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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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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4e1><colcolor=#ea6d90> 이름 [ruby(倖, ruby=こう)][ruby(田, ruby=だ)] [ruby(來未, ruby=くみ)] (코다 쿠미, Kumi Koda)[1]
본명 [ruby(神, ruby=こう)][ruby(田, ruby=だ)] [ruby(來未子, ruby=くみこ)] (코다 쿠미코, Kumiko Koda)
출생 1982년 11월 13일 ([age(1982-11-13)]세)
일본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54cm|45kg[2]A형
가족 부모님, 2녀 중 장녀 | 동생 가수 misono
배우자 KENJI03 (2011~) | 슬하 1남
데뷔 2000년 12월 6일 싱글「TAKE BACK
레이블 파일:RZN_NewLogo_2009.gif (1999~)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전성기 때의 인기4. 음악 인생
4.1. 2000~2003 : 데뷔와 무명 시절4.2. 2004~2007 : 에로각코이 사회현상4.3. 2008~2011 : 실언 소동과 하락세4.4. 2011~2013 : 결혼과 출산, 그리고 복귀4.5. 2014~2019 : 투어형 가수로서의 전환4.6. 2020~ : 20주년 돌입
5. 보컬6. 여담7. 음반 목록8.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9. 투어
9.1. 정규 투어9.2. 팬클럽 투어
10. 수상
10.1. 가요제10.2. 기타 수상
11. 기록12. 링크
12.1. 공식 웹사이트12.2. 팬카페

[clearfix]

1. 개요

파일:v_i_p__gif_by_jlegend83-d47yzuh.gif
일본가수.

2. 상세

2000년에 데뷔하여 2000년대 중반 섹시하면서도 멋있다라는 뜻의 신조어 에로각코이, 에로카와이를 만들어내며 헤이세이의 가희(歌姬)[3]로 올라섰던 아티스트. 코다 쿠미보다 더 음반을 많이 팔고, 대중적 호감도가 높고, 더 롱런한 가수는 있을지언정 코다 쿠미가 내세운 본인만의 강렬한 이미지는 일본 가요계에서 전무후무하며 이를 두고 흔히 얘기하는 아이코닉한 가수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일본에서는 드문 파워풀하고 섹시한 컨셉에 시원한 가창력과 춤 실력까지 겸비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2000년대 중반 톱 아티스트로 자리했다. 대표작으로는 '큐티하니', 'Butterfly', '사랑의 노래', '사랑의 꽃봉우리' 등이 있으며, 섹시가수임에도 발라드 히트곡도 상당히 많다.[4] 전성기 시절 발매한 베스트 앨범 BEST~first things~BEST~second session~, Black Cherry는 3작 연속으로 밀리언 인증을 받으며 이중 베스트 두장은 연속으로 더블 밀리언 인증을 받는다. 코다 본인이 만들어낸 유행어 에로 각코이는 2006년 10대 유행어에 공식 등재되었으며 가수 본인 최전성기였던 2006년에는 4대 가요제에서 3연승[5]을 기록, 같은 해 일본 정치인, 연예인을 모두 포함한 유명인사 2위에 오르며 인지도의 정점을 찍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일본의 가요 시상식에서 수차례 대상을 수상했으며, 06년과 07년 2년 연속 오리콘 연간 아티스트 세일즈 1위에 올랐고 음악 활동 외에도 베스트 네일 부문은 물론 베스트 지니스트에서 5년 연속의 수상을 얻어 명예의 전당에 오른 기록이 있다. 2007년에는 10개 기업의 CM 모델로 발탁되어 CM 모델로서도 대활약. 코다 쿠미 특유의 까만 피부와 파격적인 노브라 패션, 화려한 메이크업과 네일등이 코다 쿠미를 상징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이야 노브라 패션이 국내에서도 등장하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반면에, 10년도 전이었던 그 당시에는 코다 쿠미는 파격 그 자체였다.

2008년을 기점으로 구설수로 인해 하락세가 시작되었었지만 꾸준한 라이브 공연과 자기 관리로 두터운 고정팬층을 확보해 현재까지 음악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특히 1년의 시작과 끝을 투어로 시작해 투어로 마무리하는, 일명 투어 중독자로도 유명하다. 출산 이후 TV 활동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2020년을 기점으로 최근에는 TV 출연도 간간히 하고 있다.

3. 전성기 때의 인기

코다 쿠미는 일본의 피지컬 음반 시장이 점점 하향세로 접어들고 디지털 시대가 막 시작되는 과도기에 인기를 끌었기에 체감 인기에 비해 더 폭발적인 판매량이 나오지 못했고(그래도 코다 쿠미의 전성기 때의 앨범 두장은 연간 차트 1,2위를 다퉜다.) 디지털 시장이 막 시장 규모가 성장하던 시기였기에 디지털 세일즈에서도 손해를 본 바 있으나 여러가지 핸디캡 속에서도 코다 쿠미 자체로 대단한 기록을 세운것이 있다.

일본에서 전체 다운로드 누계수가 10억건을 돌파한 착우타 서비스(통화 연결음 서비스)에서 역대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린 솔로 아티스트가 바로 코다 쿠미였다. (전체 가수 중 2위[6]) 착우타 서비스는 2002년부터 2016~7년까지 제공되었기 때문에 2000년대 가수들의 대중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 중 하나인데 따라서 일본에서 가장 많은 착우타 음원을 판매한 솔로 아티스트가 코다 쿠미였다는 것은 2000년대에 활약한 솔로 가수중에서도 압도적인 대중성을 가졌던 가수였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7] 이정도의 기록이라면 00년대 중반 일본 거리에서 코다 쿠미의 노래 소리가 안울려퍼지는 핸드폰이 없었을 정도라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음반 불황 시기였지만 그 시절 일본 음악계 앨범 판매 선두를 기록함과 동시에 착우타 서비스에서의 압도적인 기록 및 가라오케에서 자주 불리는 아티스트 상위권, 디지털 판매량까지 함께 성공적으로 잡았고[8] 여기에 베스트 지니스트 명예의 전당 수상 및 전성기때 화려한 CM 활동까지 더해지면 더욱 임팩트있던 커리어다.[9]

이렇듯 전성기때의 기세와 기록을 볼때 2000년대에 코다 쿠미만큼 확실한 자기만의 시대를 가졌던 솔로 가수도 3대 디바에 이어 거의 유일한데 코다 쿠미의 경우는 묘하게 본인 구설수로 인해 망했다고 묘사되거나 혹은, 인기가 후려쳐지는 경우가 많은 가수 중 한명이기도 한데 애초에 2006년과 2007년에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로서 등재되었기에 그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연간 세일즈 아티스트 1위는 웬만큼 인기가 있지 않고서야 달성하기 힘든 기록이다.

코다 쿠미 보다 더 단일 음반 판매량을 많이 올린 유수의 솔로 아티스트들도 있지만[10] 코다 쿠미가 3대 디바 바로 아래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신만의 아이코닉함으로 코다 쿠미 시대를 이끌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

기록으로 볼때나 체감 인기로 볼때나 일본에서 본인만의 컨셉으로 브레이크에 성공해 자신만의 노선을 완전하게 구축한 아티스트였으며, 2000년대 데뷔했던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다.[11]

일본 레코드 협회 공식 기록으로 일본 역대 아티스트 디지털 다운로드 총 판매량 9위에 랭크되었다. #

4. 음악 인생

4.1. 2000~2003 : 데뷔와 무명 시절

데뷔전 14살 오디션 영상

코다 쿠미는 유년기때부터 일본악기의 사범이었던 조부와 일본전통 춤 센부의 명인이었던 조모, 그리고 금의 면허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전통 예능을 배운 소녀였다. 그리고 상당한 가창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그의 어머니를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됐고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오디션에 지원하기 시작하며 가수 지망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코다는 어머니를 빼닮아 노래 실력은 좋았으나 또래 지원자들처럼 귀여운 외모는 아니어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때 오디션에서 합격하는 건 모두 용모가 귀여운 아이들 뿐이었다고. 코다의 오디션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중학교때는 J-POP 붐이 불어 오디션 지원자가 급증해 서류 심사부터 떨어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그래서 코다는 학창시절 자신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고교 2학년 재학 시절에는 모닝구 무스메 3기 오디션에 지원해 괜찮은 선까지 갔었다. 하지만, 현재 하로프로가 굴러가는 상황을 봐서는 그때 오디션에 떨어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잘된 셈이다. 그리고, 코다 쿠미까지 떨어뜨려 가면서 층쿠가 오디션에 합격시킨 멤버가 바로 모닝구 무스메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로 평가받는 고토 마키였다.당시의 오디션 영상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12] 이렇게 꾸준히 많은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탈락이 계속됐고 어느새 코다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진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코다는 선생님들과 가족과의 상의 끝에 마지막으로 도전하고 여기서도 안되면 꿈을 포기하자라는 굳은 심정으로 전국에서 수십만명을 오디션하는 대형 오디션 'avex dream 2000'에 지원하게 된다.[13]

에이벡스는 일본 음악에 관심있다면 모두가 알듯이 하마사키 아유미, globe, 아무로 나미에등 내로라하는 톱 아티스트들이 소속된 일본 유수의 음반 레코드사였다.[14] 이 오디션은 30초간 참가자 전원의 '노래'를 듣고 평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코다는 탁월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디션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며 총 3차로 진행된 오디션을 거쳐 전체 준 그랑프리(2위)를 수상하고 드디어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avex dream 2000 오디션 파이널 (1999년 8월 10일)

사실 이 오디션에서도 몇차례 고비가 있었는데, 2차 오디션 전날 코다가 친구들과 함께 춤 연습을 하겠다며 새벽에 놀러나간다고 하자 당연히 어머니가 그를 붙잡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다툼을 벌이던중 그걸 지켜보던 아버지가 옆에 벗어다둔 옷가지를 집어던져 코다의 눈에 정통으로 맞는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2차 오디션때에는 부상당한 눈을 가리기 위해 안대를 쓰고 나왔다고 한다.[15] 이때 심사위원들은 코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노래만 심사하다는 오디션이었기에 다행히 2차 오디션을 아슬아슬하게 합격했고 이후 3차 오디션도 합격하여, 99년 8월 도쿄 롯폰기에서 열린 최종 오디션에 진출한다. 최종 오디션 전날, 노래의 표현법을 바꾸기 위해 워크맨을 들으면서 열심히 연습했으나 본방에서 노래를 실수해버려 코다는 "이번에도 합격은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심사를 봤던 마츠우라 마사토는 도무지 누굴 뽑아야할지 몰라 최종 오디션에 오른 22인을 직전에 재면접했는데 이때 잘 떠들면서 웃음을 줬던 코다가 제일 인상에 남았고 노래 실력도 그둘중 가장 출중해 그녀를 선발했다고 한다. 코다는 자신이 노래를 잘해서 뽑힌줄 알았는데 코다 쿠미는 웃겨서 뽑았다는 마츠우라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고. 그는 코다가 만약 잘 떠드는 아이의 캐릭터가 없었다면 최종 20인에 들지 못했을거라는 얘기도 했다. 다만 준 그랑프리에 그친 이유는, 당시 오디션을 여름방학에 진행하여 그랑프리 수상자를 2000년 1월에 곧바로 데뷔시킬 계획이었으며 마츠우라는 코다를 차분히 키워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준 그랑프리에 올렸다고 밝혔다.[16] 수년간의 도전끝에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행운을 따낸 코다는 에이벡스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무상으로 받을 권리를 받는다.

코다는 정식 데뷔에 앞서 1999년 설립된 에이벡스 산하 레이블 'rhythmzone'[17]과 계약을 체결하고 R&B를 기반으로한 아티스트로서 출발하게 됐는데, 계약을 맺기 전 관계자가 코다에게 앞으로의 음악 계획을 물어보자 당시 히트하던 DOUBLE[18]이나 m-flo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고 관계자는 "그럼 R&B를 하고 싶다는 거네?"라고 되물었지만 코다는 "R&B가 뭐죠?"라는 답변을 내놓았을 정도로 서양 음악에 대해 무지했다고 한다.[19]

이후 코다는 서양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날아가 일명 무사 수행까지 완수했으며 약 1년간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아 이듬해 가을 데뷔가 결정된다. 코다는 가창력을 무기로 미국 시장에서 먼저 데뷔하는데 원래 미국진출이 계획에 있었던것은 아니고 데뷔곡이 R&B 넘버라 미국 유명 DJ에게 싱글에 들어갈 리믹스 음원을 맡겼는데 생각보다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미국에도 내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 경과로 발매된 리믹스 싱글들이 댄스 차트에서 20위권에 오르며 신인가수로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낸다.[20] 당시 음악 잡지에서 이 소식을 꽤 비중있게 다뤘기에 코다 본인도 "훗, 나 좀 잘 나갈지도"라는 이후 무명 시절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한 기대에 찼다고 회상했다.
파일:takeback.gif
19살 데뷔 당시의 코다 쿠미. R&B 계열의 아티스트로 출발한다. (2000년)
코다 쿠미의 데뷔 싱글 「TAKE BACK」 (2000)

이후 코다 쿠미는 2000년 12월 6일, 데뷔 싱글 'TAKE BACK'을 발매하며 정식으로 데뷔한다. 당시 고교생이었기에 본격적인 활동은 못했고 '미국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실력파 가수'로 조금 주목 받았으나 첫싱글은 오리콘 최고 59위에 그쳤으며 이후 발표한 싱글들도 잇따라 실패해 썰렁한 신인시절을 보내야 했다. 곡도 좋았고 노래도 잘 했지만 소속사에서는 그동안의 소속 가수들처럼 미디어를 충분히 활용한 히트곡을 만들기 보다, 단순히 음악만을 어필하는 실력파로 가자는 전략을 펼쳐 TV 프로모션을 하지 않는 일명 '얼굴 없는 가수' 신세로 음반을 내게 했다. 조금 더 정확한 에이벡스의 의도로는 완전히 얼굴 없는 가수보다도 'TV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을만한 가수'로 키우고 싶었다는 실제 언급이 있다.[21] 이때 데뷔를 염원하던 코다와 가족들도 이 점은 상당히 실망했지만 코다 쿠미를 유명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코다가 첫 싱글을 발표한 직후 데뷔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팔리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몸무게가 단기간에 8kg까지 늘어 결국 프로듀서에게 불려가 "그렇게 계속 살 빼지 않으면 PV(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해버릴꺼야!"라고 경고받기에 이른다. 실제로 그 당시 발매된 PV들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코다를 볼 수 있다. 'COLOR OF SOUL' PV는 아예 코다의 클로즈업샷에 화면 전환만 줄창 나온다.

