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유현준(건축가)
1. 개요
건축가 유현준의 여러 발언 등을 비판적으로 읽은 문서.1.1. 비판론
그의 기고문이나 방송에서의 발언은 대체로 건축학과 관련해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역사와 인문학적 사실 관계와 같은 결합 분야에서는 잘못된 추론이 종종 발견된다.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단일한 요인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아, 예를 들어 'A라는 현상은 B로 인해 일어난 것' 또는 'A는 이러이러한 특징과 비례가 있으니 이를 따르지 않는 B와 같은 건축 사례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 유현준 교수는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고 있는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1.2. 옹호론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은 도전적인 과제이다. 특정 요소만을 강조하다 보면 복잡한 정보가 생략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특정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오도할 의도는 없더라도, 전문적인 지식을 간단히 풀어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기본부터 차근차근 지식을 쌓아야 하며, 빠른 해답을 추구할 경우 정보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중 친화적인 전달 방식은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핵심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성과 대중성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2. 그의 지식·추론에 대한 검증
상술했듯이 대부분 역사(세계사), 인문학에 관한 것들을 건축적 맥락과 접목하다 보니 발생한 오류들이다.2.1. 전염병과 건조 기후 간의 추론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 첫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지금은 건조한 사막 지역이지만 문명 발생 당시, 겨울에는 온난 다습, 여름에는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기름진 지역이었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나일강이 불규칙적으로 자주 범람해 문명 발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곳임을 상기하자. 홍수 이후에는 수인성 전염병이 번성하기 쉬운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교통의 요지라서 여러 민족이 교차, 접촉하는 지역이었다. 이는 오히려 전염병 발생에 유리한 환경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염병은 기본적으로 건조, 다습을 가리지 않는다. 이집트가 사막화, 건조기후대가 된 14세기에도 페스트가 창궐해 카이로 인구 1/4~1/2이 사망했다고 한다.
- 둘째. 전염병 피하기가 유리해서 특정 지역에서 문명이 발생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개인적 추론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정확한 역사 지식을 수차례에 걸쳐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4대 문명의 발생 원인은 1차적으로 비옥한 토지로 인한 농업생산성 증대, 어류자원의 풍부함, 교통의 편리성에서 먼저 찾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 절충적 관점
2.2. 조선 도시 밀도와 상업 발달의 인과 추론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 첫째. 우선 사실 관계부터 알아보자면, 조선에 중층 거주건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주요 도시의 인구밀도 역시 그리 낮은 편이 아니었다. 한양의 경우 인구밀도가 현대 부산에 밀접하는 초고밀도 도시였고, 제2의 도시 개성의 경우 현대의 세종시, 제3의 도시 평양의 경우 현대의 제주도에 밀접하는 수준의 18세기 치고는 나쁘지 않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었다.
- 둘째. 조선이라는 나라의 도시적인 문제점은 각 도시의 인구밀도보다는 전국적 규모에서의 도시화율에 있었는데, 이 도시화율은 후술하듯이 도시화율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는 것이 아닌, 상업이 발달하였기에 도시화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띈다. 즉 유현준 교수가 제시한 인과 관계는 실제와는 인과 자체가 뒤집힌 것이다.[4] 유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온돌이 없고 밀도가 높은 도시는 전부 선진국이 되었어야 했다.
