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961년 7월 4일 |
학력 |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
직업 | 게임 개발자 |
경력 | 오리진 시스템즈 설립 2001년 엔씨소프트 이사 2000년 데스티네이션 게임즈 설립 1997년 스타크래프트 개발 참여 1982년 ~ 1992년 오리진시스템 공동설립 1980년 게임 아칼라베스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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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 울티마 시리즈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2. 전성기
명문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에 입학한 엘리트 출신 능력자이며, 재학 시절 오리진 시스템즈를 설립하여 성공 가도를 달렸다. 역대 최고의 RPG 시리즈 중 하나인 울티마 시리즈의 개발자로, 80년대에는 시드 마이어, 로버타 윌리엄스와 함께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게임의 장르를 확립한 인물이며, 90년대까지 존 카맥, 윌 라이트 등과 함께 서양의 대표적인 천재 게임 개발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오너캐로는 울티마의 샤미노 등이 있다.NASA의 우주인이었던 아버지 오웬 개리엇(Skylab 3호 미션에서 59일간 우주에 체류했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영학을 전공한 형 로버트 개리엇은 울티마의 첫 시리즈부터 리처드 개리엇과 함께 게임을 개발했으며, 울티마 시리즈의 공략집을 "로버트 경(Lord Robert)"이라는 필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취미로 만들던 D&D 기반 롤플레잉 게임 아칼라베스: 파멸의 세계를 동네 컴퓨터 가게를 통해 팔면서 게임 개발자 인생을 시작한 리처드 개리엇은 울티마 시리즈를 만들면서 본격 게임 개발자로 나서게 되고, 1983년에는 자신의 게임 회사인 오리진 시스템즈사를 창립한다.[1] 특히, 울티마 4가 '최초로 철학을 담은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대박을 치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비디오 게임 개척 시대 때의 거장들이 흔히 그렇듯 리차드 개리엇 또한 울티마 3 까지 코딩은 물론 기본적인 스크립트 작성까지 직접 했으며, 심지어 도트도 혼자 찍었다고 한다(...). 회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진 뒤 발매한 울티마 5 까지 직접 프로그래밍을 했다고 한다.[2]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후 행보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지만 울티마 시리즈는 컴퓨터 RPG의 틀을 확립한 게임 역사상 길이 남을 역작이며 명작으로 평가 받는다. 나중에 만든 게임들은 평가가 갈리기도 하지만 울티마 4~7만으로도 넘사벽 게임 개발자이다.
개발자로서의 그의 특징은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게임을 만들려는데에 있다. 초창기 대부분의 게임들(사실 지금도 그렇지만)은 당시의 부족한 컴퓨터 성능 때문에 단순하게 적을 때려잡는 것 외에는 그다지 게임속 세계의 디테일한 면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개리엇은 80년대 극초반 기준으로도 그다지 뛰어난 성능이 아니었던 애플 2 컴퓨터로 어떻게든 최대한 '현실적이고' '리얼한'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한 개발자이다. 음식 개념을 도입해서 먹지 않으면 캐릭터는 굶어죽게 되고, 동굴에서 횃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NPC를 공격하면 경비병에게 체포당하고, 밤과 낮을 도입해서 낮엔 사람들이 일하고 밤에 잠을 자고... 사소해보이지만 게임속 세계를 보다 현실적으로 만드는 수많은 장치들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도입한 선구자이다. 이런 노력은 처음에는 크게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울티마 4, 5, 6, 7 쯤으로 가면 다른 RPG와 넘사벽으로 차이가 벌어지면서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심지어는 80년대 초기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세계에서 수많은 플레이어가 함께 플레이하는 가상현실 RPG를 만들고 싶다'라는 말까지 했다. MMORPG가 나오기 까마득하게 전부터 이미 MMORPG의 구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임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당연히 그래픽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 울티마 시리즈는 초창기 한심한 성능의 컴퓨터로도 어떻게든 훌륭하고 세련된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작품이다. 때문에 RPG를 잘모르는 사람들도 '그래픽이 멋있어서' 시작한 경우도 꽤 있다. 즉 울티마는 '그래픽은 안좋아도 게임성이 뛰어난 작품'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는 '게임성도 좋고 그래픽도 뛰어난 넘사벽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그런 고사양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 항상 당대의 컴퓨터 사양중에 최고급 사양만을 기준으로 게임을 냈다는 점. 게이머들은 투덜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울티마를 위해 컴을 업그레이드하곤 했다.