데뷔하고 이듬해가 돼서야 도쿄로 상경하여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시작하는데, 코다에게 주어진 스케쥴은 소소한 지방 클럽의 순회였고, 가끔 출연하는 라디오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기 관리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코다가 사무실에 인사하러 가도 아무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프로 의식이 없는 가수로 낙인 찍혔기 때문.
2nd Single 「Trust Your Love」 (2001)

2001년의 어느날, 에이벡스 소유의 클럽 벨파레에서 첫 원 맨 라이브를 갖게 되었는데 공연을 마친 뒤 성취감을 갖고 대기실에 들어오는 순간 당시 에이벡스의 전무였던(현 대표) 마츠우라 마사토가 코다를 향해 "너 라이브 재미없구나."라고 얘기했고 코다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한다. 이 이후 코다는 무조건 자신의 라이브를 재미있는 공연으로 꾸며야 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22]

같은 해 겨울에는 9.11 테러를 추모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song+nation'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song+nation'은 에이벡스, 에이벡스 소속 유명 가수들, 그리고 거물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로 화제가 되었는데, 코다는 에이벡스 레이블에서 갓 데뷔한 보아와 함께 듀엣곡 'the meaning of peace'를 불렀고, 이는 싱글로 발매되어 싱글 차트 1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같은 'song+nation' 프로젝트에 참여한 팀들과 함께 대형 음악 방송인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 출연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둘 다 신인이었으며 아무나 나올수 없는 특집 방송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아주 큰 무대였다.

그러나 코다가 동선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고 만다. 무대 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코무로와 함께 세 사람이 엔딩에서 [코다 - 코무로 - 보아] 순으로 카메라에 들어와야 하는데, 코다가 센터로 나와버리는 바람에 코무로를 가려버린 것이다. 결국 엔딩에서 코무로는 제대로 잡히지도 않고 코다와 보아만 나온다[23]. 이런 대형 실수를 한 코다는 방송 직후 PD한테 불려가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사실 영상을 보면 코다가 한껏 오버하는데 그때 코다는 이때 아니면 다신 TV에 못나올거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이 방송 이후 몇개월 뒤 보아는 'LISTEN TO MY HEART'로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했지만 코다는 이 방송 이후에 발매한 싱글들 조차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여담이지만 보아와 코다 쿠미는 이 시절 데뷔 차이도 얼마 나지 않기 때문에 초창기 함께 뉴욕 페스티벌에 참가하거나 서로가 처음으로 듀엣 곡을 부르게 된 상대이기도 해서, 교류가 꽤 있었다. 특히 초기 a-nation의 라인업이었기에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다만 보아는 코다가 사석에서 사투리를 쓰고 말이 너무 빨라서 당최 뭐라고 하는지 못알아 들었다고 나중에 후일담을 밝히기도.
코다 쿠미와 보아의 첫 뮤직스테이션 무대 (2001년)

이후 정규 1집 'affection'을 발매하며 평론가들과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실력이 좋은 가수로 평가받긴 했지만 2000년대 초반 J-POP계에선 하마사키 아유미, 보아, 마츠우라 아야, 쿠라키 마이같이 스타일리쉬하고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여가수들이 각광받던 시기였으며 당시 코다는 음악외엔 파괴력이 전혀 없었다. 미국에서 싱글도 냈고, 메이저 데뷔도 했지만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예쁘고 청순하고 여리여리한 외모가 아닌탓에 계속 TV 프로모션도 못하고 심야 시간대 클럽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는 게 활동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새벽에 라이브하는 경우가 잦아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하루는 자신의 공연을 보는 관객이 세명밖에 안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훗날 코다는 이 시절이 있었기에 라이브 실력과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소속사인 avex에서는 매년 개최하던 여름 이벤트를 'a-nation'이라는 정식 공연으로 발전시켜 본격적인 스타트를 끊는다. 이 콘서트에는 하마사키 아유미, ELT, hitomi등의 스타 아티스트들도 함께 참여했고 선배 가수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코다도 이벤트 참여가 결정되어 '드디어 나도 이 자리에 있구나. 저 가수들처럼 무대에 임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첫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코다는 MC때 관객들을 향해 '분위기 오르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관객들이 호응을 해주지 않아 라이브 회장이 싸해졌던 일이 생겨버려 그 날 이후로 2006년까지 a-nation때 코다는 MC 금지를 당했다. [24] 이것은 특히 에이벡스 계열 신인 가수들은 꼭 한번쯤 겪게되는 일인데 아무리 a-nation 출연자라고 해도 이름 없는 무명 가수는 일명 화장실 타임으로 취급되기 일 수다. 지금은 스타가 된 동방신기 역시 일본 활동 초기에 이러한 설움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몇년을 이렇다 할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2002년에는 여동생인 misono가 같은 기획사의 밴드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의 보컬로 데뷔하게 되는데 코다와는 다르게 전폭적인 지원 아래 데뷔했고 귀여운 외모와 가창력으로 언니보다 먼저 유명세를 탄다. 한때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와 코다 쿠미가 같은 날에 앨범을 발매한 적이 있었지만 여동생쪽이 이기는 상황도 있었다. 무명인것도 서러운데 졸지에 코다 쿠미는 'misono 언니' 정도로 소개되었다. 아마 이 시기가 코다 쿠미 최악의 슬럼프 시절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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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절의 코다 쿠미의 모습 (2002년)

그러던 코다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전세계에서 발매되는 인기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게임 주제곡을 불러줄것을 요청해 온것이다. 당시 게임회사쪽에서는 다른 아이돌 가수의 섭외를 원했지만 이런저런 논의끝에 에이벡스와 연락이 닿았고, 실제 코다와의 대화도 순조로워서 채택됐다고 한다.[25] 녹음에 성공한 2003년 3월, 대망의 7번째 싱글 real Emotion / 1000の言葉가 발매가 결정되면서 첫주 3만장의 판매고를 시작했지만 꾸준한 롱런끝에 28만장 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고 연간 차트 23위까지 오르는 데뷔 이래 최고의 성공을 맛본다. 코다 본인은 이 싱글마저 실패하면 가수를 그만둘것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다만 'real Emotion'의 인기는 빠른 비트와 화려한 멜로디로 곡 자체의 구성이 워낙 뛰어난데다 세계적인 인기 게임 '파이널판타지 X-2'의 오프닝 테마송으로 채택된 덕택이었다. CD의 재킷에도 코다 쿠미를 대신해 게임 여주인공 캐릭터들이 등장했을 정도였으니 노래는 히트했지만 역시나 TV 프로모션은 할 수 없었다. 당시 'real Emotion'으로 히트하자 작은 소극장 공연에서의 라이브 일정이 잡힌것이 전부였다.
코다 쿠미의 첫 히트 싱글 「real Emotion」

7번째 싱글과 비슷한 시기 발매한 정규 2집 음반 grow into one이 오리콘 차트 8위까지 올라 선방했고 매니아 팬층도 조금씩 모으고 있었지만 이후 반년간 CD를 못내 후속 싱글 COME WITH ME가 10위 밖으로 이탈하면서 다시 침체기에 돌입했고 'real emotion' 한곡으로 반짝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싱글들이 빛을 보지 못하며 원히트원더로 남는듯 했다.

그리고 활동을 이어가던 어느날 코다는 동생 misono의 라이브 현장에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한다. 그저 어린 여동생인줄만 알았던 misono가 직접 곡 컨셉에 맞게 잡지를 북북 찢어와 코디네이터에게 의상을 지시하고 전체적인 라이브 기획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그전까지 찾아볼수 없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할말을 잃게 된다. 자신과는 다르게 '얼굴도 귀여워서' 먼저 히트했다고 생각했던 misono의 뒷면에 이렇게 진지한 모습이 있다는 걸 알고 그만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전까지 코다는 노래만 부를 수 있으면 됐었고 비쥬얼에도 역시 자신이 없어 프로 스탭들한테 모든걸 맡겼던 수동적인 아티스트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당시 케이블 TV에 중계되는 이벤트 페스티벌에서의 코다의 모습은 프로가수라기엔 너무나 평범한 모습에 그냥 노래만 부르고 있어 수많은 무명가수들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작사를 제외한 음반 작업도 모두 프로 제작진들에게 맡겼을 정도. 하지만 이날 이후 코다는 '코다 쿠미'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발전이 없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되면서 동생의 모습을 본보기로 '코다 쿠미'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4.2. 2004~2007 : 에로각코이 사회현상

코다 쿠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몸무게를 8kg을 뺀 뒤[26] 가슴선이 훤히 드러난 의상을 입고 섹시 컨셉트로 무대에 오르면서부터다.
10th Single 「Crazy 4 U」

섹시 컨셉을 시도한건 다름 아닌 한 스탭의 충고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코다에게 한 스탭이 "코다, 근데 그거 별로 귀엽지 않아"라고 돌직구조언하면서 우연히 섹시한 의상을 입어본 결과 주변 스탭이 만장일치로 섹시하다며 칭찬했고 이 아이디어가 2004년 1월 발표한 싱글 'Crazy 4 U'에 녹아들면서 섹시 가수로서의 변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27] 이 PV에서 그가 감행한 과감한 노출과 고가의 의상들이 메스컴에서 화제가 되었다.

한창 섹시미로 주가를 올리던 시절 코다는 인터뷰에서 '에로와 섹시는 한 끗 차이'지 않느냐며 본인도 많은 고민을 했고, 결론을 내린 것이 앞으로의 시대는 여성이 이끌것이며[28] 남자의 시선에서 섹시한 의상을 입기 보다 같은 여성이 봤을 때 멋있는 섹시미를 어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미디어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코다 쿠미 본인이 사실 동경하는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격렬한 섹시 컨셉으로 인해 논란이 있긴 했으나 코다 자신은 몸무게를 감량하면서 발견한 자신의 섹시한 매력을 남성에게 수동적으로 상품화되기 보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컨트롤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어필하는 능동형 섹시 디바로서 완성시켰다.

그 일례로 코다는 3집 앨범 제작 시점부터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Team Koda'를 결성했고 여성들이 봤을 때 멋있는 의상과 아이디어를 스탭들의 투표 결과를 받아 곡 컨셉과 자켓 선정을 했으며 이것은 에이벡스 사내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곧이어 발매한 3집 앨범 'feel my mind'에서는 본인이 본격적으로 음악 작업이나 컨셉에도 상당 부분 참여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3집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하진 못했어도 대형 히트곡 'real Emotion'이 수록된 2집때와 큰 하락 없는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부터 여성지나 각종 미디어에 점차 노출되는등 진보적인 행보를 밟아가기 시작했다. 코다는 곧 이어 11번째 싱글 'LOVE & HONEY'를 발매하는데 이 싱글에서는 더욱 극적인 변화를 감행했다.
11st Single 「LOVE HONEY」 中 『キューティーハニー』.

음반의 타이틀 곡 '큐티하니'는 섹시한 여성이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는 내용의 노래로 일본 영화 '큐티하니'의 주제가로 수록됐는데[29] 전면에 내세워진 파격적인 PV는 코다 쿠미의 변화된 이미지를 어필하는데 성공했으며 별다른 프로모션 없이도 오리콘 주간차트 4위에 오르며 히트한다. 'real Emotion' 이후로 1년만에 TOP 5에 진입한 것이다.