2.3. 프랑스 혁명과 동학 농민 운동의 비교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
- 도시가 고밀화될수록 화폐 통화량이 많아지면서 부의 이동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신흥 부흥 계급이 생겨나고 계층 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데 밀도가 높은 도시에 신흥 부흥 계급이 정치와 종교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성공하고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했다고 설명한다.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 첫째.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상업의 발달로 화폐 통화량이 늘어나는 것은 맞다. 하지만 2차, 3차 산업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은 노동력과 서비스를 위한 인구가 핵심이다 보니 모여 사는 게 중요하고 더불어 상업도 같이 발달하여 화폐 통화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정책상 이유[5] 로 농경 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평균 건폐율이 10%~30% 밖에 안되었을 정도로 농업 중심 국가여서 모여 사는 것보다 농사할 수 있는 땅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 보부상이 5일마다 장을 열어서 여러 마을과 도시의 화폐를 통화시키고 있었으니 2차 3차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폐통화량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 둘째.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와 산업혁명 이후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 시대의 도시 인구 밀도를 비교하는 것은 산업의 발달 추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연도만 비슷할 뿐 산업의 발달 추이는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결론은 도시의 밀도 때문에 상업이 발달한 게 아니라 산업의 발달 추이에 따라서 인구의 밀도, 화폐통화량, 상업 등등이 늘어나고 그 다음에 도시가 고밀화 되었다고 보인다.[7] 즉 주장하는 바의 전후 관계가 바뀐 것이다.
- 셋째. 유 교수의 주장대로 신흥 부흥 계급(부르주아) 세력이 프랑스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맞으나 동학 농민 혁명에서 조선의 지주·부호로 구성된 향촌 세력[8]은 오히려 동학 농민 혁명을 방해하였다. 결론적으로 프랑스 혁명, 동학농민혁명에 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밀도 높은 도시는 프랑스 혁명, 동학농민혁명과 유의미한 관계가 없었고[9] 부르주아 세력의 요인만 따져 보아도 부르주아 세력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어떤 세력과 결탁했는지 차이 뿐이었다.
- 화법에 대한 여담
- 물론 본인도 사회학적으로 근거 없다고 하다가 다시 "건축가의 눈"으로 포장해서 다시 주장한다. 처음에는 자신있게 주장하다가 맞다는 건지 틀리다는 건지 자신 없는 부분은 뒤에서 애매모호하게 주장하고 있으니 댓글의 반은 이런 얼토당토 하지 않는 말을 믿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과 공상을 교묘하게 섞어서 일반인에게 호도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2.4. 안토니 가우디 역현수선 디자인 의도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 첫째. 줄을 늘어뜨려서 만들어지는 곡선은 포물선(parabola)이 아닌 현수선(catenary)이며 두 곡선은 모양도 다를 뿐더러 구조적 성질도 다르다. 안토니 가우디의 역현수선 아치(inverted catenary arch) 모델은 건축 전공자들에게 대단히 유명한 모델로서 이 곡선이 현수선이지 포물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흔히 함께 이야기되곤 한다. 역현수선 아치에 대해서는 이것을 참조하라
- 둘째. 이 방송에서 유현준 교수는 안토니 가우디가 저러한 방법을 처음 생각해낸 선구자처럼 묘사하였으나, 이 방법은 안토니 가우디보다 200년 먼저 태어난 로버트 후크에게도 알려져있던 사실이었다[10]. 그리고 이 방송에서 안토니 가우디가 그러한 현수선을 이용하여 설계한 것을 마치 자연을 닮은 모습으로 디자인하려고 했던 것처럼 설명하는데, 안토니 가우디가 현수선을 사용한 것은 복잡한 구조해석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지 자연을 닮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수선 아치의 독특한 구조적 성질이라든가, 포물선 아치와의 차이, 그리고 안토니 가우디가 현수 모델을 이용해서 구조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등은 일반인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었더라면 아주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2.5. 외젠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
- 외젠 오스만(Eugine Haussmann)의 파리 개조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나폴레옹 3세 시절에 외젠 오스만 시장이 파리를 방사상 구조로 바꾸게 된다. 12개의 직선 간선도로가 개선문으로 모여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설계가 나온 이유는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시민봉기로 인해 수백 년 지속된 왕권이 무너졌다. 당연히 이후에 권력을 잡은 자는 시민봉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봉기를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디자인이 방사상 구조이다. 파리에서 시민이 봉기를 하면 12개의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이때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이유는 순수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직선의 도로망 덕분에 파리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빠르고 효율적인 직선의 도로망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11]
- 유현준 건축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 첫째.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방사상 구조로 바꾸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외젠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의 결과물을 사진으로 보여줄 때 흔히 개선문 주변의 방사상 도로를 보여주곤 하기 때문에 이 사진만 본 사람들은 외젠 오스만의 계획이 랑팡(L'Enfant)의 워싱턴 DC 계획처럼 방사상의 구조가 반복되는 계획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아니면 외젠 오스만의 계획과 랑팡의 계획을 혼동하거나), 외젠 오스만의 boulevard들은 방사형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파리 이곳저곳에 건설되었다#.
