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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사찰에 대한 내용은 중흥사(북한산) 문서 참고하십시오.고려의 왕립 사찰 |
1. 개요
重興寺 / 中興寺고려 서경 장락궁 황성 근처에 세워진 사찰. 건국군주 태조 왕건이 세운 사찰이다.
2. 상세
태조 왕건이 개경에 7층탑을 세울 때 평양 서경에 같이 세운 절이다. 혹은 이 중흥사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운 아홉 사찰[1] 중 하나인데, 태조 왕건이 수축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3대 정종 때 9층 탑에 불이 난 적 있다. 1010년 12월 9일 계축일, 8대 현종 때 제2차 여요전쟁으로 서경까지 내려온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대에 의해 중흥사가 불탄 것으로 보인다.# 문종이 다시 재건했고 의종이 증축, 명종 때 또 9층탑에 불이 난다.
중흥사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절이다. 중흥사의 모든 요소가 고려와 고구려를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흥사는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 위치하고 있다. 태조 왕건이 직접 설정한 위치로 왕실이 지은 사찰이며 그것도 건국군주가 지은 사찰인 셈이다. 사찰명도 重흥이든 中흥이든 모두 '다시 한번 부흥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놓고 고구려를 의식하고 있는 이름이다. 거기다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된 중흥사의 9층 탑은 태조가 얼마나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는지 보여준다. 고구려계 신라인이었던 태조는 고구려계 호족들을 끌어모아 건국했고, 신라의 상징인 9층 목탑을 전례로 삼아 서경에도 9층 목탑을 세웠다. 개경에는 7층 목탑을 세워 서경과 개경에만 특별 대우를 했는데 탑을 짓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서경을 본수도 개경보다도 더욱 우대해 주었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9권에는 중흥사에서 금강경을 읽는 설문, 금강경 용왕환희원을 읽는 설문, 불상점안문이 남아있다. 금강경 용왕환희원은 내용을 보아 고종이 즉위 후 중흥사에서 용왕들에게 제사지낸 것으로 보이며 불상점안문은 중흥사가 훼손된 이후 재건하고 올린 축문으로 보인다.
3. 9층 목탑
옛 신라가 구층탑(九層塔)을 만들어 일통지업(一統之業)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開京)에 칠층탑(七層塔)을 만들고 서경(西京)엔 구층탑(九層塔)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玄功)을 빌려 군추(群醜)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卿)은 날(我) 위해 소(疏)를 지어달라.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태조가 희개공 최응에게.
그 현공(玄功)을 빌려 군추(群醜)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卿)은 날(我) 위해 소(疏)를 지어달라.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태조가 희개공 최응에게.
태조는 서경에 9층 목탑을 세워 신라가 서라벌에 9층탑을 세웠던 것을 모방했다. 바로 중흥사에 이 구층탑을 세웠으니, 서경의 중흥사는 서라벌의 황룡사 급의 지위를 지녔던 것이다.[2]
고종 대에 중흥사 9층 목탑이 번개에 맞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 축문을 올린 적이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40권에 그 축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축문에서 증흥사 9층 목탑은 중흥탑(重興塔)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또한 별칭으로 안탑(鴈塔)으로도 표현됐다.
황룡사 구층탑이 허구헌날 벼락을 맞고 부분부분 파손이 간 것처럼 중흥사 구층탑도 늘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명종, 고종 대까지 보수의 기록이 등장하다 끊긴다. 아마 원본인 황룡사 목탑처럼 대몽항쟁 시기에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1] 광개토왕의 아홉 사찰로 추정되는 사찰은 중흥사, 영명사, 금강사 등등이 있다.[2] 아쉽게도 7층 목탑이 있던 개경의 사찰은 알 수 없다. 최응의 소문도 실전되어 더욱 더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