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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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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일반적으로 시아파와는 별개의 종파로 분류되는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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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2. 역사3. 분파
3.1. 무스탈리파3.2. 니자리파3.3. 드루즈파

1. 설명

Isma'ilism

시아파의 분파 중 하나이며 8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7이맘파라고도 한다. 제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제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다.

이와는 달리 12이맘파는 자파르 알 사디크의 차남 무사 카딤(Musa al-Kadhim)을 제7대 이맘으로 세웠다. 장남인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는 자파르 알 사디크보다 먼저 사망했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수니파 이슬람에 환생이나 윤회에 관련된 교리는 없지만 이스마일파에는 전생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교리가 있다.

이스마일파는 전통적인 시아파 교리에서의 마흐디(구세주) 관련 교리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며 이스마일파 이맘이야말로 진정한 이맘이라고 선언했다. 중세 파티마 왕조는 이맘의 승계와 역사의 종말론적 순환개념을 재정의하여 자신들이 제6대 이맘의 주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구세주의 등장과 역사의 종말은 먼 훗날로 미루어졌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해당 이론에 힘입어 신플라톤주의영지주의의 여러 개념들이 이스마일파의 사유방식에 혼합되었다.

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신자가 제일 많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발티스탄아자드 카슈미르, 인도령 카슈미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지방(사리콜인 한정)에 일부가 거주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 극소수가 존재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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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심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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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자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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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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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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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알 하피즈
제22대
앗 자피르
제23대
알 파이즈
제24대
알 아디드
제25대
알 하미드
제26대
바하룻딘 술라이만
제21대
앗 타이브
* 1.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알리의 이복 동생인 자파르의 손자 }}}}}}}}}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사후에 그 자손이 이맘을 계승했는데, 이스마일파의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정체를 숨겼다고 알려져 있다. 8대 이맘, 9대 이맘, 10대 이맘이 정체를 숨겼으며 이들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반인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Abdullah al-Mahdi Billah)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고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가 되었다.아무리 봐도 족보 날조 같지만 교리라 하니 그렇다 치자(...)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시아파 이맘들은 탄압받았는데 감금당하거나 독살당하는 등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맘의 혈통임을 주장하는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에서 봉기한 후 이집트까지 점령하고 카이로에 도읍을 정한 뒤 칼리파를 선언하면서 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헤게모니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에 대항하여 안달루스후우마이야 왕조까지 칼리파를 자칭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세 칼리파가 공존하는 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는 성지순례객들을 대학살해 피바다를 만든 것으로 악명높았던 카르마트라는 극단적인 단체가 존재했다. 이스마일파는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암살자들의 사이비 종파, 다른 한 편으로는 이슬람 세계에서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보존하는 인텔리 집단이라는 두 얼굴을 가졌다.

파티마 왕조는 카이로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칼리파 알 하킴의 실종 이후 점차 실권을 잃었고 군인과 관료들에게 휘둘렸다. 이후 니자리파와 무스탈리파의 분열 등은 알 무스탈리 항목 참조. 5이맘파 / 7이맘파의 분열과 유사하게 알 무스탈리의 아들 알 아미르가 사망한 후 장성한 타이브 대신 알 아미르의 사촌 알 하피즈가 계승하며 무스탈리파는 재차 하피즈파(하피지)와 타이브파(타이비)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후자는 예멘의 아르와 앗 술라이히가 수장을 맡아 인도 등지에 전도했다. 1179년 마지막 칼리파 알 아디드가 사망하자 재상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가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시아파 파티마 칼리파를 더이상 세우지 않음으로써 파티마 조는 사실상 멸망했으며 동시에 이스마일파의 정통임을 주장하던 하피지파도 사라졌다.
한편 1095년 니자르가 칼리파위에 재차 도전했다가 사망한 후에도 그 추종 세력들은 (이집트에서 생환한) 니자르의 셋째 아들 알리 알 하디를 이맘으로 모시며 이란과 이라크에서 잔존했다. 니자르와 그 후손들을 이맘으로 모신 아사신 세력은 오늘날 이란 북부 알라무트 요새를 중심으로 뭉쳐 니자리 이맘국을 세웠다. 다만 니자리 이맘들은 실권자인 '다이'(선교사) 하산 에 사바흐와 그 후손들에게 실권을 이양하고 은둔 상태로 교리 저술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렇게 반세기 이상이 흐르고 1164년 하산 에 사바흐의 증손자 하산 앗 살람이 자신이 사실 (2년 전 사망한) 이맘 하산 알 카히르의 아들이자 '재림'(키야마)이라 주장하며 스스로 이맘이라 선포했다.

