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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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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스만호 바레인 · 요르단 · 말레이시아 · 사우디아라비아 · 호주 · 요르단[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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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년~1964년 아시안컵은 4개국이 진출하는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4강 결승리그)[5개국] 본선 아시안컵 진출에 실패했다.[3] 1972년~1976년 아시안컵은 6개국이 진출하는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6강 조별리그)[6개국] 본선 아시안컵 진출에 실패했다.[5] 1980년~1988년 아시안컵은 10개국이 진출하는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10강 조별리그)[8개국] 본선 아시안컵 진출에 실패했다.[7] 1996년~2000년 아시안컵은 12개국이 진출하는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12강 조별리그)[8] 2004년~2015년 아시안컵은 16개국이 진출하는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16강 조별리그)[9]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대회부터 24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었다. (24강 조별리그)[10] 이 대회부터 3·4위전이 폐지되었으므로 4강까지 최종 획득 승점을 기준으로 3·4위를 구분한다.
}}}}}}}}}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colbgcolor=#79003c> 조별리그 A조, B조 C조, D조
결선 토너먼트 8강 4강, 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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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2010~2011
전체 (20102011)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바레인전 · 호주전 · 인도전 · 이란전 · 일본전 · 우즈베키스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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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활약상을 정리한 문서.

2. 엔트리

1 정성룡 · 2 최효진 · 3 황재원 · 4 조용형 · 5 곽태휘 · 6 이용래 · 7 박지성
C
· 8 윤빛가람
9 유병수 · 10 지동원 · 11 손흥민 · 12 이영표 · 13 구자철 · 14 이정수 · 15 홍정호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김보경 · 19 염기훈 · 20 김신욱 · 21 김용대 · 22 차두리 · 23 김진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조광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태하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서정원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브라질 국기.svg 알렉산드레 가마

2010년 12월 24일 최종 결정된 23명의 엔트리는 다음과 같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끝으로 허정무 전 감독의 후임으로 조광래 전 감독이 선임되었다. 당연히 목표는 우승으로 잡았고 슬로건은 왕의 귀환. 특히 박지성, 이영표의 국가대표 은퇴 무대로 정해졌으며, 박지성은 은퇴 전에 국가대표로서 첫 우승을 하고 싶다며 전의를 다졌다.

본래 박주영도 대회 엔트리에 발탁되었으나 무릎부상으로 인해 아웃되면서 홍정호가 대체발탁되었다.

3. 조별리그 C조

3.1. C조 1차전 바레인전 | 2 : 1 승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C조 2경기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01:15 (UTC+9)
알 가라파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압둘라흐 알 힐라이 (오만)
관중: 6,669명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 : 1 파일:Bahrain BFA old.png
바레인
40', 52' 구자철 파일:득점 아이콘.svg 85' (PK) 파오지 아이시
83' 곽태휘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구자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바레인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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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C조 2차전 호주전 | 1 : 1 무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C조 3경기
2011년 1월 14일 금요일 22:15 (UTC+9)
알 가라파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압둘라흐만 압도우 (카타르)
관중: 15,526명
파일:Australia FFA 2010.png 1 : 1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호주 대한민국
62' 밀레 예디낙 파일:득점 아이콘.svg 24' 구자철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박지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호주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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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C조 3차전 인도전 | 4 : 1 승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C조 5-1경기
2011년 1월 18일 화요일 22:15 (UTC+9)
알 가라파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칼릴 알 감디 (사우디아라비아)
관중: 11,366명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4 :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India_FA.svg.png
대한민국 인도
6', 23' 지동원
9' 구자철
81' 손흥민
파일:득점 아이콘.svg 12' (PK) 수닐 체트리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구자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인도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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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선 토너먼트

4.1. 8강 이란전 | 0 (A.E.T.) 1 승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8강 4경기
2011년 1월 23일 일요일 01:25 (UTC+9)
카타르 SC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라브산 아르마토프 (우즈베키스탄)
관중: 7,111명
파일: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0 : 1
A.E.T.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이란
- 파일:득점 아이콘.svg 105' 윤빛가람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이용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이란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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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강 일본전 | 2 (3 PSO 0) 2 무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4강 1경기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22:25 (UTC+9)
알 가라파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칼릴 알 감디 (사우디아라비아)
관중: 16,171명
파일: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2010~2017).svg 2 : 2
A.E.T.
(PSO 3 : 0)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일본 대한민국
36' 마에다 료이치
97' 호소가이 하지메
파일:득점 아이콘.svg 23' (PK) 기성용
120' 황재원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혼다 케이스케
승부차기
일본
GK: 가와시마 에이지
3 : 0 대한민국
GK: 정성룡
선축 후축
혼다 케이스케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1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골키퍼 선방)
구자철
오카자키 신지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2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골키퍼 선방)
이용래
나가토모 유토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골대 빗나감)
3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골대 빗나감)
홍정호
곤노 야스유키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4 -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일본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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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3위 결정전 우즈베키스탄전 | 2 : 3 승

