들은 설치되지 않았던 관계로 복구에는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시설이 실제로 파괴된 것도 맞고 실질적인 피해가 별로 없었던 것도 맞다. 가장 실질적인 피해는 수백명의 프랑스, 이탈리아 엔지니어들이 안전 문제로 귀국해 버려 반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된 것이었다.
2달 후인 1980년 11월 30일에는 피해와 복구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이란 공군의 RF-4E가 초음속으로 오시라크 원자로에 접근하여 사진 촬영 후 이탈해 귀환했다.[11] 이렇게 얻은 사진으로 정확한 시설 파괴 정도와 공사 중단이 확인되어 이란과 이스라엘은 이 폭격작전이 성공이라고 결론내렸다. 또한 오시라크 원전의 정확한 구조와 생김새가 촬영된 사진들은 곧바로 이스라엘로 전달되었고 이스라엘은 이 사진을 바탕으로 자체 폭격 계획을 세우고 오시라크 원자로의 1:1 모형을 만들어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
3.2. 이란 공군의 H-3 공군기지 폭격
H-3 작전Operation H-3
폭격 후인 1980년 10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메나헴 베긴 당시 수상에게 "1981년 6월 말부터 오시라크 원자로가 완공, 가동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오시라크 원자로의 완공, 가동 이후에는 방사능 유출 문제로 인해 무력으로 제거할 기회가 사라질 것임을 인식하고 이전에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이스라엘은 정찰 비행을 통해 유효한 침투 경로를 분석, 계획하고 이라크의 방공 태세를 평가하는 작업을 전개했는데 이중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 오시라크로 접근하는 경로 상에 있는 공군기지 H-3였다. 이는 요르단-사우디-시리아의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요르단군과 이라크군이 공동으로 운용하는 공군기지로, 이스라엘 방향의 항로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최신형 미라지 F1EQ 전투기까지도 막 전달되어 배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무력화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이라크의 방공망이 철저히 감시하는 이스라엘 쪽 요르단-사우디 국경 방향이 아닌 정 반대편의 이란에서 멀리 돌아와 공격하는 작전을 세우고 이스라엘이 파악한 이라크군의 레이더 및 방공망 정보[12]가 이란에 전달되었다.
1981년 4월 4일 아침 10시 30분에 이륙한 이란군의 F-4E 8대가 이라크의 국경선을 따라 차례로 터키-이라크 국경, 터키-시리아 국경, 시리아-요르단 국경을 거쳐 무려 3,500 km를 돌아 날아가 무방비상태의 H-3 공군기지를 내륙방향에서 공격했다. 이란에서 출격한 8대의 F-4E가 시리아에서 이륙한 KC-707 공중급유기에게 공중급유를 받으며 비행했고 747 공중통제기, 공중급유기와 C-130H 통신중계기도 시리아의 공항에서 이륙해[13] 시리아 영공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시에 양동작전으로 같은 시간에 3대의 이란 공군 F-5가 정 반대쪽인 키르쿠크의 공군기지를 공격했고 2대의 이란 공군 F-14가 바그다드 근처에서 영공을 침범하여 이라크군의 시선을 돌렸다. F-4E는 국경 산악지대를 300피트(약 100m) 초저공으로 비행하여 이라크와 터키군의 레이더를 피했으나 이라크 군 레이더에 여러 번 포착되었다. 하지만 이란군의 양동작전으로 내륙을 공격받고 있던 이라크군은 단지 국경선을 따라 날아가는 F-4E에는 신경쓰지 못했다.
H-3 공군기지와 수십 대의 항공기는 등 뒤에서 나타난 이란군 F-4E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파괴되었고 이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습작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폭격을 위한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
4. 이스라엘 공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2차 폭격
오페라 작전Operation Opera
이스라엘의 공습 작전은 1981년 6월 7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 55분에 시작되었다. 직접 공습을 실시할 8대의 F-16 전투기, 공중 호위를 담당할 6대의 F-15 전투기가 출격하였다.[14] 이들 전투기의 조종은 1967년과 1973년의 제3, 제4차 중동전쟁 등에 참전했던 베테랑 파일럿들이 담당했다. 작전 당일은 서방에선 휴일인 일요일로, 혹시나 있을 프랑스인 관계자들의 사망 가능성을 낮춰 국제적 비난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비행거리가 1,600km에 달했으며 비행 경로상 공중급유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작전에 동원된 F-16 전투기들의 방어장비를 제거하여 기체를 경량화하고 폭탄을 탑재한 하드포인트에 보조연료탱크까지 장착하여 항속거리를 최대한 연장하였다. 밀집 편대로 전투기들을 비행하도록 하여 아랍측 레이더에 대형 민항기처럼 식별되도록 유도했으며 아랍어를 잘 하는 조종사를 동반시켜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측을 기만했다. 이라크 상공으로 진입한 후에는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고도 30m[15] 상공으로 저공 비행했다.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묘사도 |
폭격 직전, 이스라엘 공군 F-16의 HUD에 포착된 오시라크 원자로의 모습 |
마침내 비행 약 1시간 30여분만인 오후 5시 30분(이라크 현지시각 기준으로는 오후 6시 30분) 이스라엘의 공군기들은 오시라크 원자로에서 20km 밖까지 도달했다. 이스라엘의 F-16 전투기는 이라크의 방공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급격히 높인 후 35도 각도로 급강하하여 총 16발(대당 2발)의 마크84 무유도 폭탄을 원자로와 지하 재처리 시설을 향해 투하했으며[16] 고도를 상승시켜 신속히 이라크를 빠져나갔다. 실제 공습 과정에서 소요된 시간은 채 2분도 안 되었다.