현실적인 그래픽을 위해서는 당연히 3D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지라 개리엇도 당연히 3D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 3D를 활용한 게임(울티마 8, 9, 타뷸라 라사)은 좋지 않았고, 당시 하드웨어 성능이 받쳐주지 못해서 3D를 시도하지 못한 게임들(울티마 시리즈 7까지와 울온)은 명작이 되었다. 아무래도 3D 기술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은 극초기부터 3D를 시도하다가 생긴 징크스이겠지만, 지금의 개리엇은 젊을 때와는 달리 창작력이 많이 고갈된 상태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이상은 리차드 개리엇 본인의 손을 떠나 엘더스크롤 시리즈나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같은 최근의 오픈월드 게임을 통해서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의외로 매직 더 개더링도 즐겼는지, 매직 2015 코어 세트에선 아바타의 방패라는 카드의 디자인을 맡았다.
루리웹의 한 이용자는 90년 울티마 6을 통해 팬이 되었고, 곧 미국에 가게 되어 그 곳에서도 즐기기 위해 한국판 울티마 클래식(1~3편 합본), 4, 5, 6편을 다 구입했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이 가진 원판 패키지는 열악한 한국판과 달리 지도가 진짜 헝겊으로 되어 있고 각종 기념품도 들어 있는 등 고퀄이었다. 빡친 이 유저는 제대로 된 지도를 받기 위해 직접 리처드 개리엇에게 편지를 보냈고, 리처드 개리엇은 친필 편지와 함께 울티마 VI 헝겊 지도를 보내줬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00년대. 이 유저의 매제가 NC소프트에 다니고 있어 이 이야기를 했는데 6개월 뒤 아칼라베스 오리지날 초도 물량[3]를 직접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유니크 아이템.#
3. 이후
울티마 7-1편 제작 후인 1992년, 오리진 시스템은 EA에 3,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인수된다. 인수와 동시에 결과는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EA는 자사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개발하기를 고집했고, 원래 소수 정예로 운영되고 있던데다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개발을 하고 게임을 내는 분위기에서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리처드 개리엇의 팀은 울티마 8을 발매하게 된다.저작권 문제가 마무리되자마자 리처드 개리엇은 EA를 퇴사하고 엔씨소프트의 러브콜을 받아 입사한다. 엔씨가 개리엇을 영입한다는 소식이 일으킨 파장은 전세계의 게이머들을 휩쓸기 충분했으며, 이 덕에 리니지 2가 북미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궤도를 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개리엇은 엔씨의 이사로 취임한 뒤 타뷸라 라사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리처드 개리엇이 생각한 구상과 엔씨 내부의 방침이 달라서 제작 초기부터 여러 번 충돌하였고 이후 소송이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영문) 소송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엔씨소프트가 자신을 "해고" 했음에도 "자진퇴사" 한 것처럼 임의로 꾸며, 결국 엔씨소프트의 주식 가치가 낮은 상황에서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에 금전적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디스이즈게임 관련 뉴스 해고됐을 경우 스톡옵션 행사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자진퇴사는 9개월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1심에서 승소했다. 엔씨소프트는 이에 대해 항소한 상황. 하지만 항소심에서도 개리엇이 승소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엔씨소프트의 잘못이다. 리처드 개리엇은 그저 자기가 가진 재산을 정리했을 뿐이다. 정리해고나 권고사직 등을 자진퇴사한 것처럼 속여서 처리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나 통하는 관행이고, 실제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소송을 걸 경우 회사가 사원을 상대로 목줄 잡힐 수 있는 몇 가지 사유 중 하나다.[4] 회사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대놓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돼도 회사가 자신의 책상을 치우기 전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리처드 개리엇의 퇴사 후 발매된 타뷸라 라사는 패키지가 아마존닷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비판적인 견해글 타뷸라 라사의 제작비가 무려 1,0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점이 클 것이다. 지금이야 GTA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등 대작 게임들의 개발에 제작비가 1억 달러가 넘게 들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지만 당시에는 게임 하나 개발하는 데 이 정도의 시간과 돈이 든 적이 전무했다. NC소프트에 공헌을 했다는 우호적인 의견도 있다. 길드 워를 개발한 아레나넷을 인수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미국 내 개발사들의 인맥을 활용해 NC의 미국내 입지 확보에 공헌했다는 이야기.
