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1. 개요2. 결과
2.1. 경상북도 제1선거구 (대구시 중구·북구·서구)2.2. 경상북도 제2선거구 (대구시 남구·동구)2.3. 경상북도 제3선거구 (포항시·영일군·영천군·울릉군)2.4. 경상북도 제4선거구 (경주시·월성군·청도군)2.5. 경상북도 제5선거구 (김천시·금릉군·상주군)2.6. 경상북도 제6선거구 (안동시·의성군·안동군)2.7. 경상북도 제7선거구 (구미시·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2.8. 경상북도 제8선거구 (달성군·경산군·고령군)2.9. 경상북도 제9선거구 (영덕군·청송군·울진군)2.10. 경상북도 제10선거구 (영주군·영양군·봉화군) 2.11. 경상북도 제11선거구 (문경군·예천군)
1. 개요
본 항목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상북도 지역구 선거 결과를 정리하는 항목이다. 선거구는 가나다순이 아니라 지역 선거관리위원회가 설치된 순서로 한다. 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쓰는 공식 발표법이기 때문이다.2. 결과
정당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 무소속 | 합계 |
득표 수 | 564,171 | 478,025 | 60,192 | 926,207 | 2,028,595 |
득표율 | 27.81% | 23.56% | 2.97% | 45.66% | 100% |
당선자 | 9 | 8 | 0 | 5 | 22 |
1위 | 7 | 1 | 0 | 3 | 11 |
2위 | 2 | 7 | 0 | 2 | 11 |
-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든 선거구에 당선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한 선거구에서 1, 2등을 모두 석권해 22명 중 12명을 당선시킨 민주공화당이었으나, 이번엔 오로지 한 명 씩만 공천해서 모두 당선되어야 딱 절반인 11명이었다. 그럼에도 당선자가 9명 뿐이고 결과적으로 신민당에게 3석이나 빼앗겼다[1]는 점에서, 박정희의 출신지이자 근거지인 경북에서조차 민주공화당이 심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2.1. 경상북도 제1선거구 (대구시 중구·북구·서구)
경상북도 제1선거구 | |||
대구시 중구·북구·서구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이만섭(李萬燮) | 66,598 | 2위 |
[[민주공화당|]] | 24.83% | 당선 | |
2 | 조일환(曺逸煥) | 55,190 | 3위 |
[[신민당(1967년)|]] | 20.57% | 낙선 | |
3 | 이종섭(李鍾燮) | 17,578 | 4위 |
| 6.55% | 낙선 | |
4 | 한병채(韓柄寀) | 128,810 | 1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8.03% | 당선 | |
계 | 선거인 수 | 362,518 | 투표율 83.28% |
투표 수 | 271,518 | ||
무효표 수 | 3,342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 | |
이만섭 | 조일환 | 한병채 | |
결과 | 24.83%(당선) | 20.57% | 48.03%(당선) |
대구시 서구 | 23.52%(2등) | 23.01% | 46.55%(1등) |
대구시 중구 | 25.98%(2등) | 16.48% | 52.22%(1등) |
대구시 북구 | 26.10%(2등) | 19.20% | 47.99%(1등) |
- 여당 텃밭에 공천된 후보가 겨우 30%도 넘지 못 한 득표율로 간신히 2위로 당선되었다. 이만섭이 대구시 중구에서 제7대 국회의원을 했는데도 중구에서의 득표율은 북구보다도 낮았다. 이만섭은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제6-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여당 의원이지만 정부에 할 말은 했고, 그 때문에 설움을[2] 받기도[3] 했다.[4] 민주공화당은 그런 사람을 공천했지만 경북에서 분 여당 심판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오히려 이만섭이었기에 이 정도라도 득표했을 것이다. 만약 이만섭이 아니었다면,[5] 여당 텃밭의 한가운데에서 신민당이 공천한 조일환과 친야 무소속 한병채가 당선되고 민주공화당 후보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 신민당 공천으로 대구시 중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을 지난 한병채가 지난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은 신민당 내의 계파 갈등 때문이었다. 당선된 뒤에 신민당에 입당했건만, 이번에 신민당이 두 명 공천하면 두 명 다 당선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 명만 공천했고 한병채는 또 무소속으로 나섰다. 그 결과 지난 번에 자기 지역인 중구에서 2위, 나머지 지역에서 3위를 하면서 조일환에게 불과 0.2%(300여 표) 앞서서 당선된 한병채는 이번 선거에서 이만섭과 조일환의 표를 합친 것보다 많은 득표로 자기 지역인 중구 뿐만 아니라 조일환의 지역구였던 북구와 서구까지 압승을 거두면서 전체 1위로 당선되었다.
