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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2:35:40

작위 요구자/유럽/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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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등재 기준3.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3.1. 국가
3.1.1. 프랑스 국왕3.1.2. 프랑스 황제
3.2. 그랑테스트
3.2.1. 로렌 공작
3.3. 노르망디
3.3.1. 노르망디 공작
3.4. 누벨아키텐
3.4.1. 가스코뉴 공작3.4.2. 아키텐 공작
3.5. 부르고뉴프랑슈콩테
3.5.1. 부르고뉴 공작
3.6. 브르타뉴
3.6.1. 브르타뉴 공작
3.7. 오드프랑스
3.7.1. 칼레 영주3.7.2. 아르투아 백작
3.8.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3.8.1. 오랑주 공작
3.9. 코르시카
3.9.1. 코르시카 영주
3.10. 기타
3.10.1. 부르봉 공작3.10.2. 브로이 공작

1. 개요

프랑스작위 요구자를 다루는 문서.

2.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프랑스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3.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3.1. 국가

3.1.1. 프랑스 국왕

파일:프랑스 왕국 7월 왕정 국장.svg 파일:부르봉 왕조 문장.svg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파일:1253px-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png
관련 칭호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루이스]
바이에른 국왕[프란츠]
프랑스 공작[장]
앙주 공작[루이스]
스코틀랜드 국왕[프란츠]
파리 백작[장]
부르봉 공작[루이스]
잉글랜드 국왕[프란츠][사이먼]
아일랜드 국왕[프란츠]
요크 공작[사이먼]
칼레 영주[프란츠][사이먼]
아일랜드 영주[사이먼]
아키텐 공작[루이스][프란츠][사이먼]
작위 요구자 (오를레앙파)
장 도를레앙[18]
(정통주의자)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앙리 7세 알퐁스 2세[21][22][23]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후임자 가스통 도를레앙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막스 폰 바이에른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계승 실패 원인 1328년 왕조 단절 및 교체(카페 왕조)
1453년 프랑스 왕위 상실(랭커스터 왕조)
1830년 왕조 교체(부르봉 왕조)
1848년 왕국 멸망(오를레앙 왕조)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수장 파리 백작 장,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막혀버린 계승권을 주장하는 스페인, 프랑스 이중국적[24] 앙주 공작 루이스 알폰소의 각축장.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왕위 요구자는 전부 부르봉 왕가에서 발원한다. 부르봉 직계 왕가의 지지자인 정통주의자(정통 왕당파)와 방계 오를레앙 왕조의 지지자인 오를레앙파가 서로 다른 왕위 요구자를 지지한다. 그 외에 보나파르트파는 아래 문단의 프랑스 황위 요구자들을, 자코바이트파는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를 지지한다. 정통주의자와 오를레앙파 두 파벌의 다툼은 부르봉 왕조 문서에 보다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치하에서는 부르봉, 오를레앙, 보나파르트 왕위 요구자들의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었으나 1950년에 해금되었다.

장은 루이 13세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후손이다. 프랑스 마지막 왕 루이필리프 1세가 쫓겨나고 그 손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 7세(1894년 사망), 그 아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8세(1926년 사망)로 이어졌다. 필리프 8세는 후사가 없어서 다음 왕위 계승자는 루이 필리프 1세의 증손자인 기즈 공작 장 3세[25](1940년 사망), 그 아들 파리 백작 앙리 6세(1999년 사망) 그 아들인 파리 백작 앙리 7세(2019년 1월 21일 별세)로 이어졌다. 장은 이 파리 백작 앙리 7세의 아들이다. 장 4세라고도 불린다.

루이스 알폰소는 샤를 10세 다음의 '명목상의 왕' 루이 19세에서 내려오는 직계 부르봉 왕위 요구자이고, 본인은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손자이다. 1989년 부친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2세와 형 부르봉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들이 죽은 후 부르봉 공작과 앙주 공작을 계승하고, 루이 20세(Louis XX)라 불리며 프랑스와 나바르 왕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루이스 알폰소는 스페인 왕 펠리페 6세의 육촌이다.

한편 부르봉의 일부 왕족들의 조사 결과 인도 보팔에 사는 발타자르[26]라는 인물이 앙리 4세의 조카 장 필리프 드 부르봉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밝혔다. 가설이 사실이라면 발타자르가 스페인 보르본, 프랑스 부르봉 왕가보다 계승 순위가 앞선다.# 발타자르는 본인이 정말 왕실 후손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에 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라는 것이 부르봉 가문의 일원이 1560년에 인도에서 자식을 낳아 그 후손이 이어졌다는 이야기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도 19세기 말의 작가에 의해 기록된 것이 전부인지라 위의 두 후보들과는 달리 가십 수준이고, 왕위 요구자도 아니다.

