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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11:03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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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AP20110114028801008_P2.jpg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인질로 잡힌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직원들

تصرف سفارت آمریکا , گروگان‌گیری در سفارت ایالات متحده آمریکا

1. 개요2. 배경3. 미국의 오판과 인질극 발발4. 종결5. 이후
5.1. 메카 유혈사태5.2. 레이건 측근의 폭로
6. 여담7. 미디어

1. 개요

1979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미국인 50여명이 이란인질로 억류되었던 사건. 미국에서는 이란 인질 사태(Iran hostage crisis)라고 불린다.

미국이란이 적대 관계가 된 대표적인 원인이다.

2. 배경

이란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팔라비 왕조의 압제를 단지 친미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하던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팔레비 왕조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물밑에선 반발심리도 커지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여러차례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정권의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 와중에 이란 시아파의 최고 성직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강제로 이란을 떠나야 했다. 호메이니는 터키로 망명했다가 결국 프랑스 파리에 자리잡아 이란내 반팔레비 운동을 부채질하였다.

1978년 엄청난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였고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휴양을 이유로 이란을 떠나서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란 혁명이 성공하고 바크티아르가 주도하던 과도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아무런 힘이 없었고 팔레비 절대왕정에 반발했던 민주주의 세력, 외세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여기에 서구식 근대화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등 3개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15년간 해외에 망명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2월 전격 귀국해서 엄청난 대중을 동원하면서 주도권을 쥐었다. 호메이니가 주도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바크티아르 과도정권을 붕괴시켰다. 바크티아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호메이니가 바크티아르의 즉각적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연정 협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바크티아르는 프랑스로 망명했으나 호메이니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하메네이 측에서 파견한 암살자의 총격을 받아 1991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호메이니는 1979년 3월 30일~31일의 이틀간의 국민투표에서 경이적인 비율인 99.3%의 찬성으로 신권적 지배, 즉 이슬람의, 이슬람을 위한, 이슬람에 의한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기존 팔레비 왕조가 추진했던 모든 서구식 제도, 관습, 그리고 양태를 부정하고 이슬람 원점으로의 회귀라는 명분을 외치면서 중동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고 나섰다. 따라서 서방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이면서 원한관계에 있던 미국에 대한 도발은 어떤 형태로든 예상되고 있었다.

미국도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혁명 후 군수 부품 공급 등을 통하여 관계정상화와 분쟁 예방을 꾀했다. 40년이 넘게 지난 후에 믿기지 않지만 적어도 당시만 하더라도 신혁명 정부 이란이나 미국이나 변한 현실 자체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시작부터 맹목적 증오심으로 가득찬 관계는 아니었다.

3. 미국의 오판과 인질극 발발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이란의 이러한 경직된 입장을 오판해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전 국왕의 입국을 허가하는 바람에 이란의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의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팔레비 왕의 지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단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이미 이란 혁명으로 실권하기 전 프랑스 의료진으로부터 암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단 파견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팔레비를 따르던 왕당파는 물론이거니와 반팔레비 운동을 같이 했던 민주주의 세력까지 대대적으로 숙청했는데 샤(팔레비)는 1979년 5월 궐석재판에서 본인과 본인의 일가족들인 레자 팔레비 전 왕태자와 파라 디바 전 왕후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1]

팔레비는 암 말기라서 송환되더라도 사실상 오래 못 살고 곧 죽을 운명이었다. 차라리 팔레비를 송환했다면 미국은 굳이 이란과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팔레비를 송환한다면 미국 영향 하의 독재자들에게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신호를 주는 꼴이므로 그것도 선택하기 힘들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볼때 이미 권력도 잃고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아서 아무 쓸모도 없는 팔레비의 미국 입국을 허용한 것 자체가 애초에 실수였다. 이란 정권을 장악한 이슬람 급진, 강경 세력들이 얼마나 구 팔레비 체제를 증오하고 있었는지 미국 수뇌부가 전혀 파악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2]

파일:us-embassy-tehran.jpg

결국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중 미국 대사관으로 난입, 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미 급진 강경파가 장악한 이란 혁명 정부는 미국과 일전불사의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금지 조치에 이란의 대미 석유 금수 조치, 이란의 재미 예금 전액 인출 및 재이란 미국 투자의 국유화 조치에 미국이 재미 이란 공적 자산 동결조치로 응수하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 만인도양에서 미 해군의 무력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미국 내 이란 중앙은행 예금에 대한 동결 조치로 인해 이란의 중앙 은행은 미국의 체이스은행에 이자 지급을 못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체이스은행은 이란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하였다.

일련의 사태로 인해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이란은 미국에 대한 단죄 및 사과 요구까지 확대시켰고 미국 역시 미 대사관 난입과 인질사태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국과 이란의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잠시나마 온건파의 중재로 협상의 기미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강경한 자세를 내비침으로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미국은 1980년 4월 7일에 공식적으로 이란과 단교했으며 미국 내 이란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육/해/공/해안경비대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계획 차질과 항공기 충돌 사고로 애꿎은 미군 수송기 승무원 8명의 목숨만 앗아가는 결과만 얻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4. 종결

이렇듯 평행점으로 치달아 앞이 보이지 않던 인질 사태는 호메이니가 유화적인 태도로 나오고 1980년에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전환점을 맞이한다. 알제리의 중재 하에 미국이 동결된 팔라비 왕조 당시의 재미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하고 이란이 사건 발생 444일만인 1981년 1월 20일에 억류된 인질 전원을 석방시키고 미국으로 귀환함으로 막을 내렸다.