- 둘째. 외젠 오스만의 파리 계획이 시민 봉기를 두려워해서 이같은 건축을 했다고 성급하게 추론하고 있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이후 외젠 오스만의 파리 계획의 주된 목적이 시민 봉기의 원활한 진압 때문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졌지만, 그것이 적어도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Peter Hall은 외젠 오스만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 시민 봉기 진압은 교통 소통 개선, 도시 건강 문제 개선, 기념비적 요소 도입과 함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이야기한다. 당장 중세 이래 계획적인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던 파리 시의 도로 체계는 가히 혼란 그 자체였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집을 짓고 생활했던 탓에 도로의 폭이나 선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마차의 보급과 자동차의 개발로 도로가 수용할 수 있는 교통량이 점점 한계를 보였기 때문에 도로정비는 시급한 문제였다. 따라서 이 시기 파리 시의 대대적인 도로 정비는 외젠 오스만이 아니었어도 어떤 도시공학자라도 추진했을 사업이며, 그런 맥락에서 보듯 제일의 목표는 역시 도로체계의 개선이었다.They would simultaneously achieve several key objectives: they would free up traffic, give access to the new [train] stations, make the suburbs accessible, clear slums to make the city healthier, create a monumental city that would be the envy of the civilized works and - not least - guard the city against demonstrations and civil disturbances. (Hall 1998 Cities in Civilization. p718)
외젠 오스만의 재개발은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야기해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한 도시 노동자들을 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부유층과 중산층을 도시 중심부에 집결시켰다. 그래서, 봉기가 일어나더라도 정권은 도시 중심부에서 부유층과 중산층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과거처럼 도시 중심부에서 시위대나 봉기군을 맞상대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 셋째. 외젠 오스만의 계획의 규모를 감안하면, 그의 계획이 복합적인 이유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외젠 오스만을 지원한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인기가 주된 정치적 자산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외젠 오스만의 계획을 전적으로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그리고 외젠 오스만의 계획에 군사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현준 교수가 기고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과 같은 방식을 겨냥하고 대로(boulevard)를 건설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 외젠 오스만의 대로는 이곳저곳에 훨씬 더 다양하게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파리 지도만 살펴봐도 방사형 집중 구조의 도로는 개선문 일대가 거의 유일하고 대부분 사방팔방으로 대로가 뻗어져 있어 어떠한 특징이나 통일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외젠 오스만의 재개발로 인해 파리의 도로망은 대폭 확장되어 간선 도로망도 충실해지고 건물 사이의 도로들도 폭이 넓어졌다. 그래서 파리 코뮨의 시민군들은 진압군에 맞서 몇몇 대로의 결절점을 요새화했지만, 1830년대와 40년대의 봉기에서처럼 길목을 틀어막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버티는 전략이나 복잡하고 좁은 길목을 활용해 진압군을 괴롭히는 전술을 쓸 수가 없었다. 도리어 진압군들이 기존보다 폭이 넓어지고 이동이 편리해진 간선 도로들을 이용해 시민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진압해 버렸다#.