자코바이트파가 지지하는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현 수장이다. 이건 자코바이트파의 잉글랜드 왕국 왕위 요구에 백년전쟁 때부터 조지 3세 이전까지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 요구가 덤으로 따라온 것(...).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 요구 포기는 상술하듯 하노버 왕가가 한 것이므로 자코바이트는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여담이지만 자코바이트 프랑스 왕위 요구자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영국 왕위 계승법을 따르므로 부르봉 왕조(부르봉 왕조 본가와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모두)의 왕위 요구자들과 달리 살리카법을 따르지 않는다. 애초에 잉글랜드 왕실이 백년전쟁 때부터 조지 3세 때까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것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마지막 국왕 샤를 4세의 조카(샤를 4세의 여동생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살리카법[27] 탓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또한 장미 전쟁으로 요크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 칭호가 계속 이어졌으므로, 요크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도 프랑스 왕위 요구자라고 볼 수 있다. 이쪽은 잉글랜드 요크 왕조 역대 국왕들 중 그 누구도 실제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관계로 본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카페 왕조 왕위 요구를 이어나간 것에 가깝다. 랭커스터 왕조가 프랑스 국왕을 딱 한 명이나마 배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3.1.2. 프랑스 황제

파일:프랑스 제1제국 국장.svg
관련 칭호 프랑스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
작위 요구자 샤를 나폴레옹[28]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29]
전임자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후임자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30] 루이 나폴레옹[31][32]
계승 실패 원인 1870년 제국 멸망
나폴레옹 3세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해 폐위되어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세워졌고, 왕위 요구자가 되었지만 1873년에 영국에서 죽었다. 그 아들인 전 황태자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나폴레옹 4세)는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망명했고, 1879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의 전쟁에 영국 육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면서 후사는 남기지 못했다.[33]

루이 외젠의 죽음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오촌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이 되어야 했다. 조제프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와 카타리나의 차남으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자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었다. 하지만 평소 그를 싫어한 루이 외젠은 유언장에 자신의 후계자로 조제프 대신 조제프의 장남 빅토르 보나파르트를 지명하였다. 따라서 황실의 수장은 루이 외젠의 육촌 빅토르 보나파르트가 되었으며 그는 지지자들에게 나폴레옹 5세로 불린다. 하지만 나폴레옹 5세는 아버지 조제프가 살아 있었고 한 대를 건너 수장이 되었기 때문에 부자 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조제프는 베스트팔렌 왕위 요구자였으므로 조제프 사후 빅토르는 아버지의 베스트팔렌 왕위도 계승한다. 나폴레옹 5세는 1926년 죽었고 그 아들 루이(나폴레옹 6세)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루이는 1997년 죽기 전에 다음 왕위 요구자이자 황실 수장으로 아들 샤를이 아닌 손자 장크리스토프를 지목했다. 이는 아들 샤를이 본인의 허락 없이 아내[34]와 이혼하고 다른 여성과 재혼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때문에 샤를과 장크리스토프는 둘 다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나폴레옹 7세로 불린다. 물론 샤를의 후계자는 그의 장남인 장크리스토프이며 샤를 역시 자신이 사망할 경우 자신의 지위는 장크리스토프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공언하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 완전한 가문의 수장이 될 예정이다. 장크리스토프는 2019년에 결혼하여 2022년 루이 나폴레옹이란 아들을 얻었다.

장크리스토프는 1986년생으로 뉴욕에서 모건스탠리 투자은행 애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엄친아이다.

