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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1:33:46

심포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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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osion/

1. 고대 그리스의 잔치문화2. 플라톤의 대화편 Symposion(향연)
2.1. 개요2.2. 등장인물2.3. 내용
2.3.1. 서장2.3.2. 만찬장으로 향하는 길2.3.3. 에로스 찬미 연설
2.3.3.1. 파이드로스의 연설2.3.3.2. 파우사니아스의 연설2.3.3.3. 에뤽시마코스의 연설2.3.3.4.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2.3.3.5. 막간: 소크라테스의 걱정2.3.3.6. 아가톤의 연설2.3.3.7. 소크라테스의 연설
2.3.3.7.1.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문답2.3.3.7.2. 연설 본내용: 에로스의 본성2.3.3.7.3. 사랑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2.3.3.7.4. 사랑의 기능: 출산의 비유2.3.3.7.5. 사랑의 사다리
2.3.3.8. 알키비아데스의 등장2.3.3.9. 알키비아데스의 연설2.3.3.10. 종장
2.4. 여담
3. 그 외 심포지온

1. 고대 그리스의 잔치문화

고대 그리스 시민들[1]은 독특한 잔치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서 뭘 하는지는 사실 별 거 없다. 그냥 누워서 술마시고 썰 풀면서 논다(…). 한량이 따로 없네[2]

많은 그리스 사상가들이 이 향연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많다. 물론 그냥 제자들이 스승을 주인공으로 향연을 즐기는 소설을 지어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3] 등이 이런 향연을 주제로 한 대화편의 주인공들로 나온다.

2. 플라톤의 대화편 Symposion(향연)

2.1. 개요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으로, 보통 철학과생들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국가론, 파이돈, 그리고 심포지온 만큼은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이 모여 누워서 술 마시고 노는 이야기인데, 주된 대화의 내용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이다.

2.2. 등장인물

아폴로도로스 : 이 이야기의 화자. 소크라테스 추종자.

동료들 : 아폴로도로스에게 이야기를 전해듣는 이들. 언급을 보아 부유층 자제들로 추정되며 현세적인 이야기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글라우콘 : 이야기 시점보다 조금 이전, 아폴로도로스에게 향연 이야기를 해달라 요청한 인물. 플라톤의 친형이자 국가의 등장인물인 글라우콘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큰 문제는 없다.

아리스토데모스 : 소크라테스를 따라 향연에 참석하고 아폴로도로스에게 본 이야기를 전해준 이. 소크라테스 추종자.소크라테스

파이드로스 :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사람.사랑과 의술에 관심이 많고 에뤽시마코스와 친밀하다. 사랑을 이야기한 또다른 대화편 <파이드로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파우사니아스 : 아가톤의 후원자. 아가톤을 소년애 상대로 두었다.

에뤽시마코스 : 의사. 파이드로스의 친구.

아리스토파네스 : 유명한 희극작가. 아테네의 수많은 명사들을 가리지 않고 풍자한 인물로, 소크라테스를 풍자한 <구름>의 작가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구름>과 관련하여 이름이 언급된다.

아가톤 : 유명한 비극작가. 잘생긴 외모를 가진 청년이자 파우시니아스의 오랜 소년애 상대. 3대 비극 작가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지만 현대에는 대부분의 작품이 유실되었다.

디오티마 : 소크라테스의 연설에 등장하는 무녀. 실존인물설도 있지만 플라톤이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로 창작해 넣었거나 작품 속 소크라테스가 문답식 연설을 이어나가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라는 설이 대세이다. 실존인물이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대화가 실존했던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알키비아데스 :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소년애 상대. 오만하고 질투심 강한 성격으로 실제 역사에선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칠리아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출정 직전 일어난 신성모독 누명으로 인해 적국 스파르타로 도피, 아테네의 몰락에 기여하는 매국노 행보를 보인다. 제자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분노가 소크라테스 사형의 실제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며 알키비아데스 본인도 아테네와 페르시아를 오가며 편을 갈아타다 암살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2.3. 내용

2.3.1. 서장

아폴로도로스는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얼마 전 길가다 만난 글리우콘이 아가톤과 소크라테스가 참여했던 향연에 대해 언급하면서 혹시 아폴로도로스는 직접 참석했었나고 물었던 일을 회상한다. 그 때 향연은 아폴로도로스 본인이 소크라테스에게 관심을 가지기도 전인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었고 자신도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전해들었을 뿐이라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직접 그것이 완전히 사실임을 확인받았다는 말을 들은 글라우콘이 시내로 가는 길에 동행하며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길래 해줬다고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향연 이야기를 충분히 상기시키고 전하는 연습까지 끝나서 동료들에게도 지금 당장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하며 동료들이 평소 즐기는 짜증나는 현세적 이야기 대신에 지혜를 즐겁게 논하자고 한다. 동료들은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사안들은 무작정.찬양하고 나머지 것들은 무시하고 보는 아폴로도로스의 광신적 태도를 힐난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향연 이야기가 궁금하니 빨리 해달라고 재촉한다.