- 절충적 관점
- 종합적으로, 차라리 "교통 개선, 환기, 채광 등 여러 목적이 있지만 시민 소요의 원활한 진압이라는 목적도 있었다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사실 관계에 보다 부합했을 것이다. 또한, 시민 진압에 대해 설명할 때도 개선문에 대포 설치와 같은 단순한 설명보다는 위 문단에서 설명한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3.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
-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통섭에 관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 환원주의로 단순하게 본다음 통섭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 다음 단계인 과학적 검증 방법을 거치지 않고 건축물로 표현하려 한다.
3.1. ‘이벤트 밀도’ 개념의 독창성 논쟁
- 그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조우석이 쓴 서평#에 대해, 유현준 교수는 데일리안에 반론을 게재했다#. 이 반론문에서 자신의 책의 독창성을 주장하면서 유현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내 책에 나온 걷고 싶은 거리를 분석하는 “이벤트 밀도”와 “공간의 속도”를 규정하는 ‘개념’과 ‘공식’은 이전에는 없던 독창적인 분석 방법이고 이는 이미 토지주택공사의 발표에서 인정을 받아 새로이 디자인되는 도시에 적용하려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이론이다.
- 비판 1. '이벤트 밀도'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이벤트 밀도는 '100m당 점포 입구의 개수로 정의된다#. 하지만 가로에 면한 상점 등의 입구의 개수는 공공 공간의 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사용되어온 변수이다.[12]
- 옹호 1. 이는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은 재가공 단계에서 대중화 혹은 편의를 위해 유현준 본인이 정의하여 명료화시킨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비판 2. 자기가 쓴 논문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공간디자인학회 논문집 제6권 3호 통권17호에 실린 유현준 교수의 "보스턴 뉴버리 스트리트의 이벤트 밀도 분석"#은 같은 논문집 제6권 2호 통권16호에 실린 동일인의 "도심 內 걷고 싶은 거리의 이벤트 밀도 연구"#와 앞부분이 거의 동일하다. 17호 논문의 해당 부분에서 16호 논문에 대해 따옴표는 물론 인용 표시는 되어있지 않다. 또한 17호 논문의 참고문헌에 16호 논문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2.1 이벤트 밀도의 정의"와 "2.2 이벤트 밀도의 의미"는, 한국공간디자인학회 논문집 제6권 2호 통권16호에 실린 동일인의 "도심 內 걷고 싶은 거리의 이벤트 밀도 연구"#의 "2.2 이벤트 밀도의 정의"와 "2.3 이벤트 밀도의 의미"를 그대로 옮겨왔다. 또한 17호 논문의 표1은 16호 논문의 표1과 동일하다. 한편 두 논문의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은 4개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한다. 사실 논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기본적인 문헌조사가 없다. 논문에 포함된 10개의 참고문헌들은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피어 리뷰를 거친 논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제시하는 또다른 '독창'적인 개념인 "공간의 속도"를 다룬 논문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문헌조사가 되어있지 않고, 논문에 수록된 참고문헌은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독창성을 주장하기에는 해당 분야에 대한 문헌 조사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3.2. 엉뚱한 인용: 귄터 니츠케 관련
- 유현준 건축가의 발언
- 알쓸신잡 시즌 2, 1회에서 유현준 교수는 도산서원의 공간을 설명하며 "건터 니슈케라는 사람이 쓴 논문이 있는데"라고 말하며 귄터 니츠케(Günter Nitschke)의 "Time is Money - Space is Money"를 언급한다. 하지만 귄터 니츠케가 쓴 저 글은 논문이 아니고 귄터 니츠케의 "From Shinto to Ando : studies in architectural anthropology in Japan"라는 단행본에 실린 에세이이다. 그리고 이 글을 언급하면서 유현준 교수는 이런 설명을 한다.공간이 넓으면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한대요. 미국은 공간이 넓잖아요. 시간을 줄이는 고속도로가 발달했어요.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게끔 [...] 반대로 공간이 좁으면 시간을 딜레이시키는 쪽으로 가요. 일본같이. 좁은 공간에서 넓어보이게 하려면 길을 꼬불꼬불하게 만들면 돼요"
- 이 주장에 대한 비판
