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레코드 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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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あきなおみ 치아키 나오미 | Naomi Chiaki | |
본명 | [ruby(瀬川, ruby=せがわ)] [ruby(三恵子, ruby=みえこ)] (세가와 미에코) |
출생 | 1947년 9월 17일 ([age(1947-09-17)]세) |
일본 가나가와현 | |
신체 | 162cm |
직업 | 가수 |
학력 | 신주쿠 구립 오오쿠보 중학교 |
데뷔 | 1969년 6월 「雨に濡れた慕情」 |
활동시기 | 1969년 ~ 1992년 |
레이블 | 일본 컬럼비아 (1969년 ~ 1978년) CBS 소니 (1980년 ~ 1981년)[1] 빅터 인비테이션 (1981년 ~ 1988년)[2] 테이치쿠 (1988년 ~ 1992년)[3] |
서명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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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가수이다.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지만 도쿄도 이타바시구에서 성장했다.2. 약력
5세 당시 모습 | 13세 당시 모습 |
일본 컬럼비아 오디션을 보다가 작곡가 스즈키 준의 도움으로 1년 4개월 레슨을 받았고 1969년 21세 때 비에 젖은 모정으로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당시의 캐치프레이즈는 "성이 없어서 이름이 2개" "매혹의 허스키보인". 예명은 당시의 후지 TV의 프로듀서 치아키 요시오의 성을 치아키라고 읽게 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사위(본명)의 직유에서 나오미라고 하였다.
1970년 네 가지 부탁과 X+Y=LOVE가 히트하면서 인기 가수가 된다. 같은 해, "네 가지 부탁"으로 제21회 NHK 홍백가합전에 첫 출장, 이후 1977년의 제28회까지 8회 연속 출장했다.
네 가지 부탁이나 X+Y=LOVE 때는 소위 색기 아이돌 노선에서 활약했다. 원조 몰래 카메라 콩트 55호 막후 프로그램을 날려라 등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수이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일도 해냈다.
1972년, 대표곡이 되는 "갈채"가 제14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해, 그 해 연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 오리콘 집계로 80만매를 매상하는 대히트를 친다. 이 곡은 당시 치아키의 실체험을 바탕으로 작사되었다고 하는 선전으로 프로모션되었지만, 실은 완전한 픽션이었다. 실제로는 전좌가수 시절에 형과 같이 따르던 젊은 배우가 급사한 체험을 가져, 그것과 가사의 내용이 우연히 비슷했기 때문에 "실체험"으로 하는 것으로 프로모션에 활용한다고 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 갈채, 극장, 야간비행등의 악곡은 가사 설정이나 내용으로 볼 때 드라마틱 가요로 통했다.
레코드대상 수상 후에도 1973년 야간비행, 1974년 원무곡 등의 팝계 히트곡을 발표하는 한편 엔카에서는 후나무라 엔카라면 해보고 싶다고 1975년 다이센, 1976년 사카바가와, 야키리의 나룻배(술집 강의 B면곡으로 발표), 1988년에는 홍잠자리 등의 작곡가 후나무라 토오루의 작품을 많이 불렀다.
또한 뉴뮤직 아티스트로부터 악곡을 제공받아 1977년에 나카지마 미유키의 "루즈", 도모카와 가즈키의 "밤으로 서두르는 사람", 1978년에 가와시마 에이고의 "아마그모", 1988년에는 아스카 료의 "전해집니까" 등을 레코딩했다. "밤으로 서두르는 사람"은 제28회 NHK 홍백가합전에서도 불려져 홍백의 무대에서의 치아키의 귀기 넘치는 퍼포먼스가 시청자의 간담을 누르고, 백팀사회의 야마카와 시즈오는 "정말 기분나쁜 노래입니다야~"라고 발언하는 등, 화제가 되었다. 또한 1980년대 전반에는 앨범 <각 테이블>에서 샹송, <THREE HUNDRED CLUB>에서는 스탠다드 재즈, 그리고 포르투갈 민요의 화드를 부른 앨범 <대몽>을 발표하였으며, 양악 커버·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1976년 2월, 텔레비전 드라마 "대도시 투쟁의 나날"의 제8화로서 "내가 사랑한 치아키 나오미"(극본 쿠라모토 츠토무, 감독 무라카와 토오루)라고 하는 서브 타이틀의 작품이 방영되었다.실존하는 현역 가수가 부제에 피처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며, 치아키의 대표곡 "갈채"가 드라마 내용과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의 출연도 계속해 연예 프로그램에서는 미소라 히바리의 흉내를 본인 앞에서 피로해 종달새의 폭소를 자아내거나 "킨짱의 쿵과 해보자!"에서는 하기모토 킨이치와 시청자로부터의 엽서에 의한 콩트를 연기하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3. 결혼 후
남편과의 모습 |
1982년, 1976년에 발매된 싱글 "사카바가와"의 B면에 수록되어 있던 "야키리의 나룻배"가 우메자와 후미오의 무용 연희로 이용되어 화제가 되어, 일본 컬럼비아로부터 싱글 A면으로 재발매되었다. 그러나, 치아키가 당시 빅터에게 이적하고 있던 것이나, 치아키 당시의 활동 방침등에서 다음해 1983년 2월에 호소카와 타카시반이 발매되었을 때에 폐반이 되었다. 이후 호소카와반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제25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유선차트에서는 치아키반이 1위를 독주했고 작곡자 후나무라 토오루도 과연 좋은 점을 찍지 말라고 생각했다. 다만 노래하는 모습이 거의 짐작도 안 간다. 미성이지만 호소카와군의 창법은 단조로워서 치아키군은 관상용. 세부까지 제대로 들려주는 노래니까. 솔직히 말하면 호소카와반은, 악곡의 어려운 부분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뭐야, 이것이라면 나도 부를 수 있지"라고 세상에 생각하게 하는 창법이었다.
1983년 빅터 시절 유일한 싱글 Again이 발매됐다. 그 해 화드를 담은 앨범 대몽도 발매됐다.
4. 활동 중단
1992년 9월 11일에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남편이 화장을 할 때, 치아키는 관에 매달리면서 "나도 함께 태워 줘"라며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그 며칠 후 치아키는 "고인의 강한 희망으로 여러분께 말씀 드리지 않고 가족끼리만 보냈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엔 아직 당분간 시간이 필요할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라는 서면의 코멘트를 공표. 이를 마지막으로 치아키는 가수업을 포함한 전면적인 연예 활동을 완전히 정지했다. 이후 정식 은퇴 선언이 나오지 않고 공개 석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 매스컴의 취재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아직도 침묵을 지키는 상황이다.
무덤이 있는 도쿄 도심부 사찰 근처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 추석, 춘분, 월 기일에는 향 성묘를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5. NHK 홍백가합전
1971년 제22회 NHK 홍백가합전 - 나란 여자 私という女 |
1972년 제23회 NHK 홍백가합전 - 갈채 喝采[5] |
1973년 제24회 NHK 홍백가합전 - 야간 비행 夜間飛行 |
1974년 제25회 NHK 홍백가합전 - 슬픔의 기미 かなしみ模様 |
1975년 제26회 NHK 홍백가합전 - 운명의 강 さだめ川 |
1976년 제27회 NHK 홍백가합전 - 주점의 강 酒場川 |
1988년 제49회 NHK 홍백가합전 - 고추 잠자리 紅とんぼ |
[1] 현재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2] 현재는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3] 백지영을 일본에 데뷔시킨 그 엔터테인먼트.쇼치쿠 산하[4]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만들었다.[5] 일본 레코드대상 대상 수상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