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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29:47

이소연(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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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素姸 | Lee So-yeon
파일:htm_20130801925030103011.jpg
2007년 우주인 당시 모습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78년 6월 2일 ([age(1978-06-02)]세)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본관 공주 이씨
성별 여성
신체 165cm, 59kg, A형[1]
학력 광주송원국민학교 (졸업)
광주송원여자중학교 (졸업)
광주과학고등학교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 / 학사)
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 (기계공학 / 석사)
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 (바이오시스템학 / 박사)
가족 남편 (1974년 출생 / 2013년 결혼)
경력 우주인 (2007 ~ 2008)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2008 ~ 2014)
워싱턴 대학교 공과대학 강사, 워싱턴 대학교 보셀 캠퍼스 STEM 학교 자문위원, 국제 우주 대학교 교원 (faculty)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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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이소연(1978) 서명.svg
1. 개요2. 참가 이전3. 참가 이후4. 먹튀인가, 희생양인가?
4.1. 먹튀라고 보는 측4.2. 국가 사업의 희생자라고 보는 측
5. 후쿠시마 응원 논란6. 근황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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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이학박사, 우주비행사, 대학교수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이자[2],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로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한 우주인이다. 영주권을 취득하고 거주 중인 미국의 몇몇 기사에서 우주여행 참가자(spacefilght participant)라 표현했다는 것을 근거로[3][4] 우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소연을 ‘우주인’으로 표현한 미국 내 기사들도 무수히 많으며, 영어 위키백과나 NASA, CSIS 등 우주인 목록을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이소연은 분명히 astronaut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 최초의 민간인 우주관광객으로 알려진 데니스 티토의 경우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astronaut은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여기에는 당연 조종사뿐 아니라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specialist들도 포함된다. 논란이 일이나는 것은 한국우주인배출사업 자체가 '한국 국적을 가진 우주인을 배출하자'는 단순한 목적을 가진 단발성 졸속 사업이었고, 그간 우주과학과 관련이 없던 한국에서 우주에선 당연히 크게 유의미한 연구를 할 만한 관련 전문가가 없었단 사실로 인해 이소연이 한 임무가 크게 유의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인데[5], 이건 우주인 여부를 따지는 것과는 상관없다. 즉 위 기사들은 '사실상 쟤가 한 임무는 의미없으니까 사실상 관광객 아니냐'는 의미로 우주 관광객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우주에서 해야할 특정 임무를 받고 수행한' 이소연은 우주인(astronaut)의 정의에 맞는다.

2. 참가 이전

원래는 우주인 선발 과정에서 2007년 1월 경, 고산이 최종 우주인으로, 이소연은 예비 우주인으로 선정되었다. 우주인은 만약을 대비해 보통 2배수를 교육시킨다. 그런데 2008년 3월 경, 고산이 반출 금지 서적을 무단 반출하여 규정을 위반했다는 사유로 탈락하고, 예비 우주인인 이소연이 우주로 가게 되었다. 이 서적은 일종의 지침서로, 단순한 서적이 아니고 사실상 러시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어 세세한 곳까지 관리하는 일종의 야전교범이라고 한다.

이소연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런 우주인 변경 탓에 곤란했다고 한다. 우주인이 생활할 개인용품은 우주인이 올라가기 전에 미리 다른 로켓 편에 우주정거장으로 올려놓는데, 이소연으로 우주인이 변경된 시점에선 이미 고산의 물품이 올라가있던 상황이다. 본인이 우주선에 들고 올라갈 수 있는 개인용품이 정말 한정적이어서 상당히 골치 아팠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 측 우주인과 교관의 배려로 규정보다는 좀 더 많은 개인용품을 올려 보내 줬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우주인들도 마찬가지로 눈을 피해서 규정 이상의 개인용품을 우주선 어딘가에 숨겨서 올라간다고 한다.

