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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부제는 '절제[1]에 관하여'[2]2. 등장인물
3. 줄거리
3.1. 카르미데스와의 대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옛날 자기의 대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액자 안으로 들어가면 소크라테스가 전쟁에서 돌아왔던 시점이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돌아온 소크라테스는 질리지도 않고 또 떠들려고 바로 체육관으로 직행한다. 체육관에서 소크라테스랑 만난 다른 사람들 특히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전투에서 살아돌아온 것에 안도하며 반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티아스의 옆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크리티아스는 자신의 사촌동생인 카르미데스를 칭찬한다. 얘는 집안도 좋고 잘생겼고 몸도 좋고 성격도 좋고 머리도 똑똑하고 다 좋다는 것이다. 곧이어 카르미데스가 체육관에 들어오자 소크라테스는 미소년을 보고 눈이 돌아가 카르미데스와 대화를 시작한다.
카르미데스가 요즘 두통에 시달려서 약이 필요하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전쟁터에서 트라키아 출신 의사를 한 명 만났는데 그가 약을 주면서 말하기를 머리를 치료하려면 신체 전체, 더 나아가 영혼을 치료해야 하는데, 영혼은 어떤 주문, 곧 아름다운 말로써 절제를 얻어 돌보아지고, 이로써 신체 부분부분에도 건강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니, 신신당부하거니와 우선 영혼을 내놓고 그것을 아름다운 말=주문으로 치료받지 않는 자에게 결코 두통약을 주지 말라 하였다 이야기한다. 그러니 카르미데스가 절제 있는 이인지를 검토해보자며 은근슬쩍 주제를 철학적 토론으로 전환해버린다.[6]
카르미데스가 지금 바로 주문을 받아적을 수 있냐고 하자[7] 소크라테스는 우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게 우선 아니냐는 투로 은근히 꾸짖으며[8] 만일 그가 절제를 가지고 있다면 주겠노라고 답한다. 크리티아스는 카르미데스만큼 절제 있는 이도 없을거라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미데스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절제를 가지고 있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카르미데스는 얼굴을 붉히며 만일 없다고 말하면 부끄러운 거짓말이 될 것이고 있다고 말하면 자만하는 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9]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테니 확인을 위해 절제가 무엇인지 아는 바를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카르미데스는 우선 절제란 일종의 차분함이라고 답한다.[10]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운동을 할 때에는 빠르고 민첩한 쪽이 차분한 것 보다 좋은데 절제란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것이어야 하니 어떤 때엔 좋지 않은 차분함은 절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카르미데스는 두번째로, 절제는 염치라고 답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인용하며[11] 염치는 어떤 상황에서는 훌륭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나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12] 마지막으로 카르미데스는 각자가 자신에게 속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답하나 소크라테스는 누군가[13]에게 들은 말을 읊은 것 아니냐며 카르미데스를 혼내고[14] 모두가 자기 일만 하고 남에게 속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굴러가는 나라가 국가경영이 잘 될지를 되묻는다.[15] 카르미데스가 답변을 제대로 못하고 배시시 웃기만 하자[16] 대화를 듣던 크리티아스가 이야기를 이어받아 더욱 격한 논쟁을 시작한다.