3.2. 그랑테스트

3.2.1. 로렌 공작

파일:로렌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로렌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37년 공작령 반납
1766년 프랑스에 합병
로렌 공작이었던 프란츠 1세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종전 후 로렌 공국의 영지를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넘겨주었다.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자신이 죽은 후 로렌 공국의 영지가 프랑스에 합병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로렌 공작위에 올랐으며 그에 따라 훗날 그가 죽은 후 로렌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프란츠 1세가 로렌 공위에서 물러난 후 그의 동생인 로렌의 샤를이 명목상 로렌 공작 칭호를 썼는데 샤를의 아내[36]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출산 중 사망하였으며 샤를 또한 재혼하지 않고 남은 한평생을 자식 없이 살았기 때문에, 샤를이 썼던 명목상의 로렌 공작 칭호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를 조상으로 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3.3. 노르망디

3.3.1. 노르망디 공작

파일:노르망디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노르망디 공작
영연방의 원수[찰스]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찰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에른스트]
잉글랜드 국왕[프란츠][사이먼]
스코틀랜드 국왕[프란츠]
아일랜드 국왕[프란츠]
아일랜드 영주[사이먼]
인도 황제[에른스트]
하노버 국왕[에른스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른스트]
프랑스 국왕[프란츠][사이먼]
칼레 영주[프란츠][사이먼]
아키텐 공작[프란츠][사이먼]
작위 요구자 (현직 영국 국왕)
찰스 3세
(하노버 왕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하노버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엘리자베스 2세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후임자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55] 막스 폰 바이에른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계승 실패 원인 1259년 노르망디 공작 작위 폐지
1453년 노르망디 공국 부활 최종 무산
1558년 육지 영토 완전 상실
노르만 왕조윌리엄 1세헨리 1세부터[56] 지금의 윈저 왕조까지 영국의 역대 국왕들은 모두 노르망디 공국 공작을 겸해왔다. 하지만 존 왕필리프 2세가 주도한 프랑스의 노르망디 침략으로 인해 1204년에는 채널 제도를 제외한 노르망디 공국 전역이 프랑스에 편입되었고 노르망디 공국의 본토인 프랑스 내 육지 영토가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로 온전히 존속한 건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로부터 노르망디를 일시적으로나마 되찾은 백년전쟁 때가 마지막이었으며 백년전쟁이 끝난 뒤에는 칼레를 제외한 노르망디 공국 육지 영토가 다시 프랑스에 넘어갔을 뿐더러 그 칼레마저도 8차 이탈리아 전쟁 중이던 1558년 메리 1세 때 프랑스에 점령되면서 노르망디 공국은 육지 영토를 모두 상실하고 섬인 채널 제도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도 1259년의 파리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왕실의 작위가 아키텐 공위만 빼고 모조리 폐지되면서 대외적으로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칭할 수 없게 되었고 노르망디 공국을 일시적으로나마 부활시킨 전쟁이었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패전하는 바람에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다시 대외적으로 당당히 칭할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내에서만 인정될 뿐 잉글랜드 외 다른 곳에서는 채널 제도가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가 아니라 그냥 영국 영토다. 따라서 현재 영국 국왕은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온전히 유지한 게 아니라 사실상 노르망디의 공위 요구자 신세가 된 셈이다.

윈저 왕조 이전의 하노버 왕조스튜어트 왕조 그리고 요크 왕조 또한 노르망디 공위 요구자를 매출하고 있다. 하노버 왕국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왕위 요구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는 영국 하노버 왕조의 왕위 요구자도 겸하므로 하노버 왕조의 노르망디 공작 칭호도 요구하는 셈이며, 자코바이트파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 프란츠 폰 바이에른을 명목상의 영국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요크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또한 요크 왕조에서 쓰던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명목상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영국의 현 국왕인 찰스 3세가 현직 군주인 데다가 옛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였던 채널 제도를 왕실 직할령으로 통치하는 반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와 프란츠 폰 바이에른은 독일의 군주제가 폐지된 것 때문에 그저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하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또한 장미 전쟁의 결과로 요크 왕조가 멸망하여 요크 공국 또한 자치권을 잃고 잉글랜드 왕국의 직할령이 되어버린 것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저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하다.

노르망디 본토와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 주민들은 비록 국적은 각각 프랑스와 영국으로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서로 인접한 지역에 사는 같은 노르만족으로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양쪽 지역의 노르만족 주민들은 비공식적으로 농담 삼아 영국 국왕을 공작 전하라고 부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가 1967년에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노르망디 주민들이 자신들이 프랑스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여공 만세!(Vive la Duchess)"[57]라고 외치며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 별개로 백년전쟁으로 인한 영국와 프랑스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노르망디 공국이 재건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3.4. 누벨아키텐

3.4.1. 가스코뉴 공작

파일:가스코뉴 공작 문장.svg
관련 칭호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노르망디 공작
가스코뉴 공작
작위 요구자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후임자 막스 폰 바이에른 마커스 애브헤이스팅스
계승 실패 원인 1453년 공국 멸망
잉글랜드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되었던 가스코뉴 공국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이 승리함에 따라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스코뉴 공위 요구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요크 왕가 후손과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다.