이 곡의 히트가 특이한 점은 정작 노래 자체가 딱히 프로모션이나 타이업의 덕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음방 프로모션은 고사하고 그냥 애니 관련 행사에서 노래부른 정도가 고작이었던 상황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대중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노래를 찾는 이들이 많아진 것. 당장 엠스터 첫 출연만 하더라도 노래가 발매되기 한참 이후인 연말 슈퍼라이브 때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곡이 쓰였던 큐티하니 역시 OVA와 실사 영화 둘 다 흥행에 참패했기 때문에 당연히 타이업 덕을 볼 게 없었다.

그동안 TV 프로모션이 없었지만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11월, 베스트 히트 가요제에 출연해 데뷔 4년만에 신인상을 수상했고 브라운관에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 여세를 몰아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30]에 출연하며 여기서 파격적인 무대매너로 폭발적인 화제가 되어 이 방송 단 한번으로 그동안 TV에 출연하지 못한 설움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한국에서 코다가 처음 알려질 때 가장 많이 떠돌았던 영상으로 리플 대부분이 의상이 야하긴 한데, 라이브를 잘해서 멋있다였다. 일본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컬쳐쇼크를 받았다.

당시 무대의상은 굉장히 엄해서 코다 쿠미도 본방 들어가기 직전까지 본방 의상과, 다른 얌전한 의상을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실제로 엠스테 전체가수 첫 등장[31]때는 다른 의상을 입고 있었고 이 의상은 본방 의상보다는 수위가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이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란제리 패션을 선보였고 이게 대박을 친거다. 나중에 코다 쿠미가 자리를 잡고 엠스테에 출연했을 때 이 첫등장 영상이 등장했고 이걸 본 코다 쿠미는 저때는 젊었기에 패기가 있어서 가능했던거라며 경악 했다.

물론 좋은 반응도 있었지만 사실 섹시 컨셉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있어서 대중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코다는 다시 노선을 바꾸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탭들이 입을 모아 '코다 쿠미 아니면 할 수 없는 거 아니냐'며 그녀를 지지했고, 이 시기 후속 싱글 'Chase'가 오리콘 10위권대 후반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으며 다시 침체될뻔하던 코다는 스탭들의 지지로 인해 섹시 컨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코다 쿠미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응원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후 발매한 '奇跡', 'hands'등의 싱글에서 발라드 위주의 성숙한 음악을 선보여 호평을 받는다. 우연일진 몰라도 이 싱글들부터 대형 타이업 없이 다시 10위안에 드는 결과를 냈고 이후 안정궤도에 돌입하면서 2005년 2월 발매한 4집 앨범 secret은 50만장이 넘게 팔려 기존 앨범 판매고에서 3~4배까지 뛰어 올라 무명 시절을 말끔히 청산한다.
코다 쿠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레전드 무대. (2005년)

데뷔 이후 4년여간 TV 프로모션은 일체 없었으나 엠스테 슈퍼라이브에 출연한 이후 출연요청이 쇄도해 2005년부터는 TV 프로모션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마츠우라 대표가 초창기 그녀의 미디어 활동을 제한한 이유도 코다를 TV에서 나와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가수로 만들고 싶어서였고 4년만에 드디어 그 정도 급의 가수가 된것이다.

코다는 음악 방송에 나와 훌륭한 라이브 실력을 뽐내는 것에 더해 솔직하고 당당한 입담으로 거리낌없는 털털한 모습을 보여줬고 기성세대 여가수에게선 볼수 없던 신선한 매력을 선보여 가수 인기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자신의 컴플렉스이자 수년간 가수활동의 발목을 잡았던 평범한 얼굴과 통통한 체격을 본인의 노력으로 개성있게 연출해내는 것에 성공해 미디어 노출도도 잦아지기 시작한다.

코다 쿠미가 스타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여러 다큐 프로그램에서는 그녀의 무명 시절과 정상에 오르기 까지의 힘겨웠던 시절을 방송했고 대중들은 그녀를 바닥부터 올라온 아티스트라고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팔리지 않아서 퇴출 직전까지 갔던 아티스트가 드디어 온 국민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것이다. 이 시기 오리콘 스타일 잡지가 선정한 최고의 섹시 아티스트 1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노선을 더 확실히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대중들은 그녀를 '에로 각코이'(섹시하면서 멋진)[32], '에로 카와이'(섹시하면서도 귀여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 에로 각코이라는 유행어는 일본의 시대별 유행어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인정받았다.

2005년 여름에 발매한 16번째 싱글 'Butterfly'는 차트 2위까지 올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이후 몇장의 싱글들 더 발매한후 여세를 몰아 2005년 9월에 지난 5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첫 베스트 앨범 'BEST~first things~'를 발매한다. 발매 첫주 55만장이라는 높은 판매고를 기록해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었지만 일본의 국민가수 Mr. Children와 동시발매가 되는 바람에 2위에 머물러 콩라인으로남는듯 했지만 2주차에 다시 1위로 반등했고 이 때의 에피소드가 코다 쿠미를 주인공으로한 다큐멘터리 정열대륙에서도 등장한다.

데뷔 5년만에 처음으로 1위를 달성한 코다는 스탭들과 부등켜 안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항상 2위에 머물렀던 코다가 일본 가요계 정상에 서는 순간이었다. 이 베스트 앨범은 밀리언 히트를 가뿐히 달성했고 그 해에만 12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2005년 발매된 여성 아티스트 앨범 중 판매량 1위에 올라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후에도 꾸준한 롱런으로 최종 판매량 191만장을 기록했으며 출하량으로 더블 밀리언 인증을 받았고 이것은 가수 본인 최다 판매고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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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데뷔 5년만에 일본 음악계 정상에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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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년만에 오리콘 1위를 차지했던 당시의 모습

이 베스트 앨범은 코다 쿠미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고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베스트 앨범의 진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베스트 앨범이 히트하면서 코다 쿠미의 인기는 더 급상승했고 비슷한 시기 개설된 모바일 팬클럽 playroom의 이용자가 10만명을 돌파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큰 방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베스트 앨범의 자켓사진을 보면 알수 있듯이 염색한 머리와 두터운 눈 화장 등 섹시한 '갸루'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내세웠고 하마사키 아유미의 등장으로 잠시 저물었던 까맣게 태닝 시킨 피부와 갸루 화장이 다시금 인기 몰이를 하면서 일본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33]

베스트 앨범으로 대히트를 기록한 코다 쿠미는 TV 데뷔 1년만에 각종 시상식에 초청 받기에 이르렀고 47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막을 열게 된다.[34] 이는 데뷔 5년만에 수상한 값진 대상이었으며 코다는 수상 소감을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대상은 일본 가요계에 섹시 가수로서는 십여년만의 나온 대상이었으며 일본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대상을 거머쥔 코다 쿠미는 2005년 오리콘 베스트 아티스트에 뽑히면서 그해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온 올해의 가수로 평가받아 한 해를 에로 각코이 열풍으로 뜨겁게 달궜다.
2005년 제47회 일본 레코드 대상 '코다 쿠미'
언젠가 반드시 1위를 하겠다고 말해왔던 코다 쿠미.
데뷔한지 6년째,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꿈을 지금 이뤘습니다.
- 제 47회 레코드 대상 「코다 쿠미」 호명 순간.

대상 수상 전후 시점부터 코다 쿠미는 세계 최초의 12주 동안 연속으로 싱글을 발매하는 일명 '12연작 프로젝트'를 도전한다.[35] 처음 이 프로젝트를 발표했을 때 대다수가 말도 안되는 마케팅이라며 비판했지만 12연작의 1탄 'you'가 발매되자마자 예상외로 좋은 곡퀄리티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싱글 차트에서 처음 1위를 차지하며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었다. 사실 이 12연작 곡들은 원래 차기 발매될 정규앨범 수록곡으로 이미 녹음된 곡들이었지만 코다 쿠미의 제안으로 12연작 프로젝트로 탄생되어 기획됐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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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의 성공 신화를 이끈 12연작 프로젝트.

이 12연작 싱글들은 3장을 제외하고 모두 5만장 한정 물량으로 발매됐는데, 한정판 싱글들은 발매된지 하루만에 전국에서 물량이 동나고 다음 날엔 옥션 사이트에 10만원까지 가격이 뛰어오르는 품귀 현상까지 나타났으며 그 폭발적인 반응을 입증시켰다. 결국 12개의 싱글 모두 차트 TOP 10안에 드는 오리콘 사상 최초의 결과를 내며 대다수가 실패할거라고 예견했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이 중 두 장의 싱글은 주간 차트 1위에 올라 겹경사를 이루기도 했다. 음반 출하량을 다 합치면 100만장을 팔아치웠으며 과반수가 한정물량이었지만 비한정 싱글의 판매량도 꽤나 상당했기 때문에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2연작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이 싱글들을 모두 합친 앨범을 낸다고 밝혀 또 한번 팬들을 멘붕시켰다. 이 앨범은 'BEST~second session~'라는 명칭으로 발표되어 베스트 1이 나온지 1년도 안돼서 두번째 베스트가 나오는 상식밖의 스피드였다. 그러나 앨범이 발매 되자마자 첫주에만 98만장이 팔려나가는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이는 근 일본 가요계 10년 동안의 최고 초동 판매량으로 남았다. 최종적으로 오리콘 기준 18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BEST ~first things~에 이어 2작 연속 더블 밀리언(200만장) 인증을 받았으며 연간 앨범 차트 2위에 올라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12연작 프로젝트는 코다 쿠미의 인기를 더 높여주는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SOULHEAD, 이시이 테츠야등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시도해 가수로서의 역량도 한껏 뽐내 코다의 인기를 일시적 붐이 아닌 하나의 톱 아티스트로서 인정받고 성공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싱글마다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은 자켓에서 뛰어난 컨셉 소화력을 선보였고 곡 장르도 대부분이 다 다른 장르로 포진되고 있어 넓은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그 당시 코다 쿠미의 무서운 인기와 실력이 바탕되지 않았더라면 실패했을 프로젝트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코다 쿠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프로젝트였다는 것. 이 성공적이었던 12연작 사례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며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시도한 가수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없다.
한국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코다 쿠미의 12연작 3번째 싱글 「D.D.D.」 (2006년)

12연작~베스트 대박 행진에 이어 봄께 발매한 싱글 '恋のつぼみ(사랑의 꽃봉우리)'가 착신음 2x밀리언 인증 및 27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싱글 판매에도 호조를 띄기 시작했고 7월에는 가수 본인 최초가 되는 4A 싱글[36]이자 여름 싱글 '4 hot wave'를 발매하는데 싱글에 수록된 네 곡 '人魚姬',' JUICY', 'I'll be there', ' With Your Smile'은 완벽한 퀄리티를 자랑하며 인기에 가속을 넣는다. 이 싱글은 코다 쿠미 역대 싱글 중 가장 고퀄리티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도 팬들에게서 사랑받는다.

그리고 같은 날 싱글 연속 1위 기록을 유지하던 대형 그룹 KinKi Kids와의 동시 발매로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발매 첫주에는 킨키에 밀려 2위에 그치지만 집계 기간동안 데일리 차트에서 초반 하루이틀을 빼고 코다가 계속 1위를 차지해서 당시에는 지수도 나오던 시절이 아니라 이러다 코다가 킨키의 1위 기록도 깨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결국 3만여장의 차이로 1위 자리를 양보했지만 월간차트에서는 코다가 1위를 제패했고 총 판매량도 코다 쿠미가 추월하면서 신드롬의 절정을 찍었다. 싱글은 최종적으로 39만장을 매상해 가수 본인 최다 싱글 판매고로 남았다.[37]
가수 본인 최다 싱글 판매고를 기록했던 싱글 '4 hot wave' 수록곡 「人魚姫」

2006년 9월에는 2004년 제주도 공연 이후 두번째로 내한했었는데 이때 「아시아 송 페스티벌」참가를 비롯해 기자회견과 싸인회를 가졌었다. 아송페 공연에서는 'you', '큐티하니', '人魚姬'까지 총 세곡을 불렀지만 당시 관중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人魚姬' 무대만 쏙 빼놓고 방송되어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38] 그리고 당시 아유미가 '큐티하니'를 번안해 국내에서도 코다의 관심이 상승하던 시기라 그녀의 내한이 많은 이슈가 되었는데, 이때 수십개의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취소 했다는등, 아유미와의 비교는 사절이라고 말했다는 등, 일명 톱스타 행세를 했다는 얘기가 대대적으로 보도됐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거짓으로 판명났다.

오히려 코다는 YTN과의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고 인간적인 모습까지 느꼈다는 VJ의 증언이 있었다.[39] 당시 한국에서 그녀를 담당하던 SM 엔터테인먼트가 가수 관리 차원에서 아송페 기자회견 중 어느정도 질문을 가려받고 관리를 한건 일부 사실인것 같다.[40] 다만 이것은 SM측의 과실이며, 코다는 어느 나라 기자회견에 가서도 질문을 가려받거나 하질 않는다. 싸인회장에서도 관계자들은 선착순 150명만 응해줄 예정이었으나 코다가 직접 회장에 모인 구입자들에게 싸인을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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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아시아 송 페스티벌을 위해 내한했던 코다의 모습

이후 10월에는 겨울 발라드 '夢のうた / ふたりで…(꿈의 노래/둘이서...)'[41]를 발매, 총 30만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고 인기를 얻었으며 비슷한 시기 전국 투어도 개최, 홀 공연이었지만 뛰어난 공연 퀄리티로 호평을 받았다.