우주인은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성격이 활달할수록 좋게 평가된다고 하며, 본인은 조기 탈락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활달한 성격이 높게 평가되었다고 한다. 우주에서 우울증에라도 빠져서 동료에게 연극성 성격을 표출하거나, 아무 버튼이나 확 눌러본다고 생각해보면 그럴 듯 하지만... 다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탓에 곤란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 참가 이후

2008년 4월 19일 지구로의 귀환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탑승한 소유즈 귀환선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하여 카자흐스탄의 평원 지역에 탄도 재진입으로 귀환하였기 때문이다.[6] 이 때문에 교통사고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귀환 후 텔레비전 광고를 주로 찍었으며, 우주인 배출 사업 협찬 업체는 이소연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 홍보를 펼쳤다. 한국 내에서는 ‘한국인 최초 우주인’으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의 여러 가지 우주개발 사업 홍보에도 모습을 자주 비췄다.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방송에서 과학 정보 관련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2008년 정부가 주관한 ‘건국 60주년’ 기념 사업인 건국 60주년 60일 연속강연에서# 60번째 강사로 섰다.

우주에서 귀환한 이후 2년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지냈다. 과장급 대우로, 박사연구원에게 주는 직급이다.

2012년 8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허가를 받아 휴직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2013년 8월에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재미교포 검안사[7][8]와 결혼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알려졌으나 그것은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면 영주권이 우선적으로 발급되며, 그 이후 시민권 취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온 낭설이다.[9]

2013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당시 항공우주연구원 측은 ‘경영학 석사 과정이 우주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한 학업 수행의 일부’라는 궤변을 하며 이소연을 옹호했다. 국정감사에서 강연료 수입도 문제로 제기되었다. 업무 시간 중에 강의를 하면서도 강의료를 모두 개인 수입으로 얻었다는 것. 8,00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2014년 6월 항공우주연구원을 퇴사했다.

4. 먹튀인가, 희생양인가?

“나는 우주인 배출사업의 도구……”
“후속 계획 없어 허탈했다”
- 문화일보, 2018년
이소연은 논란의 인물이기도 하다. 오해와 곡해로 인한 모습도 틀림없이 존재하는 반면에, 공식 발언과 행동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미 항공우주국 프로그램만 봐도 실전 경험이 쌓인 우주비행사라고 해서 무조건 후속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 항공우주국 우주비행사들도 공군 출신들이나 계속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교사나 과학자들은 강연 등으로 일선에 돌아간다. 따라서 "난 도구였다", "후속 계획이 없었다"는 대한민국의 우주 연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우주 프로그램은 유인 발사는 커녕, 2024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자체 로켓 엔진을 개발하고 있는 수준이다.

당장의 우주 프로그램이 없었다하더라도 여러가지 논란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국내 우주개발 프로그램에서 대표적인 스타로 언론이나 과학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배경이 충분했다. 우주인 배출 사업에 최종 선정되어 수혜를 입은 연구자로, 말과 행동에 신중함이 아쉽다는 인물평이 일반적이다.

이하 내용은 찬반 내용을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4.1. 먹튀라고 보는 측

이소연은 “수백억대의 국가 사업을 등에 업고 우주로 나간다는 것의 책임의 크기를 애초에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지원했음을 인터넷에 공개한 글을 통해 인정”했으며, 불과 몇 년 뒤에는 결국 “관련 경력을 포기함으로써 우주인으로서 최소한의 긍지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이소연은 미국 항공우주국 우주비행사 자격을 박탈당한 리사 노왁 같이 추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소연은 계약에 따른 항공우주연구원 의무 근무 기간도 모두 이행했기 때문에, 최소한 법규상으로는 아무런 하자도 없다. 그녀가 받았던 지원은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가도 얻지 못할 행운이며, 선발 과정 역시 여자라서 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중론이 될정도로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스스로 그 논란을 종식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독이 든 성배니 뭐니해도 이소연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상 좋든 싫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단지 일정기간 의무근무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퇴사 후의 행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렇다치면 고산은 대체 무엇이고 왜 그렇게 홍보와 매체놀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우주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인가 외국으로 이민가다시피한 건[10] 개인의 삶의 선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항우연이 그것을 종용했다 치더라도 외부 강의의 경우 그것 자체가 선발과정 인터뷰에서 나왔듯이 자신이 원하던 일이고 그것으로 수입도 짭짤히 챙겼다. 굳이 국정감사로 밝혀지기 전에도 그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고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또한 이전에도 이소연은 선발 당시 인터뷰와 과학간증 등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생각도 않고 일을 일으켰다.

