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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1:37:35

제롬 르 밴너

파일:5d93f93ab627df0d558b457d.jpg
이름 제롬 필리프 르바네르[1]
(Jérôme Philippe Le Banner)
생년월일 1972년 12월 26일 ([age(1972-12-26)]세)
노르망디 지방 르아브르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거주지 노르망디 지방 에트헤타
권투 전적 6전 6승 (5KO)
입식 전적 111전 86승(70KO) 22패 2무 1무효
{{{#white [[종합격투기|종합격투기]] 전적}}} 6승 3패
4KO, 1SUB
2SUB, 1판정
체격 190cm[참고] / 120kg[참고] / 201cm [참고]
링네임 Hyper Battle Cyborg
주요 타이틀 W.K.N 슈퍼헤비급 챔피언
I.S.K.A. 슈퍼헤비급 챔피언
2000 K-1 WGP 나고야 우승
2001 K-1 WGP 오사카 우승
World Pro League Kickboxing 슈퍼헤비급 챔피언
기타 1995 K-1 WGP 파이널 준우승
2002 K-1 WGP 파이널 준우승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전적3. 커리어
3.1. 격투기 데뷔 전3.2. K-13.3. K-1을 떠난 이후
4. 파이팅 스타일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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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권투 선수, 킥복싱 선수, 종합격투기 선수다.

2. 전적

※ 입식 전적
※ 종합격투기 전적

3. 커리어

3.1. 격투기 데뷔 전

1972년 12월 26일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났으며 5살 때부터 유도를 수련했다. 그러다가 14세 무렵 이소룡정무문을 통해 절권도에 심취하여 절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절권도에서 사우스포로 했던 것이 굳어져서 커리어 내내 사우스포로 활동하게 된다. 그 후 16살에 극진공수도를 수련했으며 18세부터 무에타이를 집중적으로 배워 본격적으로 입식 격투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무술을 수련하면서 짧게배우지는 않았는지 극진가라데와 유도에서 검은띠를 갖고있다. K-1 데뷔 전에 여러 격투기 단체에 데뷔하여 승리함으로써 입식 격투기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2. K-1

K-1에 1995년에 처음 입성했으며 8강과 4강에서 각각 사타케 마사키, 마이크 베르나르도를 KO로 이긴 후 결승에서 피터 아츠와 대결했으나 아츠의 오른손 펀치에 무너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아츠는 입식 격투계에서 최강자로 인식되고 있었던 만큼 밴너에겐 어려운 상대였지만 K-1 첫해에 결승까지 올라감으로써 입식의 또다른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에 비슷한 시기에 K-1에 들어온 무사시와의 경기에서 무사시를 판정으로 꺾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막상 영문 위키의 밴너 항목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위의 선수들과 더불어 이후 앤디 훅, 미르코 크로캅, 어네스트 후스트 등 K-1의 최강자들과 경기를 가지면서 K-1의 탑 컨텐더로서 자리매김에 성공했다. 특히 96년도에 후스트와의 경기에서는 후스트에게 펀치러시를 가하여 KO로 승리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6] 앤디 훅, 크로캅, 피터 아츠 등에게 패배하기도 했고, 샘 그레코, 모리스 스미스 등에 승리하기도 했다.

1997년도에는 하드 펀쳐 레이 세포와 경기를 가졌다. 폭풍 펀치러쉬로 세포를 다운시킨 후 연신 몰아부치며 KO를 시키려 했으나 세포 특유의 카운터 펀치를 맞고 일어나지 못하여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밴너로서는 리벤지를 하고 싶었을 법도 한데 희한하게도 이때의 경기가 세포와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참고로 이때 밴너는 레이 세포한테 KO 당한 상태에서 코까지 골았다고 한다.