2006년에도 최고의 한해를 보낸 코다는 일본유선대상 및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2년 연속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전년도에 대상을 수상했던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는 야후 재팬 회원들을 대상으로한 설문에서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로 점쳐졌으나 아쉽게도 대상은 못받고 '최우수 가창상'에 올랐다. 오리콘 기준 코다 쿠미는 2006년 한해동안 음반 수입으로 127억엔을 매상해 압도적인 세일즈 1위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 해 연예인, 정치인등을 종합한 유명인 랭킹에서 2위를 기록해 인지도도 최정점을 찍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TV를 틀어도,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온통 코다 쿠미로 도배되던 최고의 황금기 시절이었다.

2006년 12월에는 2005년 2월 발매한 정규 4집 이후 약 2년만에 정규 5집 앨범 'Black Cherry'의 발매를 결정하면서 과연 베스트 앨범이 아닌 오리지널 정규 앨범도 높은 판매고를 올릴까라는 대중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앨범은 발매 첫주 50만장의 판매량을 올리고 4주 연속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2007년까지 최종 판매량 100만장을 찍어 3연속 밀리언 기록을 세우면서 당연하다는듯이 대박을 냈다.[42] 이 3연속 밀리언을 달성한 앨범들은 고작 1년 6개월안에 발매된 작품들이며 그 당시 코다 쿠미의 무서운 인기와 발매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를 넘어와 2007년 코다 쿠미는 3월 발매된 싱글 'BUT / 愛証'을 통해 음악적 변신을 시도한다. 'BUT'은 동성애 테마를 잡고 일본인 작곡가 곡이 아닌 미국 현지 팝 스타일을 표방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 에이벡스의 초유의 적자 사태가 겹치며 이 싱글과 함께 발라드와 댄스를 집합한 'BEST~BOUNCE & LOVERS~'를 동시 발매하는 병크를 저질러 너무 상업적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으며[43][44] 실제 싱글 판매량도 12만장대로 이전보다 좋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한가지 여담으로 일본에서 코다가 발표한 노래중 반응이 그저 그랬던 노래들은 한국 팬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BUT'이나 'D.D.D. (feat. SOULHEAD)'가 대표적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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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의 대표곡 「愛のうた」 (2007년)

판매량 하락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운 가운데 곧 이어 여름 싱글 'FREAKY'를 발매한다. 이 싱글이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작 싱글의 부진을 만회하고 인기를 이어갔다. 수록곡 'girls'나 '空'도 인기를 끌어 롱런했으며 가을에 발매된 발라드 싱글 '愛のうた(사랑의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코다 쿠미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노래는 발매된지 8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가라오케 차트에 등장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 2015년에 음원 다운로드 100만건 인증을 받으며 음원 판매도 롱 세일즈를 기록. 일본에서 가장 꾸준히 사랑받는 코다의 대표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11월에는 동방신기와 콜라보레이션한 싱글 'LAST ANGEL (feat. 東方神起)'을 발매하며 국내 커뮤니티에서도 활발히 언급됐다.[45]

2007년 코다는 음악 활동외에도 각종 CM 및 홍보대사 활동으로 큰 활약을 했는데, 전년도의 압도적인 인기덕에 생겨난 인지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2007년 한해 동안 무려 10개 기업의 CM 모델로 발탁되어 그 해 여자 탤런트로는 2번째, 여자 솔로 가수로서는 가장 많은 CM 활동을 했다. # 음악 활동에서도 역시 73.5억엔의 CD 세일즈를 기록해 연간 아티스트 세일즈 1위에 올랐는데 이는 2년 연속의 1위 기록이었다. 12월에는 데뷔 7주년을 맞이해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로 통하는 도쿄돔에서 투어 파이널을 장식했으며 데뷔 7주년을 기념해 티켓값을 7777엔으로 맞추어 화제가 된다. 그리고 이 공연 오프닝 무대에서 레전드 퍼포먼스를 남기는데..
코다 쿠미의 첫 도쿄돔 콘서트 오프닝이자, 그녀의 올타임 베스트 무대. (2007년)

이 무대로 인기와 함께 가수로서의 기량도 절정을 찍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놀랍겠지만 이 퍼포먼스를 100% 라이브로 소화했다는 점도 크게 주목할 부분이다. 가수 활동외에도 그녀의 스타일이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아 베스트 지니스트, 네일퀸 등 다수의 상을 섭렵하며 스타일 아이콘으로도 자리매김했고 2007년 베스트 히트 가요제에서도 팝 그랑프리에 올라 대상을 수상받으며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4.3. 2008~2011 : 실언 소동과 하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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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제목 그대로 왕좌에 오를 것만 같았던 코다 쿠미. 6집 앨범 자켓 사진 (2008년)

2008년 1월, 코다는 정규 6집 앨범 'Kingdom'을 발매하고 같은 주에 발매된 아티스트의 매상을 누르며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함이 매력이었던 그녀가 1월 29일, 본인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서 "35세가 넘은 임신부는 양수가 썩어 간다"는 망언을 했다. 매니저가 빨리 아이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발언이라고 본인은 해명했으나, 썩어간다는 표현은 본인 해명과 상관없는 명백한 비하발언이다. 또한 해명을 통해 평소 매니저를 어떻게 대했는지가 보인다며 일본 내에선 오히려 더 까이기도 했다.

이 발언에 대해서 불임부부가 반발하고 나서는 등 그녀의 실언은 일본 사회에 겉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킨다. 방송 다음날 전체 신문 1면에 났고 각종 연예 뉴스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도배됐으며, 결국 열심히 새앨범을 홍보하고 있어야 할 시기에 뉴스에 출연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른다. 코다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기대속에서 발매된 신보 'Kingdom'의 모든 프로모션을 일제히 취소하고 출연 중이던 CM(CF)의 중단 및 전국 투어 연기 의사까지 전했으며 그야말로 최고의 기대 속에 발매된 앨범이 최악의 구설수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

20대 여가수가 과감한 섹시 컨셉으로 활동하는 만큼 의외로 30~40대 팬들의 지지층이 생각보다 높은 가수였는데 코다의 발언은 아주 경솔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평소에도 털털하고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긴 했으나 일부에서는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구나 모든 나라가 다 그렇듯 연예인에게 이미지 손상은 치명적인 손해였으며 심지어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비판은 날이 갈수록 거셌다. 여자의 사랑을 테마로하는 가수가 임신을 준비하는 30대 여성들, 불임으로 아이를 못낳는 여성들을 한번에 무시하는 발언을 해버렸으니 이건 도저히 팬들도 쉴드칠 수 없는 발언. 더 놀라운 건 그 방송이 생방도 아니고 사전녹음 방송이었다고 한다.[46]
양수 발언 사과 방송 (2008년)

당시 발매된 지 얼마 안된 'Kingdom' 앨범은 4연속으로 100만장을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 연일 이슈였던 그 해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거기다 수록곡 전곡의 PV를 촬영하며 정말 100만장 팔려고 작정한 앨범이었고 실제로 첫날 판매 지수를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1년 가까이 공들여 작업한 앨범이라 퀄리티도 말할 것 없이 최상이었던 앨범이서인지 왠지 더 원망스러웠던 그녀의 발언이었다. 거기다 문제의 발언이 발매 첫주 주말에 일어나 막판에 타격을 입고도 앨범 초동 판매량은 42만장을 기록했지만 2주차부터는 발언의 여파로 8만장까지 드랍하며 판매량이 우수수 떨어졌고 결국에는 최종 판매량 60만장에서 끝나버려 원래 아름다운 롱런으로 앨범 판매량에서 더 호조였던 코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60만장은 사건이 없었다면 발매 한달~두달째에 달성하고도 남을 수치. 100만장은 무리였다고 해도 그전 앨범들의 추이로 볼때 최소 80만장 이상은 충분히 팔렸을 앨범이었다.

양수 발언의 여파로 모든 활동을 중지한 코다는 연기 의사를 전했던 투어 무대에 복귀해 다시 무대에 올랐고 무대에서 팬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6월, 4개월만에 복귀 싱글 MOON을 발매하면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는데 타이틀 곡 'Moon Crying'이 좋은 반응을 얻어 상당히 히트했고 여러 CM에 다시 복귀하며 재기에 성공 하는 듯 보였으나 뒤 이어 발표한 싱글들이 전보다 부진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후속 싱글 TABOO가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첫주 기세에 비해 롱런하지 못했고 같은해 겨울 발라드 싱글 'stay with me'가 6만장대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하락폭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싱글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그래도 코다 쿠미 발라드는 10만장 넘게 팔릴 걸요" 했지만 결과가 저랬으니. 사실 복귀 싱글 'MOON'도 2006년부터 인연을 이어오던 팝스타 퍼기와의 수록곡 'That Ain't Cool'를 수록해 초호화 참여진을 자랑했으나 4A싱글 답지 않게 10만장대 초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판매량 하락세를 예고하고 있었다.
4개월간의 자숙 기간을 끝내고 발표한 복귀 싱글 「Moon Crying」 (2008년)

2009년 발표된 정규 7집 앨범 'TRICK'은 발매와 동시에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지만 첫주 20만장대 판매고에 최종 판매량 39만장을 기록하며 'Kingdom' 초동 판매량보다 안나오는 부진을 겪는다. 3년만에 판매량이 100만장대에서 30만장대까지 줄었으니 그 하락폭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피지컬 CD 주 구입층인 20~30대 팬들이 줄어서 CD 판매량이 안나오는 게 당연했고 거기다 음반 불황까지 겹쳐 설상가상이었다. 여전히 디지털이나 착신음에서는 강세이긴 했으나 이제 그녀에게 판매량 상승은 기대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때 코다는 많은 라이브 활동과 굵직한 화장품 CM 등에서 활약하며 아주 최악의 상황까지는 면했다. 2009년 오리콘 연간 세일즈 여자가수 부문 3위에 2009년 한해동안 가라오케(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린 가수 2위가 코다 쿠미인것만 봐도 아직 건재했던 편. #구설수 이후에도 이정도로 유지했는데 사건이 없었다면 전성기가 더 오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녀가 양수 사건 이후로 훅갔다고 하는데 그정도는 아니다. 사실 전성기때 많은 인기를 달성해 현지인들은 크게 하락세를 못느낀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여전히 코다는 미디어에 많이 나오고 있을 시기였으며 호감도는 떨어졌을지언정 인지도가 떨어진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정점을 찍어본 가수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해외 가수라 실제 체감보다는 차트나 성적에 나오는 숫자들을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 사실 한국에서의 코다 쿠미 하락세 이슈가 더 갑론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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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코다 쿠미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해야만 했을 2009년에는 촌스럽고 과한 스타일링에 곡들도 커버곡 남발에 퀄리티가 급격히 안좋아져서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나마 나오는 오리지널 신곡들도 대부분이 전작들을 답습한 느낌이라 신선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때 발매한 싱글들 '3 SPLASH'와 'Alive / Physical thing'은 레이블도 팬들도 서로 달갑지 않은 기대 이하의 반응이었다. 거기다 복귀한지 얼마나 됐다고 리믹스 앨범 'Driving Hits' 시리즈가 시작되더니, 애당초 08년에 나오기로 했던 OUT WORKS & COLLABORATION BEST 베스트 앨범이 취소되지 않고 발매돼 상업적인 이미지로 이미지 소비에만 열을 가했다. 짧은 릴리즈 간격속에서도 좋은 곡을 연발하는 "믿고 듣던 가수"였던 그가 이렇게 음악 활동으로 비판받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일. 안그래도 이미지 소비가 많은 가수였는데 한순간에 안좋아진 여론에 더해 이제 곡 마저도 밍밍해졌으니 하락세가 올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정도로 유지한게 신기할 정도.

이때까지는 투어 규모나 음원 성적 그리고 하락한 판매량까지 통틀어봐서도 당시 여자솔로 다섯손가락안에 들고 있었다. 구설수로 인해 20~30대 팬층이 상당수 사라지긴 했어도 그 하락한 상태에서 그나마 완만하게 하락한 편. 당시 사건을 기점으로 일본 음반 시장이 점점 축소되고 있었고 사실 2008년의 코다도 슬슬 전성기에서 내려오려던 시점이었다. 2007년부터 팝 노선을 밀기 시작하면서 음반 판매가 가수 본인 최전성기인 2006년보다는 낮아지고 있었지만 'Kingdom'의 초동 판매량을 알수 있듯이 그때 당시 여자솔로 중에 초동이 40만장 넘게 나오는 가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조금 더 확실히 얘기하면 전성기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인기의 하락세보다도, 정점을 찍고 자연스레 내려오던 시기였다는 것. 당시에도 가장 잘나가는 여가수임은 확실했다. 이때 만약 사건이 없었고, 곡 퀄리티가 쭉 유지됐다면 당시 인기를 꾸준히 유지해서 전성기를 이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후 하락세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속도가 더 빨리 찾아온것이다. 만약 전성기가 시작될 즈음인 2005년 ~ 2006년 쯤 벌어진 일이었다면 진짜 한방에 훅갔을지도 모른다.
가수 본인 투어 최다 관객 동원수를 기록했던 2010년 투어 현장.