이로써 세속과 종교 권력이 통합되었으나 당대에도 외부에서는 키야마 사상을 믿지 않았다. 사상의 진위 여부를 떠나 니자리 이맘국은 이후로도 100여년간 존속하다가 1256년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알라무트가 함락당하면서 멸망했다. 당시 알라무트 요새 함락 과정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 훗날 몽골 제국의 최고의 천문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나시르 앗 딘 알 투시였다. 당시 몽골군은 천문학자는 점성술사로 인식했고 천문학 전문가는 요행한 역술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투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보통 몽골군은 점령지의 도서관이나 서점, 필사본 제작소 등등도 모조리 불질러 버리는 편이었는데 투시가 미래를 예언하려면 책을 불지르면 안 된다고 설득해서 알라무트 요새의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투시가 아니었다면 이스마일파, 니자리파도 알라위파나 드루즈 비슷하게 교리를 구전 전승에만 의지해야 할 수도 있었다. 비록 투시가 건진 책들 중에서는 이스마일파 교리에 관련된 책들보다는 천문학, 의학, 과학, 철학서 등이 더 많긴 했지만 그래도 이스마일파 교리 관련 책들도 건저진건 사실이고 덕분에 이스마일파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의 사만 왕조로 선교를 나간 이스마일파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는데 이들은 순결 형제단이라는 학술 동아리를 만들고 철학, 과학과 종교를 분리하는 순수한 학문을 추구한다는 이념하에 주변 수니파 무슬림 및 기독교인들과 함께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중세 의학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이븐 시나의 아버지가 순결 형제단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여러차례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박해를 당한 이스마일파는 타지키스탄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파키스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현지 원주민들을 개종시켰는데 이들의 후손들을 파미르인이라고 부른다.

3. 분파

파일:파티마 이슬람.png

알 무스탄시르의 세 아들들과 이스마일파의 분열

3.1. 무스탈리파

Mustaali/ Taiyabi

파티마 조 제8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빌라(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동생 무스탈리(Musta'li)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스탈리파는 하피지와 타이비의 두 종파로 나뉘어 있는데 오늘날 무스탈리파라 하면 아이유브 조의 살라딘에 의해 소멸된 하피지가 아닌 인도 등지에 남아있는 타이비의 후예인 보흐라파를 말한다.

현재 아가 칸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니자리파와 달리 여러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다. 무스탈리파 중에서도 타이비파 세력은 파티마 왕조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예멘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다시 예멘에서 교세가 분열과 동시에 약해지면서 주도권이 인도의 서부 구자라트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타이비파의 수장을 맡았던 이가 중세 아랍의 대표적인 여왕인 아르와 앗 술라이히이다.

니자리파가 파미르 고원과 카슈미르 등 중앙아시아 산간벽지에 자리잡게 되었다면 무스탈리파는 인도 구자라트 해안 지방이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예멘과 인도 구자라트의 무스탈리파가 다시 분열하면서 갈라졌고 이후 인도의 무스탈리파는 다우디 보흐라파라는 이름의 분파로 갈라졌다.

무역 상인 커뮤니티로 유명한 보흐라파(Dawoodi Bohra; بُهرة داؤوْدِية) 신자의 대부분은 인도에 분포한다. 보흐라파는 북아프리카에서 기원하고 예멘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할례 악습을 보존하고 있다. 인도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남아시아는 하나피파가 우세하다 보니 여성할례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보흐라파는 예외적으로 여성할례를 강요하는 편이다.

보흐라파의 무역 네트워크는 인도의 구자라트를 중심으로 북부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남쪽으로는 스리랑카는 물론 동아프리카케냐탄자니아까지 이어진다. 케냐와 탄지니아의 보흐라파 신도들은 현지 흑인들이 믿는 것이 아니라 인도 제국 시절 쿨리로 이주한 보흐라파 상인들이 터를 잡은 경우다.

