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춘향전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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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가 춘향의 집을 찾아가 월매를 만나는 장면[1]
1. 개요
고전 춘향전을 영화화한 최초의 영화로 1923년 개봉했다.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다.2. 상세
당시 연쇄극[3]의 제작비는 피트 당 1원이라는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영화만 보아 왔던 관객은 처음으로 한국 사람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고 개봉관은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런 연쇄극의 동향을 보고 있던 하야카와는 1923년 조선 영화제작사인 동아문화협회를 설립, 자신이 운영하던 황금관 안에 두고 첫 작품으로 춘향전을 선정했다.하아캬와 본인이 각색, 제작, 연출을 담당하고 이몽룡 역에 김조성, 성춘향 역에 한명옥이 출연했다. 월매와 향단 역은 일반 가정 부인 중에서 발탁하고 단역과 엑스트라는 남원 사람들로 충당했다.
예명이 한룡인 한명옥은 개성의 이름난 기생으로, 춘향이가 기생의 딸이라는 점과 눈에 띄는 미모를 갖고 있어 발탁되었다. 김조성은 당시 조선극장의 주임변사로 대중의 인기가 높은 정상급 변사였으며 이후 연극계에서는 춘광(春光)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최영완은 조선극장 음악대 중의 한 명이었다.
지나치게 비싼 입장료와 사극으로서 시대적 고증의 부실, 모진 매를 맞고 나온 춘향을 월매가 안고 울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등 연기력 부재가 지적되었지만 흥행 면에서는 서울 흥행만으로도 제작비를 뽑았고 대구, 평양 등지로 순회 영사를 다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춘향전은 조선총독부의 검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컨텐츠로 취급받았다. 이로 인해 훗날 제작된 영화 반도의 봄에서도 극중극 형식으로 춘향전이 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