인질이 석방된 1981년 1월 20일은 로널드 레이건지미 카터의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카터가 임기 중에 인질 사태를 해결할 기회를 끝까지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란 측의 의도를 반영한 날짜 선정이었던 셈이다. 인질들은 이란 측이 제공한 여객기 편으로 미국 본토에 내렸고 이란에서 고생했던 터라 인질들은 내리자마자 공항에서 이륙을 기다리던 조종석의 이란 조종사들에게 비행기 밖에서 쌍욕을 퍼부었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팔레비 전 국왕은 1979년 12월에 사실상 미국에서 쫓겨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집트로 가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보호 하에 지내면서 투병하다가 1980년 7월 26일에 카이로에서 병사했다.

5. 이후

이 사건 이후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파탄이 났으며 국제적으로 미국의 인도양, 아라비아해 지역의 군사력 증강을 초래했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세력확장을 두려워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를 야기했다. 여기에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종파적 갈등의 재개는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권의 분열로 표면화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에 데인 서방 세계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왕조 국가들, 심지어 중소결렬 이후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소련중국까지 대동단결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이라크를 지원했다.

단 소련은 시간이 흐르자 양다리를 걸쳤다. 이때 팔레비 왕조시절 도입해서 이란군이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던 미국제 무기의 일부가 소련에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소련이 이란에서 F-14를 넘겨받아서 분석했다는 썰이다.

미국에선 지미 카터 대통령이 '독수리 발톱 작전'의 대실패와 인플레이션 때문에 인기가 폭락해 대선에서 강한 미국을 외친 공화당로널드 레이건에 참패했다. 특히 도덕 외교를 내세운 지미 카터 행정부가 인질 석방 때 이란에게 저자세로 나온 것이 미국에서는 굴욕 외교, 행정부의 실패로 여겨졌고 미국 정치권의 전반적인 보수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또 '독수리 발톱 작전'의 대실패로 체면을 구긴 미군은 실패 원인을 각 군간의 협동체계 미비, 준비 부족으로 분석하고 대책으로 미국 특수작전사령부를 창설해서 각 군의 특수부대를 한 데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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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은 반미 선전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대사관의 맞은 편에 있는 한 건물 벽면에는 사진처럼 반미 선전 포스터를 대문짝만하게 그려 놓았다.

5.1. 메카 유혈사태

한편 이란 인질 사태 직후인 1979년 11월 20일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노선 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카바신전이 일단의 무장 괴한 들에게 점거되고 수백 명이 인질로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 날인 11월 21일 이슬람력으로 1400년 원단(元旦)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권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 습격 사건의 배후에는 이스라엘미국이 있다."는 괴소문이 떠돌아서 이슬람권 국가에서 격렬하고 파괴적인 반미 운동이 연이어 발생하고 악성 루머가 연이어 돌아 사태가 증폭되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경비대로 하여금 진압을 명령해 사우디 군경 127명과 폭도 117명이 죽는 엄청난 유혈참사 끝에 사태를 진정시켰는데 이 점거 사태를 주도한 괴한들이 서구식 근대화를 부정하고 이란식 이슬람 혁명을 추종하는 교조적 광신도들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추종 사례로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게 감명받은것 뿐이지 구성원은 시아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원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가를 세우는 데 지극히 큰 공헌을 했던 이크완이라고 불리는 네지드 지방의 극단주의적인 베두인 부족민들이었다.

본래 사우드 왕조는 근본주의적인 와하비 신학자들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잡아 전투민족으로 이름 높았던 가문으로 오스만 제국 말기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시시각각 들이닥치던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경계한 강성 베두인 부족들이 사우드 왕가를 연결점으로 정치적 동맹을 구성해 원래 두 성지의 관리자이자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 상대로 반란을 주도했던 헤자즈하심 가문을 꺾으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후 이븐 사우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근대 국가의 요구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근대화, 세속화를 추구했는데 보수 성향 울레마와 막상 정권 잡게 도와주니 토사구팽당한 베두인 이크완 세력에겐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사건 발발 당시 재수 없게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장관이었던 왕자는 해외 순방을 가 있었고 할리드 왕은 병 걸려 몸져 누워 있었으며 워낙 전례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라 딱히 진압할 대테러 특수부대도 없어서 무려 36시간 동안 대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성지 중 성지라도 이런 경우에는 무력 진압을 할 수밖에 없다는 무슬림 신학자단, 즉 울레마의 승인을 받고 할리드 왕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엉뚱한 프랑스GIGN를 데려와 진압했다.