이소연에게 쌓인 이미지는 당시의 프로젝트 자체보다 본인이 자처한 부분이 대부분으로 경솔하게 항우연을 비난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입지를 본인이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미국 NASA나 러시아 항공우주국도 공군 조종사나 우주 관련 과학자가 아닌 기초 과학자 출신 우주비행사를 경험자라고 해서 후속 프로그램에 무조건 참여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항공우주사업은 시작부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점증주의적 정책 결정이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일단 긍정적인 논쟁거리를 만들어 국민들의 지지를 뒷받침한 후에 본격적으로 실행에 들어가야 한다. 당시 참여정부에서는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기 위해 한국우주인배출사업이라는 논쟁거리 만들기를 계획한 것이다. 이소연 지지 측에서는 우주인의 ‘귀중한 경험’을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얼굴마담’으로 간주했다고 비난하지만, 우주인 배출 사업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국민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이는 사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11]

물론 애당초 이소연이 우주에서 수행한 임무라는 것도 과학 기술 발전에 의미가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국민들의 흥미를 일으키기 위한 쇼였다. 다시 말해서, 우주인으로서의 ‘귀중한 경험’이라는 것은(실제로 ‘귀중한’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연구원으로서의 경력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일단 국민들의 관심을 얻어서 예산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실행에 들어가야 그 경험을 활용하건 말건 할 수 있는 일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활동을 시킨 것은 사업 목적과 현실에 정확하게 부합되는 것이며, 그것을 이유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비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도 여러 대중적인 이벤트에 우주비행사들을 내세워서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경우는 있어도, 우주비행사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로켓을 개발하는 기술자로 채용하자고 하는 경우는 없다.[12] 그러나 실행 중간에 일어난 사건들과 정치인들의 백지와 다름없는 차후계획,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자체의 무계획적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지 못했고, 결국 본격적인 사업은 시작도 못해본 채 한낱 역사의 한 줄 웃음거리로 끝나게 되었고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예산낭비 사례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소연 개인의 부적절한 언행 또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소연은 남을 비난할 입장이 아니며 자기 이득추구를 위해 무책임하게 행동을 할 수 있는 명분이 되질 못한다.

그외에 우주 여행 이후 국회 조찬 기도회에서 간증을 해서 우주인 규정을 어겼다는 논란도 있었다. 미국 아폴로 계획에 참가한 역사 속의 위대한 우주인들도 다수가 개신교 신자였으며 제임스 어윈은 아예 말년에 목사까지 되었다. 과학자가 종교를 믿으면 안된다는 법도 없거니와 종교적인 믿음은 직업적 전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영역이나 이소연이 간증한 게 문제시 되는 것은 당시 우주인 규정에 우주 체험을 종교적 간증에 이용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미국 시애틀 박물관에서 항공우주캠프 체험 프로그램의 안내 역할을 맡는 장면이 알려지면서 더더욱 먹튀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2015년 6월에는 미국의 우주 관련 민간 교육 프로그램에 토론자로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 2012년 회견 발언 역시 그녀가 한국우주산업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4.2. 국가 사업의 희생자라고 보는 측