95년도 이후엔 좀처럼 준결승에 올라가지 못하다가 1999년도 WGP 8강에서 피터 아츠와 다시 겨루게 되었다. 1라운드 초반 아츠의 오른발 하이킥에 다운을 당했다. 이후 계속 공격을 허용하여 아츠에게 또 다시 KO당하나 싶었는데, 공격을 허용하며 비틀거리면서도 압박 전진하여 아츠에게 레프트 훅을 날려 KO시킴으로써 극적인 승리를 차지하게 된다.[7] 이로써 WGP 준결승에 진출하나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라이트 훅에 의한 KO를 당하여 결승전에서 멀어졌다.

다음 해인 2000년에 극진가라데 최강의 괴수로 꼽히던 프란시스코 필리오와 대결하여 펀치에 의한 1라운드 KO를 이끌었다. 이 때 필리오가 KO당하면서 링에 얼굴이 걸리는 바람에 역대 다시 없을 KO장면("The biggest KO of this thousand years")이라는 굴욕의 당사자가 됐다. 당시 극진가라데 대련이 펀치로 안면 타격이 금지된 룰이어서 극진가라데 베이스의 필리오가 안면방어가 다소 부실했던 점도 있었다.

이어서 2000년 나고야에서 열린 토너먼트 대회에서 '수퍼 사모안' 마크 헌트, 니콜라스 페타스, 어네스트 후스트를 꺾고 지역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우주맷집 헌트를 상대로는 평상시와 다르게 아웃파이팅을 구사하여 판정으로 승리했고, 무제한급에서 체격이 작은 페타스를 펀치 러쉬로 2회 다운시켜 1라운드 KO승을 거뒀으며[8], 최종보스 후스트를 꺾고 WGP 진출권을 따냈지만 안타깝게도 건강상의 문제로 WGP 진출을 포기했다고 한다.[9]

다음 해인 2001년 6월에 스테판 레코와 원매치로 붙어서 판정승을 따냈으며, 같은 해 오사카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이번에는 제대로 월드 그랑프리에 출전했으나 허무하게도 8강에서 마크 헌트에게 패하여 토너먼트에서 떨어졌다. 헌트에게 펀치 콤비네이션을 시전하여 구석으로 몰았으나 헌트의 강력한 펀치 반격을 의식하여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기회를 잡은 헌트에게 역으로 코너에 몰려 난타당하다가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2라운드 KO를 당한 것이다.[10][11] 다음 해에 마크 헌트와 원매치를 가지면서 2라운드 KO로 리벤지를 하긴 했지만.

2002년 월드 그랑프리에도 어김없이 진출했다. 16강에서 개리 굿리지를, 8강에서 무사시를 비교적 가볍게 꺾고 준결승에서 만난 마크 헌트를 이겨서 결승전에 진출하는데 결승전 상대는 어네스트 후스트였다. 2라운드까지 둘 다 저돌적인 인파이팅 펀치 러쉬를 주고받았고 3라운드 1분 남짓 지난 무렵 후스트의 오른발 하이킥(혹은 미들킥)이 밴너의 왼팔에 작렬했고 밴너는 팔이 이상이 생겼다는 사인을 나타내며 경기를 멈추었다. 다운이 선언되고 카운트가 10이 되기 전에 밴너는 어떻게든 경기를 속행하려고 했으나 냉정하게도 후스트는 킥으로 밴너의 왼팔을 두번 더 작살냄에 따라 밴너는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경기 종료 직후 후스트의 춤바람 세리모니와 주저앉은 밴너의 고통+절망스러운 표정이 각각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12][13] 이 때의 부상으로 팔에 강철 막대를 부목으로 대고 열한 개의 못을 박아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부상을 극복한 밴너는 다시 격투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으나 향후 몇 년 동안 레프트 펀치의 제 성능을 이끌어오지 못했으며 2003년도 월드 그랑프리는 결장해야 했다. 2003, 2004년에 몇 경기를 뛰긴 뛰었으나 2004년도 WGP 16강에서 프랑소아 보타에게 2라운드 다운을 당하여 탈락했다.[14]