- 지난 선거 때 자기 지역구였던 북구와 서구에서 2등을 차지했지만, 중구에서 4등에 머물면서 한병채에게 불과 0.2%(300여 표) 모자른 3위로 석패했던 조일환은 이번 선거에서 서구에서만 이만섭과 2등 경쟁을 했을 뿐, 북구와 중구에선 이만섭에게 한참 미치지 못 하는 3위에 머물면서 낙선했다. 득표율도 지난 번보다 줄었다. 즉 당선되면 신민당으로 복당할 것이 확실한 친야 무소속 후보[6]가 있는 상태에서 이 지역의 민심은 굳이 신민당[7]이 공천한 후보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던 것.
2.2. 경상북도 제2선거구 (대구시 남구·동구)
경상북도 제2선거구 | |||
대구시 남구, 동구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이효상(李孝祥) | 79,299 | 1위 |
[[민주공화당|]] | 27.48% | 당선 | |
2 | 신도환(辛道煥) | 67,625 | 2위 |
[[신민당(1967년)|]] | 23.44% | 당선 | |
3 | 윤영한(尹英漢) | 8,810 | 7위 |
| 3.05% | 낙선 | |
4 | 문양(文洋) | 29,268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14% | 낙선 | |
5 | 신진욱(申鎭旭) | 44,962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5.58% | 낙선 | |
6 | 이치호(李致浩) | 48,776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90% | 낙선 | |
7 | 조화형(曺和兄) | 9,800 | 6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39%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392,180 | 투표율 74.46% |
투표 수 | 292,019 | ||
무효표 수 | 3,479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이효상 | 신도환 | 신진욱 | 이치호 | |
결과 | 27.48%(당선) | 23.44%(당선) | 15.58% | 16.90% |
대구시 남구 | 27.10%(1등) | 21.94%(2등) | 17.43% | 17.49% |
대구시 동구 | 27.79%(1등) | 24.63%(2등) | 14.11% | 16.43% |
- 지난 선거에 나왔던 민주공화당의 이효상, 신민당의 신도환, 신민당 공천으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8]한 친야 무소속 신진욱이 그대로 나왔고 여기에다가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떨어지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여 무소속의 이치호까지 4파전[9]이 벌어졌다. 결과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이효상이 1등, 신도환이 2등으로 당선.
- 민주공화당 의장인 이효상이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1위로 당선되었지만, 득표율은 43%에서 27%로 줄어들었다. 동구에서는 11%, 자기 선거구였던 남구에서는 21%가 빠졌다.[10] 그리고 친여 무소속 이치호가 동구에서 16%, 남구에서 17%를 얻어 전체 17%로 3위를 차지했다.
- 지난 선거 때 20%를 득표하며 2위로 당선된 신도환은 이번에 23%를 득표하며 2위로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친야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5%를 득표한 신진욱은 연거푸 친야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번 선거에서도 15%를 득표하며 4위를 차지했다.
- 여당 심판의 바람 속에 중구-서구-북구에서 여권의 지지율이 40%에서 24%로 16%가 빠졌고[11] 남구-동구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의 지지율은 16%가 빠졌는데, 그것이 야권으로 간 것이 아니라 친여 무소속에게 갔다.[12] 당시에는 민주공화당 뿐만 아니라 신민당의 이철승 체제도 심판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민당이 공천한 신도환[13]은 자기 계파를 만들어서 이철승을 지원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친야 무소속 후보를 지원하자니, 신진욱은 신민당의 지도자 정일형을 폭행[14]한 흑역사가 있다. 그러니 민주공화당도 심판하고 신민당의 이철승 체제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의 표심이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2.3. 경상북도 제3선거구 (포항시·영일군·영천군·울릉군)
경상북도 제3선거구 | |||
포항시, 영일군, 영천군, 울릉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정무식(鄭茂植) | 48,781 | 3위 |
[[민주공화당|]] | 21.36% | 낙선 | |
2 | 조규창(曺圭昌) | 66,868 | 2위 |
[[신민당(1967년)|]] | 29.28% | 당선 | |
3 | 안병달(安柄達) | 16,490 | 4위 |
| 7.22% | 낙선 | |
4 | 권오태(權五台) | 73,560 | 1위 |
[include(틀:무소속)] | 32.21% | 당선 | |
5 | 김병수(金炳秀) | 14,148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19% | 낙선 | |
6 | 김상순(金相淳) | 8,499 | 6위 |
[include(틀:무소속)] | 3.72%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301,320 | 투표율 76.70% |