5. 결과
불과 2분 동안의 공습으로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수년 동안 공들여 진행했던 핵무기 개발의 핵심 시설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17] 이 과정에서 이라크군 10명이 전사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무런 인명피해도 내지 않았다. 이외에 프랑스인 민간인 기술자 1명도 사망했다.
작전 직후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작전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 골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보복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잠재적 군사 위협의 제압과 더불어 5년 전의 엔테베 작전에 이어 자신들의 군사적 신화를 다시 추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6. 후일담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공습은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선제공격, 즉 '예방적 자위권'(preventive self-defense)을 실제 군사 작전으로 구현해낸 최초이자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 작전이 실행되지 않았거나 실패했다면 이라크는 핵개발을 계속했을 것이고 당시 전쟁 중이던 이란에 핵폭탄을 실제로 투하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이스라엘은 26년 후인 2007년 9월에도 시리아가 건설 중이던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공습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18] 이 원자로가 위치했던 시리아 데이르에조르 지역은 2014년부터 ISIS에 3년간 점령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공습이 없었다면 ISIS가 핵무기를 손에 넣었을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큰 의미를 가진 공습.
그 때문인지 북한이나 이란 등의 핵무장 위협에 대한 선제타격을 주장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성공사례다. 그러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은 공격 대상이었던 이라크가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방어 태세가 약화된 상태였고 표적이 원자로 하나로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가동 이전에 작전을 실시하여 방사능 유출 위험을 배제시킬 수 있었던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19] 정작 이스라엘은 당시의 이라크보다 훨씬 대규모의 핵시설을 보유 중인 이란에 대해서는 공습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란은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 규모도 훨씬 크고 명분과 성공 가능성을 따지면 여러모로 이라크보다 훨씬 공습이 어려운 데다 오시라크 공습을 본 후 대비를 철저하게 하며 러시아로부터 S-300지대공 미사일을 비롯한 대공망을 갖추고 이란 곳곳에 가짜 위장 원자로를 설치하여 위성 사진으로 보면 이게 진짠지 가짠지 판별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러시아에게 이러한 무기 판매를 항의했다가 역으로 러시아의 이웃나라들에 무기를 팔던 게 알려진 만큼 "니들도 우리 앞마당에 그래놓고 정작 이스라엘 이웃에 이러니까 따지냐?"라며 비웃음만 당했을 뿐. 이러다 보니 미국도 이란 공습을 지극히 어렵고 만일 엄청난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 한다고 하더라도 날려 버린 건 가짜일지도 몰라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이스라엘도 당연히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스턱스넷을 이용한 간접적 방해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아제르바이잔에 엄청난 무기 수출 및 기술 제휴 및 군사훈련도 같이 이스라엘이 가지면서 이스라엘군이 일부 아제르바이잔에 주둔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이 그렇다고 옆에 있는 이란과 전쟁을 각오하고 도울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이스라엘로선 떡하니 이란 옆나라 공군기지에어 이스라엘군을 주둔시키면서 이란을 윽박지르고 있다. 이란이야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에 따져들었지만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많은 군사적 도움을 받아 아르메니아를 뭉개고 아르차흐 영토 다수를 되찾은 아제르바이잔이 더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이다.
당연히 사담 후세인은 이 사건으로 노발대발했고 작전 당시 F-16 조종사로 참전했던 이스라엘 공군의 일란 라몬(Ilan Ramon)은 1997년부터 NASA 우주 비행사로 활동했는데 2003년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 폭발 참사로 다른 승무원 6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를 두고 천벌을 받았다며 고인드립을 쳤다가 굉장한 어그로를 끌었다.[20] 그리고 이후 후세인과 이라크의 운명은 다들 알다시피...