2010년에는 10주년 버프를 받아서 전보다 나아진 곡 퀄리티와 싱글 발매텀이 조금 길어져서 안정적인 활동을 했다. 이 해엔 'Lollipop', '好きで、好きで、好きで。', 'あなただけが' 등의 곡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중 '好きで、好きで、好きで。'는 전성기 시절 히트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가을에는 고전 명곡을 재해석한 커버 앨범 'ETERNITY~Love & Songs~'을 발매해 소소한 인기를 누렸으며 빌보드 라이브 등을 시도하며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2010년에도 연간 오리콘 여성솔로 아티스트 매출 3위를 기록했으며 여름에 개최한 전국 투어는 20만명을 동원해 가수 본인 최다 동원객을 기록했다. 데뷔 10주년 하루 전날이었던 12월 5일에는 가수 본인 두번째가 되는 도쿄돔 공연을 개최해 성대한 10주년의 막을 내렸다.[47]

그리고 10주년 독점 인터뷰에서 재차 실언에 대해 사과의 말을 전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 따윈 생각치도 못했던 경솔한 과오를 반성하고 있음을 밝혔고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일어날 만 하니까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며 발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자숙 기간 당시 은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주변 스탭들이 그를 지지했고 결국 팬들과 스탭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열심히 달릴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발언이 코다 쿠미에게 치명타를 입히며 주홍글씨를 새겼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코다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통감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용서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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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을 기념하여 치러졌던 도쿄돔 콘서트 공연 현장

10주년 이후 2011년에도 코다는 전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발매된 9집 앨범 'Dejavu'는 싱글라인이 상당히 히트했음에도 수록곡 평가가 좋지 못했으나 22만장 정도 판매량을 기록해 그런데로 무난한 성적을 냈고 발매 첫주에는 에이브릴 라빈과 1위 자리를 놓고 아슬아슬하게 경쟁을 펼쳐 일부 사람들에게는 "코다 쿠미 한물갔네"라며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이 해에는 홀 투어를 진행했는데 공연 일정이 매우 타이트해서 목상태가 눈에 띄게 안좋아졌다. 투어 초반 도호쿠 대지진 사태로 투어 일정을 일부 연기했다. 이후 투어는 추가 공연까지 모두 성황리에 종료됐고 홀 투어가 좋은 평가를 받는 코다 쿠미인만큼 공연 평가도 좋았다. 또 2011년에 나온 싱글들은 전성기때만큼은 아니지만 곡퀄이 상당히 좋아져서 나오는 노래마다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좋은 평을 들었다. 특히 '4 TIMES' 싱글은 2006년 '4 hot wave' 싱글 이후로 가장 퀄리티가 좋은 여름 싱글로 사랑받는다. 이외에도 Love Me Back, 愛を止めないで 등의 노래가 착신음에서 선전했다.

4.4. 2011~2013 : 결혼과 출산, 그리고 복귀

그렇게 활동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일본의 배우 오다기리 죠가 한국의 음식점에서 팬이 사인을 요청하자 본인의 이름 대신 '코다 쿠미'라고 적어서 입방아에 오른 사건이 있다. 졸지에 뜬금없이 코다 쿠미가 주목을 받는다. 2011년에는 국내 시상식 MAMA에 일본 대표로 출연해 '愛のうた', 'V. I. P', 'Bling Bling Bling' 을 불렀고 상도 받았다. 일본에 저렇게 멋있는 여자 가수가 있었냐며 꽤 호평받은 무대.[48]
2011년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 퍼포먼스.

이후 정규 10집 앨범 발매 결정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줄 알았던 2011년 12월 13일, 같은 에이벡스 소속 BACK-ON의 기타리스트 KENJI03와의 결혼 및 혼전 임신을 기습발표하면서 세간을 놀라게 한다. 임신 사실에 대해서는 초기 부정했으나 의도치 않게 먼저 기사가 나서 본인이 직접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혼란이 있었다고 말했다. 안정기에 들어갔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코다는 싱글 Love Me Back의 이벤트 자리에서 팬들에게 직접 임신 사실을 전했고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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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임신과 결혼 소식을 전하는 코다 쿠미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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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인 휴업과 결혼 사실을 공식화했다.

29살의 나이로 결혼을 발표한 코다는, 18살에 데뷔 이후 10여년 동안 길었던 활동을 잠시 내려놓고 출산의 이유로 활동을 휴지하게 된다. 자신의 출장 6회째가 되는 2011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을 마지막으로 코다는 휴가를 받고 데뷔 이래 처음으로 장기간 휴식에 돌입한다.

활동 휴지 이후 2012년 1월, 예정대로 정규 10번째 앨범 'JAPONESQUE'를 발매하는데 이 앨범의 모든 수록곡을 PV로 제작하고 오랜만에 호화스러운 앨범 사양과 좋은 퀄리티로 호평받았으나 임신으로 인해 아쉽게도 모든 프로모션을 하지 못했다.[49] 비슷한 시기 몇몇 이벤트의 건강상의 이유로 캔슬하면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지만 건강이 최우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無프로모션에 1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그럭저럭 무난한 성적을 냈다. 투어는 거듭된 회의끝에 끝내 취소된다. 티켓팅 바로 직전인 회장 예약까지 돼있던 상황이라 손실이 어느정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이다.

그리고 2012년 7월 18일, 코다는 드디어 첫 남자아이를 득남했다. 또 무려 3개월만에 바로 복귀 소식을 알리며 다시 한번 놀라움을 줬는데 이때 첫 복귀 스케쥴이었던 여성지 ViVi 화보에서 세미누드를 선보이는 그야말로 여전히 에로 각코이한 모습을 선보이면서 일본 여성들에게 역시 코다 쿠미 답다는 반응을 얻었다. # 이 화보의 화제 때문인지 음악 사이트 레코초쿠에서 투표한 최고의 어머니 아티스트 투표에서 아무로 나미에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0월에는 복귀 싱글 Go to the top을 발매해 3년만에 오리콘 주간 차트 1위에 오르며 어느정도의 건재함을 과시했으며 음악 방송에 출연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선보이며 빠르게 컴백했다.
10개월만의 뮤직스테이션 컴백 무대 (2012년)

그렇게 결혼과 출산을 하고 초스피드 속도로 복귀한 코다는 연말에 개최하지 못했던 전국 투어를 대신해 데뷔 이후 최초가 되는 무도관 라이브를 결정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도쿄돔은 했는데 무도관은 처음이었다.[50]같은해 NHK 홍백가합전에도 출연하며 출산 후에도 전력으로 활동했다. 2012년을 마친 코다는 2013년, 커버 앨범 제 2탄 Color The Cover를 발매하며 출산 후 첫 앨범을 발표했다. 2010년 나왔던 커버 앨범 1탄이 꽤 반응이 좋아서 2탄을 기획한것이었는데 가라오케 박스에서 무작정 고전 가요를 불러댔고 이 중 괜찮다 싶은 곡들을 선곡해 앨범에 수록하는 방식이었다.

그 후 지난 해 여름 개최될 예정이었다가 취소됐던 JAPONESQUE 투어를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복귀 후에도 아레나 투어를 결정하며 여전한 클래스를 증명시켰다. 이 투어에서 총 15만명을 동원하며 결혼 전과 다름 없는 티켓 파워를 입증시켰고 투어 공연 자체도 많은 호평을 받았다.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역대급 퍼포먼스가 많이 있어서 코다 쿠미 투어중에서도 유명하다. 특히 팬서비스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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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아레나 투어에서의 코다 쿠미.

그리고 코다는 이 투어 파이널에서 예상치 못한 얘기를 팬들에게 전했는데, "결혼하면서 코다 쿠미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퇴를 고민했다"라는 말을 전해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코다는 데뷔때부터 10년 활동하는 것이 목표였고 결혼을 하면 앞으로의 활동에 제약이 있고 가정 주부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크게 고민했지만 남편과 가족 회의를 하면서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고 주위의 응원에 힘입어 이를 통해 나 자신도 2nd 스테이지의 스타트를 훌륭하게 끊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꿈은 포기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해 팬들을 환호시킨 코다는 2시간 반동안에 달하는 라이브를 훌륭하게 끝마쳤고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이후 여름 싱글 Summer Trip과 가을 Dreaming Now!등을 발매하며 꾸준하게 활동했고 투어가 영상화되어 발매된 DVD와 블루레이는 오리콘 DVD 주간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이로써 9년 동안 매년 DVD 차트에서 1위를 섭렵하는 기록을 세운 코다는 미스치루와 동율이며 솔로 가수로는 신기록이라고 한다.[51] 이 시기 음반 판매량은 눈에 띄게 줄었으나 코다 쿠미 연차되는 여가수들 대다수가 피지컬 음반 판매량은 고정팬들만 구입하는 추세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고정팬 장사다. 특히나 현재 일본에서는 여가수 시장이 우리나라보다도 더 암담한 상황이라 코다 쿠미 정도 음반 세일즈는 위축된 여성솔로 시장에서 그래도 팔리는편이었다.

4.5. 2014~2019 : 투어형 가수로서의 전환

2012년 복귀 이후 코다는 2013년 싱글 'Dreaming Now!'까지 1년에 앨범 1장, 싱글 2~3장, 각종 TV 프로모션, 투어 등으로 복귀전때와 크게 다를게 없는 플랜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4년 2월 발매한 정규 11집 'Bon Voyage' 때부터 TV 프로모션이 단한번으로 끝나더니 같은해 발매된 여름 싱글 'HOTEL' 부터는 아예 TV 프로모션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사실 미디어 노출이 전과 비슷했던 2013년과 전무했던 2014년의 싱글 판매량을 볼때 약 2만장 내외로 균일했기 때문에 이제는 TV 프로모션보다 투어에 열중하는 노선으로 바꾸기 시작한것이다.

2014년 초에 발매한 11집 'Bon Voyage'는 첫주 1위에 올랐고 2006년 5집 'Black Cherry'부터 7년 연속으로 앨범 1위 기록을 세운다. 'Bon Voyage' 투어는 홀에서 개최해 총 14만명을 동원하며 성황을 이뤘고 파이널은 대만에서 치렀다. 대만 공연은 세번째.[52] 투어 기간 도중, 파칭코 시리즈 프로모션 일환으로 미공개 곡들이 포함된 홍보 CD FEVER KODA KUMI LEGEND LIVE가 배포되었는데 고퀄리티의 명곡과 PV가 수록되어 있어 팬들을 당황시켰다. 좋은 반응에도 이 곡들이 정식으로 발매되진 못했고[53] 아직까지도 숨겨진 코다의 명곡들로 남았다. 겨울에는 디지털 싱글 'Dance In The Rain'이 발매된다.[54] 코다 쿠미의 첫 디지털 싱글이었지만 정식 싱글 개수에도 카운트됐다. 이 해에는 디지털 싱글 포함해 싱글이 두장밖에 발매되지 않았고 릴리즈가 많이 줄어들어 투어를 가지 못하는 한국 팬들이 슬슬 힘들어했다. 한편 자신이 프로듀싱한 컨텍트 렌즈 'loveil'이 누적 판매개수 150만개를 돌파하며 일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심심했던 2014년이 지나가고, 2015년 3월 18일에는 정규 12번째 앨범 'WALK OF MY LIFE'의 발매가 결정되었다. 신곡은 12곡이 수록됐고, TV 프로모션도 없으며 곡 평가도 호불호가 갈렸지만 사양이 좋아서인지 다행히 5만장을 넘겼다. 첫날 판매량은 11집보다 높았다. 발매 첫주 1위를 기록. 같은해에는 아레나 투어를 개최해서 역시나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투어에서는 그전과는 달리 흐름이 좋고 퍼포먼스도 여전히 화려한 편이었지만 가수 본인의 퍼포먼스 기량이 더 늘어난 모습이었다. 특히 투어에서 선보인 고난이도 플라잉 요가 퍼포먼스는 극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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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5주년 투어에서 선보인 공중곡예 퍼포먼스.

7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해서 여름 히트곡들을 모은 컬렉션 앨범 'SUMMER of LOVE' 발매가 결정되었는데 트랙리스트와 자켓이 매우 허접해서 발매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고 결국 판매량도 시망했다.[55] 이것도 모자라 발라드 히트곡들을 모은 컬렉션 앨범 2탄 'WINTER of LOVE'도 발매되었다. 첫날 순위는 1위였지만 위클리 차트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그래도 명곡들이 모여진 앨범이라 3만장이 넘게 팔리며 나름 선방했다. 신곡도 일부 호평을 받았으나 역시나 프로모션은 없었다. 그래도 같은해 연말 가요제 FNS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TV에 출연했다. 굵직 굵직한 스페셜 방송에는 한두번씩 출연하는 가닥으로 잡은듯 하다.
15주년 기념 콘서트 다이제스트 영상.