투표 수 | 231,101 | ||
무효표 수 | 2,755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 | |
정무식 | 조규창 | 권오태 | |
결과 | 21.36% | 29.28%(당선) | 32.21%(당선) |
포항시 | 21.49% | 29.68%(1등) | 28.83%(2등) |
영일군 | 24.50% | 28.64%(1등) | 28.16%(2등) |
영천군 | 13.74% | 32.72%(2등) | 39.56%(1등) |
울릉군 | 47.32%(1등) | 6.89% | 41.78%(2등) |
2.4. 경상북도 제4선거구 (경주시·월성군·청도군)
경상북도 제4선거구 | |||
경주시, 월성군, 청도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박숙현(朴淑鉉) | 38,181 | 1위 |
[[민주공화당|]] | 22.44% | 당선 | |
2 | 박권흠(朴權欽) | 30,656 | 2위 |
[[신민당(1967년)|]] | 18.02% | 당선 | |
3 | 김덕수(金德壽) | 10,619 | 7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24% | 낙선 | |
4 | 백수근(白水根) | 13,898 | 6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8.17% | 낙선 | |
5 | 이영표(李永杓) | 21,202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46% | 낙선 | |
6 | 임진출(林鎭出) | 18,300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75% | 낙선 | |
7 | 주진포(朱晋布) | 10,043 | 8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90% | 낙선 | |
8 | 최풍(崔豊) | 22,647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3.31% | 낙선 | |
9 | 황한수(黃漢洙) | 4,541 | 9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66%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11,637 | 투표율 81.24% |
투표 수 | 171,932 | ||
무효표 수 | 1,845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박숙현 | 박권흠 | 이영표 | 임진출 | 최풍 | |
결과 | 22.44%(당선) | 18.02%(당선) | 12.46% | 10.75% | 13.31% |
경주시 | 20.65%(1등) | 17.70%(2등) | 13.46% | 10.36% | 15.66% |
월성군 | 18.67%(1등) | 13.20% | 12.43% | 12.70% | 14.69%(2등) |
청도군 | 31.83%(1등) | 27.44%(2등) | 11.21% | 7.63% | 7.67% |
2.5. 경상북도 제5선거구 (김천시·금릉군·상주군)
경상북도 제5선거구 | |||
김천시, 금릉군, 상주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백남억(白南檍) | 35,200 | 3위 |
[[민주공화당|]] | 19.48% | 낙선 | |
2 | 이기한(李璂漢) | 15,113 | 5위 |
[[신민당(1967년)|]] | 8.36% | 낙선 | |
3 | 임재영(林在韺) | 5,586 | 7위 |
| 3.09% | 낙선 | |
4 | 김윤하(金潤河) | 32,126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7.78% | 낙선 | |
5 | 박정수(朴定洙) | 43,319 | 1위 |
[include(틀:무소속)] | 23.98% | 당선 | |
6 | 이재옥(李在玉) | 6,825 | 6위 |
[include(틀:무소속)] | 3.77% | 낙선 | |
7 | 정휘동(鄭輝東) | 42,477 | 2위 |
[include(틀:무소속)] | 23.51% | 당선 | |
계 | 선거인 수 | 215,764 | 투표율 84.70% |
투표 수 | 182,755 | ||
무효표 수 | 2,109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백남억 | 이기한 | 김윤하 | 박정수 | 정휘동 | |
결과 | 19.48% | 8.36% | 17.78% | 23.98%(당선) | 23.51%(당선) |
김천시 | 21.69%(2등) | 14.82% | 11.48% | 39.46%(1등) | 8.67% |
금릉군 | 26.98%(2등) | 8.03% | 5.46% | 37.66%(1등) | 17.38% |
상주군 | 14.22% | 5.96% | 27.50%(2등) | 9.78% | 33.03%(1등) |
2.6. 경상북도 제6선거구 (안동시·의성군·안동군)
경상북도 제6선거구 | |||
안동시, 의성군, 안동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김상년(金想年) | 52,662 | 1위 |
[[민주공화당|]] | 30.41% | 당선 | |
2 | 박해충(朴解充) | 47,776 | 2위 |
[[신민당(1967년)|]] | 27.58% | 당선 | |
3 | 권태인(權泰仁) | 4,231 | 6위 |
| 2.44% | 낙선 | |
4 | 권오훈(權五勳) | 38,226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2.07% | 낙선 | |
5 | 신영목(申榮睦) | 8,947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16% | 낙선 | |
6 | 오상직(吳相稙) | 21,328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31%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16,900 | 투표율 80.94% |
투표 수 | 175,560 | ||