- 엉뚱한 인용: 귄터 니츠케는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의 전공 분야는 일본 정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와 일본 도시의 서로 다른 발전 양상을 비교하는데 니츠케를 인용하는 것은 엉뚱하다. 시청자로 하여금 마치 니츠케라는 해당 분야의 학자가 충분한 경험적 근거를 토대로 작성한 논문에 유현준 교수의 발언이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전문가가 보기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맥락에서 인용되었을 뿐이다. 그의 니츠케에 대한 오독은 그의 기고문#에서도 반복된다.진입로가 복잡한 또 다른 이유는 건축이론가 귄터 니치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니치케에 따르면 미국처럼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시간거리를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하고, 일본처럼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는 시간을 지연시켜서 공간을 심리적으로 커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시간거리를 줄이는 고속도로가 발달했고, 일본은 좁은 공간을 넓게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진입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전통 찻집에 가보면 두세 평 남짓한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 번 가까이 진입로가 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사례다. 좁은 집을 좀 더 넓게 느끼게 하려면 전체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계를 해야 한다. 좁다고 집의 모든 벽을 다 터버리면 오히려 더 좁게 느껴지게 된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머릿속으로 전체 공간을 그려보게 하면 공간이 실제보다 넓게 느껴진다.
귄터 니츠케가 마치 환경심리학자인 것처럼 인용되었다. 귄터 니치케의 저작은 진입로가 복잡하면 공간을 넓게 느끼는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공간 경험이 다르다는 에세이를 썼을 뿐이고, 실제로 공간이 복잡하면 더 넓게 느끼는지에 대해 아무런 경험적 결과를 제공한 바 없다. 잘못된 인용으로 독자를 오도하는 글쓰기이다.
- 절충적 관점
- 유현준 교수가 건축계획이나 환경심리학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잘 모르는 것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간의 형태 등의 조건이 지각된 공간의 크기(perceived spaciousness)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Stamps의 연구들을 보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1] 출처 2020.02.28 조선일보 "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백신 예방주사가 만든 현대 도시", 2020.03.07. 중앙일보 "종교단체의 강적은 전염병…한곳에 못 모이면 권력 잃어", 2020.06.19. "KBS1 라디오 최경영의 경제쇼"[2] 출처[3] SBS 교양 공식채널 달리에 2021년 1월 27일 업로드된 유현준의 판타집 개론[4] 이는 "아이스크림 판매율이 높아질수록 상어에게 사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아이스크림은 위험하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이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5] 직전 시대인 고려 때 상업이 좀 떴는데 원나라 교초의 대량 부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점과 여말선초에 왜구와 홍건적이 들끓은 점도 영향이 있다.[6] 서울은 예외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서울)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이 많아 투기도 심했다 한다.#[7] 한국에 아파트가 처음으로 들어선 것도 산업화가 시작하고 1차 산업보다 2차, 3차 산업에 자본이 몰리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주택 부족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려 아파트를 만들게 되었다.[8] 조선시대 부르주아로 불리며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 천민층이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다.[9] 동학 농민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조선의 200만~300만 민중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동학 농민 혁명을 진압하려 청나라와 일본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라 프랑스 + 유럽 규모였다.[10] P. BLOCK, M. DE JONG, J.A. OCHSENDORF (2006) As Hangs the Flexible Chain: Equilibrium of Masonry Arches[11] 알쓸신잡2 영월편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만 이 경우에는 그런 얘기도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12] 참고문헌 Merlino, K. R. (2011). Urban grain and the vibrancy of older neighbourhoods: Metrics and measures. Considering research: Reflecting upon current themes in architectural research, 477-488.
SEVTSUK, A., EKMEKCI, O., NIXON, F., & AMINDARBARI, R. (2013). Capturing Urban Intensity. In Conference on Computer-Aided Architectural Design Research in Asia (CAADRIA 2013) (Vol. 551, p.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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