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클럽 경력
2.1. 유스 시절2.2. 슈투트가르트 키커스2.3. VfB 슈투트가르트2.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2.5. AS 모나코 FC2.6. 토트넘 홋스퍼 FC2.7. FC 바이에른 뮌헨2.8. UC 삼프도리아, 토트넘 2기
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clearfix]
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이다.2. 클럽 경력
2.1. 유스 시절
클린스만은 제과점 사장 지크프리트 클린스만과 그의 아내 마르타 사이에서 난 네명의 아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8세가 된 뒤 깅엔 안 데어 필스를 연고로 하는 깅엔에 입단하였다. 6달 후, 그는 새 클럽 소속으로 단 한경기에서 16득점을 올렸다. 그는 10세가 되자 가이슬링엔으로 이적하였다. 클린스만은 그로부터 4년 뒤, 가족 전체가 슈투트가르트로 제과점을 옮겼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중심 슈투트가르트로 가족이 이사를 한 뒤에도, 클린스만은 뷔르템베르크 대표가 눈도장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링엔에서 활약하였다. 16세의 클린스만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와 계약을 맺고 2년 후에는 프로 계약도 체결하였다.2.2.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78년에 슈투트가르트 키커스로 이적한 클린스만은, 1982년에 2. 분데스리가에서 프로 데뷔를 하였다. 1982-83 시즌, 그는 짧은 시일 내에 주전이 되었고, 1983-84 시즌 말, 그는 키커스 소속으로 19골의 득점을 올렸다. 호어스트 부어츠 전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감독은 클린스만이 수차례의 스프린트 트레이닝을 호르스트 알만이라는 독일 최고의 스프린트 감독의 덕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새 시즌이 시작되기 전 100m 달리기를 11.7초에서 11초 사이에 끊을 수 있도록 하였다.2.3. VfB 슈투트가르트
1984년, 그는 분데스리가에 위치한 라이벌팀 VfB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하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첫 시즌에 클린스만은 15골을 득점하여, 같은 시즌에 16골을 득점한 칼 알괴버에 이어 팀내 득점 2위를 기록하였다. 그는 특출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팀이 리그를 10위로 마감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1985-86 시즌과 1986-87 시즌에, 클린스만은 각 시즌당 16골을 득점하였고, 전자의 시즌에는 팀을 DFB-포칼 결승에 올려놓았으나,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에서 2-5로 패하였고, 클린스만은 이 경기의 마지막 골을 득점하였다.1987-88 시즌,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전설적인 오버헤드킥을 포함하여 19골을 득점한 그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등극하였다.1988년, 클린스만은 24세의 나이로 서독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1988-89 시즌, 슈투트가르트는 UEFA컵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SSC 나폴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참고로 클린스만은 5시즌 동안 156경기 79골을 넣었는데, 거의 경기당 0.5골을 기록한 셈.
2.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인테르 시절 |
클린스만은 인테르와 3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술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에서 1989-90 시즌에 13골을 넣었다.
그다음 시즌, 클린스만은 UEFA컵 우승을 차지했고,[1] 전년도의 리그 성과를 계속 이어나가 14골을 득점하였다. 클린스만의 계약은 이에 따라 1994년까지 연장되었으나, 1991-92 시즌때 엄청 부진했고, 인테르는 코라도 오리코 감독의 지도하에 무관으로 마치는 것은 물론 리그에서 8위를 기록하였고, 클린스만 본인은 7골에 그치며, 팀내에는 불화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클린스만은 1991-92 시즌 이후로는 더이상 인테르 선수로 뛰지 않을 것을 밝혔다.