무효표 수 | 2,390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김상년 | 박해충 | 권오훈 | 오상직 | |
결과 | 30.41%(당선) | 27.58%(당선) | 22.07% | 12.31% |
안동시 | 27.00% | 30.84%(2등) | 32.19%(1등) | 4.64% |
의성군 | 35.47%(1등) | 23.19% | 7.85% | 23.57%(2등) |
안동군 | 27.13% | 30.22%(2등) | 30.87%(1등) | 5.12% |
2.7. 경상북도 제7선거구 (구미시·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
경상북도 제7선거구 | |||
구미시, 군위군, 성주군, 칠곡군, 선산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신현확(申鉉碻) | 56,645 | 1위 |
[[민주공화당|]] | 30.95% | 당선 | |
2 | 김창환(金昌煥) | 36,483 | 3위 |
[[신민당(1967년)|]] | 19.93% | 낙선 | |
3 | 김태식(金泰植) | 4,671 | 7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55% | 낙선 | |
4 | 김현규(金鉉圭) | 49,001 | 2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6.78% | 당선 | |
5 | 유성환(兪成煥) | 14,028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66% | 낙선 | |
6 | 장덕환(張悳煥) | 17,070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9.32% | 낙선 | |
7 | 조익환(曺翊煥) | 5,074 | 6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77%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22,097 | 투표율 83.42% |
투표 수 | 185,267 | ||
무효표 수 | 2,295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신현확 | 김창환 | 김현규 | 유성환 | 장덕환 | |
결과 | 30.95%(당선) | 19.93% | 26.78%(당선) | 7.66% | 9.32% |
구미시 | 39.67%(1등) | 20.60% | 23.38%(2등) | 3.61% | 7.52% |
군위군 | 16.79%(2등) | 7.58% | 62.99%(1등) | 3.93% | 3.96% |
성주군 | 22.99%(2등) | 29.27%(1등) | 14.21% | 19.30% | 8.11% |
칠곡군 | 40.62%(1등) | 27.35%(2등) | 12.63% | 7.03% | 7.15% |
선산군 | 28.93%(2등) | 8.16% | 35.49%(1등) | 2.37% | 19.82% |
2.8. 경상북도 제8선거구 (달성군·경산군·고령군)
경상북도 제8선거구 | |||
달성군, 경산군, 고령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박준규(朴浚圭) | 57,526 | 1위 |
[[민주공화당|]] | 36.18% | 당선 | |
2 | 김종기(金鍾基) | 47,617 | 2위 |
[[신민당(1967년)|]] | 29.94% | 당선 | |
| | - |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등록무효 | |
4 | 박주현(朴柱炫) | 30,341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08% | 낙선 | |
5 | 이재연(李在淵) | 23,513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4.78%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10,502 | 투표율 78.34% |
투표 수 | 164,909 | ||
무효표 수 | 5,912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박준규 | 김종기 | 박주현 | 이재연 | |
결과 | 36.18%(당선) | 29.94%(당선) | 19.08% | 14.78% |
달성군 | 37.49%(1등) | 35.36%(2등) | 18.55% | 8.58% |
경산군 | 35.99%(1등) | 19.80% | 21.70% | 22.49%(2등) |
고령군 | 33.49%(2등) | 47.72%(1등) | 12.40% | 6.68% |
2.9. 경상북도 제9선거구 (영덕군·청송군·울진군)
경상북도 제9선거구 | |||
영덕군, 청송군, 울진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문태준(文太俊) | 30,131 | 1위 |
[[민주공화당|]] | 25.72% | 당선 | |
2 | 황병우(黃昞禹) | 29,169 | 2위 |
[[신민당(1967년)|]] | 24.90% | 당선 | |
3 | 손병우(孫炳宇) | 5,044 | 6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30% | 낙선 | |
4 | 이동화(李東和) | 20,648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7.62% | 낙선 | |
5 | 장소택(張蘇宅) | 3,011 | 7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57% | 낙선 | |
6 | 주상삼(朱相三) | 12,294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49% | 낙선 | |
7 | 최순열(崔淳烈) | 16,836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4.37%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39,102 | 투표율 85.37% |
투표 수 | 118,752 | ||
무효표 수 | 1,619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문태준 | 황병우 | 이동화 | 주상삼 | 최순열 | |