3.2. 크리티아스와의 대화
크리티아스는 카르미데스가 아직 어려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논답을 이어받는다. 소크라테스는 의사들은 타인의 건강을 치료하고 구두장이들은 타인의 신발을 만들지 않느냐며, 그들은 그럼 절제있을 수 없는거냐고 묻는다. 크리티아스는 만드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고 절제는 자신에게 속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의미분별을 통한 설득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행하는 것은 만드는 것과는 달리 업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7][18]소크라테스는 자기도 프로디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이 언어 용법 세분화를 하는 것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잘 안다고 말하며 대신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크리티아스는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 곧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절제라고 주장한다.[19]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의사나 정비사는 이로운 일을 하니 절제있을텐데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를 알고 있냐고 묻는다. 크리티아스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의사나 정비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가 이로운지 해로운지 알지 못하니 때때로 자신이 절제있는 일을 하는 지 알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절제있는 자가 자신이 절제있는지도 모르는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20]
말이 막힌 크리티아스는 자신이 했던 주장을 철회하고 델포이 신전에 써져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인용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곧 절제라고 새로 정의를 내린다.[21] 그리고 자신은 이를 확신하고 있으니 만일 소크라테스가 의문이 있다면 직접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일단 진정하고 자기는 절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의견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저 모르고 있으니 알아가기 위해 검토하고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건축은 집에 대한 앎이고 베 짜는 기술은 옷감에 대한 앎인데 절제는 무엇에 관한 앎이냐고 묻는다. 크리티아스는 절제는 물질적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닌 산술이나 기하 같은 추상적인 앎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산술도 수에 관한 앎이고 기하는 도형에 관한 앎이라면서, 그렇다면 절제는 무슨 추상적 대상에 대한 앎이냐고 묻는다.
크리티아스는 바로 그 지점이 절제와 다른 앎 사이의 차이점이라면서 절제만이 대상 없는 앎이자 앎 그 자체에 대한 앎이라고 주장한다. 절제라는 앎이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단 것이다.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가 이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이의가 있어 계속 딴지를 건다고 힐난한다.[22]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그저 크리티아스의 주장을 검토할 뿐이라고 다시금 강조한 다음 크리티아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봄과 들음 자체에 대한 들음, 욕망 자체에 대한 욕망, 바람 그 자체에 대한 바람 등은 존재하지 않지 않냐는 것이다. 감각이나 욕구 등 수많은 행위들은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더해 큰 것은 무언가에 대해 큰 것이고 2배인 것은 무언가에 대해 2배인 것이지 않느냐고 물으며 유독 앎에만 대상으로 삼는 것 없이 그 자체에 대한 앎이 있을 수 있냐고 묻는다. 자신은 이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고 크리티아스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고싶어한다.
크리티아스는 앎에만 대상이 없을 수 있는지를 증명할 뾰족한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장을 무르기도 싫어 잠자코 침묵한다. 소크라테스는 답보상태를 깨기 위해 그렇다면 앎 그 자체에 대한 앎이 우선 존재한다고 치고 그것이 이로울 수 있는지를 따져보자고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앎에 관한 앎이라면 알지 못함에 관한 앎이기도 한 거냐고 묻는다. 크리티아스가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절제 있는 이는 타인이 무언가를 아는지 알지 못하는 지를 알 수 있겠다고 한다. 크리티아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절제있는 이가 타인이 무언가를 아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지 자신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크리티아스는 어리둥절해하며 마치 빠른 이가 날렵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앎에 대한 앎을 가진 이가 앎과 알지 못함을 가릴 수 있는 건 당연한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납득하지 못하고 의술을 알지 못하지만 절제 있는 이가 돌팔이 의사를 가려낼 수 있겠냐고 묻는다. 진정 돌팔이 의사를 가려내려면 절제 만으로는 부족하고 의술에 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만일 절제가 크리티아스의 말과 같은 거라면 절제를 가진 이 모두가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알아 자신이 못하는 일에는 진실로 능력있는 이를 시킬테니 세상이 조화로워질 것 같다고 묻는다. 크리티아스가 이에 동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의술을 알지 못한 채로 돌팔이 의사를 가려낼 수 없듯이 절제라는 앎이 그렇게 이로운지 증명해내지 못한 것 같다고 반박한다. 그래도 절제 있는 이는 절제로 인해 배움이 빠르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테니 이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냐고 크리티아스의 원대한 가정을 은연중에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더라도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앎에 대한 앎이 존재하고 이것이 앎과 알지 못함을 가려낼 수 있다고 치고 대화를 이어나가자고 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쳐도 이러한 절제라는 앎이 이로운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 말대로 앞의 토론에서 앎에 대한 앎이 이롭다는 사실을 검토 없이 너무 쉽게 동의하고 넘어간 것이 사실이라 쳐도 앎 밖에서는 훌륭한 삶을 찾을 수 없을거라 주장한다.[23]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그 앎은 무엇에 관한 앎이냐고 캐묻는다. 크리티아스는 청동을 다루는 앎도, 가죽을 다루는 앎도, 체스를 두는 법을 앎도 아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아는 것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돌고 돌아 좋은 것에 대한 앎이 절제라는 대답으로 돌아왔다고 크리티아스를 힐난한다.[24] 그리고 좋은 것에 대한 앎은 앎에 대한 앎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아니니 절제와는 다른, 이로운 앎의 한 종류 아니냐고 한다. 크리티아스는 절제가 모든 앎의 감독자인데 절제 있으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앎도 있을 수 있지 않겠냐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건강을 찾아주는 것은 절제가 아닌 의술, 건물을 짓는 것은 절제가 아닌 건축술이니 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결국 크리티아스가 주장한 절제의 정의,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자 앎 그 자체에 대한 앎이 존재하는지도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고 그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로운 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증명에 실패했다.
