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장일순 張壹淳 | |
출생 | 1928년 10월 16일 |
강원도 원주군 | |
사망 | 1994년 5월 22일 (향년 65세) |
강원도 원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 / 중퇴) |
직업 | 사상가, 시민운동가 |
종교 | 가톨릭 |
아호 | 호암 湖岩 (1950년대) 청강 靑江 (1960년대) 무위당 无爲堂 (1970년대) 일속자 一粟子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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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민활동가이자 서화가, 교육가. 생전에 여러 호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주로 '무위당'이라는 호로 불린다.강원도 지역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유명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생태주의 사상가로서 한살림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 생애
원주를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하나.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에서 타계했다.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국대안 파동에 연루되어 제적되었고, 새롭게 출범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다시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중퇴하고는 강원도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대성중학교·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평소 주장해 왔던 중립화 평화 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3년 간 수감되었는데, 그 후에도 반독재 운동 배후와 빨갱이 혐의로 계속 고생했다. 그의 집 앞에 경찰이 따로 파출소를 만들어 그를 전담했을 정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념 교구로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의 요청으로 본격적인 신협 운동과 평신도 교육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지학순 주교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만들었으며, 강원도 일대 농촌과 탄광촌을 중심으로 신협 운동과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민간 주도의 사회 개발 운동을 벌였다.
1970년 정인숙 사건이 터진 후 원주문화방송 개국과 관련해 부정부패 규탄 시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장일순은 그 당시 정치 활동 정화법에 묶여 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유신 헌법은 무효"라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기여하였다.
이렇듯 장일순은 1970년대 원주 캠프의 정신적 지주였으나,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정치 활동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도맡았으며, 평소 난 치는 것과 잡초를 그리는 것을 즐겼고, 이를 팔아 민주화 투사들을 돕기도 했다.
1980년대 원주의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여 호를 '일속자'로 바꾸고 "하늘, 땅, 물, 공기, 사람, 벌레는 모두 한 생명"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자연을 중시하는 생명 사상 운동을 펼쳤다.
3. 기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모습으로 후대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사상과 삶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김지하와 이현주 목사의 스승이었으며, 리영희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한국 녹색당의 사상적 비조이기도 하다.[1][2]
[1] 장일순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국제적 조직인 글로벌 그린스와 결합하여 한국 녹색당을 만들었다.[2] 다만 장일순의 직계 후배들은 현재 녹색당을 탈당한 상황인데, 이유인즉 2000년대 이후 녹색당이 래디컬 페미니즘에 휩쓸린데다가,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죄다 성범죄를 저질러 피해자(ex.신지예 전 서울시장 후보)가 반강제로 탈당하는 등 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1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위성정당 참여를 놓고 또 내홍을 겪어, 결국 장일순의 직계 후배들은 현재 정계와 연을 끊고 생명평화 시민운동에만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