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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699><colcolor=#ece5b6> 남당 제3대 황제 이욱 | 李煜 | |||
출생 | 937년 8월 15일 | ||
남오 강녕부 상원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즉위 | 961년 9월 16일 | ||
남당 서도 건강 황궁 (現 장쑤성 난징시) | |||
사망 | 978년 8월 13일 (향년 41세) | ||
북송 동경 개봉부 (現 허난성 카이펑시) | |||
능묘 | 북망산(北邙山) | ||
재위기간 | 남당 황태자 | ||
961년 2월 19일 ~ 961년 9월 16일 | |||
제3대 황제 | |||
961년 9월 16일 ~ 975년 12월 1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666699><colcolor=#ece5b6> 성씨 | 서(徐) → 이(李) | |
휘 | 종가(從嘉) → 욱(煜) | ||
부모 | 부황 원종 모후 광목황후 | ||
형제자매 | 10남 3녀 중 6남 | ||
배우자 | 대주후, 소주후 | ||
자녀 | 2남 1녀 | ||
자 | 중광(重光) | ||
호 | 종은(鍾隱) | ||
작호 | 위명후(違命侯) → 농서군공(隴西郡公) → 오왕(吳王) | ||
시호 | 문헌소회효민황제 (文憲昭懷孝愍皇帝) | ||
제호 | 후주(後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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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십국시대의 10국(十國) 중에 하나인 남당(南唐)의 제3대 황제. 마지막 황제이기 때문에 후주(後主)라고 불린다.2. 생애
남중국의 패권을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주의 대두로 위축되던 남당의 황제가 되었다. 971년에 남한이 멸망하고 조광윤이 세력을 확대해오자 국호를 당 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왕호를 황제에서 국주(國主)로, 중서성과 문하성을 각각 좌내사부와 우내사부로 변경하였다. [1] 이후 북송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조광윤의 무리한 호출에도 꾸준히 상경하여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그러나 애초에 남당을 멸망시킬 생각이었던 조광윤은 이욱이 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욱에게 당장 조정에 나올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욱이 답서를 보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대대적으로 남하하던 조광윤에게 사신으로 서현을 보내어 조광윤의 침공에는 명분이 없음을 지적하였다.[2] 논쟁 도중 말이 궁색해진 조광윤이 칼을 뽑고는 외간 남자가 코를 골며(他人鼾睡) 자는데 그냥 놔둘 수 있겠냐"며 그대로 회담이 끝나버렸다.[3]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이욱이었지만 4면이 포위된 시점에서[4] 남당 멸망은 시간 문제였고, 앞서 시간을 끌면서까지 기다리던 주령빈의 15만 주력군이 완구에서 무너지면서 남당의 멸망은 결정났다.
결국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위명후(違命侯)[5]로 책봉되고 망국의 군주로 살다가 태종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시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얼마나 극악한 독극물을 썼는지 온몸이 우그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폴더폰 마냥 어깨와 엉덩이가 붙어버렸다고 한다.[6] 다만 그냥 비참한 죽음이었다고 보기 뭣한 것이, 그는 남당 제일의 명장으로 건국 때부터 나라를 섬긴 임인조(林仁肇)를 송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독살한 바 있었다.[7]
황제로서의 능력은 평이 갈리는데,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겸병을 완화하였으며 무너져가는 황제의 권위를 재건하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필사적으로 국정을 살폈다. 다만 전황 때문에 철전으로 화폐개혁을 시도했다가 크게 실패하고 토지개혁을 시도하였다가 대대적인 반발에 부딛혀 실패하는 등 오점도 있기에 대체적으로는 시대를 잘못 탄 군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취미생활 좀 하겠다고 백성을 핍박하기는커녕 선정을 베풀었기에 이욱이 사망했다고 하자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8]
원 부인인 소혜황후 주아황과 결혼해서 10년을 살았는데, 부인이 병석에 눕자 이를 간호하러 온 동생인 주여영과 눈이 맞아 부인이 죽은 후 동생과 재혼했다(자매의 터울은 정확히 14년이라고). 그래서 언니를 흔히 '대주후'(大周后)라고 했고, 동생을 '소주후'(小周后)라고 했다. 소주후의 운명은 망국과 함께 비참해지는데, 야사에 따르면 송 태종이 자주 소주후를 궁궐에 불러 겁탈했다고 한다. 이를 안 이욱이 분노하자, 그 때문에 송 태종이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사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부인인 소주후는 이욱이 독살된 후, 곧 세상을 떠난다.