울티마 8의 예상보다 흥행 부진이 있었다. 이에 대해 유로게이머와 인터뷰한 것이 있는데, 타뷸라 라사와 울티마 8 실패의 공통점은 모두 회사가 팔린 직후에 만들어졌고, 그 회사들이 하나같이 매우 강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언급하였다. 울티마 8의 경우, EA는 당시 매년 시즌 직전 발매되는 EA 스포츠 게임들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덕분에 정확한 출시일을 가장 중시했다고 한다. 때문에 울티마 8은 출시일을 지키기 위해서 미완성작으로 발매되었다. 게임 패키지에 주어지던 헝겊지도와 실제 게임상 지도가 아무 관련이 없을 정도(...). 사정이 이렇다보니 울티마 온라인이 성공한 이유는 울티마 7을 울궈먹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타뷸라 라사의 경우 엔씨소프트 측에서는 서양의 유저층에 먹힐만한 게임을 원했고 리처드 개리엇은 아시아 시장을 노리는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엔씨와의 소송전이 마무리된 후에는 Portalarium이라는 회사를 설립, Port Casino Poker와 Port Casino Blackjack이라는 페이스북 도박게임을 만들었고, 이후 Ultimate Collector라는 소셜 네트워크 게임을 만들었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이후 14년 10월 출시를 목표로 울티마 세계관은 아니지만 울티마의 계승작을 자처하는 Shroud of the Avatar를 킥스타터에 올려 올드 게이머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장르는 MMORPG. 동년 11월 24일 스팀 앞서 해보기로 발매되어 44.99달러에 판매중이다. 게임에 대한 평가는 스팀 유저 평가 기준으로 복합적이며 특히 최근 평가의 대부분은 다양한 편이다. 초기의 울티마 팬덤의 지지가 빠져나간 이후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2016년 8월 시점으로 아직도 앞서 해보기에 머물러 있다. 펀딩 총액이 1천만 달러를 돌파했는데, 펀딩을 위한 방법이 아주 멋지다. 아직 얼리 액세스가 끝나지 않은 게임에서 부분과금 아이템의 판매를 시작한 것. 작게는 날림으로 만든 성의없는 날개 장식 아이템을 한정판으로 20달러에 판매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게임 내의 부동산을 유료 과금으로 판매하는데 100달러에서 시작하는 작은 집에서부터 무려 12,000달러에 달하는 성까지 팔고 있다.
4. 우주 비행사
스페이스 어드벤처 社(Space Adventures, Ltd)의 역대 첫 우주 관광객으로 기록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소연이 타고 ISS에 도킹했던 소유즈 TMA-12에 탑승해서 귀환했다.[5]199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973년 발사된 달 탐사선 루나 21호 및 루노코드 2호를 한화 약 7,000만원에 경매받았다. 루나21호 루노코드2호 그런데 이 탐사선은 현재 달에 있다. 달에 있는 탐사선의 소유권을 산 것.
그의 아버지는 우주인으로 활동했다.[6]
2013년에는 레딧에서 AMA[7]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주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관련 내용이 궁금하다면 홈페이지를 참조.
[1] 울티마 2까지는 다른 회사에게 유통을 맡겼는데 유통사에서 자신이 만든 게임의 로열티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있었고 심지어 유통사 직원들이 가로챈 수익의 대부분을 마약 사는 데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직접 회사를 차려 게임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 이 시대에는 이게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Apple II 게임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전문 디자이너를 두는 게 더 특별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사례가 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당시에는 게임을 프로그래머가 1인 개발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3] 이베이에서 게임 디스크는 빠진 패키지가 5,000달러 정도에 낙찰된 적이 있다. 애초에 50부 정도만 만들어진 물건인지라 풀 패키지의 값어치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4] 회사-직원은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직원에 귀책사유가 없는) “해고”는 회사가 먼저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고 “자진퇴사”는 직원이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다. 모든 계약이 그렇듯이 파기한 측이 불리한데, 엔씨는 자기가 먼저 깨놓고 상대방이 깼다고 주작질을 한 것이다.[5] 둘의 비행 일정이 겹쳤던 것은 아니고, ISS 엑스퍼디션의 인원 교대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3인이 ISS에 방문하는데 한 사람은 단기체류 목적일 경우 몇 달 전부터 ISS에 있다가 집에 가는 사람들의 다른 소유즈에 타고 돌아오는 식. 러시아만 이러는게 아니고 미국의 우주왕복선 임무에서도 우주정거장 도킹 미션에서는 A가 타고 갔다가 올 때는 B가 타는 일이 흔히 있었다. 우주정거장 시대가 열리면서 우주선의 인원 배정이 복잡해진 예시라 할 수 있다. ISS 엑스퍼디션 16팀과 17팀의 교대 일정에서 ISS에 갔던 이소연은 엑스퍼디션 16팀의 소유즈 TMA-11을 타고 귀환했으며, 개리엇은 17팀과 18팀의 교대 시기에 올라가서 17팀이 타고 온 TMA-12를 타고 돌아왔다. 매우 자주 이런다.[6] 아버지 오웬 개리엇은 아폴로 계획 시절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다가 후기 미션이 취소된 뒤 Skylab 3호 미션에서 활동하였고, 1983년 우주왕복선 미션 STS-9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생으로 2019년 4월 15일 향년 89세로 타계.[7] Ask Me Anything. 말 그대로 유저들에게 질문을 받는 것으로 빌 게이츠나 버락 오바마도 한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