파일:asian-cup-qatar-2011-logo.jpg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3위 결정전
2011년 1월 29일 토요일 00:00 (UTC+9)
자심 빈 하마드 경기장 (카타르, 도하)
주심: 말리크 압둘 바시르 (싱가포르)
관중: 8,199명
파일: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2000~2014).svg 2 : 3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우즈베키스탄
45' (PK), 53' 알렉산데르 게인리흐 파일:득점 아이콘.svg 18' 구자철
28', 39' 지동원
경기 다시 보기 | 경기 하이라이트
Man of the Match: 지동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우즈베키스탄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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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단 6개월 만에 단 9명 만을 제외하고 전원 교체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젊어졌다. 거기에 대표팀의 거의 유일한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김정우는 부상 회복이 느려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박주영은 소속팀에서 결승골 넣고 세레머니하다가 동료들한테 깔리는 바람에(...) 부상 당하여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염기훈K리그 맹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였다.

박주영이 부상으로 불참하여서 결국 공격수는 전부 새로운 얼굴들로 꾸려졌다. 김신욱(22), 유병수(22), 지동원(19)로 모두 상당히 어린 선수들이며 모두 K리그 소속. K리그 득점왕 유병수와 U-19 월드컵과 소속팀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지동원의 활약이 관심을 끌고 있다.

중원에서는 K리그에서 맹활약한 젊은 미드필더들인 구자철윤빛가람이 합류하였다. 기성용과 함께 세 명의 조합에 대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중. 최근 기성용의 폼이 부쩍 오르면서 기성용은 고정으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화제의 신성 손흥민이 합류되어 많은 이들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조광래 전 감독은 조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조광래 전 감독이 경남 FC에서부터 3백을 중시해왔고 이를 국대에서도 적용하고 있기에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결국 4강전 한일전에서 2:2 무승부를 기록, 어린 선수들이 통한의 승부차기 패배를 기록하였다. 이후 우즈베키스탄과의 3, 4위전은 이기며 아쉽게 3위에 머물렀다.

경기력 자체는 이 때는 나름대로 평가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무명에 가깝던 이용래가 활발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조광래호의 새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대회를 끝으로 박지성과 이영표가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게 왜 경기력이 이 때까지는 좋았는지에 대한 사실상의 정답이 되었다.

4강전에서 삼연뻥 사건이 터지며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 A매치 경험조차 일천한 젊은 선수들에게 4강전의 승부차기 같은 중압감이 높은 임무를 맡긴 것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표하는 상황. 베테랑 선수들이 킥에 자신이 없는 선수들이 많았지만, 결국 이 선수들을 제대로 설득해서 차게 하지 못한 것이 감독의 지도력 문제고 선수 구성을 그렇게 한 감독의 문제기도 했다.[1][2]

양박쌍용에 대한 고평가가 많았지만 사실 까고 말해서 김정우의 빈 자리를 메꾸지 못한 대회였다. 냉정하게 박주영의 빈 자리는 이 대회에서의 지동원과 구자철이 나름대로 메워줬다. 이 대회는 구자철이 득점왕, 지동원이 득점 2위를 한 대회다. 공격력에서 부족한 것은 없었다. 일본전에서의 2실점도 국가대표 레벨에서도 제대로 된 준척급의 수비력을 갖춘 수비형 미드필더가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실점이다.

공격 루트가 측면에 한정되었으며, 수비에서의 빌드업도 황재원의 롱패스를 통해 단조롭게 풀려나갔다는 단점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조광래의 측면 위주의 플레이는 지동원박주영만큼 중앙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서 측면으로 이동해서 경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광래호는 중앙을 비워놓고 측면에서 경기를 풀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에 무한 스위칭과 패싱 플레이를 강조하는 조광래호는 필연적으로 심한 체력적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이러한 체력 부담에 대해 딱히 대응 방안을 보여주지도 못했다.[3]

이 체력부담에 대해서는 결국 조광래의 선발 실패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외국인 감독도 아니고 한국 선수들을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게 한국 감독의 장점이다.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핑계가 있을 수가 없고 3년 후가 되는 2014년의 월드컵을 대비해 2011부터 조직력 어쩌고 하는 건 결국 헛꿈이다. 2011년의 대회는 알아서 이기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래의 선수 선발 자체는 지나치게 월드컵만 바라보면서 망상을 하고 있는 선발이었다.