3. 예술가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다. 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화(書畫)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이었는데, 징심당을 설치해 하급 문관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였다.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었으며 자신의 취미를 황제의 권위 확립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9]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당대 서적에서도 황제로 태어나지 않고 문학가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와는 반대로 송휘종은 예술활동 한다고 벌인 일들이 너무 커서 정강의 변 이후 고종이 재건한 송 황실, 즉 남송은 송 황실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 원망 때문에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불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 중 '사(詞)'[10]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 되는 송사(宋詞)에도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전기에는 황제로 기세등등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화려하고 로맨스 있는 문학을, 후기에는 망국의 군주로 유폐 생활을 해야 했기에 절절하고 감성있는 문학을 창작했는데 인간의 흥하고 쇠함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이욱의 작품은 후기작을 최고품으로 치며, 전기작도 고급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아래가 바로 문제가 된 우미인(虞美人)[11]이라는 사(詞)이자 이욱이 후기에 지은 문학이다.[12]
봄꽃과 가을 달 언제 다하려나(春花秋月何時了)
지난 일 얼마나 그리운지(往事知多少)
작은 누대 어젯밤 또 봄바람이 불었는데(小樓昨夜又東風)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차마 옛 땅으로 고개 돌릴 수 없었네(故國不堪回首月明中)
조각한 난간 옥으로 깎은 섬돌 아직도 있으련만(雕欄玉砌應猶在)
아름답던 얼굴만 세월 따라 변했구나(只是朱顔改)
그대에게 묻노니 품은 수심 얼마인고(問君能有幾多愁)
봄 강물 동쪽으로 흐르는 만큼이라네(恰似一江春水向東流)
절절하기 그지없다. 잘 나가던 시절에 지은 시 일곡주(一斛珠)와 비교해보자.지난 일 얼마나 그리운지(往事知多少)
작은 누대 어젯밤 또 봄바람이 불었는데(小樓昨夜又東風)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차마 옛 땅으로 고개 돌릴 수 없었네(故國不堪回首月明中)
조각한 난간 옥으로 깎은 섬돌 아직도 있으련만(雕欄玉砌應猶在)
아름답던 얼굴만 세월 따라 변했구나(只是朱顔改)
그대에게 묻노니 품은 수심 얼마인고(問君能有幾多愁)
봄 강물 동쪽으로 흐르는 만큼이라네(恰似一江春水向東流)
아침 단장 막 마치고(晚妝初過)
침단향을 은은히 발랐네(沈檀輕注些兒個)
임을 향해 붉은 혀 살포시 드러내고(向人微露丁香顆)
한 곡조 맑은 가락 읊조림에(一曲清歌)
앵두 입술 잠시 벌어진다(暫引櫻桃破)
비단 소매 촉촉이 적시니 옅은 홍색 비끼고(羅袖裛殘殷色可)
잔은 깊은데 감긴 겉옷 좋은 술에 더럽혀 있네(杯深旋被香醪涴)
비단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니 교태로운 모습 한없어라(繡床斜憑嬌無那)
붉은 실을 씹다가는(爛嚼紅茸)
웃으며 임을 향하여 뱉네(笑向檀郎唾)
신기하게도 글을 쓸 때 붓이 아닌 비단을 김밥 말듯 말아서 글씨를 썼다고 한다. 아래 나오는 어필이 영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로 쓰는 일 자체가 매우 힘들다.침단향을 은은히 발랐네(沈檀輕注些兒個)
임을 향해 붉은 혀 살포시 드러내고(向人微露丁香顆)
한 곡조 맑은 가락 읊조림에(一曲清歌)
앵두 입술 잠시 벌어진다(暫引櫻桃破)
비단 소매 촉촉이 적시니 옅은 홍색 비끼고(羅袖裛殘殷色可)
잔은 깊은데 감긴 겉옷 좋은 술에 더럽혀 있네(杯深旋被香醪涴)
비단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니 교태로운 모습 한없어라(繡床斜憑嬌無那)
붉은 실을 씹다가는(爛嚼紅茸)
웃으며 임을 향하여 뱉네(笑向檀郎唾)
이욱의 어필
入其國,其教可知也。其為人也(예기·경해)
4. 기타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우미인을 배운다.5. 둘러보기
육씨남당서(陸氏南唐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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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 국호(國號)는 1자, 군호(郡號)는 2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국호를 두 글자로 하고 왕호를 가치중립적인 어휘로 바꾼 건 '개기지 않겠습니다. 제발 봐주십시오!' 라는 나름의 절박한 하소연인 것.[2] 1차 회담 : 이욱은 폐하를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처럼 하였는데 어찌 침공하였는가. 2차 회담 : 이욱이 중병에 걸려 조회를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조회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어째서 거절하였는가.[3] 물론 이욱도, 사신으로써 이 말을 했던 서현도 진지하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구원군의 도착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이다.[4] 975년 북송의 침공 당시 남방의 남한과 서방의 후촉이 멸망하였고 동쪽의 오월은 한참 전에 북송에게 신종하였다.[5] '위반하다' 할 때 그 위 자다. 즉 천명에 어긋났다는 비난투의 작호인 것(…)[6] 스트리크닌(Strychnine)의 작용으로 보인다.[7] 임인조는 송 태종도 두려워하던 명장으로,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남당에서 송에 보낸 사신에게 송 태종이 앞으로 임인조가 투항하여 거처할 곳이라는 집을 보여주어 사신이 이욱에게 임인조를 제거하라고 진언하게 된다. 다만 임인조가 북송 침공을 주장하였던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욱의 결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그의 군단은 주령빈이 그대로 인수하였기에 와해되었다는 건 어폐가 있다.[8] 같은 예술가 스타일의 송휘종은 당대에도 심각한 비판과 경멸을 받았던 걸 보면 천양지차.[9] 앞서 말한 징심당에서 학문을 토론하는 것 외에도 정사를 살핌으로써 관료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후대 조선의 초계문신제를 생각하면 바로 들어맞는다.[10] 한문 문체의 명칭. 중국 당대에 발생하여 송대에 성행하였던 시와는 형식과 풍격이 다른 운문이다. 중국 근세에 유행하던 서정시.[11] 詞牌(사패)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상 A라는 제목을 가진 곡조에 전혀 다른 노랫말을 붙였기 때문에 내용은 링크된 우미인과 아무 상관이 없다.[12] 등려군의 표준 중국어 노래 幾多愁(얼마나 큰 걱정인지)로 각색되어 불리기도 한다. 들어보기. 幾多는 광동어에서도 '얼마'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며 표준 중국어의 多少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