3.4.2. 아키텐 공작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아키텐 공작
작위 요구자 (부르봉 왕조)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곤살로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후임자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막스 폰 바이에른
계승 실패 원인 1399년 공가 교체(플랑타주네 왕조)
1453년 공국 멸망(랭커스터 왕조)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프랑스 부르봉 왕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에 병합되어 멸망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 국왕은 더 이상 아키텐 공작을 겸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에서 아키텐 공작을 각각 1명씩 배출했다. 현재는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아키텐 공작 곤살로 데 보르본이 외동딸 에스테파니아 미첼레 데 보르본을 남긴 채 2000년에 사망함에 따라 곤살로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에게 아키텐 공작 칭호가 넘어간 상태다. 한편 영국 왕실은 하노버 왕조조지 3세 때부터 노르망디 공위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관련 작위의 요구를 포기했는데, 자코바이트파는 하노버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관계로 이러한 조치 또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자코바이트파가 명목상의 영국 국왕이라고 주장하는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 또한 아키텐 공위 요구자다. 요크 왕조의 역대 왕위 요구자들은 랭커스터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관계로 본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아키텐 공위를 요구하고 있다.

3.5. 부르고뉴프랑슈콩테

3.5.1. 부르고뉴 공작

파일:1939px-Coat_of_Arms_of_Charles_the_Bold,_Duke_of_Burgundy.svg.png
관련 칭호 부르고뉴 공작
신성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스페인 국왕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작위 요구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스페인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스페인 보르본 왕조&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안 카를로스 1세 펠리페 5세 루이[63]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계승 실패 원인 1477년 공국 해체
1713년 부르고뉴 공위 포기(스페인 보르본 왕조)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프랑스 부르봉 왕조)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1477년 용담공 샤를이 죽으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는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 분할합병되었다. 그리고 샤를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부르고뉴 공작 칭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으로 갈라진 뒤부터는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이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세습하다가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첫 국왕 펠리페 5세를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은 더 이상 부르고뉴 공작을 겸하지 않게 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넘겨받았다. 한편 펠리페 5세가 부르고뉴 공작으로 있었던 시기에는 루이 15세의 아버지 프티 도팽 루이가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쓰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루이 16세루이 18세의 형 루이가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썼다. 대립공작 현재 명목상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쓰는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 그리고 펠리페 6세의 육촌이며 프랑스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으로 총 3명이나 되는 상황이다.[64]

3.6. 브르타뉴

3.6.1. 브르타뉴 공작

파일:1280px-CoA_dukes_of_Bretagne_1316-1514_(chivalric).svg.png
관련 칭호 프랑스 국왕
브르타뉴 공작
작위 요구자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전임자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후임자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계승 실패 원인 1547년 프랑스에 합병
1792년 자치권 상실
1547년에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앙리 2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며 그에 따라 브르타뉴 공작 칭호는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훗날 루이 14세가 프랑스 국왕이 직접 브르타뉴 공작 칭호를 쓰거나 그 칭호를 다른 왕족에게 내려주도록 정하면서 프티 도팽 루이의 장남 루이와 차남 루이가[66] 차례대로 브르타뉴 공작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된 뒤에도 브르타뉴인들에게 자치권이 보장되었으며 사실상 프랑스 국왕이 브르타뉴 공작 역할을 하였으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1792년에 프랑스의 왕정이 폐지됨과 동시에 브르타뉴 또한 자치권을 상실하면서 브르타뉴 공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부르봉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은 브르타뉴 공작 칭호도 쓰고 있었으나 1989년에 교통사고로 아버지인 알폰소와 함께 사망하였으며, 이후 프란시스코의 동생이자 알폰소의 차남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브르타뉴 공작 칭호를 계승하게 되었다.