3.2. 니자리파

Nizāri

파티마 조 제8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빌라(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기존 후계자였던 장남 니자르 대신 차남 알 무스탈리가 집권하자 형 니자르(Nizar)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분파한 자들의 집단이다. 그가 사망한 후 기존 후계자이던 장남 니자르 대신 차남 알 무스탈리가 집권하자 전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자립했다. 1095년의 반란 직후 니자르는 감금된 후 암살되어 생을 마감했지만 추종자들은 니자르는 모습을 감췄을 뿐이고,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다.

니자리 세력은 '다이'(선교사) 하산 에 사바흐의 지도하에 이란 북부의 알라무트에 어쌔신 조직을 세웠다. 이들은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에서도 활동했는데 자신들과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주요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암살전을 펼쳤다. 이는 사실 시아파와 수니파를 가리지 않았다. 직접적인 적인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 니잠 알 물크와 니자르의 적인 재상 알 아흐달을 암살하고 1130년에는 니자르 대신 칼리파위를 차지한 알 무스타일의 아들 알 아미르를 암살하는데 성공하며 복수를 단행했다. 이로써 무스탈리파는 분열되었고 1138년에는 아바스 칼리파 알 라시드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으며 십자군에 맞서던 아미르들도 여럿 희생되었다.

하산 에 사바흐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니자르의 셋째 알리 알 하디를 이맘으로 추대했다. 다만 이맘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혹은 관여하지 못하고) 은둔했다. '숨겨진 이맘'(이맘 알무스투르, إمام المستور)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하산 에 사바흐는 실권을 행사했고 이맘은 알라무트가 아닌 람브사르 성채에 머물며 (혹은 유폐되어) 종교 서적 저술이나 잠행을 통해 신도들과 교류했다. 1136년 알 하디 사후 그가 페르시아인 여성과 낳은 아들 무함마드 알 무흐타디가 새 이맘이 되었고 1158년 알 무흐타디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하산 알 카히르가 계승했지만 1162년 알 카히르가 사망하자 (혹은 살해되자) 이맘위는 2년간 공석이 되었다.

이로써 니자리 이맘국은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하산 에 사바흐의 증손자인 당시의 다이 하산 앗 살람12이맘파처럼 이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하나님의 칼리파'(대리인)로 지목받았고 자신은 사실 부친 무함마드 1세가 아닌 이맘 알 카히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이맘이라 선포했다. 이로써 니자리 이맘국은 세속 권력인 '다이'와 종교 권력인 '이맘'이 통합되면서 정교일치의 신정국가로 변모했으며 하산 앗 살람의 증손자 무함마드 3세 때 시리아 아사신의 지도자 라시드 앗 딘 시난이 분리 독립했다. 이후 이란과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때 상당한 세력을 쌓아올렸지만 몽골의 훌라구 칸의 서정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영웅 바이바르스의 토벌에 의해 붕괴하고 음지로 숨어들었다. 당대 서아시아 패권자 모두의 다굴

니자리 이맘국의 멸망, 그리고 시리아 아사신의 소멸과 함께 서아시아에서 니자리파는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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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아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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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리파의 제44대 이맘 하산 알리 샤(Ḥassan ʻAlī Shāh)(1800~1881)가 페르시아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나중에 인도로 이동했으며[1]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는 1936년생 아가 칸 4세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가 칸'은 영토는 없지만 14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와 1,500만명 이상의 추종자[2]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일국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3]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니자리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크며, 이스마일=니자리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아가 칸 4세는 극단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스마일파를 세속[4], 온건 성향으로 개혁하는 인물로, 이스마일파 소수민족들이 사는 산간 벽지[5]에 학교를 비롯한 여러가지 편의 시설을 지어주고 투자해주는 정책을 통해 이스마일파 신도 전반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악명높은 극단파 암살단의 후예가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세속주의 온건파로 바뀐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아가 칸 가문이 유럽 대륙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지가 오래됐고 아가 칸 4세만 해도 이미 혈통의 1/2이 유럽인이며 영국에서 영국인으로 성장한 데다 본인과 아들들도 유럽/미국인과 결혼했으니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아무래도 서구적 가치관에 익숙할 것이다.
파일:A1F09479-CA84-4A3A-8968-16BF5043AE56.jpg
타지키스탄의 아가 칸 학교. 이슬람 명절인 이드 행사를 이렇게 하는 건 와하브파 무슬림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6]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가 같은 장소에서 히잡 같은 것도 없이 함께 모여 있다. 사진 왼쪽에는 아가 칸 4세 사진
파일:aga khan schools Gahkuch Gilgit.jpg
파키스탄의 길기트 발티스탄가흐쿠츠의 아가 칸 학교. 참고로 길기트는 탈레반의 근거지 중 하나인 카이베르파크툰크와와 접해있다.
파일:Aga khan school in Maputo.jpg
모잠비크 마푸투의 이스마일파 학교. 포르투갈의 마르셀루 헤벨루 드 소자 대통령이 학생들을 방문했는데 학생들이 긴장하거나 눈치보는 것 없이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7]

