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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베르 드 지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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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위베르 드 지방시
Hubert de Givenchy
파일:지방시.jpg
본명 위베르 제임스 마르셀 타팽 드 지방시[1]
Hubert James Marcel Taffin de Givenchy
출생 1927년 2월 20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프랑스 피카르디 우아즈 보베[2]
사망 2018년 3월 10일 (향년 91세)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패션 디자이너
활동 기간 1945년~1995년
경력 1945년 자크 파트 디자이너
1946년 로베르 피게 디자이너
1946년 뤼시엔 를롱 디자이너
1947년~1951년 스키아파렐리 디자이너
1952년 지방시 설립
수훈 1983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92년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10101,#010101><colcolor=#fff,#fff> 신장 192cm
학력 에콜 데 보자르
가족 마르게리트 디테를레 바댕 (외할머니)
뤼시엔 타팽 드 지방시 후작 (아버지)
베아트리스 타팽 드 지방시 후작부인 (어머니)
장클로드 타팽 드 지방시 (형)
연인 필리프 베네
묘지 프랑스 파리 파시 묘지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활동과 전성기2.3. 은퇴와 노년기
3.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패션 디자이너. 자신의 이름을 딴 명품 패션 브랜드 지방시의 설립자이다.

단연 20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우아하고 세련된 여성복 디자인의 대표 주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유년기

1927년 프랑스 우아즈에 위치한 도시인 보베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713년 프랑스 왕국루이 14세로부터 수여받은 후작 직위가 대대로 이어진 세습 귀족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에서 태피스트리 제조 규모 1위와 2위인 고블랭 공장과 보베 공장의 소유주인 쥘 바댕의 딸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지닌 집안의 막내 아들이었던 지방시는 어렸을 때부터 유복한 생활을 영유했다.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지방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태피스트리 사업을 운영하는 외가의 영향으로 그는 자연스레 직물과 의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7살이 되던 해에 그는 파리로 떠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2.2. 활동과 전성기

지방시는 당대 뭇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에서 근무했는데 1945년 그는 자크 파트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해 이듬해에는 로베르 피게와 뤼시엔 를롱 밑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피에르 발망과 함께 일했다. 이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는 엘사 스키아파렐리 밑에서 작업을 했다.

1952년 지방시는 파리의 플랭 몽소에서 작업실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인 지방시를 개시했다. 당시 유명 여성 모델 베티나 그라치아니의 이름을 딴 첫 컬렉션은 혁신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그는 단숨에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1953년 지방시는 영화 사브리나 촬영장에서 배우 오드리 헵번을 만났다. 이 기점으로 지방시와 헵번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는데, 그녀는 그가 디자인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출연했으며 그의 첫 향수 컬렉션인 랭테르디와 르드지방시의 전속 모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최초로 연예인이 향수 브랜드의 모델이 된 사례였다. 이때부터 지방시는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들과 왕족들의 의상들을 제작했으며 덕분에 그의 브랜드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54년 지방시는 여성 기성복 라인을 론칭했고 1969넌에는 남성복 라인으로 확장했다.

2.3. 은퇴와 노년기

50년대 중반 겨우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거물 디자이너로 군림하고 있던 그는 이후 약 40년을 더 일한 뒤 지방시를 LVMH에 매각하고 1995년에 은퇴를 했다.

말년에는 파리 근교 외레루아르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 로미쉬레그르에 위치한 종셰 궁전에서 17~18세기 조각상들을 수집하며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고, 2018년 3월 10일 91세에 여느 때처럼 잠을 자던 중 아무런 고통없이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은 자연스러운 노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파리 파시 공동묘지에서 자신의 외할머니, 어머니, 형과 함께 묻혔다.

3. 기타

파일:HG1.png}}} ||
<rowcolor=white> ▲ 20대의 지방시
* 지방시는 단순히 유능한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서 귀족 집안 출신에 잘생긴 외모, 192cm의 장신, 게다가 머리도 좋았던지라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매우 인기가 많았다.


[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기 때문에 '드지방시'가 맞으나, '드 지방시'로 띄어 쓰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용적 예외로 인정된다.[2]오드프랑스 우아즈 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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