이소연은 원래 예비 우주인이었다. 한국 최초로 우주를 비행할 사람으로 결정된 사람은 체격도 좋고 퍽 용맹해 보여서 나중에 우주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해도 될 법한 남자, 고산이었다. (…) 그 옆에 여성 후보가 함께하는 것은 국민들 보시기에 참 좋았다. 우주인 선발 과정이 남녀 차별 없이 공정했고, 그것이 달라진 한국 사회를 반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비행을 앞두고 갑자기 우주인이 바뀔 때까지는.
우주인이 사용할 물품은 이미 화물로 보내진 뒤였다고 한다. (…) 그 바람에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동안 이소연은 고산이 미리 보내두었던, 체격도 성별도 다른 사람의 옷을 입어야 했다. 물품 목록을 작성하던 러시아 측 담당자가 이 사실을 알고 안타까웠는지 '이 안에 담으면 무조건 실어주겠다.'며 슬쩍 건네주었다는 지퍼백 하나. 그 안에 급히 담은 다이어리를 십여 년 뒤의 내가 보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소연을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 고산이 이소연으로 교체된 사건은, 남자의 자리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충격으로 퍼져 나갔다. 이소연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주정거장에서의 실험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전문가라는 점은 쉽게 무시되었다. 많은 사람이 놓쳤지만, 우주인 프로젝트의 명목상 목적은 우주정거장에서의 과학 실험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 실험을 수행할 사람이 마침 학계에서 과학 하던 사람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우주정거장에서는 지구에서보다 얼굴이 붓는다. (…) 여성 우주인의 잔뜩 부은 얼굴을 두고 외모를 비하하는 댓글이 기사마다 달렸다. 이소연은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열여덟 가지의 실험을 수행해냈고, 생각대로 진해되지 않는 실험을 두고는 몇 날을 고민했다. 러시아 측에서 실험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요청할 정도로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런 일을 새내기 우주인이 완수해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목소리 높여 칭찬해주지 않았다.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 귀환 모듈의 결함으로 죽을 뻔했던 일이 한국 우주인의 영웅담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일도 없었다. 이소연이 탄 귀환 캡슐은 궤도를 이탈했고, 화염에 휩싸이는 바람에 통신조차 끊어진 채, 거의 수직으로 카자흐스탄의 평원에 메다꽂혔다. 예상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벗어난 곳에 불시착했다. 당황한 그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귀환 캡슐에서 탈출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수 시간 동안 동료와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극적인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로 지겹도록 재생산되는 대신 누구도 넘겨보지 않은 책장처럼 홀로 바래갈 뿐이었다.[13]
우주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소연은 수백 차례의 대중강연과 인터뷰를 하며 애초 계약했던 의무기간의 갑절 되는 동안 우주인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는 일회성 사업이었고, 앞으로도 우주인 이소연이 할 만한 일은 11일간의 비행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 4년간 그랬듯이. 그렇다고 몇 년 만에 다시 DNA를 다루는 공학 박사 이소연의 길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분야다. 수년간 손놓았던 사람이 다시 그 급류 속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물살을 타는 일이 어디 쉬울까. 우주인 이소연이 할 수 있을 후속 프로젝트가 마련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고민 끝에 휴직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이번에는 '먹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했을 때도, 휴직 기간이 만료되고 마침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되사했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공립' 과학고등학교를 나와 '국립'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한 경력까지 문제가 되었다. '그 여자'를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국가 세금으로 기위준 것이 괘씸하단다. 강연료를 챙기면서 출장비까지 받았으니 구상권이라도 청구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 그래야 할까?
규정 위반으로 우주 비행에 참여하지 못한 고산도 연구원과의 의무계약기간을 마친 뒤 미국에 갔다. 역시 우주인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별 접점이 없는 분야로 유학길을 떠났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지금은 3D프린터를 만드는 회사의 대표로 있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 사람들은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그의 도전 정신과 마침내 성취해내는 모습에 칭찬을 보낸다. 우주인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260억이니 300억이니 하는 '혈세를 뱉어내라던가, '우주 개척의 가치와 비전을 스스로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어 제2, 제3의 우수인이 배출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는다. '국가 자원의 후속 지원이 없다는 이유로 뱀 허물 벗듯 우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벗어던졌다'는 비난은 오롯이 이소연의 차지였다.
2007년 이소연과 고산을 함께 인터뷰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아직 둘 중 누가 소유즈에 탑승할지 결정되지 않은 시점의 기사였다. 당시 미혼의 박사과정생이던 이소연에게 기자는 '골드미스'라는 단어를 꺼냈다. 우주에서는 노화가 빨리 진행된다는데, 여성이니 피부 문제에 신경쓰이겠다고 했다. 우주에서 생리가 시작되면 어떻게 하느냐고도 물었다. 우주가 상당히 춥다더라는 기자의 우려 섞인 질문에는 고산의 대답만이 기사에 실렸다.
이소연 박사는 한동안 대중 앞에 나서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 최초의, 그리고 한국 최고의 우주인인 그를 한껏 응원한다. 우리는 우주인 이소연이 지상 훈련에서, 우주 실전에서, 그리고 우주에 다녀온 뒤에 겪은 모든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가 무슨 실험을 했는지 하나라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신비롭고 놀라운 우주 이야기부터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과학정책 이야기까지, 오직 이소연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그 교훈을 얻으려고 우리는 그를 우주정거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바꿨다는 이유로 그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싶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세금을 '먹튀'하려는 자다.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中
개인에 대한 비난에 앞서, 수백억 원의 국민 세금을 들여 이러한 기획 행사성 우주 공연을 만든 후 아무런 후속 계획을 세우지 않은 당시 정부가[14] 근본적인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15] 물론 아래 민주당 최재천 의원의 발언처럼,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이소연 본인의 처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시 말해 당시 정부의 국가 우주인 사업을 비판하는 것이 이소연 본인의 처신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 사업으로 한국우주인배출사업을 추진한 당시 참여정부조차 제대로 된 계획이 없었다. 한국우주인배출사업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6년부터 이미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당시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일찌감치 이 문제를 지적하며 “정부의 정책 부재”를 꼬집었다. 특히 프레시안은 〈260억 원짜리 ‘홍보대사’, 값비싼 일회성 ‘우주 관광’〉, 심지어 “황우석 사태의 재판”이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언론의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업은 일회성 공연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홍보 목적 이외에 중·장기적인 유인우주개발 계획이 전혀 없었고, 이소연이 우주를 갔다 온 후 홍보를 위한 얼굴마담으로 사용되는 것 이외에는 활용 계획이 전혀 없었다.#

