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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람/선수 경력/SK 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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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즌
2.1. 2004년2.2. 2005년2.3. 2006년2.4. 2007년2.5. 2008년2.6. 2009년2.7. 2010년2.8. 2011년
2.8.1. 포스트시즌
2.9. 2012년
2.9.1. 포스트시즌
2.10. 군 복무2.11.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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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화 이글스 소속 투수 정우람SK 와이번스 시절 선수 경력에 대해 다룬 문서.

정대현, 윤길현, 박희수와 함께 비룡의 철벽 계투진을 이루던 시기부터 군 입대 전까지 꾸준히 SK 좌완 계투진의 핵심으로 활약했으며, 군 복무 이후에도 SK 불펜의 중핵과 마무리로써 자기 역할을 다 했다. 자기 역할을 다 한 걸 떠나서 거의 그냥 노예 수준으로 굴려졌다.

2. 시즌

2.1. 2004년

데뷔 시즌. 2경기에서 2.2이닝 동안 2실점하였다.

2.2. 2005년

파일:/image/295/2011/06/29/8.jpg

프로 2년차인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중간계투 보직(특히 원포인트 릴리프)에 투입되어 3승 1패 1세이브 13홀드, 평균자책점 1.69의 훌륭한 성적으로 불펜의 한 자리를 꿰찼다.

2.3. 2006년

2006년에는 무려 82경기에 출장해 데뷔 첫 20홀드를 기록하였다.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매우 높아졌다.

2.4. 2007년

2007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경기 수와 이닝 수가 절반으로 깎였다. 기록은 45경기 0승 1패 14홀드. 4.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2.5. 2008년

2008년에는 85경기에 출장해 좌완 류택현이 가지고 있던 투수 한 시즌 최다 출장 타이를 이루었고, 77⅔이닝을 소화하며 정현욱과 함께 쌍으로 정노예로 불리며 25홀드로 홀드왕에 올랐다.

2.6. 2009년

2009년에는 62경기에 출장해 3.3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등판 경기 수에 비해 승패세홀은 1승 1패 1세이브 2홀드밖에 안된다.

2.7. 2010년

홀드 3위했는데도 불구하고 임태훈 때문에 국대를 탈락한 투수로 SK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안면 마비 증세로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제외된 김광현을 대체할 투수가 한명 필요하였을 때. 이 당시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과 2009 WBC에서 역투했던 임태훈에 대한 보상심리가 강한 선발이었다.

2010 시즌이 시작되자 몸상태를 회복했다. 투수진 운용을 보면 선발투수 7이닝-정우람 1이닝-작은 이승호 1이닝의 필승공식이 정착된 것으로 보였다.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면 홀드왕 재탈환을 노려볼 만했지만 3위에 머물렀다.

75경기 102이닝을 소화하며 8승 4패 2세이브 17홀드(홀드 3위), 평균자책점 3.53를 기록했다. 특히 불펜진이 무너진 SK의 허리를 작은 이승호와 함께 예년보다 월등히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 지탱했다. 결국 만 25세란 젊은 나이에 400경기 출장기록을 돌파했다.

하지만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에서는 최종 명단에서 탈락하며 향후 군입대를 예약했다. 준수한 좌완 불펜이지만 대표팀 특성상 휴식을 취한 좌완 선발요원을 돌려쓰면 된다는 생각인 듯하고, 여기에 소속팀 SK에서는 무려 7명이나 선발되었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에서 밀린 감도 있다. 특히나 김광현이 안면마비로 하차한 빈자리를 임태훈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정말로 아쉽다고 한탄하는 슼팬들이 수두룩하다.[1]

삼성과의 2010년 한국시리즈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4⅓이닝 3피안타(1피홈런) 2사사구 6K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2.08, 1승 1홀드를 기록하여 이름값을 해내면서 팀의 시리즈 전적 4연승 우승과 3번째 우승에 공헌했다.

시즌 후 결혼에 골인했다.

2.8. 2011년

2011시즌 연봉이 2억 2천만원으로 기존 1억 5천만원에서 7,000만 원이나 상승했다.

2011년 5월 18일, 통산 100홀드를 달성했다. 이는 역대 최연소 기록(만 25세)이자 최소 경기(430경기)만에 따낸 타이틀이다.

