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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51:06

조신의 꿈

조신지몽에서 넘어옴
1. 개요2. 내용3. 기타

1. 개요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편에 실린 대표적인 꿈 이야기로, 조신몽(調信夢), 조신지몽(調信之夢), 조신설화(調信說話)라고도 한다. 우리 고전문헌에서 일장춘몽 속의 허무한 인생을 그린 원조 격 작품이니, 중국의 한단지몽, 남가일몽에 못지 않게 우리 조상님들 또한 꿈 이야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 플롯은 우리 국문학사상 전기체(傳奇體) 소설의 효시라 일컫는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금오신화에 실린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꿈 속에서는 세속적 욕망에 매우 충실하고 일장춘몽은 그저 형식적 교훈으로만 보이는 후대의 몽자류 소설과 달리, 조신의 꿈은 불교적인 주제를 잘 담은 비극적인 작품이다.

2. 내용

주인공은 신라승려 조신(調信). 조신은 본디 세달사(世達寺)[1]에 있었는데, 절의 장원(莊園)이 명주(溟洲) 내리군(㮈李郡)[2]에 있었으므로 파견되어 장원을 관리하였다.

조신은 명주 태수[3] 김흔(金昕, 803~849)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그 여인과 맺어지게 해주십사 하고 남몰래 기도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연분이 맺어지기는커녕 다른 남자와 혼사가 정해졌다는 소문이 들릴 뿐이었다. 조신은 밤중에 불당에서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사모하던 낭자가 제 발로 절에 나타나 불당 문을 열고 조신을 찾아오지 않는가. 낭자는 웃는 얼굴로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알아 마음으로 사랑하였으니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의 명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무덤에 묻힐 짝이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김씨 낭자 또한 부모가 정한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난 조신에게 연정을 품고 과감히 집을 나온 것.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대로 고향으로 도피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일구었다.

두 남녀는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식 5명을 낳았으나 집은 서 발 장대 거칠 것이 없는 판이었다. 나중에는 그 보잘것없는 누옥도 잃고 온 가족이 함께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먹고 살기를 10년 간 했는데, 입은 옷마저 갈갈이 찢어질 정도였다. 어느 날 명주 해현령(蟹峴嶺)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15살 된 큰아이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자, 부부는 대성통곡을 하며 시신을 길 옆에 묻었다. 그 뒤 남은 가족들이 우곡현(羽曲縣)[4]에서 풀을 엮어 집으로 삼아 구걸로 먹고 살았다. 부부는 늙어서 움직이기도 힘든데, 어느 날 10살 된 딸이 마을에서 구걸을 하다가 에게 발목을 물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가 이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는데 아내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젊었으며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벌써 50년이니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해가 거듭될수록 병은 깊어가는데 굶주리며 추위에 떨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곁방살이나 한 병의 마실 것도 사람들이 용납하여 주지 않으니, 수많은 집 문 앞에서 당하는 그 수모는 산더미같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도 돌보지도 못하는데 언제 부부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밝은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언약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가지처럼 지나갔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예전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뿌리였습니다. 다 함께 굶어죽기보다는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것입니다. 좋다고 취하고 나쁘다고 버림은 사람 마음에 차마 할 짓이 못 되지만,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이 따르는 것이지요. 바라건대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은 아내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자 아이들을 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하였다.[5] 떠나기 전에 아내가 말하였다.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길을 떠나려는데 조신이 꿈에서 깨어났다. 쇠잔한 등불이 가물거리고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버렸다. 마치 한평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겪은 듯 세상사에 뜻이 사라지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또한 자기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조신이 돌아가는 길에 꿈 속에서 큰아이를 묻은 곳에 들러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조신은 미륵상을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은 뒤,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살았다. 이후 조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조신이라는 사람이 스님으로 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운 좋게 그 여자도 조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둘은 사실상 야반도주를 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밑천 없이 대충 가정부터 만들었으니 둘 다 가난에 허덕이며 수십 년간 살다 끝내 첫 아이까지 잃고, 자식들은 구걸로 먹고 살다가 개한테 물리는 지경에 처한다. 조신 부부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서로가 만남이 바로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이혼하기로 한다. 근데 여기까지 전부 다 꿈이었고, 조신은 깨달음을 얻어 속세에 관심을 잃은 후 다른 절(정토사)을 세우고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는 것.

