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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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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리
이탈리아어 : Cagliari
사르데냐어 : Casteddu
국가 이탈리아
지역 사르데냐
면적 85.45km2
인구 146,627명[1]
시장 Massimo Zedda
시간대 UTC+1 (서머타임: UTC+2)

1. 개요2. 역사3. 경제4. 인구와 사회5. 랜드마크6. 칼리아리 칼초7. 자매도시8. 여담

1. 개요


칼리아리이탈리아 남해안에 위치하며, 사르데냐의 중심 도시다. 칼리아리의 사르데냐어 이름은 'Casteddu'로 문자 그대로 '성(castle)'을 의미한다. 사르데냐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고 섬 전역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놓여진 교통의 요충지이다.

2. 역사

칼리아리는 신석기 시대 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다. 칼리아리는 바다와 비옥한 평야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내륙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제공하는 두개의 습지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천해의 지리때문에 페니키아인이 정착하였으며 이후 카르타고가 정복하였다. 사르데냐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로마 공화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고대 로마속주 코르시카 에트 사르디니아의 중심지 카랄리스가 되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는 로마 해군의 주요 기지로 카르타고 해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칼리아리는 사르데냐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반달족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동고트족, 비잔틴 제국, 피사 공화국이 차례대로 차지하였다. 하지만 아랍인 해적들이 칼리아리를 계속 침공하자 이 일대에 요새를 세웠다. 왜냐하면 칼리아리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간 상업 항로를 통제하기 위한 완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르데냐를 노렸으며 14세기 후반 아라곤 왕국은 피사 공화국과 일련의 전투 끝에 사르데냐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칼리아리는 교황괴뢰국으로 만든 중세 사르데냐 왕국에서도 수도가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제를 받았으나 사국 동맹 전쟁으로 사보이아 공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국왕을 칭한 후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이자 피에몬테의 중심지인 토리노사르데냐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2] 이름만 사르데냐 왕국이지 사르데냐 사람들은 사르데냐 왕국의 정계에서 별 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으며 사보이아 가문의 국왕들도 칼리아리 대학교를 개편한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를 제외하면 사르데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사보이아 왕조가 사보이아와 피에몬테를 혁명 프랑스에게 빼앗기자 사르데냐로 몽진하여 1814년까지 칼리아리를 임시수도로 삼았으나 1814년 파리 조약으로 피에몬테를 반환받자 토리노로 환도하여 다시 찬밥 신세가 되었다. 186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선언된 후 칼리아리는 급격히 바뀌었다. 사르데냐 스타일의 꽃 장식과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한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항만도 크게 개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칼리아리는 1943년 2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폭격의 위험과 어려운 생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시골로 대피했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자는 총 2000명 이상이며 건물의 약 80%가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휴전을 하자 사르데냐는 나치 독일이 장악했지만 섬에 보급을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곧장 후퇴해 결국 미군이 장악하였다. 1948년에 칼리아리는 사르데냐 자치주 법령 제2조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르데냐의 주도가 되었다.

3. 경제

칼리아리의 1인당 소득은 25,315 유로로 사르데냐에서는 1위 지차체이지만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하면 매우 가난하다. 칼리아리의 주요 산업은 어업이며 이탈리에서 가장 큰 어시장 중 하나인 산 베네데토 시장이 있다. 또다른 주요 산업은 관광업으로 2022년에만 약 1,400,000명이 칼리아리를 방문하였다.

4. 인구와 사회

150,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칼리아리와 16개 인근 코무네 포함 광역도시는 431,000명이다.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칼리아리의 통근 지역인 기능적 도시지역의 인구는 477,000명으로 늘어난다. 칼리아리는 이탈리아에서 26번째로 큰 도시이자 사르데냐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5. 랜드마크

6. 칼리아리 칼초

이탈리아의 프로축구팀 칼리아리 칼초가 이곳을 연고지로 두고 있다.

7. 자매도시

8. 여담


[1] 2024년 12월 31일 기준.[2] 프로이센의 이름을 빌려왔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에 계속 머물렀던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과 비슷했다. 사르데냐나 프로이센이나 그저 국왕을 자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3] 부르봉 왕정복고 이전 사망하여 프랑스 왕비는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