2011년 6월 12일 규정이닝을 충족하면서 잠깐동안 중간 계투로 리그 평균자책점 1위(0.98)가 되었다. 참고로 그날 2위였던 카도쿠라 켄이 2.28. 이에 따라서 혹사 논란도 4년 연속 계속되었다.[2][3] 본문에서 언급했다시피 정우람 자신도 연투를 해야 컨디션이 유지된다고 밝힌 바 있으니 판단은 각자의 몫. 그렇다 하더라도 채병용과 윤길현처럼 부상 후 군입대하지 않기를 바라는 팬들도 상당수 있다. 그 정도로 정우람은 SK에서 웬만한 선발 투수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2011년 6월 15일 문학 롯데 전에서 팀이 2:1로 이기고 있던 7회 무사 1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해 1⅓이닝을 투구수 22개, 1볼넷 3K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홀드를 기록하며 통산 103홀드로 류택현의 개인통산 홀드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6월 21일 KIA전에서 팀이 4:3으로 앞서고 있던 7회에 등판하여 2이닝 47투구수 1피안타 2볼넷 2K 무실점으로 막으며 마침내 26세 20일의 나이로 개인통산 홀드 1위에 등극했다. 사실상 중간계투 부문에서는 명실상부한 현역 레전드가 된 셈.

시즌 중반부터 선발이 무너진 팀의 사정상, 명실상부한 팀의 실질적인 에이스를 맡은 그지만, 리그 초반부터 엄청 굴려진 탓인지 여름이 된 후부터의 등판 기록을 보면 매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6월 30일 문학 한화 전에서 팀이 한점 차로 뒤지고 있는 6:5 접전 상황에서 카림 가르시아에게 승부를 결정짓는 3점 홈런을 맞고 말았고, 7월 2일 목동 넥센 전에서도 8회에 한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나와 강정호에게 뼈아픈 적시타를 허용하여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7월 5일 문학 삼성 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2:5로 이기던 8회초에 나와 야수들의 실책성 플레이와 더불어 본인의 제구 난조, 여기에 삼성 타자들의 무서운 집중력까지 보임으로써 기어이 5:5 동점을 내주고 강판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낸 삼성은 11회초, 기어이 한점을 더 보태 6:5로 역전승했고, 동시에 연패를 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SK는 충격적인 6연패를 당해버렸다.

제 아무리 철벽 계투진이라도 기계가 아닌 인간인 이상 체력적인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르는 게 중간계투의 비애라고 할 수 있다. 정우람도 시즌 초반의 연투의 영향으로 페이스가 상당히 뒤떨어진 모습으로, 올스타브레이크 이전에 이미 60이닝을 돌파했다. 제 아무리 강견이라도 체력적인 문제가 필히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매년 여름마다 페이스가 떨어지다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011년은 주변 상황이 꽤 심각했다.

이렇게 돼버린 원인은 SK 선발진의 연쇄붕괴에서 찾을 수 있다. 부진 끝에 2군으로 내려간 김광현, 팔꿈치 통증으로 다시 중간계투로 이동한 송은범, 여름에 유일한 에이스로 활약하지만 역시 페이스가 떨어진 듯한 게리 글로버 등등. 2011 시즌 SK 선발진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으나 정우람을 비롯한 필승 계투진의 눈부신 호투로 선두를 계속 질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선발진의 부진과 타자들의 단체 삽질, 거기에 초반부터 가동된 불펜의 과부하 등이 겹쳐 3위까지 떨어졌다.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 정우람의 부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도 계속된 우천취소와 올스타브레이크로 휴식을 충분히 취한 7월 말 이후부터는 다시 정상 컨디션에 올랐다.

그리고 가을만 되면 능력치 +100 되는 팀컬러 특성상 정우람은 또다시 머리를 한 뭉텅이 뽑아내면서 부활하였다.

여담으로 2011년 한국시리즈가 한창 펼쳐지던 당시 다큐 3일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를 방영하였는데, 여기서 6년차 솩빠 중딩을 갈구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줘 솩갤러들을 빵 터지게 만들기도 했다. 너 땡땡이 쳤지?

2.8.1. 포스트시즌

2011년 10월 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1:0으로 지던 7회초 무사 1루 상황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7회초와 8회초를 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스코어 1:0인 9회초에도 등판했다가, 선두 타자이자 3번타자인 이범호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박희수와 교체되었는데, 박희수의 다음 투수로 나온 엄정욱이 차일목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바람에 정우람은 실점하고 말았다. 이날 정우람은 2이닝 21투구수 1볼넷 1K 1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5:1로 패한 것도 모자라 윤석민에게 완투승을 조공했다.

2011년 10월 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2011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스코어 2:2인 연장 10회초에 정정대현의 뒤를 이어 4번째 투수로 등판하였다. 전날에 2이닝을 던지고 이날도 2이닝을 던졌는데, 달랑 공 17개를 투구하여 1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막았고, 팀이 스코어 2:3으로 승리하여 정우람의 이날의 승리투수가 되었다.

정우람은 2011년 준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5이닝 1피안타 1볼넷 2K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1.80, 1승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0월 16일 부산 사직 경기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스코어 6:6인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 6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손아섭을 초구 병살타로 잡는 위엄을 선보였다. 그리고 10회초 정상호의 솔로홈런으로 스코어 7:6이 된 10회말에도 등판하여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내 이날의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날 기록은 1⅔이닝 11투구 무실점 승.

