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계유선방송은 난시청 해소를 위해 개별 사설 사업자가 정부에 신고 후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을 중계하는 사업자를 의미한다. LG헬로비전, SK브로드밴드와 같은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와는 다른 개념이다.[1] 본래 외딴 섬이나 산간오지 마을 등 에서 라디오를 공동 청취하기 위해 만든 공청사가 시초이다 보니 공청이라는 별칭으로도 흔히 불렸다.[2]2. 상세
과거 중계유선방송(성동구 국제유선방송)[3] 안내방송. 녹화된 내용으로 보아 시기가 2000년 2~3월로 추정된다. |
TV 난시청 해소를 위해 공용 안테나로 지상파 방송을 수신하여 케이블로 각 가정에 중계 전송하는 사업이다. 쉽게 말해서 수신 감도가 좋은 고성능의 안테나로 KBS, MBC를 받아와서 각 가정에 케이블로 뿌려주는 형태다. 업계에서는 RO(Relay Operator)라는 약칭으로 케이블TV(종합유선방송)인 SO와 구분해서 부른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남아있는 사료가 없으나[4] 일반적으로 1960년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본래 라디오조차 수신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라디오 공동 청취를 위한 중계방송으로 시작하였으며, 이후 소규모 TV 공청사가 되었다.
과거 TV 채널이라고는 지상파만 존재하였지만, 방송국이 자체 송출하는 전파의 품질도 낮았거니와 한국의 지형상 가정에 설치된 안테나로 뚜렷하게 TV를 시청할 수 있는 권역이 얼마되지 않았다. 난시청 해소는 1995년 3월 케이블TV(종합유선방송) 출범 이전까지 한국방송공사의 주요 과제였을 정도이며, 난시청 가구는 수신료가 면제되었다.[5]
그러나 1980년대 이전에는 TV 수상기에 RF단자가 존재하지 않아 중계유선방송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다. 이후 수신 단자가 설치된 컬러TV가 보급되면서 중계유선방송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6]에는 중계유선방송 시설 없이 TV를 시청하는 가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흥했다. 1980년대 말에는 사업자만 921개에 달했고, 가입자도 230만가구에 이르렀다. 1990년대가 되면 가입자가 700만 가구에 이르렀을 정도로 흥했다.
중계유선방송이 흥했던데에는 난시청 해소라는 공익적 목적도 있었으나 진짜 이유는 재방송 송출과 국내외 위성방송 중계 송출이였다.[7]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매우 강조했으며, 지상파 방송은 오전 10시~오후 5시 30분까지는 전파를 송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계유선방송 사업자들은 이런 지상파 정파 시간대에 2번에서 13번 채널[8] 사이로 전 날 방송한 컨텐츠를 녹화 후 재송출해 주고 있었다. 당시 SBS가 송출되지 않던 지방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아예 SBS 컨텐츠 전용 채널을 만들어서 테이프 넷 형식으로 송출해주기도 하였기에 중계유선방송은 나날이 성장세에 있었다. 또한 일본 NHK BS1, BS2 등의 해외 위성방송도 송출해주었는데, 홍콩 STAR SPORTS 채널이나 일본의 WOWOW 채널 문서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 유명한 STAR TV의 풋볼 아시아도 중계유선방송을 통해 불법(?)으로 전송되던 컨텐츠 중 하나였다.
3. 문제점
동네 유선방송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별(시/군/구)로 송출하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이들 사업자를 관리 및 감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난시청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여 지역별로, 심지어는 읍/면/동 단위로 소규모 사업자들이 난립하면서 통제가 더더욱 어려웠다.위에 언급된 국내외 위성방송 중계 송출은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제제 수단이 없어서 거의 모든 사업자들이 무단으로 중계 송출하고 있었다. 2002년 3월 이후로는 법제화를 통해 역외 재전송은 완전 불가하다. 대신 그 빈 채널에는 계약을 맺은 케이블PP 방송으로 바뀌었다.
또한 일부 사업자들은 비어있는 대역에 채널을 만들어 선정성 높은 컨텐츠를 송출하기도 했다. 이런 사업자들이 대부분 영세한 업체이다 보니 사내 통제 시스템 및 단속이 미흡하여, 직원이 개별적으로 시청하려던 불법 컨텐츠가 고스란히 유선방송을 통해 송출되는 사고도 빈번했다.