이후 국정감사 때마다 이 부분이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주당 최재천 의원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소연 우주쇼 개인 경험에 260억 들였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최 의원은 “우주인 배출 사업 후속 연구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최 의원은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이소연 박사는 우주과학 분야의 기술 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미국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겠다고 건너간 점은 과학 인재 육성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이소연 박사의 경영학 석사 행을 우주인 능력 향상을 위한 학업 수행이라고 미화했다”라고 말했다.#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국정감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홍의락 의원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홍 의원은 “우주인의 귀환 후 미래 계획과 후속 사업에는 관심도 의지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이소연 박사는 얼굴마담으로서 혹사에 가깝게 부려먹어 연구할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이소연 박사를 외부강연 235회, 과학 전시회·행사 90회, 대중매체 접촉 203회 등 총 528회의 대외 활동을 소화시킨 반면, 우주인 관련 연구는 고작 4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소연 박사는 2년간 선임 연구원의 복무를 수행하는 조건인데, 이소연 박사는 4년간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이소연 박사는 연구 활동을 위해 공군의 모 시설을 빌리기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여러 노력을 통해 30여 건의 우주과학 논문을 발표하고 1건의 특허를 등록하였다.# 국내 우주기초과학계는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실험한 것들은 모두 결과물로 정리된 상태로써, 한국인 최초 우주인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이소연은 “내가 점점 비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이 때가 고작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후였다.# 우주에서의 귀환 이후 이소연 박사가 명백히 연구원으로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남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얻은 귀한 경험을 활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얼굴마담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실험실에서 전화를 받으면 ‘비서 말고 연구원과 통화하고 싶다’는 말을 듣는 때가 많았고, 남성 연구원들 가운데 일부는 남성 연구원과 일하거나 얘기하고 싶다고 내게 직접 얘기하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상 연구원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도 우주인에 대한 후속 계획이 없으니 그 후로 얼마나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있었든 강연만을 다녔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먹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10년, 15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월급만 받는 것은 오히려 세금 낭비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항우연을 비난만 할수는 없는 것이 자체 로켓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야 우주비행사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경험을 위해서 러시아 소유즈 로켓에 우주인을 계속 탑승시키는 것은 현단계에서 무의미한 일이다. 재론하지만 대한민국의 항공우주 기술은 현재 로켓 엔진을 시험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지금도 그러한데 이소연이 비판하던 2010년 경에 우주 프로그램을 왜 육성하지 않냐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애초에 이소연이 귀환하던 2008년 당시 그녀는 박사학위 과정을 갓 마친 시점이었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기대치와 역량은 명석한 신입 연구원 정도에 그치는게 정상이다. 당연히 그녀가 한 경험은 대한민국에선 누구도 한 적이 없는 경험이지만, 사실 세계적으론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 경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경험이다.[16] 즉 항우연에선 연구에 딱히 활용하려고 해도 활용할게 없다. 2008년 당시 이소연의 연구원으로서 역량은 단순히 KAIST 기계공학 박사 출신 신입 연구원 한명이었는데 인지도는 다른 연구원을 까마득히 상회하는 상황이다. 냉정히 말하면 엄청난 능력이나 기여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17] 전국민이 주목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인지도 높은 신입 연구원 이소연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어차피 다른 신입 연구원들도 똑같이 잘할 수 있는 연구를 시키는게 아니라, 강연으로 부려먹는 방법이다. 이소연 개인으로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따지고보면 항우연은 '우주인 이소연'을 가장 효율적으로 써먹은 셈이다.