2.3.2. 만찬장으로 향하는 길

아폴로도로스는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났는데 평소와는 달리[4] 깨끗하게 목욕하고 신발도 신은 모습에 놀라 어딜 가는 길이길래 그렇게 멋을 한껏 냈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이 비극대회에서 우승을 한 기념으로 향연을 여는데 거기에 참석하기로 약속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따라와 참석하겠냐고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아리스토데모스는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따라오라고 하며 훌륭한 자들은 훌륭한 연회에 자진해서 간다고 너스레를 떤다.[5] 그렇게 길을 가는데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기며 뒤쳐지게 되고 아리스토데모스는 아가톤의 집에 먼저 도착한다. 얼떨결에 자리로[6] 안내받은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집주인 아가톤은 안그래도 어제 초대하려고 찾아다녔다고 하며 잘 왔다고 인사를 건넨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사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오는 길이었는데 생각에 빠져 뒤쳐진 소크라테스보다 앞서 도착하는 바람에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아가톤은 이 말을 듣고 노예에게 소크라테스를 찾아오라고 명한다. 얼마 안가 소크라테스는 이웃집 문 앞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는 답이 돌아오자 아가톤은 데려오려 하지만 아리스토데모스는 그게 원래 소크라테스 습관이니 냅두면 곧 만찬장으로 들어올 거라 조언한다.

그 말대로 소크라테스는 얼마 안가 연회장에 들어왔고 아가톤은 소크라테스를 환영하며 자기 옆자리를 내주며 부디 지혜를 나눠달라 부탁한다. 소크라테스는 만일 지혜가 옮겨갈 수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식견을 가진 자신이 아가톤에게 지혜를 받아야 할 것이라 답한다.[7] 아가톤은 누가 더 지혜로운 지는 좀 있다 술이 들어가고 판가름내고 우선은 잔치를 즐기자 한다.

2.3.3. 에로스 찬미 연설

그렇게 한창 연회 분위기가 오르는 도중 전날 과음한 파우사니아스와 아리스토파네스를 시작으로 과음과 술 강요를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의사인 에뤽시마코스가 특히 숙취가 심한 날에 과음이 좋지 않다고 강조하며 이에 동조한다. 에뤽시마코스는 거기에 더해 악사들을 방 밖으로 물리고 이야기를 통해 교제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이야기 주제도 제시하는데, 파이드로스가 얼마 전에 말하길 수많은 찬가와 송가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신인 에로스를 찬미하는 노래는 지금껏 찾아본 적이 없다고 푸념한 사실을 말하며 그러니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이 에로스를 찬미하는 연설을 한 명씩 돌아가며 해보는 것은 어떻냐고 한다. 그리고는 이 주제의 발단이자 맨 처음 자리에 앉아있는 파이드로스부터 차례대로 연설하지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당연히 거부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아가톤과 파우사니아스, 술과 사랑에 온통 관심을 쏟는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다른 사람 모두가 이를 환영할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파이드로스가 연설을 시작한다.
2.3.3.1. 파이드로스의 연설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신이자 신들의 어머니 가이아와 동시대에 태어난 신[8]으로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다. 사람에게는 좋은 애인을 갖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라면 무릇 추한 것에는 수치심을, 아름다운 것에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부와, 명예, 혈연,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 보다도 에로스가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만들어준다.

누구나 자신의 추한 면모를 애인에게 들키는 것에 가족이나 동료에게 들키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니 국가가 사랑하는 자들과 소년 애인들로 구성된다면[9] 공적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국가보다 더욱 잘 운영될 것이고 군대가 서로 사랑하는 이들로 이루어지면 부대원들이 자기 애인에게 비겁함을 들키길 꺼리기 때문에 어떤 부대보다도 용감하게 싸울 것이다.[10]

그리고 사랑만이 누군가가 남을 위해 기꺼이 죽게 한다. 이는 소년애를 하는 남자 뿐 아니라 여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신화 속에도 알케스티스가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해 그 숭고한 행위를 하데스 신에게 높이 평가받은 이야기가 있다. 반면 유약한 가수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지 못하고 살아 나갈 결심만 했기에 신들의 벌을 받아 죽었다. 일리아스아킬레우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위해 원수 헥토르를 죽이고 본인도 전사하여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떠났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에로스는 덕과 행복과 관련되어 가장 권위있는 신이다.