결과 | 25.72%(당선) | 24.90%(당선) | 17.62% | 10.49% | 14.37% |
영덕군 | 26.76%(1등) | 25.52%(2등) | 15.91% | 20.51% | 5.36% |
청송군 | 19.66% | 42.90%(1등) | 28.39%(2등) | 3.30% | 3.29% |
울진군 | 29.02%(2등) | 10.91% | 11.61% | 4.52% | 32.69%(1등) |
2.10. 경상북도 제10선거구 (영주군·영양군·봉화군)
경상북도 제10선거구 영주군 일원, 영양군 일원, 봉화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김창근(金昌槿) | 59,768 | 1위 |
[[민주공화당|]] | 43.47% | 당선 | |
2 | 박용만(朴容萬) | 38,291 | 2위 |
[[신민당(1967년)|]] | 27.85% | 당선 | |
3 | 우성구(禹成九) | 7,497 | 5위 |
| 5.45% | 낙선 | |
4 | 안용환(安龍煥) | 8,443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14% | 낙선 | |
5 | 정태중(鄭泰重) | 23,490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7.08%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64,818 | 투표율 84.50% |
투표 수 | 139,275 | ||
무효표 수 | 1,786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김창근 | 박용만 | 정태중 | |||
결과 | 43.47%(당선) | 27.85%(당선) | 17.08% | ||
영주군 | 46.53%(1등) | 33.36%(2등) | 7.48% | ||
영양군 | 53.58%(1등) | 30.89%(2등) | 7.34% | ||
봉화군 | 32.67%(2등) | 16.65% | 38.99%(1등) |
2.11. 경상북도 제11선거구 (문경군·예천군)
경상북도 제11선거구 | |||
문경군, 예천군 일원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구범모(具範謨) | 39,380 | 2위 |
[[민주공화당|]] | 32.00% | 당선 | |
2 | 채문식(蔡汶植) | 43,237 | 1위 |
[[신민당(1967년)|]] | 35.14% | 당선 | |
3 | 반형식(潘亨植) | 15,431 | 4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54% | 낙선 | |
4 | 현석주(玄錫朱) | 20,509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66% | 낙선 | |
5 | 황병호(黃丙鎬) | 4,482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64%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47,749 | 투표율 84.48% |
투표 수 | 124,811 | ||
무효표 수 | 1,772 |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구범모 | 채문식 | 반형식 | 현석주 | |
결과 | 32.00%(당선) | 35.14%(당선) | 12.54% | 16.66% |
문경군 | 27.06%(2등) | 54.26%(1등) | 5.06% | 11.24% |
예천군 | 37.96%(1등) | 12.07% | 21.55% | 23.21%(2등) |
[1] 오히려 대도시인 대구에서는 모두 당선되었고, 시/군 단위에서 낙선자가 나왔다.[2] 이후락의 집요한 공작과 공화당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민심이반으로 여당 텃밭인 대구시 중구에서 낙선했다.[3] 공천에서 박찬에 밀려 탈락했고 대통령 추천 국회의원도 되지 못했다.[4] 같은 대구 출신인 이효상 민주공화당 의장이 그를 위한 당직(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상근부의장)을 만들어주었지만, 탈당해서 야당으로 가거나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정부의 발목을 잡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으며 그렇기에 실권도 거의 없는 한직이었다. 무엇보다 이 때의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친위세력 때문에 여당은 커녕 제대로 된 정당의 역할도 하지 못 했다.[5] 그러니까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단독 후보라는 이점으로 전체 1위로 당선되었지만,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구에서 조일환에게 진 박찬이나, 서구-북구 선거구가 서구와 북구로 나뉘고 조일환이 서구로 가는 바람에 북구에서 당선되었던 강재구 같은 사람[6] 실제로 한병채는 당선된 뒤에 신민당으로 복당했다.[7] 정확하게는 대표인 이철승[8] 이 때 꺾은 사람이 바로 이효상이었다.[9] 전체 후보는 7명[10] 자기 선거구였던 남구에서도 21%나 빠졌는데, 동구에서 11% 밖에 줄지 않은 것은 동구가 농촌 지역을 편입해서 만든 지역이기 때문이다.[11] 10%는 신민당에, 6%는 민주통일당에 갔다.[12] 무소속까지 포함한 전체 비율이 여권은 43%에서 44%로, 야권은 35%에서 39%로 거의 변동이 없다.[13] 이승만 시절에 정치깡패(반공청년단)를 조직해서 3.15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한 사람으로 5.16 군사정변 이후에 이른바 혁명재판으로 8년 여를 복역했다. 단지 자신을 감옥에 보낸 것에 대한 원한으로 신민당에 들어갔을 뿐이다.[14] 자기 동생과 관련한 전국구 공천 헌금 문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