3.7. 오드프랑스

3.7.1. 칼레 영주

파일:1280px-Blason_ville_fr_Calais_(Pas-de-Calais).svg (1).png
관련 칭호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노르망디 공작
칼레 영주
작위 요구자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후임자 막스 폰 바이에른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계승 실패 원인 1485년 영주 가문 교체(요크 왕조)
1558년 프랑스에 합병(튜더 왕조)
1558년에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할 때까지 잉글랜드 왕실이 칼레 영주 칭호를 쓰며 칼레를 지배한 것은 백년전쟁으로 시작된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왕위 요구를 계속 이어나가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왕실 계통의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와 요크 왕조 왕위 요구자는 칼레 영주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3.7.2. 아르투아 백작

파일:1280px-Blason_province_fr_Artois.svg.png
관련 칭호 아르투아 백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659년 프랑스에 합병
부르고뉴 공국과의 동군연합이 되었던 아르투아 백국은 1477년 용담공 샤를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작 칭호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1482년에 아라스 조약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그러다가 이후 아르투아가 1493년에 상리스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넘어갔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대공가로 나뉘어진 후부터는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에서 대대로 아르투아 백작 칭호를 쓰며 아르투아를 통치했으나, 훗날 1659년에 피레네 조약으로 아르투아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로도 압스부르고 왕가에서 명목상으로나마 아르투아 백작 칭호를 계속 썼으나, 압스부르고 왕가 단절 후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첫 국왕인 펠리페 5세가 잠시 아르투아 백작 칭호를 썼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펠리페 5세가 아르투아 백작 칭호를 포기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대공가가 아르투아 백작 칭호를 쓰게 되었다. 현재도 아르투아 백작 칭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서 쓰고 있다.

3.8.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3.8.1. 오랑주 공작

파일:오랑주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랑주 공작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스타트허우더)
작위 요구자 빌럼알렉산더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전임자 베아트릭스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후임자 카타리나아말리아 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계승 실패 원인 1713년 공국 멸망
오라녀 공작 빌럼 1세의 후손인 네덜란드 공화국 스타트하우더(총독)가 오랑주 공작을 겸하며 대대로 통치하던 오랑주 공국은 1713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어 멸망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오라녀나사우 왕조프로이센 왕국호엔촐레른 가문이 명목상의 오랑주 공위를 요구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3.9. 코르시카

3.9.1. 코르시카 영주

파일:코르시카 문장.svg
관련 칭호 코르시카 영주
작위 요구자 펠리페 6세
전임자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레오노르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
스페인 보르본 왕조 직계는 프랑스 왕국 왕위 요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국 치하 코르시카의 영주위 요구권만큼은 계속 가지고 있다.

3.10. 기타

3.10.1. 부르봉 공작

파일:부르봉 공작 문장(1410 ~ 1527).svg
관련 칭호 부르봉 공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아키텐 공작
프랑스 국왕
나바라 국왕
작위 요구자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전임자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70]
후임자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계승 실패 원인 1531년 프랑스에 합병
1830년 콩데 가문 단절
1521년 당시 부르봉 공작이던 샤를 3세가 반역혐의로 작위와 영지를 전부 박탈당하고 추방되면서 부르봉 공국은 잠시 사보이아 가문으로 넘어갔다가 이내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이후에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족들이 부르봉 공작을 겸하였으며[71], 부르봉 왕조 설립 이후에는 왕실의 제1분가인 콩데 가문[72]이 부르봉 공작을 겸했는데, 마지막 콩데 공작 루이 6세 앙리가 1830년 사망해 콩데 가문이 단절되면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 왕위 계승권과 같이 공작위가 카를리스타를 거치면서 이리 저리 옮겨 갔다가 최종적으로 왕위 계승권이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에게 계승권이 넘어가게 작위를 잇게 되었다. 그러다가 알폰소 13세 사후 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가 프랑스 국왕을 자처하면서 각각 하이메의 장남인 알폰소는 앙주와 카디스 공작, 장손(알폰소의 아들)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부르봉 공작으로 작위 계승이 되었지만 1989년 아버지 알폰소와 형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알폰소의 차남이었던 루이스 알폰소가 아버지와 형이 갖고 있던 모든 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3.10.2. 브로이 공작