자신의 데뷔 15주년이었던 2015년 12월 6일에는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15주년 기념 라이브 'THE ARTIST'를 개최해 15주년을 팬들과 현장에서 함께 보낸다. 이 날 코다는 "노래도 춤도 잘 못하는 귀여운 비쥬얼도 없던 나였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것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오게됐다", "하루라도 더 오래 노래하고 싶고, 앞으로도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가고 싶다"며 앞으로의 다짐을 맹세했고 1만 5천명의 꽉찬 객석을 바라보며 긴 세월을 느낀 코다는 몇번이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016년에는 3월부터 11월까지 데뷔후 처음으로 47 도도부현을 도는 대규모 투어를 진행했는데, 코다 본인이 코멘트 하기를 "교토 출신인데 교토 라이브를 한적이 없어서 전국을 리얼하게 돌고 싶다"라는 이유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3월 하반기 예정이었던 첫 투어 일정은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인해 취소. 4월 9일에는 라이브 회장 한정 및 mu-mo샵 한정 발매 싱글 'Shhh!'가 발매되었고 mu-mo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B-Side에는 파칭코 무료배포 CD에 수록된 '君想い'가 수록됐는데 팬들 사이에서 묻히기 너무 아쉽다는 반응이었고 아마 이 반응을 수렴하여 수록하게 되었다. 한가지 주목할 건 벌써 59번째 싱글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의 싱글 수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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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개최한 47 도도부현 투어.

2016년 한 해 활동을 보자면 컬렉션 앨범 1장, 디지털 싱글 1장으로 2014년부터 투어 위주로 바뀐 활동 플랜이 이제 확실히 굳혀진게 눈에 띈다. 떡밥이 없어서 국내팬들은 지쳤지만 그래도 투어 반응이 워낙 좋아서 처음으로 도전한 47 도도부현 투어가 역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완전히 투어형 가수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한해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2017년 전국투어 일정이 잡혔다. 2016년에 이어 2년 연속 47 도도부현을 도는 투어로 결정되었는데 내년 4월에 시작해 10월에 막을 내린다. 2016년 투어 파이널에서는 60th 싱글 스포가 있었다. 아마 내년 초 쯤 새로운 싱글과 앨범이 발매될 예정으로 보인다. 이제 과거처럼 1년 4계절을 꽉 채워서 발매됐던 싱글을 모아 싱글 콜렉션같은 정규 앨범이 발표하는 게 아닌, 싱글 발매를 자제하고 앨범 제작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실제로 음악 노선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지만 유기성 하나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코다 쿠미는 음악적으로도, 활동 반경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17년 3월 8일 드디어 13번째 앨범 W FACE ~inside~」 「W FACE ~outside~」의 발매가 결정됐다. 무려 2장의 앨범이 동시 발매되는데, 각 타이틀 앨범마다 10곡씩 수록되며 inside에는 감성적인 발라드부터 경쾌한 팝 사운드를 주로 담았으며, outside에는 힙합과 R&B 위주의 댄스 곡 위주로 수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길었던 준비 기간만큼 두 장의 앨범 곡수를 합치면 무려 20곡인데 더블 앨범이 아니라 따로 동시에 발매하는 케이스기 때문에 판매량에 악영향을 미칠거 같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래도 본래 SPRING of LOVE의 발매썰이 돌았던터라, 베스트가 아닌것만으로도 다행인 소식이다.

'W FACE'의 발매 후 앨범 퀄리티가 생각보다 좋아서 여기 저기 호평 섞인 목소리가 많다. 그리고 'inside', 'outside' 두 앨범이 모두 오리콘에서 1, 2위를 차지해 여가수로는 47년만의 오리지널 앨범 1, 2위 획득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다만 발매일을 정말 잘 잡은 영향도 상당히 컸다. 2010년대 이후 발매된 앨범이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코다지만 이번 앨범은 긴 제작 기간만큼 곡 퀄리티가 좋고 오랜만에 앨범다운 앨범을 만들었다는 좋은 평가가 있어서, 앞으로의 음악 인생에 좋은 전환점이 될만한 앨범으로 주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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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NHK 우타콘에 출연해 눈물을 보인 코다 쿠미.

그리고 오랜만의 앨범 홍보를 위해 NHK 음악 방송 '우타콘'에 출연한 코다 쿠미는 무대가 시작될때의 MC의 소개 멘트(47년만의 쾌거를 언급한 부분)와 객석에서의 응원 소리에 복받쳐 생방송 도중 눈물을 흘렸다. 영상 링크 생방송 음악 방송 도중 눈물을 흘린건 대상때 이후로 처음인데 이후 트위터를 통해 언제나 제 등을 토닥여주고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져나왔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긴 공백 기간과 새로 나올 앨범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차트에서 좋은 순위를 거두어 감정이 복받쳤던 것. 사실 판매량이 높은 것도, 정말 예전처럼 앨범이 히트한건 아닐지라도 여전히 자신을 바라봐주는 팬들이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더욱 감격스러웠던 코다 쿠미였다.
울어버렸어요
지켜봐준 모두에게 미안해요.
걱정끼쳐 버렸네(웃음)

처음에 MC 소개 멘트를 듣고
감회에 젖어버렸어요.

모두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니
기쁨이 흘러넘쳐 나와버렸습니다.
결국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 우타콘 생방송 직후 코다 쿠미 트위터 전문

현재 코다는 4월 8일부터 시작된 1년만의 전국 47 도도부현 투어에 매진하고 있다. 벌써부터 4월 분 공연이 매진되고 있어 성황리에 개최 중.

최근에는 8월·10월·12월로 이어지는 한정 싱글 3부작을 발매하고 있다.[56] 제 1탄 LIT와 제 2탄 HUSH까지 발매되었으며, 12월에는 발라드 싱글 'NEVER ENOUGH'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12월 6일, 자신의 데뷔 17주년일에 FNS 가요제 출연이 확정되어 오랜만에 TV 가요제 시상식에 서게 된다.

2018년, 5년만에 개최되는 팬클럽 투어 'Koda Kumi Fanclub Live Tour ~And~'의 공연 일정이 결정되었다. 4월 29일부터 6월 17일까지 총 15번의 공연이고 주로 소규모 공연장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올해 2장의 앨범을 릴리즈 하는 것이 발표되었는데, 2월 28일에 제 1탄으로 발매되는 앨범 AND가 발표됐다.

2018년 여름, 여러 각국에서 서비스 되는 애플리케이션 'Tik Tok'의 광고에 코다가 불렀던 'め組のひと'가 삽입되어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발매 된지 8년된 노래가 라인 뮤직과 애플 뮤직에서 역주행 했으며, 라인 뮤직에서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화제가 되어 'テレ東音楽祭(테레토음악제)'에 출연해 'め組のひと'를 다시 선보이기도 했다.

8월 22일, 2018년 제 2탄 앨범이자 16번째 정규 앨범 DNA가 발매되었으며 a-nation에 참여가 확정됐다. 그리고 9월 14일부터는 전국 투어 'KODA KUMI LIVE TOUR 2018~DNA~'를 개최했다. 이 투어에서는 처음으로 새해 카운트다운 라이브를 시도했고 성황리에 투어를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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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TOUR 2019 re(LIVE)

2019년 새 투어가 결정되었다. 무려 전설의 투어 두 편을 새롭게 복각하는 주제의 투어다. 지난 2007년 전국 투어와 2013년 투어를 다시 재현하는 투어이며, 9월 14일부터 홀에서 진행된다. 티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복각하는 투어의 의상을 더 업그레이드 해서 착용하고 촬영했다. Black Cherry 투어의 경우는 벌써 12년전인데 그때와 거의 달라진게 없고 더 예뻐진게 눈에 띈다.

새 투어의 컨셉이 결정되고 팬들의 반응이 아주 호평이다. 전설의 어항 퍼포먼스를 다시 선보였고 하루 2 공연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음에도 무사히 투어를 성황리에 마쳤다.

2019년 11월 13일 새 정규 앨범 re(CORD)를 발매했다. 전성기 시절의 느낌과 현재의 모습이 잘 결합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년에는 5년만에 아레나 투어의 개최가 결정되었고 20주년을 앞두며 여전히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4.6. 2020~ : 20주년 돌입

20주년에 돌입한 코다 쿠미는 오랜만에 예능 버라이어티에 출연하고 있는데, 전성기때와 달라지지 않은 여전한 몸매와 왠지 모르게 더 예뻐진듯한 비주얼을 선보여 호평을 얻고 있다. 가수 본인 자체도 관리를 잘했지만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링을 찾아서 일본 현지에서도 관리를 잘했다, 스타일 여전히 좋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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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데뷔 21주년 기념 이벤트 라이브
2020년에는 슷키리 생방송에 출연해서 자신의 히트곡 'Butterfly'와 '사랑의 노래' 중 시청자 투표를 받아 한 곡을 선보이게 됐는데 예상밖의 'Butterfly'가 선곡되어 당황한 나머지 첫소절에서 실수하고 폭소[57]한 모습이 인간적이었다며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고 뉴스 댓글에도 죄다 호평만 달렸다. 근 몇년간 코다의 뉴스에는 악플러들이 대다수였는데 팬들도 놀랄 정도.

20주년에 돌입한 코다 쿠미는 오랜만에 예능 버라이어티에 출연하고 있는데, 전성기때와 달라지지
최근 일본의 모 언론에서는 비난의 폭풍우였던 코다 쿠미가 최근 호감도가 극적으로 회복한 이유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떨어지지 않는 가창력으로 팬들을 매료 계속

코다라고하면, 2004년 영화 '큐티하니'의 주제가로 주목을 받아 「에로 각코이」라는 독특한 스타일로 대 브레이크. 일세를 풍미했지만 2008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양수 발언"을 계기로 큰 비난을 받고 인기가 하락했다. 그 후에도 매년 신곡을 발표하고 투어도 실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 전성기에는 못 미치지만 최근 들어 다시 서서히 호감도가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옛날은 안티도 많았지만, 지금도 높은 전문성을 가지면서 어깨의 힘이 빠져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모습을 강력한 무기로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를 거듭해도 스타일과 가창력을 유지하면 팬이 줄어들지 않는 단 말인가.

TV 전문가의 나카무라 유이치 씨는 현재 코다 쿠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에로 각코이」로 대 브레이크하고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 뜨릴 기세였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튀어 나온 "양수 발언"이 엄청 무지하고 경솔해 많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준 매우 충격적인 코멘트였습니다. 당연히 CM 방영 중지, 활동 자숙 TV에서 해명 및 사과 인터뷰를 흘리는 등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고 난리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멀어진 팬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녀가 한 자신의 언동에 대한 반성과 자숙의 마음과 함께 "이대로 끝낼수 없다"는 결의와 각오가 싹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인기가 부활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확실히 받아 들여 아티스트로서 팬이나 관객을 진지하게 대했기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어려워지는 보디 컨트롤을 확실히 해내고 있는 부분도 바로 '계속은 힘이다'[58]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라포[59]가 되어도 줄지 않는 코다. 전성기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 매력이 전해지면 재브레이크 기대도 가질 수있다. 향후에 주목하고 싶은 점이다.
비난의 폭풍우였던 코다 쿠미 호감도가 극적 회복한 이유, 2020년 아사히 언론 기사 中 #

유튜브 코다 쿠미 공식 계정에서는 20주년을 맞아 과거 뮤직비디오를 발매일에 맞춰 초고화질로 업로드 하고 있다. 관심 있다면 방문해보자.

20주년을 맞이한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더믹이 겹쳐 공연계의 불황이 찾아왔지만, 코다는 철저한 방역 하에 아레나 투어를 개최했고 관객의 4분의 1만 수용했다. (1만 6천석 공연장에서 4천명을 수용) 공연은 감염자 없이 무사히 마쳤으며, 코로나로 인해 그 전 아레나 투어처럼 다양한 세트와 화려한 볼거리는 자제했지만 20년차임에도 뛰어난 관리 실력을 바탕으로 좋은 비주얼과 무대를 선보여 공연에 임했다.

2021년에는 여름 싱글 3부작 'We'll Be OK', 'Doo-Bee-Doo-Bop', 'to be free'를 발매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같은 해 FNS 가요제에서는 비슷한 시기 데뷔해 활동한 AI와 함께 합동무대를 꾸몄는데 언론에서 호평 받았다.

이후 20년 커리어를 정리하는 'BEST~2000-2020~'을 발매했고, 12월에는 데뷔 21주년을 기념하는 Zepp 공연을 펼쳤다. 이후 정규 앨범 18집 heart가 리스너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최근 데뷔 20년차임에도 관리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앨범 수록곡 '100のコドク達へ'가 유선 차트 2위까지 올랐다.

2022년 봄부터는 출산 후 복귀 공연이었던 'Love & Songs' 시리즈를 오랜 만에 다시 꺼내 2022년 전국 투어를 발표했으며 전 공연이 완매되었다.# 여름에는 본인 최초가 되는 풀 오케스트라 공연이 예정되어 여전히 전력적인 활동중이다.

