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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8:47:18

율산그룹


1. 개요2. 역사3. 역대 회장4. 계열사 목록5. 여담6.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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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율산그룹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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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율산실업을 주축으로 했던 무역중심 기업집단으로, 제세, 대봉, 원기업과 더불어 1970년대 재계의 '앙팡테리블'로 손꼽힌다.

2. 역사

1975년 6월 17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신선호(申善浩, 1947. 5. 6. ~)[2]가 27세에 오퍼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광주서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차례로 함께 졸업한 동창생들과 함께 자본금 5백만 원으로 '율산실업'을 세운 게 효시이다.[3] 초기에는 중동 붐을 타고 건축자재 수출을 하면서 사세를 신장시켜 부실기업 신진알미늄을 인수했고, 동원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도 손을 뻗었다. 이에 따라 기획, 조달, 관리, 지휘 등 4개 본부를 조직한 후 1976년 회장직에 장인인 원로언론인 부완혁(夫琓爀)[4]을 추대해 그룹 모습을 갖췄다.[5]

​1977년 경흥물산을 인수해 패션업에도 진출하고 동아공업을 합자 형식으로 인수하는가 하면, 율산엔지니어링,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율산공업전문학교 등 여러 기업이나 기관을 각각 세워 계열사 수를 11개로 늘렸으며, 1978년에 율산실업이 정부로부터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심지어 이천 부지를 통일그룹에 팔고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지까지 사들여 부동산 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78년 박정희 정부가 전격적으로 '8.8 투기억제 조치'를 단행하면서 율산의 주력사업이었던 건축자재수출을 금지하면서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게 된다. 자금난 해결을 위해 서울신탁은행에서 무신용장 방식 'DA제도'를 이용해 돈을 빌려다가 부실기업 대한전자 및 광성피혁을 불하받으면서 빚은 점차 늘어갔다.[6] 그해 추석에는 남성 기성복 '밤빔' 판매직원들이 중앙청(현 정부서울청사)에서 선물티켓을 마구 뿌리다 청와대 사정반에 적발되는가 하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 아파트 공사 입찰마저 경쟁 업체들의 방해로 무산되고 자금난으로 종합상사 자격을 잃었다.

​게다가 1979년 2월 신선호 대표가 청와대 직원들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난게 언론에 알려져[7] 이래저래 청와대의 눈 밖에 났고, 이후 각 계열사들이 은행관리에 들어가자 그룹 차원에서 진의종 전 의원을 새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신선호가 비리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8]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으며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회사에 넘어갔고 일부는 소멸되었다.

​해체 후 신선호는 그나마 서울종합터미널을 지켜 1994년 '센트럴시티' 착공에 들어가 2000년에 완공해 재기에 성공하는 듯 싶었으나, 다 짓고 보니 채무가 많아져 본인은 대주주로만 남고, 경영권은 2002년 애경그룹에 넘기면서 사실상 명을 다했다.

3. 역대 회장

4. 계열사 목록

5. 여담

6. 출처


[1] 해당 로고는 설립 초기부터 해체 전까지 사용되었다.[2] 아내의 족보에는 평산 신씨라고 오기되어 있으나 고령 신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으므로 고령 신씨가 맞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신선호 처가 족보.png파일:신선호 족보.jpg[3] 나한일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훠어이 훠어이>에는 6사람만 나오지만, 창립발기인 포함 10여명이 함께 시작한 것이라 한다. 중간에 타향살이 자금, 가족 부양 등의 사유로 낙향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아 회사를 꾸려나가던 중, 아랍에서 Offer를 받아 성장을 시작한 것이라고.[4]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신선호 처가 족보.png 그러나 사위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夫完爀'이라고 오기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신선호 족보.jpg[5] 신선호는 부완혁의 장녀 부정애(夫貞愛, 1947~)와 결혼했다.[6] 당시 서울신탁은행에서 대출을 해주면서 골칫덩이였던 대한전자와 광성피혁을 강제로 떠넘긴 측면이 크다.[7] 당시 율산그룹과 경찰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은행 직원을 사칭한 괴한들'한테 납치됐던 걸로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그런데 긴장한 신선호 대표가 기자회견장에서 "재벌 총수가 일개 은행 직원의 전화에 움직였다는게 이해가 안간다"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순간 당황해서 '청와대 비서실이라고 해서 나갔다'고 이실직고 해버리는 사고를 친다. 이 때문에 신선호는 경찰한테도 까이고, 청와대에서도 까이는 신세가 된다.[8] 당시 신선호 대표는 외국환관리법(1999년 폐지) 위반과 횡령죄로 구속되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신선호 대표가 광주서중 출신이고 상기한 장인 겸 회장 부완혁 씨가 장준하국회의원 당선 이후 사상계의 2대 발행인을 맡은 야당 성향의 인물이어서, 한마디로 김대중과의 커넥션이 의심되어 당시 정권이 조진 거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이와 연관해 비호남계 정재계 인사들이 많은 당시, 호남 기반의 대기업이 나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인사들이 나섰을 거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9]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율산이 유력했던 사우디 공공주택 공사 수주가 무산된게 국내 재벌건설사들의 로비 때문이었다는 썰이 돌았다.[10] 풍산에서 인수했다고 아는 이들도 있으나, 효성그룹에서 인수했다고 한다.[11] 센트럴시티 개발 전에는 가건물과 플라스틱 좌석 수십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