파이드로스의 첫 연설이 끝난 후 몇 사람이 더 연설을 했지만 아리스토데모스는 이를 제쳐놓고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2.3.3.2. 파우사니아스의 연설
파이드로스의 연설은 매우 훌륭하지만 하나 짚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에로스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에로스가 하나라면 마음 놓고 찬미하면 될 테지만 하나가 아니라면 어느 쪽 에로스를 찬미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그 신에 걸맞은 찬미를 바쳐야 한다. 에로스가 없으면 아프로디테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11]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의 딸인 천상의 아프로디테와 제우스디오네의 딸인 범속의 아프로디테로 나뉜다. 에로스 역시 천상의 아프로디테와 함께 일하는 천상의 에로스와 다른 쪽 여신과 함께하는 범속의 에로스로 나뉜다. 똑같은 행위도 아름답게 행해지면 아름다운 것이 되고 올바르지 않게 행해지면 추한 것이 된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관장하는 에로스 쪽 만을 찬미할 필요가 있다.[12]

범속의 아프로디테와 그와 함께하는 에로스는 영혼보다는 육체적 사랑을 추구하고 쾌락을 느끼는 것에만 집중해서 어리석은 이들이 이 신들을 따른다. 이런 보잘것 없는 이들은 소년들을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여인들을 사랑하기도 한다. 이는 범속의 아프로디테가 천상의 아프로디테보다 어려서 방자한 데다가 태어날 때 남녀 모두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반면 천상의 아프로디테와 그 에로스는 어머니 없이 태어나 소년애만을 관장하고[13], 더 나이들어 방자함이 없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이끈다.

천상의 아프로디테를 따르는 이들은 소년 애인을 구할 때 너무 어린 아이를 고르지 않고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청소년을 택하는데 이는 분별이 없을 때 홀려놓고 애인이 크고 나서는 헌신짝처럼 버리기 보다는 분별력이 자라난 상대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 옳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소년들이 최대한 덕 있는 이로 자라게 하기 위하여 너무 어린 소년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필요하다. 훌륭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너무 어린 소년을 탐하지 않을 줄 알지만 범속의 에로스를 따르는 이들은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은 이들이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추하다는 인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결혼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강제가 꼭 필요하다.[14]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사랑에 대한 법률이 굉장히 단순해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살갑게 응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만 규정되어 있으나 페르시아 야만인들의 지배를 받는 이오니아 도시들에서는 그것들이 오히려 추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사랑과 철학, 그리고 체력 단련을 추하게 여기는데 그러한 것들이 만드는 친애와 연대가 탐욕스러운 전제군주에게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랑을 마냥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다수 폴리스들은 지적으로 게을러 범속의 에로스를 멀리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곳 아테네는 이 둘 사이에서 중용을 지켜 복잡하지만 훌륭한 법을 따른다. 우리의 법은 어떤 면에서는 사랑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 같다. 은밀한 사랑보다는 공공연한 사랑을 더 훌륭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사랑과 관한 일이 아니었다면 추하거나 부끄럽게 여겨졌을 만한 일들도 자유롭게 허락해준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아름답고 상대를 떠나보내는 것을 추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에게 사랑하는 이들이 꼬일 나이가 되었을 즈음 자식에게 보호자를 붙여 주변의 접근을 차단하는 부모들이 많기도 하고, 소년이 사랑하는 이와 만날 때 소년의 또래 동료들이 그 소년을 비난하고 나이든 사람들도 그 비난을 막지 않기도 하는 등 사랑을 추하다고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는 사랑의 본성이 아름답게 행해지면 아름답고 추하게 행해지면 추하기 때문이다. 범속의 에로스를 따르는 못된 사랑은 확고부동하지 못하고 영혼보다는 몸을 탐하려 한다. 반면 천상의 에로스를 따르는 아름다운 사랑은 확고부동하여 평생을 간다. 우리 아테네의 법은 이를 현명히 반영한 것으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시험하고 본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쪽은 쫓아가라고, 다른 쪽은 피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시험에서는 빨리 붙잡히는 것돈이나 정치권력에 잡히는 것이 추하게 여겨진다. 이러한 이들은 확고부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살갑게 응답하는 것이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선 한가지 방법이 있다.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을 위해 하는 노예 노릇은 아부나 비굴함으로 여겨지는 다른 경우에서와는 달리 비난 받는 일이 아니다. 노예 노릇이 비난받지 않는 경우가 또 하나 존재하는데 그것은 덕과 관련된 노예 노릇이다. 이 두 노예 노릇이 만나야 진정 아름다운 사랑이 된다. 덕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설령 기만적인 사랑이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이는 덕이 무엇보다도 훌륭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년 애인이 나이든 이의 덕을 얻을 수 있는 사랑[15]이야말로 천상의 에로스가 관장하는, 찬미할만한 사랑이고 나머지 사랑들은 범속의 에로스의 지배를 받는 속된 사랑이다.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이 끝나고 다음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차례였지만 갑자기 생긴 딸꾹질 때문에 연설을 할 상황이 아니었고 다음 차례인 에뤽시마코스가 먼저 연설을 하게 된다. 의사인 에뤽시마코스는 연설을 하기 전 숨 멈추기, 물 마시기, 재채기하기 등 딸꾹질에 효과적인 처방을 알려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2.3.3.3. 에뤽시마코스의 연설
파우사니아스는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해 놓고도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지었으니 대신 이어서 이야기를 마무리짓겠다. 에로스가 두 부류가 있다는 건 훌륭한 구분이다. 하지만 에로스는 사람의 영혼과 아름다운 자들에게만 깃든 것은 아니다. 그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있다. 의술은 이 사실을 훌륭하게 가르쳐준다.