2.5. AS 모나코 FC
3시즌 동안 세리에 A에서 103경기 36골을 넣은 클린스만은 AS 모나코 FC로 이적하여, 첫 시즌에 팀을 리그 1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마르세유의 뇌물수수 스캔들이 터지자, 마르세유가 가져갔던 타이틀을 획득하여 1992-93 시즌의 실질적인 우승팀이 되었고, 그에 따라 모나코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나코는 AC 밀란에 패하기 전까지 준결승에 올라갔다. 1993-94 시즌, 모나코는 리그를 9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클린스만은 인대 파열로 2달간 결장하였으며, 1년의 계약기간이 남는 상황에서 조기에 팀을 떠났다. 참고로 이때 2시즌 동안 65경기 29골을 넣는 활약을 펼친다.2.6. 토트넘 홋스퍼 FC
1994-95 시즌, 토트넘 홋스퍼 FC는 AS 모나코 FC에서 이적료 20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클린스만을 영입했다. 사실, 클린스만이 처음 토트넘으로 왔을 때는 클린스만을 향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었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잉글랜드를 탈락시킨 주범(?)이기도 했고, 할리우드 액션이 너무 심하다는 편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만 30살이던 클린스만은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할리우드 액션 셀러브레이션을 펼쳐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을 끌더니 연이은 득점 행진으로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치면서 단숨에 토트넘을 대표하는 골잡이로 떠올랐다. 이 시즌에서 클린스만은 21골을 터뜨린 것을 포함하여 모든 대회에서 30골을 넣었다. 그리고 축구기자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다.프리미어 리그 공식 기록은 불과 1시즌 동안 41경기 21골을 넣으면서 일약 토트넘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게리 리네커[2]의 뒤를 잇는다는 찬사까지 들었지만... 다음 시즌 훌쩍 독일로 떠났다.
2.7. FC 바이에른 뮌헨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2시즌 동안 65경기 31골을 넣으며 여전히 녹슬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다. 특히 95-96 시즌엔 UEFA컵에서 당시 단일 시즌 최다골 기록인 15골을 폭격하는 기염을 토하며 UEFA컵 득점왕에 올라 뮌헨의 UEFA컵 우승을 견인했으며, 96-97 시즌엔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며 커리어 황혼기에 더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인테르 시절 감독이었던 트라파토니 감독과 재회한 후 오히려 사이가 안좋아져 두시즌만에 또다시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2.8. UC 삼프도리아, 토트넘 2기
또 다시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서 1997-98 시즌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다. 다만, 이 때는 1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토트넘으로 다시 임대를 갔었다. 삼프도리아에서는 8경기 2골, 토트넘에서는 15경기 9골.클린스만이 토트넘 팬들에게 진정한 레전드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 짧은 1년을 보낸 뒤,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긴 뒤 UC 삼프도리아를 거쳐서 다시 되돌아온 1998년 토트넘에서 보여준 활약 때문이었다. 토트넘 팬들은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해줄 것이라면서 클린스만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클린스만의 유럽 리그 은퇴 시즌이 된 이 시기에는, 토트넘 팬들에게 클린스만의 이름을 영원히 각인시킨 시간이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삼프도리아에서 임대로 다시 토트넘으로 합류한 클린스만은 반복된 패배로 인해서 강등권으로 쳐진 토트넘의 구세주가 되었다. 클린스만이 합류한 1997-98 시즌 중반, 토트넘은 10월의 시작과 함께 이어진 패배의 그림자가 불러온 강등의 기운에 허덕이고 있었다. 11경기에서 무려 8패를 당하면서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린 토트넘은 시즌 도중 감독까지 경질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많은 전문가들이 1977년 이후, 토트넘이 20년 만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될 가능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8년 1월 17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의 홈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면서 한 달 만의 승리(1:0으로 승리)를 안긴 클린스만은 남은 시즌 6경기에서 (최종 3경기 연속골을 포함) 모두 골을 넣었으며, 그 경기에서 팀은 4승 2무의 호성적을 냈다. 그 중 압권은 강등권 팀들간의 혈투인 37라운드 윔블던 FC 원정경기였다. 클린스만은 이 경기에서 무려 4골을 몰아치며 토트넘의 6:2 승리를 이끌었다.[3] 이로써 토트넘은 극적으로 잔류를 확정했고, 클린스만은 현재까지도 토트넘 팬들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토트넘의 레전드, 감독 제의받다."라는 신문 기사도 나왔었고, 실제로 토트넘에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끝나고 감독직 제의를 하기도 했다.
한동안 축구계를 떠나 미국에서 조용한 삶을 누리나 했는데, 40세가 된 2003년 미국 오렌지 카운티 블루 스타 팀에 등장하며 8경기 5골을 기록한다.