3.3. 결론 : 아포리아
소크라테스는 결국 절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고 선언하며 사실은 지금까지 해온 논답에서도 증명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카르미데스를 걱정하며 기껏 절제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절제가 쓸모없는 거라면 참 슬픈일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탐구가 부족했을 뿐이고 절제는 좋은 것이 확실하지 않겠냐고 하며 나중에 다시 제대로 탐구하겠다고 한다. 카르미데스는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소크라테스의 주문을 알아내겠다며 크리티아스에게 절제를 알아내고 주문을 배우라고 명령해달라고 부탁한다. 크리티아스가 그렇게 하자 카르미데스는 이를 꼭 지킬 것이며 못 지킨다면 폭력을 쓸지도 모른다고 한다.[25]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설득시키기보단 폭력을 쓰겠다는 선언에 기겁하며 자기 선택권은 없는 거냐며 카르미데스에게 묻는다. 카르미데스는 그러니 자신의 요청을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하며 대화편을 마친다.[26]4. 여담
절제에 대한 대화편이라고 말해지긴 한다. 그런데 사실 절제라는 어떤 성품적 미덕이나 윤리학 같은 얘기라기보다는 절제를 소재로 삼아서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한다. 파르메니데스를 연상시키는 정말 안다는 게 뭐냐 모른다는 게 뭐냐, 안다고 한다면 그런 지식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게 뭐냐 같은 형이상학적인 소재 가운데에서는 상당히 진지하고 어려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소재를 그렇게 깊게까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에게는 상당히 어렵지 않다.근데 실제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 해도 이 내용을 카르미데스를 처음 읽을 때 실제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서 형이상학적인 철학적인 용어가 나름대로 정리되지만 그것마저도 사실 좀 쓸데없이 복잡한 편인데 플라톤은 철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상언어를 통해서 그런 내용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기 저작이기도 해서 언어가 좀 난잡한 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려운 소재임에도 잘 설명해주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은 내용이지만 어려운 소재를 개떡같이 설명했기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내용 자체도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책에 훨씬 더 세련된 설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전공자나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굳이 카르미데스까지 찾아 읽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주제에 대한 예고편 같은 느낌도 있고 30인 참주정의 주요인물인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를 소재로 삼아서 보여주는 플라톤의 문학적 센스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선 나름의 재미가 있다. 대화편 속 크리티아스의 카르미데스의 언행이 후일 그들의 행보를 은유하는 느낌으로 쓰여진 감이 있다. 아마 소크라테스의 사형 이후 작성되었을 이 작품에 플라톤이 의도하고 그러한 장면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 입장에서는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그다지 멀지 않은 친척이자 정치적으로도 비슷한 친스파르타 귀족 엘리트주의 동지였지만 아테네 시민으로서 변명할 수 없는 폭군이자 스승 죽음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플라톤의 복잡한 심정을 헤아리면 자못 삼삼한 재미가 있다.