10월 23일 부산 사직 경기장에서 열린 2011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6:4로 앞서고 있던 7회부터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9회에 황성용을 3루수 실책으로 출루시킨 것 외에는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팀은 이날 8:4로 승리하였고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정우람은 2011년 플레이오프 5경기 중 2경기에 나와서 4⅔이닝 1승 1세이브 1K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정우람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 5경기 중 1경기에 나와 ⅓이닝 1피안타 1사구(死球)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27.00, 1홀드를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정우람은 2011년 포스트시즌 14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10이닝 2피안타 2사사구 3K 2실점(2자책) 평균자책점 1.80, 2승 2홀드 1세이브를 기록하였다.

2011년 투수 팀내 고과 1위임에도, 연봉이 2억 2천만 원에서 6천만 원만 인상된 2억 8천만 원으로 집계되어 프런트는 또 다시 포화를 맞았다.

2.9. 2012년

FA로 풀린 정대현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고, 원래 마무리로 낙점되었던 엄정욱의 수술 때문에 정우람은 2012년에는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게 되었다.

2012년 4월 한 달 동안 8경기에 등판해서 6⅔이닝을 던지고 4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을 기록했으며, 거기다가 더 괴랄한 것은 피안타가 0이었다.

5월 3일에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4:2로 이기던 9회 말에 등판했다. 선두 타자 최희섭에게 내야 안타이자 시즌 첫 피안타를 맞고 불안하게 시작했지만, 나지완차일목을 각각 삼진,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어 무난하게 세이브를 올리나 싶었다. 하지만 이준호에게 안타, 윤완주에게 볼넷을 내주어 2사 만루를 만들더니, 김선빈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고 4:4 동점을 만들고 시즌 첫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음 타자 이용규를 삼진으로 잡고 이닝을 종료하였고, 10회말에는 엄정욱으로 교체되어 내려왔다. 이날 기록은 1이닝 39투구수 3피안타 1볼넷 2K 2실점(2자책)으로 블론세이브를 추가했고, 팀은 6:6으로 비겼다.

5월 10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팀이 스코어 8:7로 앞선 8회말 1사 1, 2루의 위기 상황에서 등판하여 이종욱을 중견수 플라이, 정수빈을 1루수 땅볼로 잡고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여전히 스코어 8:7인 9회말에는 선두타자 이성열에게 몸에 맞는 볼을 내주고 불안하게 출발하다가 2사 1, 2루 상황까지 왔는데, 임재철에게 우중간 끝내기 3루타를 맞아 스코어 8:9로 역전패하면서 정우람은 블론세이브를 기록함과 동시에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날 1⅓이닝 30투구수 2피안타 1사구(死球) 1K 2실점(2자책), 블론세이브를 기록했고 평균자책점이 3.48까지 치솟았다.

6월 7일 역대 최연소 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작년처럼 이 때에 이르러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 시즌 초반의 언터처블의 모습은 사라지고 구위가 조금씩 흔들려 몰매맞을 때도 보이곤 했다. 대표적인 경기가 6월 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로, 팀이 스코어 4:1로 앞선 상황에서 등판했으나 최정, 박정권의 연예인급 수비에 정우람 본인의 시원찮은 구위까지 한몫을 하여 결국 9회 초에 5:4로 대역전패하고 만다. 정우람 본인은 블론세이브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패전 투수까지 되고 말았다.

6월 22일 왼팔 이두근염으로 결국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 7월 7일에 겨우 복귀했다.

이후엔 불안했던 모습에서 탈피해 다시금 훌륭한 마무리로서 모습을 비추었다. 다만 벌어놓은(…) 점수 때문에 평균자책점은 2~3점대.

2012시즌을 마치고 난 결과, 2012년도 안 퍼졌다! 53경기 49이닝 2승 4패 30세이브 평균자책점 2.20 K/9 10.1개, BB/9 1.65, K/BB 6.11개 특히 피홈런은 0개로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을 찍었다.[4][5] 시즌 후 입대 예정이므로 정우람이 언제 퍼지는가는 2015년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2.9.1. 포스트시즌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1:2로 앞선 9회초에 팀의 네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세 타자를 상대로 1이닝 12투구수 1K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10월 17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스코어 4:4 동점이던 9회초부터 4번째 투수로 등판하였는데, 2이닝 40투구수 2피안타 4사사구 1실점 (1자책)을 기록했고팀이 스코어 5:4로 패하여 정우람은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는 2012년, 7개 구단 모든 마무리 투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던 10월 20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2:0으로 앞선 9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사 후 홍성흔에게 솔로홈런을 맞았지만, 그래도 1이닝 21투구수 1피안타(1피홈런) 1볼넷 2K 1실점(1자책)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정우람은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4경기 5이닝 3피안타(1피홈런) 5사사구 3K 2실점(2자책) 평균자책점 3.60, 3세이브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정우람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2이닝 3피안타 1K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4.50,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정우람은 2012년 포스트시즌 11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7이닝 6피안타(1피홈런) 5사사구 4K 3실점(3자책) 평균자책점 3.86, 4세이브 1패를 기록했다.

