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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7:32

이대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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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K 와이번스 1기 시절2. 두산 베어스 시절3.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10 시즌3.2. 2011 시즌3.3. 2012 시즌3.4. 2013 시즌3.5. FA3.6. 2014 시즌
4. SK 와이번스 2기 시절
4.1. 2014 시즌4.2. 2015 시즌4.3. 2016 시즌4.4. 2017 시즌4.5. 2018 시즌

1. SK 와이번스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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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에 실패한 이 후 군산상업고등학교 동기 이승호의 추천으로 2000년 1월 쌍방울 레이더스연습생으로 입단했다. 그러나 이대수가 쌍방울과 신고선수 계약을 맺기 전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되었고, 웨이버 공시된 옛 레이더스 선수들이 SK 와이번스와 개별 계약할 때 이대수의 경우 쌍방울과 계약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졸지에 무적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갈 곳이 없어지자 고향으로 내려가 현역 입대를 준비하던 도중 고교 선배인 이건열 SK 타격코치의 추천으로 연습생 테스트에 재응시해 합격하면서 간신히 SK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후 SK 와이번스의 엷은 선수층의 덕을 보면서 백업 내야수로 간간히 얼굴을 내밀었고, 2003년 6월 14일 인천 한화전에서는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치면서 데뷔 첫 타점과 결승타를 올리기도 했다.[1] 이후 김민재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2006년에는 주전 유격수로 타율 0.253, 실책 13개의 나름 괜찮은 성적을 기록한다.

2.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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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7년 손시헌상무 야구단 입대로 유격수의 빈 자리를 메꾸려던 당시 김경문 감독의 트레이드 제시로 두산의 내야수였던 나주환과 유니폼을 맞바꿔 입게 된다. 사실 두산에는 이미 나주환이라는 유망주가 있었고, 김경문 감독도 트레이드 전에는 당연히 나주환을 유격수로 굳혀보려 했었지만,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클러치 에러를 자꾸 범하는 탓에 나주환을 포기하게 된 것. 결국 김경문 감독은 SK에서 정근우에 밀려 입지가 감소하고 있었고[2] 상대적으로 수비가 낫다고 평가되던 이대수를 데려오기로 결심하였으며, 이에 김성근 감독은 SK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공격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던 나주환을 요구해 맞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3] 당시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말도 있지만,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 이유 때문에 버림받은 건 아니라고. 아직도 김성근 감독을 존경한다는 이대수 김성근 감독도 두산에서 맹활약하던 이대수를 보면서 흐뭇해했다고 한다.

트레이드 이후 이대수는 곧바로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았고, 탄탄한 수비력과 나쁘지 않은 타격으로 두산의 정규시즌 2위와 한국시리즈 진출에 공헌했다. 이후 플레이오프와 2007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결승타를 치는 등 맹활약하면서 2차전 경기 MVP로 선정되었지만, 3차전에서 일명 이대수의 난이라고 불리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 한 이닝 실책 3개를 범하기도 했다.[4][5] 결국 두산은 1, 2차전을 모두 이기고도 내리 4연패를 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8년에는 직전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당한 부상 여파로 부진하며 오재원[6], 김재호 등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9월 한달간 2할 초반대 타율을 2할 8푼까지 끌어올릴 정도로 미칠듯한 맹타를 휘두르며 두산의 순위싸움에 힘을 보탰다. 다만 팀은 또 다시 한국 시리즈에서 준우승.

이후 손시헌이 전역함과 동시에 군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었는데, 이대수가 군 면제[7]를 받았다. 팀에 잔류한 이대수는 결국 공수 양면에서 상위 호환이던 손시헌에게 밀리고, 김재호, 이원석, 오재원 등의 존재로 인해 2009년에는 1군 38경기 출전에 그쳤다.

3.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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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0시즌을 앞두고 내야 자원이 필요했던 한화 이글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대상은 김창훈조규수. 둘 다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자이긴 했지만, 성장이 정체되어 사실상 전력에 별 보탬은 되지 않는 투수들이었다.[8] 사실상 OB 베어스 시절 선배인 김경문한대화의 첫 감독 취임 선물을 겸해, 2군에서 썩기는 아까웠던 이대수의 앞길을 터주기 위해 응해준 트레이드라는 것이 중평.

3.1.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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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규정타석을 채웠고, 타율 0.232에 7홈런 37타점으로 시즌 내내 타율 꼴찌 수준을 맴돌았지만 애초에 타격을 기대하고 데려온 선수는 아닌데다 김민재 은퇴 후 수비진을 잘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고 데려온 거라... 기대대로 수비는 잘 했고 실책 0개라는 기록으로 KBO 골든글러브 후보에 살짝 올라왔었다.

