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3-19 13:28:28

집실사력

1. 개요2. 생애
2.1. 당 침공2.2. 당나라에 귀순2.3. 태종을 간언하다2.4. 여러 전선에서 활약2.5. 유배2.6. 복관 및 죽음

1. 개요

執失思力, 생몰년 미상으로, 돌궐족 집실부 추장 출신의 당나라 무장이다.

2. 생애

2.1. 당 침공

본래 동돌궐 집실부의 추장이다. 무덕 9년(626년) 8월, 이세민이 제위를 계승하자, 동돌궐의 힐리가한은 당 태종이 제위에 오르자 내부 갈등이 모두 해결되지 않았고, 통치 질서가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돌리가한과 연합하여 20여 만이 넘는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변경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고, 그는 힐리가한의 밑에서 당을 공격한다.

무덕 9년(626년) 8월 28일, 힐리가한은 군사를 이끌고 위수의 북안으로 들어갔다. 집실사력이 당에 사신으로 간 뒤 당 태종을 만나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세민을 겁주려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엄중한 상황 속에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힐리가한의 기염을 돋우고 종병을 크게 약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집실사력을 꾸짖었다.
내가 너희 가한과 직접 화해를 약속하고 앞뒤로 너희에게 금은보백을 주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당신들의 땀은 혼자서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깊이 들어가, 나는 당신들에게 미안한 점이 없다. 비록 너희들은 융적족의 사람들이지만,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당신들에 대한 큰 은혜를 완전히 망각하고, 군사가 강하다고 자화자찬할 수 있는가! 오늘 내가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집실사력이 두려워 살려 달라고 빌었고 다른 신하들도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당 태종은 "내가 지금 돌려보내면 돌궐은 내가 그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더 함부로 침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집실사력을 문하성에 가두었다.

당 태종은 집실사력을 감금한 뒤 대신 고사렴(高士廉), 방현령 등을 이끌고 곧장 위수 남안으로 내려와 힐리가한과 위수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며 맹약을 저버렸다고 나무랐다. 이윽고 당군의 주력이 연이어 도착하여 군대의 진용이 성대해지자 힐리가한은 집념력을 잃고 돌아오지 않자 당태종이 나서서 매우 두려워 화의를 청하였다. 당 태종은 정권이 안정되지 않아 정권을 안정시켜야 했고, 반드시 견고하게 대처하기 위해 청구에 동의한다. 8월 30일, 당 태종과 힐리가한은 변교에서 회맹하여 말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에게 많은 양의 금백을 주었다. 그 뒤 집실사력은 풀려났고 힐리가한을 따라 북쪽으로 물러났다.

2.2. 당나라에 귀순

위수의 맹 체결 후 돌리가한은 오랫동안 힐리가한의 압제에 밀려 당나라에 은밀히 연락하여 당나라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 태종은 동돌궐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국력 증진을 위한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조치를 취하여 군사적으로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였다.정관 3년(629년) 11월 당 태종은 여건이 무르익자 이세적, 이정 등을 파견해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돌궐을 공격했다.

정관 4년(630년) 정월, 이정은 3천의 기병을 이끌고 마읍을 출발하여 악양령에 입성하여 밤을 틈타 정양을 급습하였다.힐리가한은 황급히 치장을 사막 어귀로 옮겼다. 이정(李靖)은 힐리가한의 측근인 강소밀(康蘇密)을 보내 힐리가한의 심복을 이간시키고, 그의 측근인 강소밀(康蘇密)을 배반하여 수 양제의 황후 소씨(蕭氏)와 그 손자인 양정도를 비밀리에 데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힐리가한은 강소밀 등이 당나라에 투항하자 감히 머물지 못하고 계속 부하를 이끌고 음산으로 후퇴하다가 백도에서 이세적의 군대에게 요격을 당하자 철산으로 퇴거하여 남은 무리들을 모았다. 힐리가한은 더 이상 당군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집실사력을 특사로 보내 장안에 가서 당 태종에게 사죄하고 항복을 청하며, 국내 부의를 표하였으나, 그 이후 막북으로 옮겨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정에 의해 간파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힐리가한이 이끄는 군대는 당군에 의해 전멸되었으며, 힐리가한은 도망쳤다가 당군에게 포로로 잡혀 동돌궐은 멸망하였다.[1] 동돌궐이 멸망하자 당 태종은 집실사력을 좌령군장군으로 임명했다.