2005년에는 '마르세유의 악동' 시릴 아비디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밴너와 아비디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시릴 아비디 문서 참조) 막상 K-1에선 처음으로 만나 겨루게 되었는데 밴너는 아비리를 최대한 오래 때려 주고 싶어서 일부러 경기를 빨리 안 끝냈단 식으로 인터뷰에서 말했고 대신 아비디는 밴너의 머리에 큰 혹을 달아 주었다. 그 후 WGP 16강에서 개리 굿리지를 다시 만나 이전과는 달리 킥의 비중을 높인 경기 운영으로 1라운드로 굿리지를 제압하고 8강에 오른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오랜 동료 선수이자 라이벌, WGP3회 우승자 '럼버잭' 피터 아츠였고 중간에 아츠의 펀치를 맞고 마우스피스가 이탈하는 상황에서도 3라운드 내내 접전을 펼치나 (이 무렵 아츠가 하락세를 극복하고 기량이 부활해서인지) 판정패하고 만다.

2006년 5월에는 드디어 디펜딩 챔피언 레미 본야스키 와 링 위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밴너가 경기의 우위를 점했으나 어째서인지 판정은 본야스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재판정을 요청받은 K-1측에서 한 달 후에 판정 결과를 수정함에 따라 밴너가 승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어서 06년도 월드 그랑프리에서는 최홍만과 대결하게 되었고, 최홍만의 덩치에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구사하진 못했으나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8강에서 만난 상대가 '격투 로봇' 세미 슐트인지라 실력은 비슷하다 쳐도 슐트의 피지컬과 정확한 타격에 밀려 2라운드에 다운을 빼앗기고 결국 판정패로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밴너의 왼팔에 박혀 있던 철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07년 3월 4일에 자신보다 경험이 적고 신체가 작은 일본의 신예 사와야시키 준이치에게 2번이나 다운을 당하여 판정패한 바 있다. 본인은 이 패배를 가장 굴욕적인 패배라고 언급했다. 이 경기에서도 밴너는 펀치를 맞으면서 마우스피스가 튀어나가는 상황을 겪었다. 이 경기 후에 무릎 수술을 받았다고 영문 위키에 작성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부상이 빨리 회복되어 월드 그랑프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듯 하다. 9월 29일에 서울에서 열린 WGP 16강에서는 원래 루슬란 카라에프와 붙게 되어 있었으나 교통사고로 토너먼트에서 이탈한 카라에프를 대신하여 출전한 박용수와 붙어서 손쉽게 승리를 따냈다. 이어서 8강에서는 또 최홍만과 대결하게 되었고, 전년도와 유사한 경기 흐름에 따라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4강에서 만난 상대가 '격투 로봇' 세미 슐트로 이번에는 슐트의 로우킥에 의한 다리 부상으로 기권패를 당했다.

2008년 6월 29일 후쿠오카에서는 슈퍼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두고 슈퍼파이트 원매치로 다시 한번 슐트에게 리벤지에 도전했지만 결국 판정패했다. 동연 9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WGP 16강에서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사와야시키 준이치에게 판정승 함으로써 리벤지를 성공했다. 이 날 밴너는 준이치의 아웃파이팅에 상당히 짜증이 났는지 안면의 가드를 열고 준이치를 도발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나,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로킥을 차던 준이치의 모습이 압권.

2008년 12월 6일 WGP 파이널 토너먼트 4시합에서 2타임 챔피언 레미 본야스키와 대결하여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잘 싸웠으나 3라운드에 왼쪽 팔부상으로 인해 TKO로 탈락하게 된다.

2008년 연말에는 자신과 4번이나 싸운 바가 있는 마크 헌트와 종합룰로 붙기로 되어있었지만 결핵에 걸려 경기를 포기했다.

2009년 3월 28일에는 극진의 괴물 신예 에베르통 테이셰이라와 붙었지만 단조로운 경기운영으로 인하여 결국 5R 1:2 재연장판정패했다.