7월 14일 SK전에서 데뷔 첫 만루 홈런을 치며 경기 MVP로 선정되었다.

3.2.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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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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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3 시즌

한화 이글스의 1번타자로 3월 30일 개막전 선발로 나왔고, 이날만큼은 가히 이대수의 날이라고 할 정도로 5타수 3안타에 2타점까지 쏘아올리며 맹활약했지만 팀은 졌다.

그러나 3월 31일 사직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타격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한화팬들이 우려하던 수비에서 큰 실수를 저질러 임기영의 멘탈을 붕괴시키고, 팀의 패배에 일조하며, 욕을 먹게 되었다.

4월 2일 대전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마무리 앤서니 르루를 상대로 10여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안타를 만들어내는 근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1번 타자로서 준수한 타격감을 보여주었지만 도리어 수비 능력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모습으로 팬들을 걱정하게 했다.

4월 1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2회말 김동주가 친 평범한 뜬 공을 캐치하지 못하고 글러브에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3루 주자 정수빈이 그대로 홈인, 추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3회말 조정원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 주고 교체되었고, 팀은 1:15로 대패했다.

4월 21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넓은 수비범위와 연이은 호수비로 이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5회초에 이 날 유일한 타점이자 결승 타점을 뽑아내면서 팀의 1:0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정말 오랜만에 MVP 인터뷰도 했다!

그러나 5월 이후 타격페이스가 떨어져 버리며, 2할대 중반에 타율에 머무르고 있다.

7월 송광민이 복귀한 이후 송광민이 유격수자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대수는 3루수로 주로 출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화에서는 유격수로 주로 출장했기때문에, 3루 수비는 유격수에서의 수비의 안정감 보다는 떨어진다는 평.

시즌 최종 성적은 122경기 390타수 100안타 .256을 기록. 타율은 저조하지만 3년 연속 100안타 달성에 성공했고, 도루 부문에서는 커리어 처음으로 두자릿수를 기록했다. 시즌 중반 포지션을 옮긴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만은 않은 활약.

3.5. FA

시즌 후 FA를 선언했고, 우선협상 마지막 날인 11월 16일에 4년 20억 원(계약금 4억 원, 연봉 3억 5천만 원, 옵션 2억 원)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처음 계약발표가 났을 때는 프런트에 대한 비난이 거셌지만 KIA 타이거즈이대형을 4년 24억을 주고 데려가자 한화 프런트는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싼 가격에 잡았다는 재평가 되었다.[10]

이후 행적을 보면 먹튀나 다름없지만 사실 본인 실력과 무관하게 본인 포지션에 자리가 없어서 이대수가 못 나온 거라 딱히 드러눕거나 해서 먹고 튄 건 아니다.

3.6. 2014 시즌

개막전 엔트리에 들었으나 3루수의 김회성, 유격수에 송광민이 있는지라 자리가 불분명해 2일 2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내야수비의 핵인 유격수 송광민이 SK와의 3연전에서 잇따른 5실책, 개막전부터 계산하면 7실책이나 하며 불안함을 보이자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자라는 실적과 경험 때문에 1군 콜업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12일 넥센전에서야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은 함정. 그리고, 복귀 후에도 한상훈과 경쟁할 것으로 보이며, 아직 코칭스텝은 송광민의 활용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에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만 이후 실책 퍼레이드를 펼치는 송광민을 끝까지 유격수로 기용하고 백업으로 한상훈이 자리를 잡으면서 5월 첫주 현재까지 1군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김회성-송광민으로 이어지는 3-유 거포라인의 매리트가 상당히 높고 거기에 이대수 본인은 장타력이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당장은 1군 콜업이 요원할듯 하다. 그러다 5월 16일에 콜업되었다.

5월 18일 SK 와이번스전에서 6회말 만루 찬스에서 대타로 기용되어 2타점 적시타를 쳤고, 이 안타는 이 날 경기의 결승타가 되었다. 5월 23일 잠실 두산전에 선발로 출장했지만 왼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끼고 경기 초반에 교체되었고, 다음날 부상 때문에 1군에서 말소되었다.

4. SK 와이번스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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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군에 머물러 있다가 6월 3일, 김강석과 세트로 조인성과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친정팀 SK로 7년만에 돌아왔다.

내야의 포지션 경쟁자 송광민한상훈이 안정된 수비와 더불어 고감도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어[11] 이대수의 주전 확보가 힘들어진 가운데, 베테랑 포수를 원했던 한화와 3루수 최정과 유격수 박진만이 모두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기존 내야 백업인 신현철의 수비가 시원치 않던 SK 입장에선 백업으로라도 필요한 선수인 만큼, 양 팀의 사정이 맞물려 이뤄진 트레이드. 물론 SK에서도 주전 유격수를 맡고 있는 김성현, 그리고 트레이드 즈음에 막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내야 유망주 박계현과 쉽지 않은 주전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이 트레이드로 이대수가 유격수로 출장하는 날에는 7년 전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나주환과 키스톤 콤비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흔치 않은 인연.