7. 창작물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솔저 블루에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있다. 이라크는 오시라크 원자로에서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었고 이에 이스라엘 육군 특수부대는 육로로 오시라크 원자로를 파괴하기 위해 침입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중동전쟁의 도화선이 될 것을 염려한 솔저 블루 팀은 길 위에 다윗의 별을 그려 놓고 매복했다가 멈춰선 이스라엘 특공대를 전원 사살한다. 하지만 이것은 양동작전이었고[21] 실제 역사대로 이스라엘 공군 전폭기들이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해 파괴하는 것으로 끝난다.
- 탑건: 매버릭에서도 30미터 저공 비행을 한다던지 핵관련 시설에 대한 파괴 임무라는 점, 2분 30초만에 폭파하고 두 번의 루프비행을 통해 탈출한다는 점 등에서 본 공습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본 작전을 주제로 한 Raid on the Sun(태양으로의 공습)이라는 소설이 있다.
8. 관련 사건
- 과수원 작전: 2007년 이스라엘의 시리아 원자로 공습
[1]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에 군대를 보내고 점령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2] 묘하게도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의 이름과도 같다. 핵무기의 이미지와 일맥상통하는 대목.[3]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의 플로토늄을 모으려면 수십년이 걸리도록 제작되었다.[4] 이집트 국적의 핵물리학자.[5] 현지인 여성을 이용해 호텔로 유인한 뒤 칼로 살해하였다. 현지인 여성은 입막음 용도였는지 사고였는지 보복이었지는 불명이나 며칠 후 차에 치여 사망했다.[6] 이후 이어진 걸프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해 이라크의 위협이 사라지자 이란과 이스라엘은 상호간 협력의 목적을 상실하여 현재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7] 이스라엘은 이란에게 미국제 전투기 부품 등 핵심 군수물자와 군사정보를 제공해 주는 거의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라크와 전쟁이 시작된 이란에게는 너무 중요한 동맹이었다.[8] 바그다드가 이틀간 정전되었다.[9] 프랑스인 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가 제공했다.[10] 이란 공군의 F-4E, F-14A에 달린 전자전 장비는 미국에게 업데이트를 받지 못해 이중 SA-6 지대공 미사일에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롤랑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면 격추되었을 수 있었다.[11] 이때는 대공포와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12] 예를 들어 이라크 방공망은 저고도 고속비행하는 항공기를 발견하고 대응하기까지 항상 2-3분의 공백이 있었다.[13] 이란은 시리아에 자국의 보잉 747 공중급유기 2대 배치를 요청했으나 시리아는 이라크와의 마찰을 우려해 거부했다. 이에 이란은 747 한 대를 유럽으로 보낸 후 다시 이란에 돌아오는 길에 비상상황을 선포해 시리아의 기지에 긴급착륙하게 한다. 이어서 이란은 부품 조달을 핑계로 또다른 747 1대를 그 기지에 보내고, 이후 두 747은 공습 시간에 맞추어 이륙하였다.[14] 당시 이스라엘 공군의 F-15는 모두 공중전만을 할 수 있었던 A/B형이었다.[15] 피트로 환산하면 고작 100피트로, 착륙할 때나 잠깐 보는 고도다.[16] 당시에는 GPS를 통해 유도되는 JDAM 같은 유도폭탄이 없었고 가장 정밀한 공대지 무기는 외부 유도가 필요한 레이저 유도폭탄(LGB) 정도였다. 그러나 오시라크 원자로 주변에 배치된 이라크 방공전력의 존재를 고려할 때 지속적인 유도 제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스라엘 공군은 무유도 폭탄을 공습에 사용한 것이다.[17] 물론 이라크는 이스라엘의 공습 후에도 핵무기 개발 계획을 지속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핵관련 시설을 공개적으로 외국에서 구입하지는 못하게 되었고 자체적인 비밀 계획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작전은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을 크게 지연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후세인은 비밀리에 핵무기보다 가성비 뛰어난 북한제 미사일을 구매하였다.[18] 당시 이스라엘이 파괴한 시리아 원자로는 북한의 지원으로 건설 중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19] 1994년의 1차 북핵위기 당시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검토 단계에서 포기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방사능 유출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전쟁도 아닌 예방적 타격에서 가동 중인 원전을 터트리는 행위는 그야말로 체르노빌급 파국을 일부러 만드는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지탄받을 외교적인 자살 행위다.[20] 당시 과거 이스라엘과 싸웠던 이집트 등 다른 아랍계 국가들도 애도를 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히 더 엄청난 어그로가 되었다.[21] 국경도 닿아 있지 않고 천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적국의 내륙 깊숙히 있는 대형 시설물을 파괴하는 작전을 초음속 전투기의 초음속 침투 폭격과 특수부대의 육로침투 양동작전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상호배타적인 작전 접근법이라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