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는 초기 근대 유럽 국가 형태를 설명하는 이론이자 개념이다. 이 말은 영국 역사가 존 브루어(John Brewer, 1947-)의 1989년 저작 The Sinews of Power: War, Money and the English State, 1688–1783에서 비롯되었는데,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17~18세기 국가 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와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 체계를 운영할 수 있었던 유럽의 초기 근대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즉 재정 군사 국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국민 국가와 대비되는 초기적 형태의 근대 국가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전 패러다임인 절대주의 개념을 대체한다. 한국에서도 서양사강좌를 비롯한 대학 개설서에 이어 22 개정 교육 과정 역사 교과에도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상황이다.2. 개념
재정-군사 국가 개념은 기본적으로 오토 힌체 이래 지속되어 온 유럽 초기 근대 국가의 형성을 대륙식 절대주의와 영국식 의회주의의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힌체는 초기 근대 유럽 대륙이 '유럽 국가 체제'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환경으로 인해 빈발하였던 전쟁 수행을 위해 군주 중심의 관료적이고 절대주의적인 국가 형성 경로를 밟은 반면, 그러한 군사적 경쟁에 노출되지 않았던 영국은 비교적 의회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 형성 경로를 밟았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하에서 프랑스 및 프로이센으로 대표되는 대륙의 절대 왕정은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관료제와 대규모 육군 상비군을 구축한 근대 국가의 원형으로 여겨진 반면, 영국은 그에 비해 관료주의 경향이 미약했고 해군 중심의 군사조직을 형성하였다는 것이 고전적인 이해였다.이러한 고전적인 이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재정사 연구가 발전하면서 근본적인 재검토에 직면한다. 여기에 선구적인 연구로는 조지프 슘페터의 조세 국가(Tax State/Steuerstaat) 논의를 들 수 있다. 슘페터는 "조세 국가의 위기(Die krise des Steuerstaat)"(1918)라는 에세이에서 군주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에 기반하여 운영되는 영지 국가(Domain State)가 18세기 이후 증가하는 재정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신민에 대한 과세를 바탕으로 하는 조세 국가로 전환된다고 하였는데, 슘페터의 영지 국가-조세 국가 이론은 이후 재정사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독일 역사가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Gerhard Oestreich)는 1967년 "독일의 신분 집단과 국가 건설(Ständetum und Staatsbildung in Deutschland)"이라는 에세이에서 초기 근대 유럽 국가가 16세기 신분제 의회에 의해 세금과 부채가 관리되는 금융 국가(Finanzstaat)에서 17세기 중반 군주제가 조세 권한을 장악한 군사-경제-행정 국가로 발전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외스트라이히의 제자인 케르스텐 크뤼거(Kersten Krüger)는 여기에 슘페터의 영지 국가-조세 국가 개념을 도입하여 초기 근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1. 영지 국가 2.금융 국가 3.조세 국가의 3단계로 제시하였고, 이를 16세기 헤센의 사례를 바탕으로 보여 주었다.[1]
또한 영국 역사가 P.G.M. 딕슨(P.G.M. Dickson)은 18세기 영국[2]과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오스트리아의 재정[3]을 연구한 중요한 저작을 출간하면서 전후 재정사 연구를 선도하였는데, 딕슨은 특히 18세기 영국에서 의회제가 보장하는 신용을 바탕으로 대규모 공공 부채를 운용하는 공공 재정 체계가 출현하였다고 파악하였고, 이를 금융 혁명(Financial Revolution)으로 개념화했다.
이후 영국의 구체제 프랑스사가 리처드 보니(Richard Bonney)와 중세사가 마크 옴로드(Mark Ormrod)는 크뤼거의 3단계 모델을 변형하여 1. 공물 국가(Tribute State) 2. 영지 국가 3. 조세 국가 4. 재정 국가(Fiscal State)로 제시하였는데, 이를 보니-옴로드 모델이라고 한다. 이들은 크뤼거의 금융 국가는 조세 국가의 덜 발전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재정 국가는 정교한 신용 구조와 재정 유지 능력을 가진 조세 국가의 발전된 형태로 규정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적 형태의 재정 국가는 1815년 이전에는 영국만이 달성하였고,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대륙의 절대주의 국가들은 주기적인 디폴트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브루어는 이러한 재정사 연구 성과를 힌체의 전쟁-국가 형성 테제와 결합하면서 재정-군사 국가 개념을 발전시켰다.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유럽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서 대규모 군대 및 관료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안정적인 조세 수입과 신용 체계를 바탕으로 조달하는 선진적인 재정 체계를 수립했다. 즉 브루어의 재정-군사 국가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세금을 부과하고 차입을 운용하는 정부를 의미하며, 이는 초기 근대 영국 국가가 대륙 절대주의 국가에 비해 권력이 약하고 덜 효율적이었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브루어의 재정-군사 국가 이론은 1990년대 니콜라스 헨셜의 비판을 기점으로 역사학계에서 절대주의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의문시되기 시작하면서 그 대안 개념으로 더욱 각광받기 시작했다.[4] 이후 스웨덴 역사가 얀 글레테(Jan Glete)는 War and the State in Early Modern Europe: Spain, the Dutch Republic and Sweden as Fiscal-Military states(2001)에서 이 개념을 에스파냐, 네덜란드, 스웨덴으로 확장시켰고, 윌리엄 갓시(William Godsey)는 The Sinews of Habsburg Power(2018)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재정-군사 국가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3. 사례