4.1. 2014 시즌

이후 퓨처스리그서 조율을 하다 6월 27일 전격 등록되었다. 바로 선발 3루수로 출전할 예정. 하지만 그간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7월 7일에 최정이 복귀하면서 말소되었다.

이후로는 1군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팬들 사이에서는 최정이 FA로 팀을 떠날때를 대비한 대체선수로 영입한것이라는 소문이 돌고있다.

하지만 최정은 잔류했다. 나주환박계현도 있기 때문에 앞길이 험난한 상황.

4.2. 2015 시즌

시범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개막 엔트리에는 승선하지 못했다. 그 후 재활과 퓨처스 경기를 주로 뛰면서 종종 1군에도 모습을 비췄으나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확대엔트리가 시행되는 시점부터 1군에 다시 합류했다. 9월부터는 타격감이 상당히 좋은 상태인데 9월 16~17일 삼성과의 시리즈에서는 두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4.3. 2016 시즌

유격수 용병 헥터 고메즈가 합류함에 따라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 김성현과 로테이션으로 주로 2루수로 출장하고 있다. 시범경기에서의 수비능력과 타격실력은 발군으로 3월 19일 기준으로 현재 .412의 타율을 마크중이며 3월 19일 LG 트윈스와의 시범경기 홈경기에서 선발 3루수로 출장하여 4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했으며 경기 중반에 2루수로 이동하여 수비를 소화하였고 9회초 이천웅의 잘맞은 2루쪽 땅볼 타구를 깔끔하게 병살타로 연결하며 고전 중이던 박희수를 구해냈다.

하지만 정규 시즌이 시작되고 김성현이 타격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데다가 최정민이 1군으로 올라오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등 존재감이 희박해지며 4월 20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5월 1일 1군에 재등록되었으나 별다를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18일 다시 말소되었다

이후 1군에 등록되지 못한 채 타율 0.000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4.4. 2017 시즌

2017년은 FA 계약 마지막 해이다.

대니 워스의 부상 덕분에 박승욱과 주전 유격수 자리를 경쟁하게 되었다. 주로 유망주를 선호하는 트레이 힐만 감독의 특성 상 주전 경쟁에서 살짝 밀려서 대주자나 대수비 등 백업 요원을 하고 있으나, 4월 12일 경기에 선발 출장하면서 아예 주전 자리에서 밀린 게 아닌 듯. 그리고 4월 12일에 내야안타를 치면서 2015 시즌 이후 2년만에 정규 시즌 안타를 선보였다.[12] 그러나 13일 경기에서는 아예 출장하지 못했다.

4월 15일 한화전에서는 유격수 겸 9번타자로 선발출장. 앞 타순에 배치된 나주환이 펄펄 나는 모습을 보여 승부처에서 고의사구로 걸러보내고 자신과 승부를 하는 것에 3타점 적시 3루타로 쐐기를 박는 활약을 보여주셨다.

이후 무려 5할대의 타율을 보여주고, 호수비까지 하는 등 용병과 박승욱의 빈자리를 완벽에 가깝게 채우고 있다.

4월 28일 삼성전에서는 첫 타석에서 몸에 맞는 공으로 나가려 했으나 스윙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삼진 판정을 받자 강력히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덕아웃 밖으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법규를 외치는 장면이 생생히 잡혔다.영상보기 [13]

5월 2일 KBO는 상벌위원회를 열고 이대수에게 2경기 출장정지 + 유소년 야구봉사 40시간의 징계를 내렸다.

그뒤로 잘 못 나오더니, 박승욱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대수비나 대주자로 몇 번 나오다가 2군으로 내려왔다.

7월에 1군에 복귀했다.

8월 6일 경기에서 이대형이 도루를 할 때 송구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서 얼떨결에 무릎을 태그했는데 하필 십자인대 파열이 되는 바람에 소수의 kt wiz 팬들은 무릎을 태그한 이대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대수가 무릎을 찍은 것은 송구 타이밍 때문에 주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태그해서 우연히 무릎에 태그를 하게 된 것이고, 이대형이 이미 도루 중에 자세가 흐트러져서 십자 인대가 나갔다는 것이 중론이라 이대수의 잘못은 없다는 여론이 대세.