과연 불교에 기반을 둔 삼국유사의 집필 취지에 부합하는 불교식 교훈과 결말로 끝난 이야기라 하겠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곰곰이 궁리해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 스님의 꿈만 그렇겠는가? 현재도 모든 사람들이 인간세상이 즐거운 줄만 알고 기뻐 날뛰며 애쓰고 있으니, 이는 오로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3. 기타

춘원 이광수가 이 작품을 대단히 좋아해서 중편소설 <꿈>을 썼다. 이 소설의 배경은 똑같이 신라시대지만 TV 문학관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바꾸어 방송하였는데, 각색을 대단히 잘했다고 평가받는다. 마지막에 나오는 훈남이 임성민.

신상옥 감독은 이광수의 소설 <꿈>을 굉장히 좋아해서 <꿈>을 두 차례나 영화화했는데, 1954년에는 최은희와 황남 주연이었고, 1967년에는 신영균과 김혜정 주연이었다.

배창호 감독도 1990년에 <꿈>을 영화화했지만, 이광수 소설보다는 삼국유사를 원작으로 했다. 안성기황신혜 주연이고 정보석최종원, 윤문식도 나온다. 시나리오는 배창호 감독과 이명세 감독이 같이 썼다. 꿈 속에서 김흔의 딸이 스스로 조신을 찾아온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조신이 아가씨를 겁탈해 아내로 삼았고, 아가씨의 약혼자인 화랑이 조신 부부를 계속 추적한다는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현실-꿈-현실의 플롯을 가진 소설이 후에 금오신화를 포함해서 많이 등장하고 구운몽에서는 확연히 오마주를 담은 것을 볼 때, 이 이야기는 당시에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듯하다.

각색한 판 중 하나에서는 조신이 여자와 헤어지고 난 후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나무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 자리에 쓰러졌는데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 꿈에서 깨어났다는 판도 있다. 이후는 원작과 동일.

삼국사기에 기록된 명주태수 김흔의 활동시기를 감안해[6] 헤아려보면, 833년-839년으로부터 883년-889년까지[7], 최소 35년 최대 7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누군가가 '조신의 꿈'을 창작했거나 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아 다듬었을 수 있다.[8] 조신과 그 아내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된 시점인 868년, 이야기의 배경이 된 세달사로 어떤 애꾸눈 청년[9]이 출가해서 잠시 몸을 의탁하고, 이 청년은 훗날 절을 떠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데... 시기상으로 볼 경우 그가 세속화 후 몰락한 조신을 반면교사로 삼아 건국 후 원리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띄었을 가능성이 있겠다.


[1] 삼국유사 판본 중에는 세규사(世逵寺)라고 쓴 것도 있으나, 다른 판본들과 비교해보면 규(逵)는 달(達)을 잘못 쓴 것이다. 절 이름은 세달사가 맞다. 하지만 '세규사'라고 쓰인 판본 때문인지 인터넷에서는 표기가 세규사/세달사로 엇갈린다. 궁예가 처음으로 출가한 절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불렸다. 후에 폐사가 되어 잊혔으나, 2012년에 강원도 영월군에서 터를 발굴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2]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누락된 지명이라 지금의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연은 주석을 달아 한자가 비슷한 명주 내성군(奈城郡: 현 영월군) 또는 우수주 내령군(奈靈郡: 현 영주시)과 같은 곳이 아닐까 추측했다. 내리군이 명주 영내의 군으로 기록된 점과 조신이 있던 세달사의 위치를 고려하면 전자가 타당해 보인다.[3] 太守, 옛날 중국의 지방관(地方官)을 이르는 말로 한국과 일본도 한때 이 관직명을 사용했었다.[4]강원도 동해시.[5] 헤어지자고 말하는데 기뻐하다니, 아무래도 힘들게 살아오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린 듯하다.[6] 822년 당나라에 입조했다가 1년 후 귀국한 뒤 남원태수가 되었고, 여러 번 승진해 강주대도독에 이르렀다가 얼마 뒤 이찬 겸 상국이 되었고 839년 대장군이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민애왕이 실각한 뒤부터는 관직에서 은퇴해 소백산부석사(현재 소백산 국립공원에 포함)에 은거하였다.[7] 이를 반영하면, 둘이 급속도로 가난해진 시점은 873년-879년이다. 참고로 조신의 아내의 아버지인 김흔은 849년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다.[8]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김흔 사망 당시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부인이 상주가 되고 이후 비구니가 되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조선~근현대와는 달리 신라~고려시대에는 만약 아들이 없으되 '사위'가 있다면 사위가 장인의 대를 잇기도 하였다. 만약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 있어 정상적으로 정략혼을 했다면, 굳이 자식들과 사위를 제치고 아내가 상주가 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라기에는 실제 지역명이 언급되는 등 구체적인 면을 보여준다.[9] 조신의 아내 기준에서 17촌 숙부이며, 6촌 자매의 시숙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