3. 국가대표 경력
자국에서 열린 자신의 첫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인 UEFA 유로 1988에 출전해 8개국 본선 조별리그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어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도 토마스 헤슬러, 카를하인츠 리들레 등과 함께 서독 대표로 출전해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에 승부차기로 패한뒤 3·4위전에서 이탈리아를 잡으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4]이어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24개국 본선에서 루디 푈러와 함께 부동의 투톱으로 맹활약하며 우승, 대회 올스타팀에 선발되며 본격적으로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로 거듭나게 된다. 해당 대회에서 서독은 유고슬라비아, 콜롬비아,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D조에 편성되어 있었는데, 서독은 이 세 팀과의 경기에서 10득점 3실점, 2승 1무로 수월하게 24강 조별리그를 통과하였다. 서독의 16강 상대는 2년 전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1988에서 서독을 탈락시킨 네덜란드였고, 이 16강전은 클린스만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국가대표팀 경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에게 선제골을 뽑아낸 직후 환호하는 클린스만 |
루디 푈러가 22분에 프랑크 레이카르트와의 신경전 끝에 동반 퇴장을 당한 뒤, 클린스만은 혼자서 스트라이커 임무를 이행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수비를 향해 질주하여 휘저으면서 후반전에 1-0 선제골을 득점하였고, 서독은 2:1로 승리했다. 그 다음날 서독 신문사인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클린스만에 대해 최근 10년간 서독에서는 이처럼 놀랍고, 완벽한 성과를 보인 공격수는 없었다고 보도하였다. 이후 서독은 8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격파하고, 준결승전에서 잉글랜드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리턴매치를 하였다. 이 경기에서 클린스만은 페드로 몬손의 거친 태클을 받았다. 몬손은 클린스만을 태클한 뒤 퇴장당하였고,[5] 아르헨티나는 10명으로 서독을 상대하였다.[6] 그리고 마침내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으며, 서독은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동서독이 통일되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0월 10일 스웨덴과의 평가전에서 클린스만은 통일 독일의 A매치 1호 골을 넣으며 3-1 승리를 이끈다. 마티아스 자머나 울프 키르스텐 등 동독 출신 선수들까지 합류한 통일 독일은 UEFA 유로 1992에 참가하며 첫 메이저 대회에 출전한다. 이미 월드컵 우승 후 세계 최강으로 자리 잡았던 독일은 유로 8개국[7] 본선에서도 자타공인 우승후보였으나 팀의 간판이자 전설 로타어 마테우스가 대회 직전 아킬레스건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낙마, 루디 푈러가 주장을 이어받아 출전한다. 그러나 독립국가연합과의 1차전에서 푈러마저도 팔 골절 부상을 당해 대회에서 아웃되고 클린스만은 나머지 경기에선 리들레와 투톱으로 출전한다. 독일은 평가만큼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지 않았지만 대회가 진행될수록 해슬러와 슈테판 에펜베르크, 리들레의 활약으로 차츰 기량을 회복하였으나, 결승전에서 아예 지역예선 탈락으로 진출 기회조차 없었던 덴마크[8]와 맞붙어 우승이 유력했으나 충격적인 0-2 완패를 당해 준우승에 그쳤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터닝 슛을 작렬한 클린스만 |
클린스만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 24개국[9] 본선에도 주전 스트라이커로 출전, 개막전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대회 첫 골이자 결승골을 기록하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스페인과의 본선 조별리그 2차전에서도 헤더 동점골을 기록했고, 댈러스의 코튼 볼 경기장에서 열렸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최종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닥뜨려 전반전에 2골을 기록했는데, 엄청난 터닝 슛으로 한국을 침묵에 빠뜨리기도 했다. 당시 전반을 클린스만의 2골과 리들레의 득점으로 3-0으로 마쳤다. 후반에는 더운 날씨로 인해 지친 상태에서 한국이 몰아붙이며 2골을 넣었지만 결국 독일이 3-2로 승리하고 16강에 진출했다.[10]
이후 불가리아에게 패해 8강 5위로 탈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은 대회에서 브라질의 호마리우,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 스웨덴의 케네트 안데르손과 함께 5골을 득점하여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받았다. 8강 탈락에도 5골을 기록한 클린스만보다 많은 골을 득점한 선수는 6골을 기록한 불가리아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러시아의 올레크 살렌코가 유이했다.