몸들의 본성은 이 이중의 에로스를 가지고 있다. 건강함과 병듦은 서로 다른 것이며 비슷하지 않은 것들은 비슷하지 않은 것들을 욕망하는 법이다.[16] 그러니 건강한 것에 깃든 사랑과 병든 것에 깃든 사랑은 다르다. 훌륭한 것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건강한 것들에 잘 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방종한 것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병든 것들에 그렇게 하는 것은 추한 일이다.

의술이란 에로스가 몸 안에서 하는 것들에 관한 앎이고 의사는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분간해 추한 사랑(병)을 아름다운 사랑(건강)으로 변화시키는 자이다. 사랑(건강)이 안에 없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만들어 넣어주고 있으면 안되는 사랑(병)이 있는 경우 그 사람 안에 있는 에로스를 제거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의사이다.의술은 차가움과 뜨거움, 마름과 축축함 같이 서로 반대되는, 즉 가장 적대하는 것들을 친밀하게 만들고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기술이다.[17]

의술 뿐만이 아니라 체육 기술과 농사 같은 다른 기술 역시 에로스의 조종을 받는다. 특히 시가 기술이 그러한데 헤라클레이토스도 "그것 자체가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화합한다. 마치 활과 뤼라의 조화가 그렇듯이'라는 말로 이를 언급한 바가 있다. 조화가 불화한다거나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조화한다는 말이 비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서로 불화하던 고음과 저음이 조화를 얻어 화음이라는 일치를 이루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음계가 화함을 이루며 화음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긋나는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조화를 얻게 되면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의술이 몸에 조화를 넣어주듯이 시가 기술이 음계와 템포에 조화를 만들어 넣어준다.즉 시가 기술은 조화나 리듬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다.

곡조와 운율을 직접 만들거나 아니면 만들어 진 것들을 교육 등지에 이용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어 훌륭한 시가 기술 장인이 필요하다. 소년애와 의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상의 무사(뮤즈) 우라니아에 속한 천상의 에로스는 질서를 관장하기에 가까이 해야 하지만 송가의 무사 폴림뉘아에게 속한 범속의 에로스는 쾌락과 방종을 불러오기 때문에 적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18]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 속에는 두 에로스가 모두 들어 있으니 그 일을 할 때에는 두 에로스를 잘 지켜봐아 한다.

1년을 나누는 계절 속에도 두 에로스가 들어 있다. 질서 있는 에로스가 서로 반대되는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축축함에 조화를 만들어 줄 때 방자한 에로스는 여러 성질들의 질서를 깨트려 질병과 자연재해를 일으킨다. 별들의 움직임이나 한 해의 계절들과 관해 에로스가 하는 일에 대한 앎을 천문학이라고 부른다.[19] 이 뿐만 아니라 예언술 역시 에로스와 관련한다. 불경건이란 경건을 관장하는 에로스를 무시하고 방종한 에로스를 따를 경우 일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인간과 관련된 에로스의 일들을 알고 잘 살펴 치유하는 것이 곧 예언술이고 신과의 친애를 빚어내는 기술이다. 에로스는 이런 수많은 일을 관장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에로스는 절제와 정의에 관한 에로스이다. 가장 큰 능력을 가진 이 에로스를 따르는 것이 행복해지고 지혜로운 삶을 향유할 열쇠이다.

