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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11:49:34

조공공

파일:조(춘추) 전서체.png
조(曹)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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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曹)나라 16대 국군
공공
共公
희(姬)
조(曹)
양(襄)
아버지 조소공(曹昭公) 희반(姬班)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1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52년 ~ 기원전 618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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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조(曹)나라의 제16대 군주. 조소공의 아들. 조문공의 아버지. 진(晉)나라공자 중이(重耳)[1]에게 무례하게 굴어 그 공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군주가 되자 그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했다.

2. 생애

조 소공 10년(기원전 653년), 조 소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조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겨울에 조 공공은 조 소공을 안장했다.

조 공공 원년(기원전 652년), 조 공공, 노희공, 주나라의 사신, 제환공, 위문공, 허 희공, 진(陳)나라 세자와 조나라의 도읍(桃邑)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왕실의 안정이었다.

조 공공 2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조 공공, 노 희공, 송양공, 진목공(陳穆公), 정문공, 허 희공과 규구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6년(기원전 647년), 조 공공이, 노 희공, 제 환공, 송 양공, 위 문공, 진 목공, 정 문공, 허 희공과 함읍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8년(기원전 645년), 초(楚)나라서(徐)나라를 치자 제 환공이 노나라, 진(陳)나라, 정나라, 허나라, 조나라 7개 국의 군주를 소환해 모구 땅에서 회맹을 가져 서나라를 구하려고 했다. 7월, 제나라와 조나라는 초나라의 여 땅을 공격했다.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송나라는 조나라가 원정을 가 나라가 비자 조나라를 쳤다. 이에 제후들은 송나라에게 한을 품게 되었다.

조 공공 9년(기원전 644년), 조 공공은 노 희공, 제 환공, 송 양공, 진 목공, 위 문공, 허 희공, 형나라 후작과 회 땅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12년(기원전 642년), 제 환공이 관중의 말을 듣지 않아 내란이 일어나자 송나라, 조나라, 위나라는 제나라를 쳐서 공자무휴를 쳐서 죽이고, 제 환공의 다른 아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다. 송 양공은 이 사건을 계기로 패자가 될 뜻을 품었다.

조 공공 13년(기원전 641년), 송 양공이 우읍에서 회맹했다. 이때 송 양공이 회맹에서 늦은 증나라 군주를 삶아 죽였다. 이에 조 공공은 송 양공에게 대들었다.[2] 이에 송 양공이 크게 분노해 조나라를 쳤는데, 양국 다 소득이 없어 결국 물러났다.

조 공공 16년(기원전 637년),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가 조나라에 와서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공공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 늑골을 훔쳐보려한 무례함을 저지르려 했다.[3] 이때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간했으나 목욕하는 것을 끝내 훔쳐보았다. 이에 희부기는 그 아내의 조언을 듣고 선물로 아름다운 옥돌과 음식을 바쳤다. 공자 중이는 음식은 받아들였지만, 옥돌은 거절했다. 희부기의 아내와 희부기는 공자 중이가 장차 패자가 될 것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동국열국지에서는 한술 더떠 중이의 갈비뼈가 특이하여 칼을 막는다는 소문을 듣고 잠을 자는 사이 몰래 칼로 찌르려고 하여 기겁하며 도망갔다는 묘사로 나온다. 어느 쪽이든 상당히 경박한 성격이었던 모양.

결과적으로 조공공에게 수모를 겪은 공자 중이는 진후가 되니 그가 바로 진(晉) 문공이다.

조 공공 21년(기원전 632년) 진 문공이 조 공공의 무례한 태도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조나라를 쳐서 조 공공은 포로가 되어 진(晉)나라로 끌려갔다. 진 문공은 희부기의 가족들을 보호하라고 했다. 진 문공은 조나라를 멸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동성 제후국을 없애는 것은 제후들을 호령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간해 조 공공은 귀국할 수 있었다.

조 공공 24년(기원전 629년), 진 문공이 다시 조 공공을 핍박하자 노나라에게 제서 땅, 자도 이남 등이 할양되어 조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다.

조 공공 30년(기원전 623년), 조 공공이 진(晉)나라와 공물 바칠 일을 상의했다.

조 공공 33년(기원전 620년), 조 공공은 제소공, 송소공, 위성공, 정목공, 허 소공, 진(晉)나라의 조돈과 우읍에서 회맹해 진영공을 세웠다.

조 공공 35년(기원전 618년), 조 공공이 죽고 그 아들인 수(壽)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 문공이다.


[1] 훗날의 진문공(晉文公)이다.[2] 다만, 이것은 인신공양해서 실망해서라기 보다는 송나라가 조나라를 뒷치기한데 한을 품어서 그렇다.[3]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목욕한 것을 훔쳐보는 것은 무례한 행위다. 고우영의 십팔샤락에서는 중이 본인이 조공공이 훔쳐 보는 것을 보고 경박한 것에 묵묵히 분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