즉 이 사건과 관련되어 근본적인 원인은 이소연도 항우연도 아니고, 대한민국 우주과학과 관련인들의 역량이 발전하기도 전에 '우주인부터 배출하고 보자'라며 달려든 한국 정부에 있다.
이소연과 관련된 논란을 떠나 이 사업 자체는 욕먹을 만한게, 21세기에 더 이상 '우주인이 되었다'란 단순한 사실 자체만으론 의미있는 성과가 아니다. 당연히 우주 한번 찍고 욌다고 대한민국 우주과학이 유의미하게 발전하는 것도 아니며, 우주인 개인의 관련 역량이 훌쩍 뛰는 것도 아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우주과학 관련해 꾸준한 연구와 기여를 해온 국가라서 그 연구원 중 한명이 우주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당시 기준) 우주과학 분야가 빈약하기 그지없던 국가에서 단순히 '한국 국적을 가진 우주인 한명 배출'을 찍으려고 했다는게 촌극이다.[18] '우주과학에 대한 인지도를 높인다'는 의도라면 차라리 나로호나 누리호 발사처럼 어느 정도 의미있는 성과 이후 개발에 계속 관여해온 항우연 연구원을 상징적 의미로 보내는게 훨씬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해당 인원이 우주과학 분야에 계속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 우주인 배출'이란 1차원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의의가 있었을 것이다.

현재 이소연과 고산[19] 두 명이 모두 우주와 연관되지 않은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우주인 훈련에 참여했던 두 명 모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의미 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이 사건 이외에도 대한민국이 이공계 전문 인력에 대해 얼마나 홀대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해외로 유출되는지 생각해보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10년 만에 이소연 본인이 다시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또한 이소연은 지구 귀환 후 교육과학기술부 담당자에게 “우주에서의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묵살당했을 뿐더러, 우주과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비전문가들과 함께 했었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 NASA나 러시아 항공우주국, 유럽 우주국 등 세계 어디에서도 이소연 같은 연구자를 우주 경험을 했다는 한가지 이유로 후속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시키는 예우를 하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우주인이냐 우주여행객이냐는 논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우주인배출사업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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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후쿠시마 응원 논란

2018년 디스커버리 채널 아시아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다이어리에 출연하여 후쿠시마 농수산물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출연을 해서 논란을 빚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부터 완전한 수습이 끝나지도 않은 지금까지 먹어서 응원하자!로 후쿠시마 농수산물이 안전하다고 선전해왔으며, 한국의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여 1심에서 승소했지만, 상소심이자 사실상의 최종심인 2심에서 대한민국한테 패소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민국의 유일한 우주인인 이소연이 후쿠시마 배경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해당 지역 농수산물에 대해 옹호한 것이다.
후쿠시마 지역 농수산물을 국내에 수출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에 적극 반대하는 한국 정부의 대립이 여전히 첨예한 가운데 단순히 "과학자로서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항변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은 섭외와 출연이었다. 후쿠시마 상품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감안하면 상술한 여러 실언과 같이 개인의 유명세를 위해 여러가지 상황을 고민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위 논란과 관련하여 이소연은 허핑턴포스트지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올라온 댓글들을 보면 싸늘한 반응이 대부분이며, 후쿠시마 홍보 영상 논란 이후로 이미지가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본인은 홍보목적으로 찍은 게 아니라며 해명을 하였으나 아무도 믿는 사람들은 없다. 굳이 외국인을 섭외해서 찍은 의도가 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6. 근황

