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헤이스팅스 John Hastings | |
생몰년도 | 1347년 8월 29일 ~ 1375년 4월 1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켄트 서튼 밸런스 성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 |
아버지 | 로렌스 헤이스팅스 | |
어머니 | 아그네스 모티머 | |
아내 | 마가렛 플랜태저넷(약혼자), 앤 매니 | |
자녀 | 존 헤이스팅스 | |
직위 | 헤이스팅스 남작, 펨브로크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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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맞섰다.2. 생애
1347년 8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 서튼 밸런스 성에서 초대 펨브로크 백작 로렌스 헤이스팅스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프랑스의 이자벨의 애인이자 권신이었던 로저 모티머의 딸 아그네스 모티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로렌스는 그가 태어난 지 1년 후 사망했고, 존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후견을 받았다. 그의 재산에 대한 후견권은 어머니 아그네스, 할머니인 레이본의 줄리안, 그리고 제3대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에게 분할되었다.1362년, 존은 아버지가 소유했던 영지 보조금을 받기 시작했다. 1364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있는 아버지의 땅 전체에 대한 후견인 자격을 받았고, 할머니가 보유한 모든 땅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66년 12월 왕족의 일원으로서 에드워드 3세의 한겨울 향연에 참석했다. 1368년 9월 12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이듬해에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맹세한 뒤, 그 대가로 모든 영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1359년 5월 19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왕비 예배당에서 에드워드 3세의 넷째 딸인 12살된 마가렛과 약혼했다. 존과 마가렛이 성년이 되면 결혼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마가렛은 불행히도 1361년 10월 1일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1368년 7월, 존은 백년전쟁 초기에 맹활약한 기사 월터 매니와 노퍽 백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토머스 브라더튼의 딸인 노퍽의 마가렛의 여식인 앤 매니와 결혼했다. 앤 매니는 존의 약혼자였던 마가렛과 사촌 관계였기 때문에, 존은 이 결혼을 이루기 위해 교황에게 특별 허가를 요구했다. 1368년 7월 1일, 교황청은 캔터베리 대주교를 대리로 삼아 특별 허가를 내리면서, 그 대가로 세인트 폴 대성당 수리를 위해 1,000 금 플로린을 기부하게 했다.
존은 1369년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함께 아키텐에서 프랑스군과 대결하고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를 돕기 위해 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생 말로에 상륙했다. 이후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남쪽으로 420km를 이동한 끝에 4월 말에 앙굴렘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합류했다. 이후 페리고르로 진군해 그 지역 일대를 약탈했으며, 11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부르데유 성을 점령했다. 존은 랭글리의 에드먼드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뒤 앙주와 푸아투 등지에서 약탈 행진을 이어갔으며, 6월까지 푸아투 북쪽에 대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그와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존 챈더스와 합류했다.
1369년 6월 말 랭글리의 에드먼드, 존 챈더스와 함께 앙주로 진군해 라로슈쉬르온의 수비 대장이 투항한 덕분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루아르 계곡으로 진군해 소뮈르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소뮈르와 낭트 사이의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2개의 주요 다리를 모두 점령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이로 인해 푸아투 서부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의 기세가 약해졌다. 그러나 그는 챈더스와 곧 심한 갈등을 벌였다. 챈더스는 존이 아직 전투 경험이 많지 않으니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존은 챈더스가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단지 깃발 기사일 뿐이기에 계급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고, 그의 밑에서 봉사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두 사람은 군대를 제각기 나누어 별도로 지휘했다.
1369년 12월, 존은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앙주를 재침해 푸이레논 일대를 약탈했다. 이때 루이 드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 600명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 100명이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모든 보급품, 말, 전리품을 상실했다. 그는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기사단 소유의 집으로 후퇴해 돌담을 주변에 쌓고 농성하면서, 챈더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챈더스는 곧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를 구해줬지만,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감사 인사를 건내지 않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챈더스는 1369년 12월 말에 푸아티에를 급습하고자 루삭 다리로 이동하는 프랑스군을 요격하던 중 적병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사흘 만에 사망했다.
1370년 초, 그는 1369년 말에 사망한 토머스 뷰챔프의 뒤를 이어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해 후반에 리모주 공방전을 지휘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군대에 가담했다. 1371년 1월 흑태자 에드워드가 중병에 시달린 끝에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에도 아키텐에 남았고, 곤트의 존의 지휘하에 1371년 1월부터 2월까지 몽파옹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371년 2월 런던으로 소환된 뒤 펨브로크 대표로서 의회에 출석했으며, 청원 심사관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왕실 성직 장관들을 탄핵해 총리를 맡고 있던 위크햄의 윌리엄과 재무장관을 맡고 있던 토마스 브랜팅엄이 사임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의 직위는 평신도가 차지했다.