마테우스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받고 참가한 UEFA 유로 1996에서 클린스만은 러시아전에서 2골, 크로아티아전에서 1골 등 총 3골을 넣으며 활약했고 체코와의 결승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독일의 마지막 유로 우승이다. 아울러 노장들이 대거 합류해 비판을 받았으나 노련함과 대회 MVP 마티아스 자머, 중고신인 비어호프의 활약으로 우승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독일의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치게 한 양날의 검과도 같은 우승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클린스만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32개국 본선에도 출전했고, 16강 멕시코전에서 동점골을 득점하는 등 3골을 득점했지만,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대패 8강 7위로 탈락했다.[11] 이후 클린스만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4. 플레이 스타일
많은 득점을 기록하였지만 단순히 골대 앞에서 득점을 주워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빠른 주력을 통한 라인 브레이킹과 강력한 슈팅을 양발로 날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당시 수비들에게 굉장히 위협을 주는 공격수였다.
드리블이나 스피드, 제공권, 킥력, 퍼스트 터치 등 모든 면에서 준수했던 전천후 스트라이커로 전형적인 클래식 스타일의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으며, 발재간도 준수한 공격수로서 보다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깝다. 특히 피지컬로 상대를 누르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최전방 원톱보다 세컨톱으로 많이 기용되었다.[13]
특히 무엇보다도 클린스만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위협적인 무기는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다이렉트 슛이었다. 투톱 파트너에게 수비수들이 몰리면 그 틈을 타서 크로스나 패스가 건네지는 순간 최소한의 터치로 날리는 슈팅은 일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커리어 내내 발리나 다이빙 헤더와 같은 멋진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14] 극단적인 수비로 일관하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의 유럽 무대에서 이러한 클린스만의 능력은 더더욱 빛을 발했다.[15]
[1] 로마에게 합계 2-1로 우승[2] 토트넘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 3년간 있었다. 1986년 월드컵 득점왕. 그보다는 "축구란 단순하다. 22명이 공을 쫓아 90분간 뛰다가 언제나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이란 말로 유명하다.[3] 더 기가막힌건, 나머지 2골도 전부 자신이 어시스트했다.[4] 1988 서울 올림픽 축구종목은 브라질의 호마리우, 베베투 등 스타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승은 동구권 최강이던 소련.[5] 사실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나도 잘해서 속아넘어간 심판이 몬손에게 다이렉트 퇴장을 선언했다.[6] 이후 후반전 막판에 아르헨티나는 한명이 추가로 퇴장을 당했다.[7] 마지막 8개국(8강) 본선 조별리그 체제[8] 원래는 유고슬라비아가 진출해야 했으나 내전으로 진출하지 못해, 덴마크가 '대타'로 진출. 덴마크는 대타 진출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적을 썼다.[9] 마지막 24개국 본선 조별리그 체제[10] 그리고 독일 대표팀 감독이 된 클린스만은 10년 후 본프레레호 당시 원정 경기로 2004년에 다시 만난 한국에 1:3으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다만 이때도 전술은 요아힘 뢰프 당시 수석 코치가 다 맡았다고 한다.[11] 전반전에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다이렉트 퇴장으로 경기의 절반이상을 10명으로 싸운 것이 치명적이었다. 안 그래도 노쇠화로 의심되던 전력에서 체력에 결정타로 작용했다. 그러나 뵈른스 퇴장 전까지 오히려 골대를 맞추는 등 독일의 경기력이 오히려 좋았다.[12] 클린스만의 94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기록했던 유명한 그 터닝슛이 왼발로 기록한 득점이었다.[13] 단적인 예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루디 푈러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카를하인츠 리들레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올리버 비어호프와 투톱으로 많이 나섰다.[14] 일례로 1998년 월드컵 이란전에서 같은 팀의 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반사적으로 다이빙 헤더한 적이 있는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라 당시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천히 돌려보면, 골 포스트 맞고 튕겨나오는 공을, 쇄도하던 중에 만나, 왼발로 왼쪽으로 점프한, 다이빙 헤더를 했다.[15] 실제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소위 압박축구가 대세였는데, 말이 압박이지, 공격수의 무릎을 작살낸 수비수들에게 영웅급의 칭찬을 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더불어 득점력도 빈곤하여, 20골 언저리만 득점해도 득점왕에 오를 수 있는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