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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25:57

추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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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크 주
Chuuk State
파일:추크(미크로네시아 연방) 깃발.png
국가
[[미크로네시아 연방|]][[틀:국기|]][[틀:국기|]]
면적121.5 km²
인구48,654명
인구 밀도 400명/km²
주도웨노

1. 개요2. 역사3. 정치4. 인구

[clearfix]

1. 개요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구성국 중 하나.

추크는 현지 사투리로 트루크(Truk)라고도 불리는데, 이 때문에 2차대전 시기 태평양전쟁을 다루는 문헌에서는 영어식으로 '트럭 섬'이라고 표기된 것이 훨씬 많다.

2. 역사

오랫동안 매우 단순한 정치적 구조의 모계 부족 사회가 수십 명의 마을 단위로 유지되었으며 1885년부터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된다. 1899년 이 지역은 독일에 매각되어 독일의 통치를 받다가 1914년 일본 제국이 점령하여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석호에 둘러쌓인 화산섬들로 이루어진 추크 제도는 농사가 가능한 평지가 적고 별다른 산업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만 수만 명이 거주하던 팔라우사이판과는 다르게 추크 제도의 일본인 수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는데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위임통치령에 군사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는 제한이 사라지자 일본 해군이 서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천혜의 군항인 추크 제도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1930년대 남양청과 일본 해군의 협력으로 추크 제도에 참치 어업과 가쓰오부시 가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추크 제도의 중심지였던 토노와스(Tonowas)섬[1]을 중심으로 추크 제도의 일본인은 1930년 749명에서 1940년 4,128명으로 늘었다.

보다 더 큰 변화는 1941년 태평양 전쟁과 함께 찾아왔다. 1942년 추크 제도에 연합함대사령부가 설치되었는데 추크 제도가 가진 천혜의 군항은 군함이 대량으로 정박하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토노와스섬 북쪽에는 50척의 군함이, 섬 남쪽에는 200척의 군함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연합함대의 주력함을 비롯해 태평양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함정들의 보급 기지가 되었다. 또한 상당한 규모의 비행장이 건설되어 일본군 군용기의 중요한 거점이자 일선 기지로 가는 경유지가 되었다. 각종 군함 및 항공기의 연료보급기지, 정박 시설, 하역 시설, 정비 시설, 군수지원시설을 비롯해 대규모의 병참 기지가 들어섰으며 섬 곳곳에는 대공포가 설치되었가다. 전쟁이 절정이던 때 추크 제도의 일본인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3만 5천 명에 달했으며 이 수치는 팔라우나 사이판에 비견될만한 수치였다. 이 때문에 추크 제도에는 '일본의 진주만', '일본의 지브롤터'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전쟁 말기 미군의 서진을 막기 위한 절대방위선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거창한 별명과 다르게 실제로는 빈약한 요새화 수준에 대형 전함을 수리할 시설도 없었던 반쪽짜리 요새였다. 그리고 1944년 2월 추크 제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미 해군의 헤일스톤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어 토노와스섬의 주민들은 전부 웨노섬[2]으로 소개되었다. 이미 '개구리 뜀뛰기' 전략[3]으로 절대방위선을 돌파한 미 해군은 추크 제도는 주기적인 공습으로 무력화시키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태평양의 섬들과 다르게 지상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종전 때까지 추크 제도늩 외부의 지원이 끊긴 채 주기적으로 공습만 당하는 고립된 섬으로 남게 되었다.

종전 이후 추크 제도의 일본인은 모두 송환되었고 미국의 신탁 통치를 받다가 1986년 미크로네시아 연방으로 독립하여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 중 하나가 되었다.

3. 정치

역사적으로 추크는 매우 작은 규모의 수십 개의 마을들로 구성된 모계 부족 사회로 , 팔라우, 마셜 제도나 다른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주처럼 다른 마을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는 대추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층화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작은 정치 단위의 문제로 마을의 추장들의 권한도 굉장히 약했다. 현재도 팔라우나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다른 주들은 전통 추장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간주되지만 이런 이유로 추크는 추장의 위상이나 기능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현재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4개 주에서 가장 세금 징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가 공적 자금의 오용으로 재정 상태도 최악인 주이다. 공교육 시스템과 보건 시스템 역시 가장 열악한 상황.

추크 섬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2022년 3월에 치를 예정이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이 투표는 원래 2015년 3월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2019년, 2020년, 그리고 2022년으로 계속 연기되었고, 2022년에는 중앙정부조차 아무런 말이 없어서 또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4. 인구

2010년 기준 인구는 48,654명.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주 중에서 가장 일본계 인구가 많은 지역인데, '모리", '시라이', '아이자와', '나카야마' 등의 일본 성씨를 볼 수 있다. 추크 주 출신인 매니 모리 전 대통령에 의하면 주 인구의 10%라고. 가장 많은 일본계 성씨는 '모리'로, 1891년에 모리 코벤(森小弁)이란 일본인 사업가가 이 지역에 들어와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정착하면서 남긴 후손들이다. 현재 모리 코벤의 후손은 2,000명의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며 연방의 7대 대통령인 매니 모리가 모리 코벤의 증손자이다. 현재도 모리 코벤의 고향인 고치 현과 미크로네시아의 '모리' 가문 사이에 교류가 존재한다.
[1] 또는 두블론(Dublon)섬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일본은 나츠시마(夏島)라고 명명했다.[2] 당시 일본은 하루시마(春島)라고 명명했다.[3] 콜롬방가라나 라바울같이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방어를 강화한 거점을 직접 공략하는건 가급적 피하고 대신 그 주변지역을 공략해 장악한 후 신속하게 자신들의 거점으로 만들어 일본군의 거점으로 가는 보급선을 끊고 말려죽여 큰 피해 없이 신속하게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