한편,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는 존이 프랑스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존의 영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존이 사망했다는 헛소문을 접하자, 그는 이를 사실이라고 믿고 펨브로크 영지의 상속자로 자처했으며, 펨브로크 가문의 노샘프턴셔 사유지인 야들리 헤이스팅스 마을 인근에 들어가 사냥했다. 1371년 초 잉글랜드에 돌아온 존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그해 9월 말버러 성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레지날드 그레이를 처벌하라고 주청하려 했다. 그러나 왕실 시종인 윌리엄 라티머가 왕을 만나게 해주는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에 존은 동료 귀족들에게 라티머가 자신 같이 저명한 청원인이 왕을 뵙지 못하게 한 것은 권력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레지날드 그레이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해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마치 백작 로저 드 모티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야들리 헤이스팅스에서 존과 화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존은 이를 듣지 않았고, 레지날드 그레이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주변 귀족들이 만류했기 때문에 실제로 벌이지는 않았다. 1372년 초 프랑스로 떠나기로 한 그는 자신이 만약 자식이 없는 현 상황에서 죽게 되면 레지날드 그레이가 아니라 베르가베니 남작이자 자신의 사촌인 윌리엄 뷰챔프에게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한편, 아키텐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프랑스 북서부에서 약탈 행진을 벌이며 아키텐으로 남하하던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 6,000명은 1370년 12월 4일 퐁발랭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궤멸되었고, 지난날 흑태자 에드워드가 전설적인 승리를 거뒀던 푸아티에는 1372년 게클랭에게 공략되었다. 급기야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 마저 포위되었다. 이곳 마저 상실한다면, 아키텐과 잉글랜드 간의 해상 보급이 끊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곤트의 존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1372년 4월 20일 존을 아키텐 보안관으로 선임하고, 잉글랜드 육군 및 해군을 이끌고 라 로셸을 구원하게 했다. 존이 이끄는 함대는 3척의 대형 전함과 14척의 소형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사 160~400명과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을 실은 수송선 50여 척이 뒤따랐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복무하는 잉글랜드군의 6개월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12,000 파운드도 실렸다. 존의 함대는 6월 초 플리머스에서 출항해 라 로셸로 항해했다.
한편,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엔리케 2세는 자신이 페드로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왕위를 쟁취하는 데 도움을 준 프랑스의 요청에 기꺼이 따르기로 하고, 제노바 출신의 제독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휘하의 함대를 아키텐으로 파견했다. 함대 규모는 갤리선 12척, 범선 8~10척이었는데, 하나같이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컸으며 적 선박에 큰 돌을 던질 수 있는 투석기가 장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 선원들의 항해술은 탁월해서, 적보다 큰 배를 가지고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1372년 6월 22일 늦은 오후, 존은 강력한 카스티야 함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라 로셸 항구 외곽에 도착했다. 카스티야 함대는 즉시 잉글랜드 함대를 향해 달려들어 적선 2~4척을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장궁병들이 높은 위치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정확히 쏘며 분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은 적이 배를 건너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기에, 카스티야군은 그들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조수가 높아지자, 두 함대는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팸브로크 백작은 항구에서 다소 떨어진 해안으로 철수했고, 카스티야 함대는 항구로 돌아갔다.
그날 밤, 라 로셸 수비대의 기사인 존 하피든이 바지선 몇 척에 소규모 병력을 태운 뒤 잉글랜드 함대에 몰래 가담했다. 그들은 라 로셸 수비대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조속히 적을 물리쳐달라고 호소했다. 부하들은 카스티야 함대의 강력한 전투력을 당해낼 공산이 없다고 보고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존은 존 하피든의 설득에 넘어가 해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6월 23일 아침, 두 함대는 다시 라 로셸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이때 카스티야 함대는 적선의 갑판과 장비에 기름을 뿌리고 불화살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수많은 잉글랜드 선박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다음 몇 시간 동안 잉글랜드 함대 전체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존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생포되었고, 존 하피든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날 생포된 기사는 총 140~4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전원이 사슬에 묶인 채 카스티야 항구인 산탄데르로 끌려갔다. 카스티야 측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 라 로셸은 잉글랜드 함대가 파괴된 후에도 계속 버티다 9월 7일에 항복했다.
존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산탄데르로 끌려갔다가 다시 쿠리엘 데 두에로 성으로 끌려간 후 그곳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카스티야인들은 수감자들을 목줄에 묶인 개처럼 사슬이나 끈으로 목을 묶었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방치했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서 아내가 아들 존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료 수감자였던 퍼넬스 영주 존 트레일리가 훗날 기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그 아들이 상속인 없이 죽는다면 레지날드 그레이가 상속받을 여지가 생겨버렸다면서, 아들의 출생에 오히려 분노했다고 한다.
몇 달 후, 엔리케 2세는 존의 몸값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프랑스 무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120,000 프랑에 판매하기로 했다. 그러나 몸값을 마련하는 데 진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1375년 초까지 감옥에 계속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그의 몸값에 대한 첫번째 분할금이 지불되었고, 그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이러다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자, 카스티야 측은 그를 가석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게클랭에게 넘겨진 뒤 칼레로 이동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끝내 감옥에서 얻은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1375년 4월 16일 피카르디에서 사망했다.
존의 아내 앤 매니는 남편이 라 로셸을 구하고자 출전한 직후인 1372년 10월에 외아들 존 헤이스팅스를 낳았다. 이후 윌리엄 뷰챔프의 후견을 받으며 성장했고, 8살에 곤트의 존의 딸인 17살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지만, 14살 때 23살된 엘리자베스가 존 홀랜드의 아이를 임신한 게 밝혀지면서 취소되었다. 이후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딸인 필리파 모티머와 결혼했다. 그러나 1389년 12월 25일 우드스톡 궁전에서 열린 성탄절 기념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상대의 창에 사타구니를 찔리는 바람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그해 12월 30일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펨브로크 백작위는 단절되었고, 켄트 내 펨브로크 영지는 존 헤이스팅스가 그토록 미워했던 레지날드 그레이의 장남인 레지날드 그레이에게 넘어갔다. 이는 생전의 존 헤이스팅스가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