2009년 서울에서 열린 WGP 개막전에선 은퇴를 선언한 무사시와 통산 3번째 대결로 경기했다. 두 선수 다 노련한 복싱 스킬로 진검승부를 펼쳐 오다가 3라운드 후반에 밴너의 펀치 컴비네이션으로 무사시를 다운시켰고, 곧이어 라운드가 종료되면서 3-0으로 판정승했다. 은퇴가 확정된 동갑내기 파이터 무사시에게 밴너가 먼저 절을 했고, 이어서 무사시가 맞절하면서 감동의 도가니를 이끌었다. 이 때 기립 박수를 치는 관중들이 있을 정도로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훈훈한 명경기였다.

그러나 정작 8강에 진출한 밴너의 상대가 세미 슐트. 꼭 한번 이기고픈 밴너가 이를 악물고 덤볐지만 슐트의 미들킥에 두번 다운을 당하며 1라운드 KO패를 당했다. 이로써 밴너는 슐트를 4번 만나서 4번 다 져버렸다.[15]

2010년도 4월엔 타이론 스퐁과 경기를 치러서 판정승을 거뒀다.

2010년 WGP 16강에서 피터 아츠에게 굴욕적인 KO패를 안겨준 바 있는 교타로와 대전했다. 2라운드 후반에 KO승 직전 상황까지 갈 정도로 승기를 잡았지만 라운드가 종료되어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교타로의 누적된 데미지가 커보여 밴너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가나 싶었지만 3라운드에서는 의외로 밴너가 교타로의 복싱 스킬에 말려들어 라운드 내내 엄청난 양의 안면 타격을 허용했고 판정단은 결국 연장을 선언했다. 밴너는 연장이 선언되자 경기장을 떠났고, 교타로의 승리로 처리되었다.

3.3. K-1을 떠난 이후

2011년 K-1을 떠나 여러 단체를 떠돌면서 스테판 레코를 한번 더 이기기도 했고, 나중에는 GLORY와도 계약을 하여 에롤 짐머맨, 세르게이 하리토노프와 대결해 패하기도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Rizin FF나 일본 중소 MMA 단체를 전전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일본 프로레슬링에도 발을 담그기까지 하는 등 여기저기에서 출연하는 모양이다. 프로레슬러 시절에는 북한에서 후지타 카즈유키와 경기를 하기도 했었다.

2018년 한국의 종합격투기 단체인 Road FC와 계약했다. 무제한급 토너먼트에 출전하며, 8강전 상대는 중국의 우라한.

하지만 시합 준비 중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불발되었다. 우라한 역시 부상으로 아웃.

2019년 5월 18일에 아오르꺼러와의 매치가 확정되었다. 인터뷰 영상

격투팬들의 반응은 반반인데 펀치력과 타격 수준만큼은 전성기와 별 다름 없는 밴너가 가볍게 이길거라는 반응과 아무리 밴너라지만 48살이란 많은 나이 때문에 20살 이상 젊은 선수인 아오르꺼러를 이기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또다시 부상 아웃 되어 허재혁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한국 대회는 매번 불발시키는 반면, 일본 대회에는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어 일부 국내 격투 팬에게 이런 부분을 지적당하며 더 큰 이득이 되는 대회를 제안받으면 일부러 이탈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비판받기도 했다.

2019년 2월에 일본 단체 HEAT에서 쿠스노키 자이로와 입식격투기 룰로 대결하여 로우킥으로 KO승을 거뒀고, 동년 7월에 AFC 일본 대회에서 '코리안 베어' 임준수와 붙었는데, 2라운드에 임준수가 밴너에게 펀치러시로 몰아붙였으나 밴너가 역으로 기세를 잡아 펀치러시로 임준수를 2번 다운시켜 KO승을 거뒀다. 전성기가 지났어도 역시 밴너다 하는 게 대부분의 팬들의 반응이다.