7. 관련 문서


[1] https://www.yes24.com/Product/Goods/56823551[2] 한국계로는 2001년 한국인과 유대인의 혼혈인 미국인 마크 폴란스키가 최초이다.[3] 이소연의 근황을 소개한 기사를 보면 ‘우주 여행을 한 첫 대한민국 사람’이라고만 기술할 뿐 ‘우주인’(astronaut)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4] 미국 항공우주국 내부 교육에서는 소유즈 상자 부상 사례들 중 “그 한국인 관광객 여인" 라고 언급하는 사례를 확인했다.[5] 즉 여기서 비판점은 '우주에서 의미있는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는 인물을 왜 국가 차원에서 세금이나 낭비하며 우주인으로 만들었냐'이지 이소연은 우주인의 정의에 부합하는 게 맞다.[6] 다행히 낙하산이 펴지고, 착륙 2초 전 연착륙용 역추진 로켓도 가동됐다. 다만 가장 먼저 땅에 부딪힌 곳이 이소연씨가 탄 쪽이어서 다른 우주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30초 정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연기를 보고 달려온 현지 주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우주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7] 안과의사로 보도한 경우가 많았는데 안과의사Ophthalmologist가 아니라 검안사Optometrist이다. 미국에선 안과 직종이 세 단계이다. 안과의사Ophthalmologist는 우리 나라의 안과 전문의와 같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을 이수하여 눈에 대한 모든 진료와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이고, 검안사Optometrist는 우리 나라 안경사와 같은 역할이다. 그 중간에 검안사Optometrist가 있는데, 예비학부 3년 후 4년제 검안사 학교Optometry School를 졸업하여, 시력·질병에 대한 검사를 하고, 다래끼 정도의 가벼운 눈병에 대한 치료와, 안경·렌즈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다.[8] 당시 39세[9] 물론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가능하다.[10] 아직 시민권을 얻기 전이니[11] 엄청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우주개발에는 달착륙을 성공한 미국조차 케네디 시절부터 끊임없이 정부가 그 필요성을 여론에 호소해왔다. 현재 NASA 예산의 감축으로 많은 기능을 스페이스X가 대행하는 현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대변한다.[12] 다만 발사체 기술자로 진로를 잡는 경우도 있다. 이온 엔진 바스미르를 제작하는 애드 아스트라 로켓 회사의 회장이 우주인이다. 사실 이건 쓸데없는 사족에 글 맥락에 맞지않는 반대측에서 할 만한 태클질이지만. 따지고 보면 단편적인 사례로 호도하고 물타기하는 악질적인 수법이다. 그게 보편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13] 사실 재진입 과정에서 생기는 플라즈마로 인한 통신장애와 우주왕복선처럼 날아다니는 게 아닌 이상 목표 지점에서 벗어나는 건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안테나가 부러지고 기울어져 착륙한 건 명백히 사고가 맞다.[14] 항공우주연구원도 개입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항우연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의지에 따라 시행한 것이지 이런 말도 안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시행하라고 지시한 것은 엄연히 대한민국 정부이다. 오히려 항우연도 피해자이다. 왜냐하면 이런 예산낭비는 항우연 입장에서 더욱 속터질만한 일인데, 안 그래도 우주과학에 배당되는 당시 예산 260억원을 연구역량 강화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쓸데없는 사업에 써버렸기 때문이다.[15] 260억원의 큰 비용이라고 하지만, 우주여행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관광만으로도 200억원은 들어간다. 기획 행사성이 맞다.[16] 고산의 경우에도 볼 수 있지만, 러시아는 이들에게 "우주에 동행하고 우주에서 해당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살아남을 수' 수 있는 것 이상의 지식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러시아를 욕하기도 그런게 원래 payload specialist의 역할은 우주비행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우주 비행과 우주 체류기간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훈련목표이며, 이건 자국의 specialist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한다.[17] 이소연의 능력이 떨어진다는게 결코 아니다. 당연히 그녀는 한국기술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능력있는 인재이다. 다만 항우연 자체가 그런 능력있는 인재로 이뤄져있고, 우주과학에 이제 막 뛰어든 신입 연구원인 이소연이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딱 신입연구원으로서 그것 뿐이다.[18] 이런 의도라면 차라리 한국우주인배출사업 문서에도 언급되어있다시피 이스라엘처럼 국가적인 영웅을 우주에 보낸다는 상징적 의미로 국민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려는 것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19] 우주인 후보였던 고산은 의무기간 2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그만두고 하버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며, 현재는 3D 프린터 업체를 창업하였다. 2013년에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로보월드 2013〉 전시장에서 고산은 우주인 후속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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