성지 중의 성지에서 유혈사태라는 엄청난 신성모독 사태가 터진 건 이크완 베두인 테러범들의 귀에 바람 넣던 근본주의적 와하비 울레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보수 신학계의 무서움을 체감한 할리드와 후임자들은 거꾸로 21세기 우리에게 익숙한 그 사우디 꼴을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근대적 교육 과정, 문화 예술, 비이슬람 문화유산들이 죄다 침해당하였고 여성들에개 강제로 베일을 씌운 다음 참정권, 사회 활동의 기회도 전적으로 박탈해 버렸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우디도 나름 세상의 흐름에 맞추고 있던 나라였는데 이런 초유의 사태를 겪은 후 맛이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사우디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전체에서 일어났다. 60-70년대만 해도 이슬람권에서는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같은 세속적인 근대주의적 이념들이 주도적이었지만 이 메카 인질극 사태, 이란 혁명, 소련의 아프간 침공 등을 차례로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는 2020년대 들어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 정책으로 예전보다는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다.

결국 1979년 베두인 부족의 메카 테러 사건은 미국-이란 인질 사태에 악재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팔레비 왕조를 끌어내린 시아파이란 혁명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사우디로 대표되는 친미 성향의 수니파 아랍 왕조 국가들과 이란과의 정치적 대립을 야기시켰다.

5.2. 레이건 측근의 폭로

2023년 3월 18일 보도된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벤 반스전 미국 텍사스주 부지사가 1980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측근인 텍사스 주지사 코널리 주니어와 공작을 벌였다고 고백했다 # 요컨대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이 자신들이 대권을 잡을 경우 카터 정부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 줄 테니 지미 카터 임기 중에 인질을 풀어 주지 말라는 협상을 했다는 것.

사실 레이건과 이란의 비밀협상설은 이전에도 제기된 바 있었다. 카터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비서관이었던 게리 식은 1991년에 펴낸 "10월의 서프라이즈"라는 책에서 레이건 팀 선대위원장인 케이시가 1980년 7~8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이란 대표들과 만나 이란이 선거 뒤로 인질 석방을 늦춰 주면 레이건 차기 행정부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이 제기되자 미국 의회 상하원은 합동 조사를 통해서 케이시가 당시 마드리드에 있지 않았다면서 이 주장의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케이시가 당시 마드리드에 체류했다는 1991년 11월 백악관 보고가 나중에 밝혀져 의회 조사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나중에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지면서 이란에 대한 무기 지원이 사실로 드러났다.#

2023년 3월 22일 뉴욕타임즈의 후속기사에서 당시 인질 피해자들의 엇갈린 반응을 보도하였다. 당시 대사관 인질 피해자였던 림버트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코널리가 정치적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라면서 "단지 우리가 강하게 의심해 왔던 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고 밝혔다. 림버트는 카터가 자신들을 안전하게 구출하기 위하여 대통령직을 기꺼이 희생했다고 말했다.

6. 여담

이 사건은 그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경위가 상당히 골때리는데 사건 당시 대사관 직원들이 인질로 잡히기 전 기밀문서를 파쇄기에 넣어 모두 파쇄했는데, 대사관 내 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인질범들이 할 일이 없어서(...) 파쇄기에 갈아넣은 문서들을 하나하나 맞춰 복원하다가 모사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7. 미디어

아르고는 당시 대사관을 탈출했던 6명의 직원들을 구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기업가 로스 페로는 이 사태 당시 함께 이란에 억류되었던 자신의 회사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전직 CIA 요원 및 전직 그린베레 대원들을 고용해 전원 구출해 왔는데 이때의 일을 논픽션 독수리 날개 위에로 펴내고 이 일을 바탕으로 미국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왓치맨에서는 정부의 첩보요원 히어로인 코미디언이 이 사태를 해결하였다.[3] 현실 역사와는 정반대로 3선째인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일어났고 성공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승리부터 시작된 극우화가 심화되는 계기가 된다.

김민수대체역사소설인 한국군의 남미 반미 정권 붕괴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설정의 매직 호크에서도 로스페로가 특수부대원들의 공로를 인정한 상류층이란 대목이 드러난다. 양대 정당이 이들의 공로를 무시하였다는 것과 앞으로의 위기를 표현한 설정이기도 하다.

냉전 시대를 다룬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의 도입부에서 스토리 진행의 발단이 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아라쉬 카디바르와 카심 자바디라는 이란 테러리스트 출신 가상의 주모자들이 해당 사건을 일으켰고 미국 정부는 이들을 추적해 체포 또는 암살하는 불법 작전을 펼쳤다는 설정이다.

2017년 3월 12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기사


[1] 하지만 이 궐석재판에서 구 팔라비 왕족들 전원이 다 사형 선고를 받았는지는 현재까지 서방 일각에서도 논쟁 중이다.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만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뿐만 아니라 배우자인 파라 황후와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그의 자녀들까지 전부 다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팔라비 구 왕가의 이란 탈출 이후 팔라비 2세 전 국왕에게 선고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 등 나머지 구 왕가 일원들에게까지도 사형이 선고됐는지는 불확실하다.[2] 당시 카터 행정부의 고위층들이 퇴임 후에 한 인터뷰들을 보면 팔레비의 미국 입국에 이란 신정부가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의례적인 멘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3] 코미디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잔인하게 진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