특히나 작중 크리티아스는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를 제 입으로 먼저 운운하는 등 유사 소크라테스적 언사를 자주 드러내지만, 스스로의 말에 대해서 참으로 진지하거나 성실하지는 않으며, 소크라테스적 지혜로움의 이미지를 챙기는 데나 치중하는 인상을 주면서, 그가 본질적으로는 결코 소크라테스와 같지 않음이 연출된다. 대화 상대자로서 크리티아스는 특수하다. 에우튀프론처럼 소크라테스와 대비가 명확한 좀 어리숙한 보통 사람도, 에우튀데모스처럼 아예 대놓고 실없는 말장난, 말싸움하며 소크라테스와 대립하는 소피스트도 아닌, 그의 제자이며 언사까지 비슷해 소크라테스의 부류인 듯하면서도 잘 까 보면 본질적 차이가 있는 노회한 사이비인 것이다.
크리티아스는 그 스스로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멋진 말을 하였지만 그것을 결코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의 본질적 차이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그의 참으로 위대한 점은 이 멋진 말을 단지 남을 향한 잘난 체하는 훈계로 끝내지 않고,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자신에게 적용하여 '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는 성실한 자기비판과 메타인지로, 겉치장이 아닌 참으로 연결해냈다는 데 있다. 그렇게 그는 철학함의 진짜 모범을 보여주었고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모범 사례와 악례를 두루 잘 살펴 오늘날 우리가 연결해낼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일견 소크라테스적으로 보이는 '너 자신을 알라',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함이 앎이니라' 식의 훈계조 발언의 맹점은 무엇인가? 혹시 자신은 이미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높은 앎의 경지에 있다는 자만이 아닐까? 자기 앎에 대한 오판, 과대평가가 아닐까? 자기 지식과 지혜의 곳간이 제대로 차 있는지 헤아리지 않고, 재물이 진품인지 짝퉁인지 스스로가 꼼꼼히 살펴 보지도 않고, 길에서 들은 소문을 길에서 바로 내뱉듯, 지성을 숙성 없이 금방금방 방만하게 꺼내 자랑하고 되파는, 자기 반성에 소홀한 무절제한 지적 오만의 가장 나쁜 예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어리숙한 보통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함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백지인 이 사람은 이제 겸허히 지혜를 써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똑똑하며 깨우쳤다고 믿는 사람은? 크리티아스처럼 이제는 자기가 남들을 가르칠 수도 있다고 믿는 시꺼먼 사람은? 게다가 그 그럴듯함이 너무 대단해 여러 사람을 속여넘기고 추종 세력을 얻는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은? 도리어 누구보다도 어리석은 처사로 그 개인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까지 미치는 커다란 비극을 낳고 만다는 것을 플라톤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크리티아스는 다만 남을 속이는 자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자인가? <<국가>>, <<변명>>, <<파이돈>>, <<향연> 등을 섭렵하고, 플라톤의 이런 자잘한 대화편 문서에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 경지에 이른, 철학에 조예가 깊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카르미데스>>를 비롯한 일견 애매하고 난잡하고 결론을 알 수 없으며 실패작 같아 보이는 아포리아 문학의 묘미는 바로 이러한 능동적 생각거리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사고의 훈련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1] sophrosyne/sophrosune. 현대적 의미의 자기통제(력), 건전한 종합적 판단력, 균형 잡힌 처신 등을 포함해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요구받는 기본 소양이나 탁월한 성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즉 '절도 있음'에 가깝다고 하겠다. 호메로스 서사시나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들 자멸의 주 원인인 hubris/hybris(자만심, 오만)와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중용'으로 번역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2] 다만 으레 플라톤의 저작들이 그렇듯 부제는 후대 학자들이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3] 플라톤의 외삼촌으로 30인 참주정 당시 피레우스 항을 관리하며 크리티아스의 폭정을 보조했다.[4] 플라톤의 5촌 당숙이자 카르미데스의 사촌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 후 친스파르타 귀족파 30인 참주정을 주도하며 학정을 펼쳐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소크라테스 사형의 실질적 원인이 되었다. 아틀란티스가 처음 나온 것으로 유명한 <<크리티아스>>에 나온 크리티아스의 손자이다.