브로이 공가 문장
관련 칭호 브로이 공작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국왕
작위 요구자 필리프모리스 빅토르 아메데 세자르
전임자 빅토르프랑수아 마리 레옹
계승 실패 원인 1870년 작위 폐지
1975년 공식 석상에서의 작위 호칭 금지
브로이 공작 가문은 본디 이탈리아피에몬테 지방의 귀족 가문이었는데, 1742년에 3대 당주인 프랑수아마리가 프랑스 왕실로부터 초대 브로이 공작으로 봉해지면서 본격적인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이래로,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1870년에는 보불전쟁에서의 패전의 결과로 인해 프랑스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작위가 3차례나 박탈된 바가 있었을 만큼, 평지풍파를 심하게 겪었다. 1975년에는 명목상으로나마 공식 석상에서 작위를 호칭하고 인정해주던 관례를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폐지하면서, 브로이 공작위는 완전하게 브로이 가문의 요구 작위가 되었다.[73] 브로이 공가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위도 요구하고 있어서, 브로이 공작위 요구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루이스] [프란츠] 바이에른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장] 프랑스 공작, 파리 백작.[루이스] [프란츠] [장] [루이스]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사이먼] [루이스] [프란츠] [사이먼] [18] 장 샤를 피에르 마리 도를레앙[C] 루이스 알폰소 곤살로 빅토르 마누엘 마르코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21]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22]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아버지, 앙주와 카디스 공작[23] 사족으로 알퐁스 1세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이다.[24] 할머니가 프랑스 귀족이라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25] 필리프 7세의 남동생 로베르 도를레앙의 아들이자 필리프 8세의 사촌이다. 필리프 7세의 3녀 이자벨과 결혼했으므로, 필리프 7세의 사위이기도 하다.[26] 발타자르 나폴레옹 드 부르봉[27] 정확히는 필리프 6세필리프 5세의 살리카법 확대해석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오리지널 살리카법에서는 외손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프랑스 플랑타주네 왕조가 들어서는 게 정상이었다. 게다가 필리프 5세가 프랑스에서 살리카법이 사문화되고 본인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살리카법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확대해석하여 여성인 후아나 2세와 카페 왕조의 남계 후손이 아닌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거라, 어찌보면 필리프 5세의 즉위는 일종의 무혈 쿠데타였으며 필리프 6세의 즉위는 그러한 쿠데타 덕분에 가능했던 셈이다.[28]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29] 장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30]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 위의 샤를 나폴레옹의 대립 왕위 요구자와 동일인이다.[31] 루이 샤를 리프란드 빅토르 제롬 마리 나폴레옹[32]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장남[33] 참고로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가 전사하는 과정이 참으로 비참하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장병들은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일국의 황태자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해서 영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근데 이 와중에 루이 외젠이 전사한 후에 남겨진 시신은 어찌됐느냐면, 줄루족 장병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내세관에 따라 이승에 미련을 갖지않게 하려고 현장에서 마구 난도질을 해서 훼손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측에 그의 시신을 반환할 때는 사람 시체인지 뭔지 알아볼 수도 없게 너덜너덜해졌다고. 줄루족들이야 나름대로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춘 셈이지만, 이런 이들의 장례법을 잘 모르는 영국인들과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공깽 그 자체였다.[34] 즉, 장크리스토프의 어머니.[B]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6] 이 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찰스] [찰스] [에른스트]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프란츠] [사이먼] [에른스트] [에른스트] [에른스트]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5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하노버의 아들.[56] 윌리엄 1세 사후 노르만 왕가는 잉글랜드 왕국의 노르만 왕가와 노르망디 공국의 노르망 공가로 분리되었다가 헨리 1세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를 폐위하고 아버지인 윌리엄 1세처럼 잉글랜드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이 됨에 따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다시 동군연합이 되었다.[57] 노르망디의 주민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보고 "여공 만세! (Vive la Duchesse!)"를 외치자 엘리자베스 2세가 "글쎄요, 나는 노르망디 공작(Duke)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Duchesse는 공작부인이라고 해석도 되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냥 공작(Duke)이라 칭한다.[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B] [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63] 루이 16세루이 18세의 형.[64]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오스트리아 황제위, 헝가리 왕위, 보헤미아 왕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위, 크라인 공작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주의 여러 작위들을 요구하고 있다. 펠리페 6세는 스페인의 왕정 복고에 의해 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로 스페인 왕위와 동시에 부활한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아버지의 생전 퇴위로 이어받았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은 스페인 왕실의 일원일 뿐더러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명목상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부르고뉴 공작 칭호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모두 이어받은 셈이다.[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66] 이들은 루이 15세의 형이기도 하다.[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B] [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70]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형[71] 이 이유가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의 어머니가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 마르그리트였는데 당시 부르봉 가문의 피를 이은 친인척 중에선 루이사가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다.[72] 콩데 친왕가, 부르봉콩데 가문으로 불린다.[73] 사족으로, 제7대 브로이 공작이 바로 물질파의 개념을 처음 주창하여 초기 양자역학 연구에 크나큰 기여를 한 물리학자루이 드 브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