2.3. 태종을 간언하다

정관 5년(631년) 당 태종은 황궁 후원에서 토끼를 쫓다가 집실사력이 이를 반대하였다.
하늘이 폐하를 화, 이족의 부모로 삼으셨는데 어찌 스스로를 천하게 하겠사옵니까?
당 태종은 듣고도 못마땅해하며 사슴 사냥을 했다.집실사력이 관모를 벗고 허리띠를 풀고 무릎을 꿇고 간언을 하자 당 태종은 그치고 말았다. 후일 당 태종은 여동생 구강공주를 집실사력에게 시집보내고 이어 집실사력에게 부마도위를 제수하고 그를 안국공에 봉하였다.

2.4. 여러 전선에서 활약

정관(貞觀) 9년(635년), 서해도 행군대총관 이정을 따라 토곡혼(土谷渾)을 토벌하여 거여천(居汝川)에서 토곡혼군을 대파하였다.

정관 12년(638년), 토번 첸뽀 송쩬감뽀는 당나라 공주를 얻지 못하자 20여만 대군을 이끌고 사천의 송주[2]를 공략하였고 집실사력은 후군집, 우진달, 유란과 함께 이를 막으러 출전했다.

정관 13년(638년), 집실사력과 당검(唐儉)이 당 태종의 명을 받들어 설연타에게 비단을 들고 보내어 고창국(高昌國) 정벌에 함께 출병할 것을 의논하였다. 얼마 안 가 고창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정관 19년(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할 때 당태종의 명으로 하주 북쪽의 금산도에 서 설연타 부족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설연타의 수령 다미가한은 역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하는 틈을 타 십만 명을 보내 황하 이남 일대를 침범하자 당 태종은 전인회로 하여금 집실사력과 함께 설연타를 막으라고 하였다.

집실사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는 척하고 설연타군을 하주로 유인해 설연타군을 대파하고 승승장구하며 6백여 리를 달려 사막 이북에서 위세를 떨친 뒤 개선했다. 이윽고 다시 하주에 군사를 보내자 당태종의 명으로 이도종, 아사나사이, 설만철 등과 함께 설연타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는다.

정관 20년(646년) 정월, 집실사력과 하주도독(夏州都督) 조사망(趙師望) 등이 설연타(薛延陀)를 공격하여 크게 패하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자 다미가한은 달아났다. 같은 해 6월 집실사력은 이도종, 아사나사이, 글필하력, 설만철, 장검[3]과 함께 설연타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다.

정관 22년(648년) 8월 집실사력은 다시 금산도를 나와 설연타의 잔당을 토벌한 뒤, 종군하여 토곡혼을 평정한다.

2.5. 유배

영휘(永徽) 4년(653년), 방유애(房遺愛)의 모반이 일어나자 방유애와 친구라는 이유로 연루되었다. 이치는 집실사력의 공적을 생각하여 집실사력을 금주로 유배시켰다. 구강공주는 봉읍을 삭탈하고 부와 동행할 것을 청하다가 집실사력(執失思力)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2.6. 복관 및 죽음

용삭(龍朔) 연간(661~663년), 집실사력은 복관하여 귀주자사(歸州刺史)를 지냈으며, 곧 병사하였다. 인덕 원년(664년), 당 고종은 구강공주(九江公主)의 봉읍을 회복하고 집실사력(執失思力)을 승주도독(勝州都督)으로 추증하였으며, 경(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 힐리가한 사후, 그 무덤 옆에 보장왕이 묻힌다.[2] 오늘날 사천 성 아바티베트족 자치주의 쑹판 현[3] 제1차 고당전쟁 때 건안성을 공격하나 대패한 그 장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