재정-군사 국가는 국가에 의한 조세 권한 확보가 중요하였다. 이는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는 신분제 의회와 군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에 따라 각국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영국과 네덜란드는 군주가 의회의 과세 동의 권한을 인정하고 상호 타협하는 양상으로 발전한 반면, 프랑스는 군주가 신분 집단에 광범위한 특권을 양보하는 대신 이들의 묵인하에 조세 권한을 확보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3.1. 에스파냐
펠리페 2세 시대의 에스파냐는 재정-군사 국가의 형태를 선취한 국가로 평가된다. 에스파냐는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누에바에스파냐, 페루 부왕령)를 바탕으로 재정을 확보하였다.3.2. 네덜란드
17세기 네덜란드는 의회주의에 기반한 재정-군사 국가를 수립한 케이스로, 암스테르담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인 데서 알 수 있듯 공공 금융 부문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상업과 식민지 역시 재정 확보의 주요 원천이었다. 군사 부문에 있어서도 마우리츠 판 나사우는 군사 혁명[5]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며, 바우르탕어 요새로 대표되는 성형 요새가 유명하다.3.3. 스웨덴
17세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의 스웨덴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재정-군사 국가를 수립했고, 30년 전쟁에 개입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패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칼 11세 시대에 스웨덴은 신분제 의회의 간섭 없는 고전적인 의미에 걸맞은 '절대주의' 체제를 수립했는데, 이는 프레데리크 3세 후반의 덴마크(1660~1666)와 더불어 유럽에서 유일한 케이스로 평가된다. 칼 11세와 칼 12세 시대의 스웨덴은 '스웨덴 제국'이라고도 불리며 북유럽의 패자로 군림하였는데, 1718년 칼 12세의 사망과 함께 스웨덴 절대주의도 종식된 것으로 평가된다.3.4. 영국
의회와 군주의 협력하에 수립된 재정-군사 국가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영국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근대적 의회주의 체제의 원형을 수립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안정된 조세 체계 및 영란은행, 그리고 의회주의에 의해 뒷받침되는 막강한 신용을 바탕으로 공공 부채에 기반한 근대적인 재정 체계의 모델을 수립했으며, 재정-군사 국가의 모범으로 평가된다.3.5. 프랑스
고전적인 견해로는 절대 왕정을 대표하는 국가로 여겨졌으나, 현재 프랑스사 연구에서 구체제 프랑스 왕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보는 경향은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주제는 귀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타협과 양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만연했던 매관매직은 국가 권력을 더욱 파편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제 프랑스는 군주를 중심으로 관료제와 군대에 기반한 강력한 재정-군사 국가를 수립했고,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지로 기능했다.3.6. 독일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지역의 각 제후국은 30년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국가 권력의 확장을 도모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낸 군주로, 조세 제도와 군대, 관료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정-군사 국가로의 길을 닦았다. 이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가 과세에 반발하자 군대를 보내 진압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하지만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재정-군사 국가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귀족의 타협과 협력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전체 영방 의회(Landtag)는 1666년 이후 개최되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권력은 쿠어마르크,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클레베-마르크 등 브란덴부르크를 구성하는 각 지역의 지방 의회를 바탕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 영방 의회가 열리지 않은 바이에른이나 헤센 등에서도 신분 집단은 신분 위원회 등의 형태로 국가 재정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뷔르템베르크와 작센 등에서는 신분 집단의 발언권이 여전히 강력하였고, 18세기까지도 과세를 위해 신분제 의회가 소집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영국과 유사한 의회주의적 정부 형태가 나타났고, 이는 19세기까지도 이어져 독일 자유주의의 보루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3.7. 오스트리아
17세기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이질적인 가문 영지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부실하였고, 각 지방의 신분제 의회의 권한이 강력했다.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광대한 영지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는 재정-군사 국가로 거듭났다.4. 참고 문헌
- Richard Bonney(ed.)(1999), The Rise of the Fiscal State in Europe c.1200–1815
- Christopher Storrs(ed.)(2009), The Fiscal-Military State in Eighteenth-Century Europe
- Patrick O'Brien et al.(ed.)(2012), The Rise of Fiscal States: A Global History, 1500–1914
[1] Finanzstaat Hessen 1500-1567. Staatsbildung im Übergang vom Domänenstaat zum Steuerstaat(1980)[2] The Financial Revolution in England: A Study in the Development of Public Credit, 1688–1756[3] Finance and Government under Maria Theresia, 1740–1780[4] 절대주의가 영국, 네덜란드의 사례를 설명하지 못하는 반면 재정-군사 국가는 다른 유럽 국가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기 때문.[5] 현 시점에서 '혁명'으로 보는 견해는 세가 약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