2020년 1월엔 HEAT에서 뜬금없이 김창희와 매치가 잡혔다. 전혀 급이 되지 않는 상대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는 불명. 당연하게도 1라운드 1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김창희를 두들겨패며 두 번의 다운을 빼앗으며 레프리 스탑 TKO로 승리했다.

코로나로 인해 한 동안 경기를 못 치르면서 쉬고 있다가 2022년 6월 4일 MMA GP라는 단체에서 이반 비치치를 상대로 오랜만에 다시 종합격투기 무대에 올라왔다. 49살이라는 나이에도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며 비치치를 테이크 다운시키며 무려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탭을 받아내며 최초로 서브미션 승을 거두었다.

2023년 일본 격투기 무대인 브레이킹 다운 9에서 52연타로 유명한 김재훈과의 매치가 잡혔다. 1분 입식 경기라는 특별룰에서 김재훈을 막판에 연타로 승리하며 KO승을 거둔다.

4. 파이팅 스타일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라는 별명다운 파워풀하면서 저돌적인 펀치러쉬가 특징인 전형적인 인파이터. 6세 때부터 유도를 수련했으나 14세 무렵부터 브루스 리 절권도에 빠져들어 타격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복싱을 베이스로 킥복싱과 무에타이를 가미하여 지금의 스타일에 이르렀다.

입식격투기 경기 통산 86승 중 70승이 (T)KO승이고 그 (T)KO승의 상당 부분이 펀치 KO인 만큼 뛰어난 펀치력 및 복싱 스킬이 강점이다. 당장 밴너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밴너 특유의 펀치 아닐까. 어깨와 목을 앞으로 숙인 채로 때릴 준비를 취하는 특유의 자세도 그렇고, 2000년 즈음을 기점으로 근육괴물 급의 피지컬이 갖춰졌고, 그 피지컬을 기반으로 한 팔뚝에서 나오는 파워 덕분에 어네스트 후스트, 피터 아츠, 프란시스코 필리오, 시릴 아비디, 무사시 등의 수많은 정상급 선수들을 다운시킴으로써 K-1에서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위력적인 펀치에 가려져서 그렇지 킥의 파워도 좋아서 양민급들은 미들/하이킥으로 KO시킨 적도 있으며 연장전까지도 잘 소화할 정도로 체력 문제가 거의 없고, 파워에 가려져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스피드도 최소 보통 이상의 능력치에 속해 있다.

일단 밴너의 스타일 자체가 저돌적인 인파이터이다. 모 인터뷰에서 밴너 스스로도 상대를 KO로 이기지 않으면 뭔가 시원치 못하다고 할 정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펀치를 날리는 스타일이다. 그가 인파이팅을 하지 않은 상대로는 우주맷집 마크 헌트와 당시 사기적인 피지컬의 최홍만 정도 뿐이다. 세미 슐트를 상대로는 인파이팅을 하긴 했으나 워낙 피지컬의 차이가 크다 보니 논외.(슐트의 특성상 아웃파이팅으로 두들겨 맞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단점이라면 지나치게 닥돌하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던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레이 세포를 한 차례 다운시키고 피니쉬로 끝내려다가 오히려 카운터를 맞고 실신한 경기, 혹은 2001년도에 마크 헌트를 펀치러시로 코너로 몰았다가 오히려 역으로 코너로 몰려 KO패 당한 경기를 들 수 있다. 즉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카운터에 걸리거나 상대방의 역공에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각에서는 이 부분 때문에 밴너가 유리턱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올 정도.