최근에는 예능과 특집 음악방송에 꽤 출연하고 있으며, 자신이 프로듀스한 다이어트 제품 'KILLER BURNER', 스킨케어 '아뷰토(AVEAUTE)', 의류브랜드 'GYDA'의 콜라보레이션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 본인의 자리에서 꾸준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오랜만에 유선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디지털 싱글 「100のコドク達へ」 (2021)

2022년에는 '가면 라이더'의 주제가 및 애니 게임 캠페인 송 'WINGS' 등을 발표해 오랜만에 애니-게임 관련 타이업 곡들을 자주 불렀으며 2023년 1월에는 Music & Live Package 앨범 WINGS를 발매했다. 올해 홀 투어가 결정되어 2020년 발매된 앨범 angeL + monsteR의 투어인 'Koda Kumi Live Tour 2023~ angeL & monsteR'의 개최가 결정된다.

놀라운 것이 2019년 투어에 이어 이번 투어도 하루 두 번 공연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또 눈여겨 볼것이, 2020년에 발매된 앨범을 3년이나 지난 2023년에 진행한다는 것인데, 같은해 행해진 전국 투어에서는 해당 앨범 수록곡들 위주 투어가 아닌 20주년 기념 투어의 성격이 강했었고, 어떤 이유에서는 모르지만 해당 앨범의 투어가 진행될 예정이었다가 무산된것인지, 아니면 아쉬움이어서였는지 팬들도 의외의 반응이다.

5. 보컬

코다가 전성기였던 200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 한국 일음 커뮤니티에서는 J-POP 아티스트 중에서 코다 쿠미가 노래를 제일 잘하는 거 같다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던 시기다. 일단 코다는 타고난 성량과 힘을 중심으로 끼가 많아서 표현력이 좋았고, 비강을 많이 사용하며 록 음악 영향을 많이 받은 창법을 사용했는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격한 댄스에도 흔들리지 않는 라이브 실력을 선보여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실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국내에서는 가수 신지효린의 목소리를 섞어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바도 있다. 효린의 경우에는 외모까지 닮아서 일본에서는 유튜브 등지에서 효린 쇼츠 영상 제목이 한국의 코다 쿠미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다수.
다만 진성 의존도가 필요 이상으로 많고[60] 발라드 라이브에서 애드립 라인이 과한 편이라 취향이 갈리는 편이며, 1년의 시작과 끝을 라이브로 장식할 정도로 과한 스케쥴로 인해 2000년대 후반부터는 목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성이 중요한 대중 음악계에서 정답은 없지만 2006년 파란만장 킨스마 스페셜에서 코다가 말하기를 본인은 테크닉보다 감정으로 부르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딱 이 말이 코다 쿠미의 보컬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트레이닝을 잘 받아서 안정적인 보컬 스킬을 사용한다기 보다, 타고난 음색과 끼로 감정 표현에 탁월했던 케이스다.

다만 진성 의존도가 필요 이상으로 많고[61] 발성 체계가 무지 완벽하게 클리어된 느낌이 아니어서 목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고수한 것이 장기적으로는 타격이 되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그로 인해 2000년대 후반부터는 목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간혹 라이브에서 애드립 라인이 과한 편이라 취향이 갈리는 편이며, 발음을 많이 굴리고 쿠세가 후반기 음악에서 더 짙게 보이면서 이 부분이 단점으로 뽑히기도 한다.

개성이 중요한 대중 음악계에서 정답은 없지만 2006년 파란만장 킨스마 스페셜에서 코다가 말하기를 본인은 테크닉보다 감정으로 부르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딱 이 말이 코다 쿠미의 보컬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1부터 10까지 트레이닝을 잘 받아서 안정적인 보컬 스킬을 사용한다기 보다, 타고난 음색과 끼로 탁월한 감정 표현과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던 케이스.
그렇게 계속되는 라이브 투어 공연과 프로모션을 휘몰아친 2000년대가 지나고 2010년대부터는 눈에 띄게 음역이 좁아지고 목상태가 악화되었으며[62] 출산으로 인해 1년간 휴지 기간을 보낸 2012년 말에 목상태가 아주 잠시 회복되는 듯 싶었으나, 그 이후 빠른 속도로 목상태가 악화되었다. 목상태가 안좋아지면서부터 안좋은 습관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것이 과한 바이브레이션과 고음 부에서 음을 제대로 찍지 못해 벤딩을 사용해 곡이 늘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고 특히 대표곡 "사랑의 노래"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곡이라, 코다 쿠미의 창법에 수월한 곡이 애초에 아니었지만 목상태가 안좋아지면서 부터 아예 사비 박자 자체를 뒤로 벤딩하며 안좋아진 보컬 습관이 모두 총집합되는 결과를 나타내어 팬들에게도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정도다.

더군다나 일본어의 구절 상 비음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안그래도 비강 사용을 많이 하는 가수인데 적당했던 비강 비율이 활동 후반부 갈수록 목상태가 안좋아지자 발성을 교정하여 정면대결을 펼치는 게 아닌, 과한 콧소리로 위기를 넘기더니 이것이 남발되면서 어느순간 코창력이라는 얘기를 들을 가수가 아닌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특히 2010년부터는 레코딩에서도 마디마디 마다 콧소리로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겨버려 돌이킬 수 없는 쿠세가 되었다.

코창력과 비강을 잘 쓰는 가수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인데 후자에 가까워서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울수 있었던 코다 쿠미는 어느순간부터는 정말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변하기 시작한다. 본인은 전성기때부터 보이스 트레이닝을 받는다고는 했지만 2008년 후반부터는 음악과 라이브에서 그 증거가 나오지 않고 가창력의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보컬 트레이닝 자체를 우리나라처럼 체계적으로 받는 가수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코다 쿠미 정도의 실력이면 레이블도 본인도 굳이 보컬 트레이닝에 힘쓰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게 크나큰 패착이 됐다.

코다 쿠미는 가성 사용이 수월한 편인데 이 것을 보면 충분히 적절한 시기에 성구를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는 발성 트레이닝을 받았으면 지금쯤 일본에서 손에 꼽는 보컬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건 출산으로 인해 1년간 휴지 기간을 보낸 2012년 말에 목상태가 아주 잠시 회복되는 듯 싶었으나, 그 이후 더 빠른 속도로 목상태가 악화되었다. 목상태가 안좋아지면서부터 안좋은 습관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것이 과한 바이브레이션과 고음 부에서 음을 제대로 찍지 못해 벤딩을 사용해 곡이 늘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고 특히 대표곡 "사랑의 노래"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곡이라, 코다 쿠미의 창법에 수월한 곡이 애초에 아니었지만 목상태가 안좋아지면서 부터 아예 사비 박자 자체를 뒤로 벤딩하며 안좋아진 보컬 습관이 모두 총집합되는 결과를 나타내어 팬들에게도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정도.

그러나 2018년~2019년을 기점으로 해외의 보컬 트레이너에게 보컬 레슨을 받고 최근들어 보컬 트레이닝에 힘 쓰고 있는 모습이 SNS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2019년 테레토 가요제에서 부른 "사랑의 노래"를 보면 그 전 창법에서 안좋은 습관을 벗어나 진성과 가성의 애매한 경계(흔히 말하는 믹스보이스)를 사용하기 위해 불필요한 힘[63]을 자제하고, 박자도 일정하게 부르려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며 데뷔 20년 차에 계속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줄기차게 모든 공연을 올 라이브로 선보이고 보컬 스타일도 목이 상하기 쉬운 스타일이었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지켜볼만한 부분이다. 1n년이 넘는 세월 유지하던 창법을 하루 아침에 바꾸리란 쉽지 않겠지만 워낙 자기관리에 뛰어난 코다 쿠미 답게 보컬적인 부분에서도 앞으로 계속 힘을 쓸것으로 예측된다.

덧붙여 최근 코다 쿠미는 본인이 하고자하는 힙합 음악을 많이 선보이는데 특히나 힙합과 알앤비 영향을 받은 장르에서는 더더욱 보컬 트레이닝이 코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질 것이다.[64]

그러던 2022년 뮤직스테이션 SP에 출연해 '사랑의 노래'를 요 근래 원곡과 가장 비슷하게 불러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현지 반응도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

2022년 MUSIC BLOOD에 출연해 처음으로 보컬 악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2015년경부터 마음처럼 노래가 되지 않아 큰 위기를 겪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내년부터 노래를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코다는 특별한 보컬 트레이닝 없이 본인이 직접 케어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스케줄 과다와 더불어 목상태 악화에 근원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보컬 트레이닝을 통해 쓰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하며 발성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고[65], 코다 본인도 자신의 보컬에 대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6. 여담

파일:external/68.media.tumblr.com/tumblr_oib94hHvRw1sq377wo1_400.jpg
코다 쿠미의 사인 (2004년~)
뮤직스테이션 히스토리 영상 (총 51회 출연, 2001~2015)

7. 음반 목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코다 쿠미/음반 목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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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8.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연도 출연 횟수곡명출연 순서상대
2005년코다 쿠미 스페셜 버전[69]16/29D-51
2006년2夢のうた25/27이츠키 히로시
2007년3愛のうた20/27토쿠나가 히데아키
2008년4TABOO17/26이츠키 히로시
2009년52009 홍백 KODA SPECIAL[70]21/25아라시
2010년6KODA KUMI 2010 Special Medley[71]15/22이츠키 히로시
2011년7愛を止めないで15/25동방신기
2012년8Go to the top07/25나오토 인티 레이미

9. 투어

9.1. 정규 투어

투어 기간 콘서트명 규모 동원객
2005년 10월 15일~11월 13일KODA KUMI LIVE TOUR 2005 ~first things~Zepp
9 공연
2만명(추정)[72]
2006년 10월 9일~2007년 2월 23일KODA KUMI LIVE TOUR 2006 ~second session~
45 공연
10만명
2007년 9월 28일~12월 1일KODA KUMI LIVE TOUR 2007 ~Black Cherry~홀+아레나
16 공연
도쿄돔
1 공연
18만명[73]
2008년 4월 12일~6월 1일KODA KUMI LIVE TOUR 2008 ~Kingdom~아레나
18 공연
14만명
2009년 4월 11일~6월 14일KODA KUMI LIVE TOUR 2009 ~TRICK~아레나
20 공연
18만명
2010년 4월 10일~6월 11일KODA KUMI LIVE TOUR 2010 ~UNIVERSE~아레나
19 공연
20만명[74]
2011년 4월 23일~10월 28일KODA KUMI LIVE TOUR 2011 ~Dejavu~
60 공연
15만명
2013년 3월 16일~6월 20일KODA KUMI LIVE TOUR 2013 ~JAPONESQUE~아레나
16 공연
15만명
2014년 3월 12일~7월 24일KODA KUMI LIVE TOUR 2014 ~Bon Voyage~
50 공연
13만명
2015년 4월 4일~6월 28일KODA KUMI 15th Anniverary Live Tour 2015 ~WALK OF MY LIFE~
supported by Mercedes-Benz
아레나
12 공연
11만명
2016년 4월 9일~11월 13일KODA KUMI LIVE TOUR 2016~Best Single Collection~47도도부현 홀
57 공연
14만명
2017년 4월 8일~2018년 1월 28일KODA KUMI LIVE TOUR 2017~W FACE~47도도부현 홀
59 공연
15만명(예상)
2018년 9월 14일~2018년 12월 31일KODA KUMI LIVE TOUR 2018-2019~DNA~
36 공연

9.2. 팬클럽 투어

투어 기간 콘서트명 규모 동원객
2008년 9월 22일~2008년 10월 15일Fan Club Event 2008: Let's Party Vol. 1 Zepp -
2012년 11월 7일~2012년 12월 8일Koda Kumi Premium Night ~ Love & Songs ~무도관 -
2013년 10월 27일~2013년 11월 28일Koda Kumi Fanclub Live Tour ~Let's Party Vol,2~Zepp
라이브하우스
3만명
2018년 4월 19일~2018년 6월 17일Koda Kumi Fanclub Live Tour ~And~Zepp
라이브하우스
-

