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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8000><colcolor=#522142,#522142> 초(楚)나라 5대 왕 목왕 穆王 | ||
| 성 | 미(羋) | |
| 씨 | 웅(熊) | |
| 휘 | 상신(商臣) | |
| 아버지 | 초성왕(楚成王) 웅군(熊頵), 웅운(熊惲) |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14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
1. 개요
초나라의 21대 국군이자 5대 왕. 초성왕의 아들. 춘추오패인 초장왕의 아버지다.초 성왕의 적장자로 아버지에게 자살을 종용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정복 전쟁을 펼쳤다. 선대 왕들의 정책을 본받아 사방으로 팽창하니, 이 사람 손에 멸망하거나 속국이 된 나라만 10개 가까이 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상신은 위에 언급한 대로 초 성왕의 적장자였는데, 상신을 태자로 세울 때 투발(자는 자상)은 초나라는 대대로 막내를 후계로 세우는 것이 전통이며[1] 상신은 벌의 눈과 승냥이의 목소리를 가진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지만 성왕은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세운다. 예상대로 초 성왕이 웅직(熊職)을 낳은 후 마음이 바뀌어 상신을 폐하고 후처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상신은 거기에 반발하였다.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상신은 부하 반숭의 계책을 듣고 궁으로 쳐들어가 초 성왕을 협박해 자결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투월초를 시켜 웅직을 죽였다. 정변을 도운 공로로 반숭은 태사가 되었다.
2.2. 치세
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이런 유혈 사태를 거치면서 왕위에 오른 초 목왕은 성왕의 장례를 치르고, '영'(靈)이라는 시호를 바치려했으나, '영'은 어둡다는 뜻이 있다하여, 어둡지 않다는 뜻이 있는 '성'(成)을 바쳤다고 한다.[2] 그는 중원 진출의 야욕이 강했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 중원 진출을 엿보았다.초 목왕 3년(기원전 623년), 진(秦)나라와 함께 진(晉)나라에 맞서 싸웠으며, 즉위 초부터 공격한 강(江)나라를 멸망시켰다.
초 목왕 4년(기원전 622년), 육(六)나라[3]와 요(蓼)나라를 멸했다.
초 목왕 5년(기원전 621년), 진(晉)나라 군주인 진양공이 죽자 조돈이 그 아들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영공이다.
초 목왕 6년(기원전 620년), 진(晉)의 대부 조돈은 강대해지는 초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진(陳)나라, 정나라, 허나라, 조나라 등과 동맹을 맺었다.
초 목왕 8년(기원전 618년) 여름에 진(陳)나라가 진(晉)나라를 따르자 열받은 초 목왕이 진(陳)나라를 쳤다. 호구 땅에서 크게 싸워 공자 주를 이기고, 공자 벌을 포로로 잡았다.
초 목왕 9년(기원전 617년), 송나라, 정나라, 진(陳)나라 등을 굴복시켰다.
초 목왕 10년(기원전 616년), 장군 성대심을 보내 균나라를 쳤다. 그리고 균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중원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초 목왕 11년(기원전 615년), 영윤 성대심이 죽자, 성대심의 동생 성가를 후임 영윤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에 서(舒)나라가 초나라를 배신하자 초 목왕은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 서나라를 치니 서나라 군주는 포로로 잡히고, 덤으로 종(宗)나라 군주도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이왕 공격한 김에 소(巢)나라도 쳤다. 그렇게 하여 초나라는 강회 지역에 세력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
초 목왕 12년(기원전 614년), 초 목왕이 죽으니 아들 웅려가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춘추오패인 초장왕이다.
[1] 여담으로 종법질서에서는 반대로 적장자가 왕이 된다. 초나라가 얼마나 중원과 다른 국가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한편으로는 초나라의 계승순서는 의외로 유목민들과 비슷했음을 알 수 있는데 유목민들은 한정된 목초지 안에서 가축들을 키우며 살아가야 하다보니 가족 수 증가=필요 가축 수 증가=목초지 고갈=가축 전멸=재산 증발로 이어지다보니 자식이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빨리빨리 독립시켰고 이러다보니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막내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다.[2] 그런데, 일설에는 초 성왕의 시신이 '영'이라는 시호를 바치자 눈을 감지 않으니 '성'이라는 시호를 바치자 눈을 감았다는 말도 있다.[3] 훗날 《초한지》에 등장하는 영포의 고향인 육현의 이름은 육나라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