이 때문에 지나치게 인파이팅을 추구하다 보니까 부상도 많았다는 것. 후스트와의 2002년 결승전에서 닥돌하면서 수시로 클린치 상황을 만들다가 경고를 먹기도 했지만, 후스트의 매서운 킥에 팔이 박살나서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건 바로 이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후스트도 그렇고 본야스키도 그렇고 킥을 잘 쓰는 지능형 파이터들에게 부상을 잘 당하는 걸 보면 지능형 파이터들에게 상대적으로 약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5. 기타

06년 요코하마 WGP때 최홍만과의 파이트 이 후 인터뷰에서 그를 얕보았던 것에 사과하고, 그의 장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며 우호적으로 대했으나, 마이티 모와의 2차전 때 최홍만의 태도에 실망하여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못가 최홍만은 뇌수술을 진행하면서 급격히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다.

한국 시간으로 2017년 12월 3일 열린 오브레임 vs 은가누의 경기에서 프란시스 은가누의 세컨드로 참여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K-1 도산 이후로는 일본 프로레슬링에 보이기도 했다. 밥 샙과 함께 평양에서 경기를 가진 적도 있다

팀 실비아와 MMA 경기를 가지려 했으나 매번 무산되었고 후에 이종격투기 컨셉으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렀다.

밥 샙 못지 않은 중저음의 톤으로 말하는 프랑스어가 상당히 포스있다.


[1] 프랑스어 발음은 제홈 르 바녜에 가깝다. 프랑스어에서 r은 ㄹ 발음이 안 나고 ㅎ에 가깝기 때문.[참고] 현재는 노화로 더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참고] [참고] [5] 1997년,1999년,2002년 WGP, 영문 위키피디아 참조[6] 하지만 후스트와의 상대전적에선 밴너가 밀린다.[7] 이 경기는 K-1 초반의 명경기로 자주 손꼽히는 경기이며 레미 본야스키가 해당 경기를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명경기로 언급하기도 했다.[8] 페타스가 용감하게도 밴너에게 인파이팅으로 공격했으나, 체격이 체격인지라 통하지 않았다. 하이킥을 맞고도 밴너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정도. 종료 직전에 2번째 다운을 뺏긴 페타스는 경기가 끝났음에도 밴너에게 다시 싸우자는 식으로 주먹을 들이대다가 밴너에게 펀치를 제대로 한방 맞고 TKO를 당했다.[9] 덕분에 밴너 대신 출전 자격을 얻은 후스트가 그해 WGP에서 우승.[10] 이로써 준결승에 올라간 마크 헌트는 스테판 레코와 프란시스코 필리오를 꺾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마크 헌트문서 참조[11] 당시 준결승 진출자가 프란시스코 필리오, 알렉세이 이그나쇼프, 스테판 레코 였으니 마크 헌트만 꺾었다면 우승할 수도 있는 상대였다. 어네스트 후스트와 피터 아츠 등의 강자들이 없었다.[12] 이 때 주심 카쿠다 노부아키가 팔 부상 직후 경기를 종료시키거나 닥터 체크를 받게 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경기를 속행시킴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때린 데 또 때린 후스트에게도 원망 어린 댓글이 관련 영상에 달려 있다)[13] 후스트는 이 토너먼트에서 밥 샙에게 얻어터져서 진출 자격이 없었으나, 밥 샙이 후스트를 패다가 주먹 부상을 당해서 후스트가 준결승 대리 출전 자격을 얻음으로써 결승 진출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밥샙이 주먹만 멀쩡했더라면 준결승에서 만났을 레이 세포의 밑밥이 되어주었을 것이고, 그러면 세포와 밴너가 붙음으로써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무관의 제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밴너가 우승자가 될 수도 있었던 대회였다.[14] 정확히는 밴너의 연장전 포기에 따른 패배였다. 2라운드에 다운을 뺏은 보타가 밴너와의 클린치 상태에서 심판이 스톱을 외쳤는데 그 직후 보타가 밴너에게 라이트훅을 날리는 바람에 옐로카드를 받았고, 이것이 판정에 반영된 건지 연장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밴너 측 코너에서 수건을 던지면서 보타가 8강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15] 비슷한 경우로 본야스키도 슐트와 3번 만나서 3번 다 졌고, 글라우베 페이토자도 슐트에게 3패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