58경기에 출장하면서 SK 복귀 이후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백업 유격수로 박승욱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FA기간이 끝났지만 2군에 내려간 기간이 워낙 많아 등록일수가 모자라다 보니 재취득은 물 건너갔다. 구단과 새로 연봉협상을 했는데, 3억 5천에서 7천으로 뭉텅 깎여나갔다. %로 따지면 무려 80% 삭감.

4.5. 2018 시즌

시범경기 엔트리에도 들지 못해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아마 박승욱, 나주환 등 유격수 후보들이 어지간히 못하지 않는 한 전력 외로 분류되어 2군에 박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17시즌때도 대니 워스가 나가리되고 박승욱은 타격툴 없는 헥터 고메즈 꼴이 나면서 겨우 백업자리 얻은 판이니... 거기다가 나이도 많기 때문에 쉽지 않다.

개막 엔트리에 예상대로 들지 못했다.

조동화가 7월 16일 현역 은퇴 선언을 함에 따라 SK 와이번스의 창단 멤버 중 이대수만 SK에 남게 되었다.

최정의 장기 부상으로 인하여 7월 25일 올 시즌 처음으로 1군에 콜업되었다.

7월 25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2차전에 8회초 3루수로 출전한 제이미 로맥의 대수비로 교체투입되었다. 타석에서는 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7월 26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도 8회초 나주환의 대수비로 교체투입되었다.

7월 28일 NC 다이노스전에는 2루수로 선발출장했다.

8월 2일 강승호가 등록되며 말소되었다.

10월 6일 사직구장에서 전병두와 함께 전력 분석을 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사실상 은퇴인 듯. 그리고 10월 13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올해 막판에 SK의 권유를 받고 은퇴선언 후 지도자 준비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렇게 그가 은퇴하면서 SK 와이번스 창단 멤버는 이제 쌍방울에서 승계된 이진영만 현역으로 남았다가, 열흘 뒤에는 그 또한 은퇴하면서 더 이상 현역인 SK 창단 멤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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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이 당시 이대수에게 희생플라이를 허용하고 패전 투수가 된 선수는 박정진으로, 이후 이대수가 한화로 오면서 한솥밥을 먹게 된다. 이대수 본인에게도 가장 잊지 못하는 경기 중 하나라고.[2] 2007년 당시 정근우의 포지션은 유격수였고, 2루수는 정경배가 맡고 있어서 나주환이 처음에 유틸리티 백업을 맡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경배의 부진으로 정근우가 2루로 이동했고(그래서 2007년 유격수와 2루수 수비 이닝이 비슷하다) 주전 유격수는 나주환이 차지했다. 이후 2008년부터 정근우는 완벽하게 2루수에 정착했다.[3] 이 트레이드는 굳이 손익을 따지자면 나주환의 포텐을 터뜨린 SK가 이득이지만, 두산도 이대수가 2007년과 2008년에 손시헌의 공백을 잘 메워줬기 때문에 충분히 이득을 보았다. 대표적인 윈-윈 트레이드 사례. 나중에 이대수가 다시 SK에 오면서 이대수와 나주환은 같은 팀이 되었다.[4] 여담으로 홍성흔이 해당 시리즈 5차전에 병살타 3개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만들어냈다.[5] 지금은 사라진 스포츠 잡지인 SPORTS 2.0에 따르면, 이 날 이대수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 TV로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이대수의 세 번째 실책이 나오는 순간 이대수의 아버지가 TV를 꺼버렸다고 한다.[6] 오재원 역시 데뷔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다만 유격수 치고 살짝 큰 체구와 약한 어깨, 뻣뻣한 몸으로 인해 나중에는 2루수로 정착했다.[7] 사유는 청각 이상. 고등학교 시절 받은 체벌로 오른쪽 귀 고막이 파열되었으나, 잘 모르고 제 때 치료를 받지 않아 청각 장애로 남았다.[8] 김창훈은 이후 좌완 사이드암으로 투구폼을 바꿔 1군에 종종 모습을 비췄지만, 그닥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2014년 시즌 중에 방출되었다. 조규수는 더 별볼일 없어서 2010년에 1군에서 딱 1.1이닝 던지고 2011년 시즌 중에 방출되었다.[9] 이 사진은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 본인의 한화 시절 카드 사진으로 쓰인다.[10] 이대형도 골든글러브 수상자이다.[11] 트레이드 당일인 6월 3일 기준 두 선수 모두 타율이 0.333이었다.[12] 사실 앤디 번즈의 실책성 플레이로 기록될 수도 있었으나 안타로 기록되었다.[13] 이 경기 전에도 SK의 경기에서의 많은 오심 때문에 이대수가 총대를 매고 항의를 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이대수는 박정권과 함께 팀 내 최고참급 선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