이승렬이 시들해졌니, 정성훈이 저조하니 하고 있지만 이 시점에는 그 외에도 이동국, 김은중, 이근호, 정조국, 김영후, 설기현 등의 풍부한 공격 자원이 있었다. 결국 박주영의 부상 대체로 홍정호를 뽑은 것은 그야말로 코메디에 가까운 선수 기용이었다. 그나마 홍정호는 조금 쓰기라도 했으니 낫지만, 유병수는 교체로 넣었다 빼는 최악의 추태를 보여줬다. 그나마 김신욱은 막판에 전봇대용으로 딱 한 번 써서 실효를 보여줬으므로 잘 써먹었던 것이긴 하다.

하지만 결국 유병수와 김보경은 실질적으로 안 써먹었다. 그리고 이 당시 공격진의 연령대가 구자철, 지동원, 유병수, 김보경, 지동원, 이청용, 손흥민, 염기훈, 윤빛가람 등 박지성을 빼면 책임질 만한 사람도 없었다.[4] PK 찰 사람이 없어졌던 것은 100% 조광래의 책임이다. 일본전에서 지동원이 앞에서 못 눌러주면서 조기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그 전까지 계속 선발을 뛰고 풀타임을 많이 뛰던 지동원의 체력 문제도 있고, 결정적으로는 박주영이 다치니까 홍정호를 뽑은 조광래의 책임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보자면 정조국이나 이근호의 무게감이야 그렇다 쳐도 이동국 김은중이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원인데 미리부터 2014년에 대한 헛꿈을 꾸면서 안 뽑은 조광래의 책임일 뿐이다. 까고 말해서 설기현 역시 허정무가 계속 뽑다가 부상으로 안 뽑힌 거라 2011년에 우승을 노리는 거면 그냥 뽑고 봐야 되는 자원인데 조광래가 괜히 2014년 생각하면서 안 뽑은 것이다.

그리고 4백 가동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옛날 한국 감독들처럼 처음에는 곽태휘를 주전으로 쓰다 퇴장당했다고 그 이후에는 선발 제외, 그렇다고 황재원 이정수 조용형 3명 중 2명을 확고하게 주전으로 쓰지 않는 등 거의 뭐 이 대회 우승에는 관심이 없거나 발작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수비진을 가동시켰다.

결국 2014 월드컵만을 망상하던 조광래의 미치광이 광대놀음에 희생된 대회라고 할 수 있다.


[1] 이 때의 패배를 이유로 경질하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시기상조였던 것은 맞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조광래가 뭐 잘한 것도 없었다.[2] 감독의 경질설에 대해서는 아시안컵 4강에서 탈락해서 3위한 감독들이 백이면 백 모두 사퇴했다는 사실이 있고 들 수 있는 예는 2006년 딕 아드보카트 전 감독이 사퇴한 후 대표팀을 이어 받은 핌 베어벡 전 감독을 들 수 있는데, 핌 베어벡 전 감독은 비록 수면 축구라 불릴 만큼 거지같은 경기력(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때의 선수 명단은 거진 2군이라서 핌 베어벡만의 잘못은 전혀 아니다.)을 보여줬지만, 대회 3위를 차지했다. 결국 2011년 조광래 전 감독은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의 선수 중복 차출을 거부해, 축구협회와 심각한 불화를 빚다 2011년 8월 10일, 한일전에서 3대 빵으로 발리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2011년 11월 15일, 브라질 월드컵 지역 예선 레바논전에서 제대로 추태를 작렬시키며 결국 2011년 12월 7일 자로 감독에서 짤렸다. 조광래호 시절에 있던 일들[3] 특히 안 그래도 얇은 공격진에 체력 부담은 더해지는데 한창 뜨는 손흥민이라는 교체 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4] 윤빛가람, 김보경을 동시에 뽑은 게 진짜 최악의 선발이다. 어차피 공미 주전은 구자철이 할 거였고 왼발 스페셜리스트와 윙은 염기훈이 해줄 수 있는데 발이 느려터지고 경험도 적은 공격형 미드필더 서브를 2명이나 뽑을 이유가 없다. 결국 국가대표 경험이 적은 유병수가 실패로 돌아가니까 중앙에서 눌러줄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중앙공격수 자원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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