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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원주교구 원동성당 園洞聖堂 | Won-dong Catholic Cathedral Church | ||
기본 정보 |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 27(원동) | |
종교 | 가톨릭 | |
교구 | 천주교 원주교구 | |
지위 | 주교좌성당(Cathedral) | |
주임신부 | 김민규 요한세례자 신부(2024~) | |
보좌신부 | 원종권 핀따노 신부(2024~) | |
홈페이지 | [[http://www.wjwd.or.kr/ |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성당]] |
원동성당 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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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인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강원특별자치도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유서깊은 성당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민주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2. 역사
2.1. 태동기의 공동체 ~ 일제 치하의 공동체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인근 부엉골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1]가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지금의 감곡)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데,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당시 풍수원 성당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장호원과 풍수원 사이인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한다.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 해 8월 17일 풍수원 성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다.
3대 주임 드브레(E. Devred, 兪世竣) 에밀리오 신부 시절 신자 수 증가에 따라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12채와 그 부지 2,000평을 매입하여 지금의 성당 터전을 마련하였다. 4대 주임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베드로 신부는 성당 신축에 필요한 목재를 비축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5대 주임 조제(Jaugey, 楊秀春) 요셉 신부는 문맹 퇴치를 위해 성당 부속 건물에 야학을 설치하고 교육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제에 의해 폐쇄되고만다. 이어 1913년 조제 신부는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하였고,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2]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2.2. 격동기의 공동체 ~ 변화하는 공동체
한국 전쟁 발발 이후 14대 주임 디어리 신부는 1951년 10월부터 교우들과 함께 폐허가 된 성당 복구에 나섰고, 3개월 뒤에 50평의 아담한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디어리 신부를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성전 재건을 위한 노력의 결과, 1954년 9월 120평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그 해 10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 신부가 1955년 2월 18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학성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1956년 6월 학성동 본당을 분리·설정하면서 본당 명칭을 원주성당에서 원동성당으로 변경하였다.
1965년 3월에 춘천교구로부터 원주교구가 분리·설정되면서 원동 본당은 원주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고, 그 해 6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1965년 설정된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1971년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 미사 및 부정부패 규탄 대회'를 개최하여 이 땅에 부정부패와 불의가 사라지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1976년 유신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원주 선언'을 하였는데 이는 같은 해 명동 성당에서 발표된 3·1 민주 구국 선언으로 이어졌다.
3. 기타
-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을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 본당설정 120주년을 맞아 내부 복원을 진행하였다.
- 성당 맞은편에 교구청이 위치해 있다.
[1] 훗날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의 그 임 가밀로 신부[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