입대전 몇 년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고, 본인의 국대에 향한 열망도 대단했지만 결국 국대 유니폼을 한 번도 입지 못하고 입대하게 됐다. 군대 때문에 2014년 아시안 게임 엔트리에도 들어갈 수 없으니 본인이나 팬들이나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군대는 가는 것이고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다는데 결국 그가 병역을 더 미룰 수 없게 되어 입대한 후 발표된 WBC 엔트리에 승선한 투수는 2012 시즌 방어율이 6점대인 핵무기. 이후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대표팀에 합류하며 데뷔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2.10. 군 복무

시즌이 끝나고 12월 26일에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하였다.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한 이유는 위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이미 결혼한 데다가 슬하에 아들 한 명(정대한 군)까지 두었기 때문. 이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부인이 둘째를 임신했다고 한다.

2014년 5월 6일 이만수 감독이 상근예비역으로 복무 중인 정우람을 탐하는 기사가 났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브레이크 중이던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kt wiz와의 연습 경기에 나타났다. 훈련만 같이 하고 마운드에는 서지 않았다. 일과 시간이 끝난 후 당연히 매일 개인 훈련은 했다고. 팬들은 오랜만에 본 정우람의 모습에 반가워했다.#

9월 24일에는 복귀 기사가 한 번 더 나왔다. 하지만 2012년 두산 베어스정수빈의 부상으로 갓 전역한 민병헌을 1군으로 등록하는 바람에 고창성NC 다이노스에 전력보강 선수로 뺏겼고, SK 와이번스도 상무에서 이재원과 함께 갓 전역한 모창민을 1군에 올렸다가 2012년 한국시리즈를 마치고 NC 다이노스에 전력보강 선수로 뺏긴 후, 모창민이 NC 다이노스 내야진에서 기회를 얻은 사례가 있어서 남은 기간에 정우람이 1군에 등록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사실 SK가 4강싸움에서 마지막에 떨어져서 그렇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었다면 1군에 등록됐을 가능성도 있다.

오래전부터 국가대표를 간절히 염원하더니 드디어 2014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가 되었다!!
파일:/image/003/2014/09/24/NISI20140924_0010160099_web_99_20140924192408.jpg
훼이크이고, 제대 시기쯤에 문학에서 훈련하던 중 덕아웃 근처를 지나가다가 사진에 국가대표팀과 같이 사진에 찍힌 듯하다. 왼쪽 가장 구석의 빨간옷 입은 사람이 정우람. 군대가기 전에 여러모로 아쉽고 간절했던 국가대표 에피소드가 있었던 터라 슬픈 사진으로도 비춰진다.

2014년 9월 25일에 전역했는데, 9월 29일 자로 이만수 감독이 정우람을 1군에 올릴 수도 있다는 기사가 났다.# 그러나 아직 실전에 올릴 상태까지는 아니라고. 군 팀 소속도 아니고 상근예비역으로 복무를 해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실전 감각이 떨어진 선수를 당장 활용하겠다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정우람 1군 등록과 관련된 논란에 관한 정보는 이만수/2014년 항목 참조. SK가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됨에 따라 무리하게 등판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2.11. 2015년

파일:30854_7230_565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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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후 맞은 첫 시즌으로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 뽑히며 데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시즌 후 FA로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 여기서 정우람과 임태훈의 2010년 성적을 보자. 정우람이 홀드 3위인 반면, 피홈런 1위로 평균자책 5점대인 임태훈이었지만, 임태훈이 하필 막판에 구위가 좋아지는 바람에 선발되지 못했다.[2] 다만 전년도에 비해 이닝당 투구수가 많이 줄어 들어서 연투에 비해 혹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2010년의 이닝 당 투구수는 17개였고, 이날까지 기록한 2011년 이닝당 투구수는 13개 남짓이다.[3] 중간계투는 마운드에 등판하기 전에 불펜투구를 하기 때문에 이닝 당 투구수가 적다고 해서 혹사가 아닌 것은 절대 아니지만, 김성근 감독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우람은 투구수와 연계시켜 휴식을 시켜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4] K/BB와 BB/9은 커리어 하이며 2.2이닝만 소화한 데뷔시즌을 제외하고 무피홈런 시즌은 12시즌이 유일하다.[5] 정우람은 뜬공 유형의 투수이며 홈 구장은 타자친화구장으로 구장 크기가 매우 작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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