10. 수상

10.1. 가요제

대상은 볼드 처리

10.2. 기타 수상

11. 기록

12. 링크

12.1. 공식 웹사이트

12.2. 팬카페



[1] 활동 예명 코다 쿠미(倖田來未)는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라는 의미에서 요행 행(倖)자로 직접 바꾸어 지어줬다고.[2] 2010년 오피셜 북 '倖田歴 (코다 레키)' 中 발췌.[3] 헤이세이 시대를 풍미한 여자 아티스트를 호칭하는 별명으로, 우타히메라고도 불린다. 쉽게 말해 Diva의 일본식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4] 한국 일음 커뮤에서는 'D.D.D.', 'TABOO'가 압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마이너하게 인기 있는 곡들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점.[5] 베스트 히트 가요제, 베스트 아티스트 가요제, 골든 디스크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는 이 해 사전 네티즌 투표에서 대상이 유력한 아티스트 1위에 올랐지만 정작 대상 수상에는 실패하고 최우수가창상을 수상했다. 레코드 대상에서도 대상을 못받은 게 의아할 정도로, 2006년은 코다 쿠미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6] 1위는 그 유명한 EXILE.[7]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면서 여러 결산 차트가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기록에서 스믈 스믈 코다 쿠미의 이름이 상위권에 자주 나오고 있는 것도 그의 인기를 반증하고 있는 사례.[8] 코다 쿠미는 디지털 판매량도 만만치 않다. 골드 인증을 받은 곡 목록은 너무 많아서 일부 곡만 기재되고 그 외 22곡이라고 표현될 정도. 그에 비해 밀리언 인증 곡은 '아이노우타' 한곡이라서 디지털 쪽은 201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니시노 카나가 단단하게 잡고 있다.[9] 혼다의 기업 광고를 비롯해 유명 화장품 비세(화장품) 모델 및 각종 주류, 뷰티, 스낵류, 쥬얼리 CM까지 했다.[10] 다만 이들은 음반 시장 호황기였던 90년대 후반에 데뷔해 00년대 초반에 세운 기록들이기도 하다.[11] 1990년대는 그 유명한 헤이세이의 3대 가희 아무로 나미에, 2010년대에는 니시노 카나가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12] 이 영상 외에도 과거 오디션에 굉장히 많이 지원해서 코다의 오디션 영상은 꽤나 많이 남아있다. 어렸을 때 코다의 모습은 상당히 성숙하고 노안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가창력만큼은 이때부터 출중했다.[13] 모무스 오디션과 시기가 겹치는데, 당시 일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 종말론을 코다가 심각하게 믿고 있어서, 이 시기 오디션을 무지막지하게 지원했다고 한다.[14] 이후 오오츠카 아이, BoA, 코다 쿠미등을 배출하면서 에이벡스하면 여가수라는 이미지가 있다.[15] 코다는 당시를 회상하기를 가족 모두가 이 오디션에 많은걸 걸고있다는 걸 느꼈다고.[16] 당시 그랑프리에 오른 세명의 소녀들은 Dream이라는 여성 트리오로 먼저 데뷔시켰다. 원래는 그랑프리에 한명이 입상할 예정이었지만 참가자의 수준이 좋아 최종 세명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 오디션에서 제작기획까지 이미 마쳤던 상황. 코다의 데뷔곡 'TAKE BACK'도 당시 오디션 현장에서 공개됐다고 한다.[17] R&B이나 힙합 장르를 주로 제작하는 레이블로 탄생했으나 이후 상황을 보면 그냥 크게 다를 거 없는 에이벡스다. 애초에 산하 레이블이기도. 참고로 우리나라의 동방신기가 소속돼있는 레이블이기도 하다. BoA는 정통 avex trax 레이블.[18] 일본의 2인조 알앤비 자매 듀오, 그러나 멤버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 현재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19] 이후 인터뷰에서도 자주 밝히지만 코다 본인은 서양 음악보다 가요 곡을 좋아하고 발라드 가수로 불리고 싶어한다.[20] 근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잘된 편은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냥 클럽DJ들한테 프로모션CD만 열라 돌리면 개나소나 다 올라가는 그런 차트다. 그래도 당시 코다가 7번째로 빌보드에 진입한 일본 가수로 어느정도 화제가 됐다. 프로모션 CD를 많이 돌렸을 수도 있지만 당시 'TAKE BACK'의 리믹스를 담당한 프로듀서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거물들이었고 그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더 높다.[21] 그래서 무명시절 아예 TV에 출연을 안한것은 아니고 2001년에는 'とくダネ'이라는 아침 정보 프로그램에 코다의 단독 인터뷰가 나간적이 있었으며 같은 해 연말 엠스테 슈퍼라이브에서는 에이벡스의 911 추모 프로젝트 'song+nation'에 코다가 참여하면서 출연 오퍼가 들어왔는지 갓 데뷔한 보아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상 TV 프로모션은 전무함에 가까웠고 자사가 운영하는 케이블 채널 'channel-a'에 가끔 등장할뿐 TV에서 코다를 보기는 좀처럼 힘들었던 시기는 맞다. 한마디로 뜰때까지는 봉쇄한다는 전략인데... 코다가 2005년 Heyx3에 처음 출연할 때도 전략에 묶여있었다고 우스갯소리로 언급한다.[22] 프로듀서 마츠우라는 코다를 발굴하고 키우긴 했지만 암흑 시절 코다에게 여러 돌직구를 날렸는데 그걸 지지대로 삼고 일어선 코다 쿠미가 놀라울 따름이다. 대놓고 방송에 나와 코다 쿠미의 초창기 비쥬얼은 볼거 없다고 얘기할 정도로 막말을 일삼았다.[23] 보아는 본인 자리에 선 것이 맞고, 동선 실수는 코다만 한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코다와 보아의 애드립 대결' 같은 제목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원래 원곡 자체가 코다와 보아의 고음으로 요란하게 마무리하는 곡이라서, 두 사람의 보컬 애드립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24] 이후 코다는 투어에서 MC 시간만 1시간을 훌쩍 넘겨 본인의 한을 완벽하게 풀었다.[25] 실제로 코다 쿠미가 직접 게임상의 캐릭터 모션캡쳐에 참여하였고, 극중 주요인물의 성우를 맡기도 하였다. 한때 이 주제가의 원래 내정자가 보아였다는 루머가 있는데 근거가 없다. 당시 파이널판타지 제작 과정의 글을 보면 아이돌 가수를 컨택하려 했다가 코다와의 대화가 순조로워서 코다에게 오퍼가 갔다고 하는데, 보아는 일본에서 아이돌 노선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real Emotion'이 보아의 초기 히트곡을 작곡한 하라 카즈히로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추측성 루머가 돌았던것도 이해가 간다.[26] 식사는 오로지 마른오징어와 물만 먹었고, 저녁 6시 이후로는 완전금식. 이건 지금도 계속 하는 식이요법이라고 한다. 8kg도 적은 감량은 아니지만 코다 쿠미는 키가 154cm의 단신이라 더 다이어트 하기가 어려운 조건이었다.[27] 다만 섹시컨셉 자체는 이전부터 꾸준히 시도하기는 했었다. 당장 COME WITH ME 자켓만 봐도 뭐....[28] 2005년 TBS 정열대륙 인터뷰 중[29]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가이 고 원작의 유명 애니메이션 시리즈 큐티하니의 최신버젼 곡을 부른 것이다. 이 곡 자체는 초기부터 멜로디와 가사를 거의 바꾸지 않으면서 부른 사람에 따라서 방식만 바꿔서 각 시리즈마다 불러왔고, 코다 쿠미가 부른 것은 가이낙스가 제작한 OVA <Re 큐티하니>의 OP였다. 코다 쿠미의 싱글은 타이업으로 같이 나온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명 시리즈물에 편승한 것이다.[30] 크리스마스에 하는 대형 스페셜 방송이다.[31] 엠스테는 방송 시작때 전출연진이 한명씩 나오는 게 등장 방식이다.[32] 여담으로, 당시 엠넷에서 일본의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일부 수입해서 방송하고는 했는데 이때 코다 쿠미를 다루는 편에서 '에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저 말을 그대로 번역하기는 그랬는지 '섹시쿨' 같은 정체불명의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33] 하마사키 아유미는 태닝 갸루와 대비되는 일명 히메 갸루를 전파시켜 일본 여성들의 스타일을 모조리 바꿔버린 바 있다.[34] 체감 인기에 비해 싱글 판매량이 저조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노래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TBS 일본 레코드 대상'의 경우는 작곡가들이 주는 상이고 'NHK 일본 레코드 대상'과 달리 판매량이 수상 기준이 아니었다.[35] 이 프로젝트는 BEST~first things~ 시점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당시 빌보드 인터뷰에서 12월부터 재미난 계획이 있을거라고 스포를 날리기도 했다.[36] 4곡이 전부 A면(타이틀)인 싱글.[37] 킨키의 1위 기록이 깨질뻔한 한 주로, 킨키 팬들한테도 기억에 남는 주간이 됐다.[38] 방송에 송출되진 않았지만 직캠이 떠돌아다니긴 한다. 무대가 끝나고 관중들과 MC가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압권이었다.[39] 이외에도 채널 V 인터뷰에도 성실이 임했으며 슈가의 CD까지 샀다고 말했다.[40] 더구나 아유미 역시 당시 SM 소속이었고 아유미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을거다.[41] 다만 이 곡은 표절시비에 휘말려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42] 이 음반 신곡들의 퀄리티는 싱글 퀄리티에 못미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43] BEST ~Second Session~이 나온지 불과 1년도 안된 시기에 또 다시 베스트를 발매하는 건 누가봐도 무리수였다.[44] 비슷한 시기 같은 소속사의 오오츠카 아이 베스트 앨범 삽질 사건을 볼 때 이 회사는 가수가 뜨면 기획사임은 분명하다.[45] 이때의 인연으로 코다 쿠미와 동방신기는 최근까지도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46] 이 후 해당 방송 책임자가 사임됐다고 한다.[47] 돔구장은 여가수들 중에서도 정말 최정상자리에 간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콘서트장이다. 게다가 도쿄돔은 다른 돔 콘서트장들과 비교해도 좌석수가 5만명 이상으로 허들이 꽤 높기 때문에 더욱 힘든면이 있다. 지금은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난이도가 높다.[48] 이후 몇번 더 MAMA에 출연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모두 모 사이트의 찌질이의 소행으로 밝혀졌다.[49] 이때 상당한 곡들이 발매 연기가 되었다고 한다.[50] 코다 쿠미의 경우, 천천히 인지도를 쌓은 케이스긴 하나, 전성기가 정말 말그대로 대브레이크였기 때문에 도쿄돔 입성이 더 빨랐으며 대부분 가수들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면 시도하는 무도관 라이브는 생각보다 늦어진 특이한 케이스다.[51] 영상쪽에서는 꽤나 우세한 기록이 많다. 역대 솔로가수 DVD 판매량 1위도 코다 쿠미다.[52] 코다 남편 어머니의 고향이 대만이기도 하다.[53] '君想い'는 제외. 이 곡은 반응이 워낙 좋아서 2016년 싱글 Shhh! B면으로 들어갔다.[54] 피지컬 CD는 FC 한정으로만 출시.[55] 전년도에 발매된 여름 싱글이 2만장대였고 이 앨범이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는데, 사실 컬렉션 앨범이 가격이 더 비싸서 투자 비용대비 에이벡스한테 이득이 된건 맞다.[56]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고 팬클럽과 라이브 회장 한정판으로만 발매된다.[57] 6:34부터[58] 일본에서 사용하는 일상 용어로. 사람에게 쓰는 긍정적인 말이다. 계속 꾸준히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는 이에게 칭찬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59] 어라운드 포티. 거의 40이 되어가고 있음을 뜻함.[60] 고음 부분에서는 힘을 과하게 주는 일명 "쌩목"의 느낌도 다분하나, 코다 쿠미의 경우 음색이 매력적이라는 평가가 많다.[61] 고음 부분에서는 힘을 과하게 주는 일명 "쌩목"의 느낌도 다분하나, 코다 쿠미의 경우 음색이 매력적이라는 평가가 많다.[62] 코다 쿠미는 가성 사용이 수월한 편인데 이 것을 보면 충분히 적절한 시기에 성구를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는 트레이닝을 받았으면 지금쯤 일본에서 손에 꼽는 보컬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63] 후두에 긴장을 주어, 목을 짜내는 듯한 습관[64] 어느순간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창법과 힙합 장르가 너무나도 이질적이다보니 음악성도 평가절하되는 면이 아주 커서 더더욱 필요한 부분이다.[65] 믹스보이스 트레이닝[66] 목소리 뿐만 아니라 스타일이나 무대 퍼포먼스 스타일도 꽤 닮았다는 얘기가 전부터 많았다. 또 효린의 데뷔 초창기 시절 인터뷰에서도 주변인들에게 코다 쿠미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고 말한적도 있다. #[67] 비슷한 케이스로 하마사키 아유미도 국내에서 "음악적인 변신을 위해 성형을 강행했다"라고 밝혔다는 루머가 기정사실화 되기도 했는데 하마사키도 그렇게 말한적 단 한번도 없다.[68] 임신 당시에 흡연실에서 봤다는 찌라시 기사가 국내에 보도 된적이 있는데 역시나 구라다.[69] 큐티 하니와 Butterfly를 메들리.[70] Lick Me♥와 It's all Love!를 메들리.[71] 좋아서, 좋아서, 좋아서와 Lollipop을 메들리.[72] Zepp 평균 2000석+α x 공연횟수 총 9번[73] 아레나로는 총 13만명 동원, 파이널 도쿄돔까지 포함해서 18만명이다.[74] 가수 본인 최고 기록이다.[75] 수상 기준은 2005년.[76] 수상 기준은 2006년.[77] 1위는 하마사키 아유미.[78] 2018년까지 코다가 1위 기록이었지만 아무로 나미에의 고별 투어 DVD/BD 판매량이 이 분야를 갱신하는 것은 물론, 역대 일본 음악 영상물에서 최초로 100만장을 돌파했다.[79] 2008년 ~ 2009년은 전체 아티스트 2위.[80] 전체 누계 다운로드 수가 10억을 돌파한 대규모 서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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