당시에는 중계유선방송에 공익적 목적이 강하다고 봐서 문제시 삼지 않았으나, 지상파의 인기 컨텐츠를 무단 복제하여 재방송하였기에 저작권을 무단 침해하는 사례가 다반사였다. 문제는 지상파의 재방송 수준이 아니라 가입자 유치를 위해 많은 컨텐츠를 무단으로 송출한 것이었다. 이는 저작권법 강화와 아래 서술되는 SO로 전환에 따라 제도권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4. SO로 전환
1995년 정부는 케이블TV를 출범하였다. 당초 정부는 대기업이 참여하고[9] 수준 높은 컨텐츠로 무장한 케이블TV가 중계유선방송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하였다.그러나 1995년 기준으로 케이블TV 가입비 3만원과 컨버터 보증금 6만원[10], 거기에 월 시청료 15,000원에 컨버터 이용료 2,000원까지 합쳐서 한달에 17,000원을 내야 했는데, 그 당시 물가를 감안한다면 2020년대 기준으로 매달 약 50,000원 정도의 비싼 가격이라 중산층에게도 꽤나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간단하게 유선 연결만 해서 TV리모컨으로 바로 유선 채널을 돌려볼 수 있는 중계유선방송에 비해 이용료가 비쌌다.[11] 당시에는 TV 옆이나 밑에 셋톱박스 같은 별도의 컨버터 수신기를 달아야 하는 개념도 매우 생소했다. 그렇다고 당시 비디오 테이프 재생 기능이 같이 있는 것도 아닌 케이블TV 수신 기능만 있어서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같은 느낌도 있었다. 여기에 중계유선방송 사업자들도 신규 서비스의 출현에 전송망 업그레이드와 자체 서비스 강화에 힘쓰면서 케이블TV 사업자들의 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야심차게 케이블TV를 출범시켰으나 출범 3년만에 SO와 PP의 누적적자가 1조원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자연스러운 시장 퇴출 대신에 중계유선방송 사업자의 강제 SO 전환을 시도하였다. 1996년 기사 그러나 기존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한 SO측에서 방송망 통합에 반대하는 등 실제로 SO 전환을 위한 정책 수립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와중에 정부에서는 2000년 이후부터 위성방송에 대한 역외 재송신을 금지하는 대신 컨텐츠를 제작하는 케이블 PP의 적자 해소를 위해 중계유선방송 사업자의 운용가능채널 수를 20개에서 31개까지(채널 2번에서 채널 32번까지) 늘려서 중계유선방송사와의 계약을 통해서 케이블의 PP가 제작하는 컨텐츠를 중계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자 SO들이 크게 반발하는 등 이 시기 방송 정책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결국 2000년 중계유선방송 사업자(RO)의 SO 전환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정하였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중반이 되면 규모가 되는 기존 중계유선방송 사업자 상당수가 SO로 전환하였고, 소규모 사업자들은 통합을 하거나 SO의 중계사업자로 남게된다. 이후 기존 중계유선방송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케이블TV 시청자가 되면서 이 때부터 케이블TV가 현재처럼 보편적인 서비스로 자리잡게 된다. 한편 기존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종합유선방송사업자와 동일 지역의 중계유선방송사업자가 동일한 컨텐츠를 전송하는 경쟁체제가 시작되면서, 케이블TV는 보편적인 TV시청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SO로 전환 당시 관련 내용은 케이블TV 문서 탄생과 역사 항목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5. 관련 문서
[1] 다만 현재는 이들도 대부분 SO로 전환하였다.[2] 아파트에 설치된 공청과는 다른 의미다. 아파트의 공청은 아파트에 설치된 수신 장비를 통해 각 가정에 송출해 주는 말 그대로의 공동 청취/시청 설비 장치이다. 본래 의미에 부합하는 말이지만 본 항목과 구별을 위해 일반적으로 공청시설로 부른다. 한때, 즉 2002년 3월 1일 이전까지 이런 공동 수신장비를 통해 유료방송, 위성방송을 수신할 수도 있었으나 법원 판결로 현재는 지상파 시청만 허용되며 아파트에서는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시설이다.[3] 이 중계유선방송은 2003년 10월 초 C&M 동서울케이블TV(현재의 딜라이브 동서울)로 인수 합병되었다.[4] <대한민국 유료방송 50년사>에 의하면 1980년대 이전 유선방송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유선방송 역사는 1995년을 시작으로 잡는 편이다.[5] 다만 이것도 말이 많은게 수신료 면제를 요구하면 한국방송공사에서 직원이 나오는데 일단 화면에 뭐라도 나오면 난시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6] 이 시기에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획을 긋는 하계 올림픽이 열렸는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대회 기간에는 방송 2사(KBS, MBC)가 뉴스와 한두 개 정도의 드라마, 교양프로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올림픽 경기를 보여줬다.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교육방송인 KBS 3TV(현재 EBS의 전신)조차도 매일 정규방송 말미에 외국인을 위한 올림픽 안내프로그램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송출하고, 정규방송이 없던 아침~낮시간대에 사이클 도로경기, 승마 종합장애물 같이 경기시간 한참 걸리는 비인기 종목을 중계해 줄 정도였다. 이 때 휴방러시 때문에 드라마, 만화영화 및 어린이 드라마를 못 봤던 시청자들이 중계유선방송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비디오 대여점의 매출이 폭증했다는 얘기도 있었다.[7] 주로 국내위성방송은 KBS 위성1/2, EBS 위성 1/2, OSB 동양방송, KTV 국민방송, YTN, 방송대학TV, 아리랑TV, 한국낚시방송, 종교 방송이였고, 외국 위성방송은 일본 NHK, 미국 CNN, 영국 BBC, 스타스포츠, STAR WORLD, 채널V, 프랑스 TV5 및 대만중앙방송을 송신해 주었다.[8] 1980~90년대 시절에는 중계유선방송 사업자의 운용가능채널 수가 12개였지만, 실제로는 30~40번대까지 서비스 해주는 곳이 수두룩했다. 위에 서술된 성동구 국제유선방송도 채널이 50번대까지 있었다.[9] 지상파 채널은 30대 대기업의 지분 참여가 제한되어 있으나, 케이블TV는 출범 당시부터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이 유료방송채널(PP) 사업자로 참여하였다.[10] 물론 계약을 해지하면 돌려받을 수 있긴 했다.[11]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소위 말하는 공청은 월 시청료가 4,000원 내외였다. 그 후 2000년대 초반부터 별도의 컨버터 설치 필요 없이 30~50여개 채널을 RF 필터로 제한하는 6,600원~8,800원/월 정도의 경제형&보급형 상품이 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