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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1:17:05

조표(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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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에 대한 내용은 조표(조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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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豹
? ~ 196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영웅기》에서는 도겸을 섬겼던 장수로 기록되어 있다.

2. 정사 삼국지

194년도겸의 명령으로 유비와 함께 조조군을 담현 동쪽에서 요격했다가 격파되었다. 도겸이 서주를 유비에게 넘기자 유비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유비와 원술이 대립할 때에 장비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사망은 도겸의 군사이던 단양병들의 이탈을 초래하였고, 단양병들은 소패여포를 불러들여 하비의 성문을 열었다. 여포는 장비의 병력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이 사건으로 유비는 근거지를 상실하였으며 해서(海西)로 도주하였다.

2.1. 분석

당대의 1차 사료인 《영웅기》는 조표를 도겸의 구장이라고 서술하였다. 도겸이 단양 출신이라는 점, 그의 사망이 단양병의 이탈을 초래하였다는 점 등을 볼 때 도겸이 서주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부곡의 일부, 즉 무력에 기반한 측근 인사로 추정되곤 한다.[1]

지위에 대해서는 하비를 수비하는 장수(守將)라는 표현과 하비상(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후자인 (相)은 후한 군국제에서 번국의 실권자로써 태수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이다. 즉 유비군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였다는 뜻이며, 사망 당시에는 관우나 장비보다 관직이 높고 저명한 호족 겸 유력인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도겸 휘하에서 복무하던 장수로서 도겸 휘하 군사력의 구심점(혹은 적어도 구심점 중 하나)로 보인다는 점, 유비 휘하에서도 관직을 인정받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조표 사후 단양병들의 반응을 볼 때, 그에 대한 장비의 적개심과 살해는 유비 세력 전체에 상당히 위험천만한 결과가 되었다.

유비가 외정에 나가 원술과 일진일퇴를 반복할 무렵 장비는 정확히 명시되지 않은 이유로 조표를 살해하려 했다. 위기감을 느낀 조표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성 내부가 두 파로 갈라졌을 가능성이 있다.[2] 장비가 결국 조표를 살해하자 성은 혼란에 휩싸였다. 단양 출신이며 유비의 중랑장이었던 허탐은 여포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구원에 응한 여포와 내부 단양병들의 호응에 의해 장비가 패퇴함으로서 유비는 기껏 얻은 근거지를 상실하게 된다. 영웅기의 묘사를 보면 여포가 근처에 오자 단양병들이 '다시 살아난듯이 기뻐했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단양병들은 조표를 살해한 장비가 자신들까지 죽일 거라는 공포에 휩싸였던 상태로 보인다.

진수선주전에서는 단지 배반하였다고 적을 뿐 구체적인 경과를 누락하였고, 마찬가지로 여포전이나 장비전에서도 전후 사정 혹은 반란 사실 자체를 적지 않았으나, 배송지가 주석으로 추가한 영웅기 기록으로 구체적인 맥락이 남게 되었다.

유비에게 호의적인 팬덤 일각에서는 반란의 책임을 조표에게 돌리는 추론도 종종 이뤄지지만 사서에서는 조표가 배반할 마음을 미리 품었다던가 하는 서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장비가 죽이려고 하자 이에 대응한 기록만이 전할 뿐이다.

3. 삼국지연의

조조서주를 처음 침공할 때 등장, 하후돈과 맞서 싸웠으나 갑자기 바람이 크게 불고 모래가 날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작가의 창작으로 일찍 요절한 여포의 둘째 부인으로 설정되었다. 이 아니라 차처(次妻)라고 연의 원문에서 기록되어 있다.

서주성을 지키던 장비술 강요를 자꾸 하자, 처음에는 사양하려다가 좋게 구슬려온데다 장비의 성격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한 잔을 억지로 마셨고, 두 번째 잔도 역시 사양하다가 끝내 장비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형에 처해진다. 조표는 이에 "부디 내 사위 여포의 체면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오."라고 사정을 빌지만, 오히려 장비는 "원래는 진짜로 때릴 맘이 없었는데 네놈이 안 그래도 재수없는 여포를 들먹이면서 협박하니 때려야겠다! 네놈을 때리는 게 여포를 때리는 거랑 같다!"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주사를 부리는 장비에게 채찍으로 실컷 얻어맞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표는 장비가 술에 곯아 떨어진 틈을 타 사위 여포를 성안으로 끌어들여 장비를 제거하려 한다. 난전 중에 도주하던 장비를 죽이려고 쫓아갔지만, 한 창에 끔살당한다.

장비의 살해 시도에 '대응'하는 입장이었던 역사상 조표에 관한 기록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조표와 여포 간의 친척 관계를 설정하여 조표가 여포와 내통할 작중 나름대로의 연결 장치를 만들고 장비의 조표에 대한 적대 원인을 장비의 주벽으로 설정함으로써 장비를 단순 용장일 뿐만 아닌 나름의 결함을 갖춘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만든 한편, 최종적으로는 조표를 술자리에서의 감정적 불화로 적을 끌어들인 인물로 만듦으로서 작중의 주인공이 되는 유비 일행의 입장을 최대한 변호해준 역사적 고증과 문학적 허구가 어울리게끔 창작한 편이다. 현대 창작물들에서는 '선한' 유비의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표를 악의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엑스트라에 불과한 조표를 아예 적극적인 악인으로 만들어 유비 일행을 띄워주는 편이기에, 같이 놓고 비교해보면 연의가 그나마 긍정적이고 공정한 서술로 보이게 된 편.

사실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부분을 보면 장비가 조표한테 한 행위는 그저 빼도 박도 못할 술 강요+패악질로 인한 자업자득에 불과하고, 저절로 조표 쪽에 동정심이 들지만, 조선족 작가 리동혁이 쓴 본삼국지를 읽어보면 장비도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한다. 중국의 술문화에서는 술자리에 초대할 정도면 어느 정도 상대와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이고 참석하고 나서는 질탕 마시는 것이 예의라고 하는데, 따라서 장비도 나름 조표를 신경써서 술자리에 초대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자리에서 조표는 장비의 술을 거절해버렸으니 어찌 보면 장비를 대놓고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정 을 거절한다면 대놓고 술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고, 정말 체질에 안 받는다면 술을 아예 못 마신다고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사전에 거부하는 것이 예의고, 즉슨 조표는 원래부터 저 자리에 참석하면 안 됐다는 것. 그러나 조표를 한번 더 변호해 주자면 장비가 조표의 상관인 것과 더불어 장비의 불같은 성격까지 고려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초대받고 다 참석을 하는데 조표만 참석을 안 한다고 하면 불같은 장비가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이겠는가? 오히려 여포가 사위인 것을 꼬투리잡아서 더 갈굴지도 모르는 일. 무엇보다 큰형님 유비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그 전부터 신신당부 했는데도 그새를 못 참고 또 멋대로 술을 마신 것도 모잘라 술 강요와 더불어 주폭질을 부린 것이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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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맡긴 선주전의 서술을 토대로 이때 유비의 휘하로 배속되었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료상으로는 이러한 추측을 확정지을 근거가 전무하다.[2] 유비는 도겸 사후 원술에서 원소로 줄을 갈아탔는데 도겸의 구장인 조표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