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임해군파의 종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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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증손 익풍군 | 益豐君 | ||
봉호 | 익풍군(益豐君)[1]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속(涑) | |
생부 |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 | |
생모 | 현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 |
부인 | 임천 조씨(林川 趙氏) 풍천 임씨(豐川 任氏) | |
자녀 | 2남 1녀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 |
생몰 기간 | 음력 | 병자년 3월 25일 ~ 을사년 12월 5일 |
양력 | 1636년 4월 30일 ~ 1666년 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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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왕족. 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손자이자 선조의 서장남 임해군의 양손자이다.2. 생애
1636년(인조 14년) 4월 30일[2]에 태어났다. 1650년(효종 1년) 2월 3일[3]에 ‘익풍군(益豐君)’으로 봉해졌다.# 1658년(효종 9년) 8월 17일[4]에는 군관을 난타하여 추고받았다.# 1661년(현종 2년)에는 종2품 중의대부로 품계가 올랐다.#3. 사망
1666년 1월 9일[5]에 사망했다. 향년 30세.[A]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공빈 김씨 성묘[7] 근처에 있다.4. 가족과 후손
임천 조씨 조시형(趙時馨)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다. 조씨부인과는 1657년(효종 8년)에 사별했고, 풍천 임씨 임좌(任座)의 딸과 재혼했다. 임씨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측실 사이에서 1남을 두었다.익풍군 사후인 1666년(현종 7년) 7월[8] 무렵에, 임씨 부인이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바로 익풍군이 생전에 아끼던 여종의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익풍군과 사랑을 나누었던 여종이 성격이 사나운 임씨 부인을 두려워해 다른 집에 가 숨었는데 이를 안 임씨 부인이 수많은 노비들을 데리고 여종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가 밧줄로 목을 맨 다음 끌고 돌아와 참혹한 벌을 주었다.# 그리고 익풍군이 죽자 여종은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두려워 달아났는데, 이를 안 임씨 부인이 격노하여 여종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잔혹하게 죽이고는 시신을 도성 안에 버렸던 것. 정언 김징이 현종에게 아뢰어 이 사건이 밝혀졌고, 현종은 임씨 부인의 종을 잡아다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임씨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호조판서 조한영이 조사하는 형조의 관리들에게 거칠게 욕설을 하여 파직당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임씨 부인은 큰 벌을 받지는 않은 듯 하며, 그 이듬해인 1667년(현종 8년) 4월 25일[9]에 세상을 떠났다.장녀는 안동 김씨 김수항의 넷째 아들 김창업(金昌業)과 혼인했다. 참고로 김창업의 형이 노론 4대신 중의 한 명인 김창집(金昌集)이다. 즉, 김창집의 제수가 익풍군의 딸이다.
익풍군의 장남은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이고, 서장남은 임흥부수 이기(林川副守 李機)이다. 임원군과 임흥부수는 각각 아들을 3명, 2명을 두었으나, 이들도 아들이 1명 내지 2명인데다, 이들의 자손들마저도 대부분 아들을 1명 내지 2명 낳아서[10] 현재 남아있는 익풍군의 후손들 수는 굉장히 적다.
[1] 봉호는 경기도 화성에 있던 남양군(南陽郡)의 옛 지명 익주(益州)에서 유래했다.[2] 음력 3월 25일.[3] 음력 1월 3일.[4] 음력 7월 19일.[5] 음력 을사년(현종 6년) 12월 5일.[A] [7] 익풍군에게는 법적 증조할머니이다.[8] 음력 6월[9] 음력 4월 3일.[10] 오죽하면 임원군의 아들 대 이후로 아들 3명 이상 낳은 경우를 찾으려면 헌종, 철종 시기까지 가야 하고, 임흥부수 계열에서는 고종 때까지도 독자 아니면 2남을 유지했다. 출처: 《선원속보 - 선조대왕자손록 권1: 임해군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