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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025년, 동로마 제국의 강역 지도와 이즈니크의 위치. 니케아라 쓰인 곳이다.
1. 개요
영어: Nicaea /naɪˈsiːə/(나이시어)튀르키예어: İznik (이즈니크)
라틴어: Nicaea[1]
고전 그리스어: Νίκαια (니까이아)[2]
그리스어: Νίκαια (니케아)
이탈리아어: Nicèa (니체아)
스페인어: Nicea (니세아)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내륙에 있지만 도시 서쪽에 크고 아름다운 이즈니크 호수[3]를 끼고 있는 호안도시다.
튀르키예에 속해 있는 현재는 이즈니크라고 부르나, 니케아라는 명칭이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2. 역사
동로마 시대 성벽
2.1. 헬레니즘 ~ 고대 로마 제국 시기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에 안티고노스 왕조를 개창한 안티고노스 1세가 기원전 316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안티고네이아(Αντιγόνεια)라는 이름으로 건설하였다.이후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치면서 기원전 301년에 리시마코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리시마코스는 도시의 이름을 아내의 이름을 따 니카이아(Νίκαια)로 개칭하였다. 니카이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승리의 여신인 니케(Νίκη)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라틴어에서 '승리'를 뜻하는 일반 명사이자 라틴어 문화권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잘 쓰이는 빅토리아(Victoria)라는 말과 어감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비티니아 왕국 시기에는 니코메데이아, 칼케돈과 함께 왕국의 중요 거점 도시였으며, 비티니아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후에도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했다.
2.2. 동로마 제국 시기
니케아 성벽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문
동로마 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도 니케아 공의회라고 불리는 두 번의 그리스도교 공의회(1차와 7차)가 개최되었을 정도로 중심 도시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11세기까지 니코미디아와 더불어 비티니아의 주요 도시로 군림하였고 반군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항상 점령하는 요충지였으나[4] 그렇게 주목을 받는 도시는 아니었다. 이 도시가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면서부터이다.
1081년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가 반란 중 튀르크 세력의 도움을 받으면서 니케아에 튀르크 군대를 진주시켰는데 멜리시노스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굴복한 뒤 그냥 튀르크 군이 니케아를 낼름 장악했다. 이후 니케아는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코 앞에 있는 유서 깊은 대도시인 니케아가 아나톨리아 튀르크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제국에 큰 위험으로 다가왔기에 니케아의 수복은 알렉시오스 1세의 대아나톨리아 정책에 있어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몇 차례의 수복 시도를 실패한 뒤에야 알렉시오스 황제는 1차 십자군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운 뒤 뒷공작을 통해 유서 깊은 대도시인 니케아를 무혈로 수복하였으며 이 이후부터 니케아는 재건된 제국령 아나톨리아의 주요 도시로서 군림하게 된다. 니케아는 콤니노스 3대 동안 집중적으로 요새화되었다. 성벽이 강화되고 이중 성벽이 설치되고 인근에 수 많은 자잘한 요새들이 세워져 니케아를 방어했다. 이 덕분에 1113년 룸 술탄국이 5만 4천 대군을 동원해 니케아를 포위하였을 때 수성에 성공하였고, 콤니노스 3대 시기에 인구 5만 가량의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1204년에는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서쪽 지역 영토를 빼앗기고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주요 도시인 니케아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니케아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에도 서부 아나톨리아의 거점으로 남았고 13세기 말 ~ 14세기 초까지 이어진 튀르크의 서부 아나톨리아 침략에도 굳건히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320년대에 이르면 주변이 튀르크의 손에 넘어가 고립되었고 니케아는 요새에 의존해 고립된 상황에서도 수년을 제국의 기치 아래 버텼으나 결국 1331년 튀르크에 평화적으로 굴복하였고 서서히 몰락하게 되었다.
2.3. 오스만의 정복 이후
1331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래 1,000년 가까이 동로마 제국의 중요 거점이었던 니케아는 오스만 베이국에 정복되어 이즈니크(Iznik)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역사가 오래된 도시인 만큼 한동안은 오스만 베이국 내에서도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되었지만 오스만 베이국의 수도가 니케아가 아니라 부르사였기에 아나톨리아에서의 중요도가 차츰 감소했고 이후 수도가 에디르네와 콘스탄티니예로 이동하자 완전히 아웃 오브 안중 상태가 되었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이 급격히 성장하여 주변국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더욱 떨어져서 쇠퇴하게 되었다. 이 지방의 명산품이었던 도자기도 17세기경에 이르면 도자기를 만들만한 점토가 고갈되면서 이 또한 내륙의 퀴타히아(Kütahya)로 옮겨지게 되었다.
현대에도 인구 6만 5천 명 정도의 한산한 지방 도시로 남아 있으며 12세기 ~ 14세기 때랑 인구가 변함 없이 그대로다. 인구 280만 명의 튀르키예 제3의 도시로 성장한 이즈미르나 인구 30만 명 정도의 그럭저럭 되는 규모로 남아있는 이즈미트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1] 고전 라틴어로는 "니카이아", 이중모음의 단모음화가 일반화된 후기 라틴어로는 "니케아", 불가타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정립된 교회 라틴어로는 이탈리아어와 비슷하게 "니체아"에 가깝게 발음한다.[2] 이 발음은 기원전 5~6세기경 사용된 아티카 그리스어식이다. 코이네 시절만 해도 모음 단순화가 상당히 진행되던 시절이라 '니케아'라고 발음되었으며, 이 발음이 라틴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3] 면적 300㎢[4]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니케아에 면한 아스카니오스 호를 통해 마르마라 해로 진입이 가능하며, 비티니아에서 프리지아 등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향하는 관문 정도의 지리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