[5] 소크라테스의 죽마고우이자 추종자. <<고르기아스>>를 비롯한 다른 대화편에서도 등장한다. <<변명>>에 따르면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아온 장본인이다.[6] 사실 카르미데스가 오기 직전 크리티아스가 두통을 치료하는 척 하면서 카르미데스를 검토해보자고 꼬셨다.[7] 맨 처음 소크라테스는 주문의 정체가 뭔지 위처럼 바로 밝히지 않고, 나한테 두통약이랑 주문이 있지롱 근데 주문을 모르면 두통약이 소용 없지롱 하면서 카르미데스를 일부러 꼬신 다음 본색(?)을 드러낸다.[8] 설득 없이 막무가내로 주문을 가르쳐 달라는 카르미데스의 태도는 후일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참주가 되어 타인에게 맘대로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의 은유라고 보통 해석된다.[9] 카르미데스는 자기 자신이 절제 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외부 시야에 너무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나이대 젊은이다운 반응이라고 여겼는지 소크라테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10] 카르미데스가 귀족 집안에서 살면서 배워온 예의범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문의 카르미데스는 여러 사례들을 열거하며 이를 포괄하는 원칙을 뽑아내는 귀납적 일반화를 이용해 정의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를 찾아 이를 반박한다.[11] 염치는 곤궁한 이가 가까이 하기에 훌륭하지 않다는 구절이다.[12] 카르미데스는 호메로스의 권위를 너무 쉽게 인정하고 넘어가고 있다.[13] 크리티아스는 자신이 가르친 적 없다고 발뺌하지만 정황상 크리티아스의 주장을 카르미데스가 말한게 맞다.[14]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 했는데 남의 생각을 말하면 어쩌냐는 것이다. 카르미데스가 그럼 뭐 어떻냐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누구 의견인지보단 참인지의 여부가 더 중요한건 맞다고 말하며 계속 검토에 들어간다.[15] 사실 자신에게 속하는 일을 행함이라는 구절은 이런 방식 말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아직 어린 카르미데스는 반박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수긍하고 넘겨버린다.[16] 묘사를 보면 크리티아스를 끌어들여 대화를 떠넘기기 위해 은근슬쩍 도발한 것이다.[17] 크리티아스의 주장은 사실 소크라테스처럼 자급자족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각자 사회에서 자기 위치와 맡은 직분에 충실하는 정치철학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분업과도 조화시킬 수 있지만 카르미데스와 크리티아스는 그들의 부족함을 증명하듯 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18] 한편 '행함'과 '만듦'을 구별하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시행하였던 것으로 대화편 속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반박당하고 바로 휙 넘겨버리지만 허투루 볼 시도는 아니다.[19] 어느 순간 크리티아스의 주장이 자신에게 속하는 일을 행함에서 좋은 것을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이 대화편 속 크리티아스는 자기 주장을 진득하게 고찰하기보단 주장을 휙휙 바꾸며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인다.[20]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가 의사를 바라보는 시야에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의사를 이로운 일을 하는 이로 보지만 크리티아스는 일을 '행해서' 업적을 쌓는게 아닌 그저 돈을 버는 이로 본다는 것이다.[21]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는 소크라테스를 상징하는 말인데 소크라테스의 토론 상대방이 이를 인용하고 소크라테스가 반박하는 구조라는 점이 특기할 점이다. 정암학당 번역자는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자기식으로 변형해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22] 절제를 탐구하려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크리티아스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23] 다른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쪽이 덕이 앎임을 주장한다.[24] 이전에 크리티아스는 반박에 말이 막히자 좋은것에 대한 앎에 대한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자기자신에 대한 앎으로 의견을 틀었었다.[25] 미래에 이들이 30인 참주정의 우두머리(크리티아스)와 그 수하(카르미데스)가 되어 폭력을 휘두르며 아테네를 도탄에 빠트릴 것이라는 암시이다.[26] 훗날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의 폭정은 소크라테스에게도 살라미스의 레온이라는 이를 체포해오라고 명령하는 등 불의를 강요했고 그들이 몰락한 이후 분노한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선고하는 실질적인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