1972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우간다에 거주하는 인도인[8]들에게 90일 이내에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떠날 것을 명령하자 아가 칸 4세는 우간다에 적지 않은 이스마일파 신도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자신과 친분이 있던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트뤼도 정부는 수천명의 이스마일파 신도들이 캐나다로 망명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후 아가 칸 4세는 자기 사비를 털어서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 버마 등에서 피난온 이스마일파 난민들이 재정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며 직접 자신의 신도들이 난민이 되자 정착 후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이들이 현지 사회에 쉽게 적응하도록 현지 적응 교육과정까지 직접 지원했다고 한다. 신도들한테서 돈만 축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재난 상황에 처했을 때 직접 사비를 털어서 구해주니 이스마일파 신도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수 밖에 없다. 여담으로 당시 아가 칸 4세가 도와준 이스마일파 신도들 중에는 니자리파만 있는게 아니라 상술한 무스탈리파가 더 많았다.

3.3. 드루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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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옥시아나의 중심도시 부하라 근교 태생의 이스마일파 신학자 앗 다라지가 이집트 파티마 왕조에 가서 창시한 종교로 시리아에 주로 분포하며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에도 소수 신도들이 있다. 앗 다라지는 다른 성직자들과 싸우다 쫓겨났는데 초기 드루즈 성직자들은 종교 창시자 앗 다라지가 빠진 자리를 메꾸기 위해 실종된 파티마 왕조 제6대 칼리파 알 하킴이 사실 마흐디이며 그는 지금 모습을 감추고 있고 언젠가 재림할 것이라는 교리를 도입했다. 즉, 종교 창시자 자리에 실종된 파티마 칼리파 하킴을 대신 앉혀놓은 것이다. 교리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며 가르침에서 여러모로 이슬람에서 동떨어진 것이 많다.[9] 사실 이 때문에 무슬림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드루즈교도 자신들조차도 드루즈를 일종의 떨어져 나간 종교로 취급하며 이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 다만 오스만 제국에서 드루즈를 인정해 주었고 이 때문에 레바논 아미르국이라고 하여서 드루즈 제후들을 오랜기간 동안 레바논을 통치해 왔기 때문에 레바논에서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지배층의 위치에 있었다.


[1] 현재 근거지는 영국이다.)[2]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다.[3] 영국으로부터는 전하(His Highness), 팔레비 왕조 이란으로부터는 전하(His Royal Highness)의 칭호를 받았으나, 후자는 현재 쓰지 않는 듯 하다.[4] 나이트 클럽에서 술 취해서 주먹다짐하고 카지노에서 도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몰래 즐기는 형태의 그런 세속화 말고 과거와 다르게 여성의 사회 참여를 장려하고 이슬람과 직접 관련 없는 학문도 교육을 적극 권장하는 형태의 세속화를 말한다.[5] 대표적으로는 훈자 마을이 있다.[6] 일단 하나만 말하지면 수니 와하브파는 음악을 절대 금기시한다.[7] 이 학교는 이스마일파 신도 자녀들을 위해서 지어진 학교지만 종교가 다른 포르투갈계/레바논계 백인이나 현지 흑인 학생들도 받아준다.[8] 파키스탄계와 아프가니스탄계 포함[9] 특히 복장이 이슬람 종교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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