에뤽시마코스가 연설을 마칠 즈음,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잦아들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재채기를 해야 딸꾹질이 잦아든 것을 보니 몸의 질서가 소음과 간지럼을 욕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비야냥댄다.[20] 에뤽시마코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비웃음을 살 지 감시해야겠다고 응수하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자기 연설은 우리 무사 여신에게 고유한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다시 한 번 받아친다.[21] 에뤽시마코스는 이를 갈며 어떻게든 연설의 허점을 꼬투리잡으려 한다.
2.3.3.4.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에뤽시마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 한다. 인간들은 에로스의 능력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만일 그가 누구보다도 가장 인간에게 우호적인 신이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치유해 주는 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분명 가장 성대한 제사를 치를텐데 말이다. 그러한 에로스의 위대함을 이 자리에서 소개할테니 주변에 널리 퍼트려주길 바란다.

원래 인간은 지금과는 달리 마치 두 사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22] 등과 옆구리는 둥글게 이어져 있었고 반대 방향을 향한 두 얼굴을 가진 한개의 머리,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 네 개의 귀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처럼 곧추 서서 걸어다닐 수도 있었지만 빨리 달려야 할 때는 여덟개의 팔과 다리로 땅을 딛으며 빙글빙글 굴러다녔다. 그때는 인간의 성별도 세가지로 나뉘었다. 남녀 둘 뿐이 아니라 남녀 두가지를 모두 가진 셋째 성이 존재했다. 두 남성이 붙어있는 성별을 해의 자손, 두 여성이 붙어있는 성별을 땅의 자손, 그리고 남녀 한쌍이 붙어있는 성별을 달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들은 힘이 세고 자만심이 깊어 신들을 공격하였다. 신화 속 알로아다이 이야기가 이와 관련되어 있다. 제우스는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손봐줘야 할지 고뇌에 빠졌다. 그들을 가만히 냅둘 순 없었지만 거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벼락을 쳐서 씨를 말려버리면 신들이 받는 숭배와 제사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간신히 생각을 짜내 그들을 둘로 잘라 약해지게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힘이 약해져 방종을 멈추고 수는 많아져 신들에게 유용해지기도 했다. 한번 잘렸음에도 여전히 제멋대로 군다면 한 번 더 잘라 외눈에 외다리로 겅중거리며 다녀야 할 것이라 선언했다.

제우스는 인간들을 잘라버리며 아폴론에게 둘로 갈라진 인간들의 머리를 잘린 부분을 향하게 돌려버리라 명하였다. 잘린 부분을 바라보며 산다면 이전처럼 반항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내린 조치였다. 그리고 이에 더해 잘린 부분을 치유하라고도 명령했는데, 이에 아폴론은 온 몸에서 살가죽을 끌어와 상처를 덮고 배 한가운데에서 꽉 묶어 주둥이 하나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이를 배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다림질을 하듯 살가죽을 매끔하게 다듬어 가슴을 만들었지만 배꼽 주변에 있는 주름들을 그대로 남겨놓았는데 이는 신들에게 벌받은 과거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둘로 잘리며 각각의 반쪽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영원히 함께하려 들었다. 서로 감싸안으며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를 갈망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굶어죽어가는 일이 반복되자 제우스는 그들을 가엾게 여겨 방도를 마련해 주었다. 원래 인간들은 상대방의 속에다 자식을 낳지 않고 매미처럼 땅 속에다가 그렇게 했는데 이를 생식기를 앞쪽으로 옮긴 다음 남자가 여자 안에 생식을 하도록 번식 방법을 바꿔 주었다. 이렇게 되면서 남녀가 만나 한데 뒤엉킬 때는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남자끼리 뒤엉킬 때에도 번식은 일어나지 않지만 포만감을 느끼게 해줘 본성 회복의 갈망을 해소되며 한숨 돌리고 일상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반으로 갈라진 본성을 서로 채워주며 치유하려 하는 갈망이 바로 사랑의 정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각자의 반쪽을 하염없이 찾아다닌다. 그런데 달의 자손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은 태생적으로 이성을 밝혀 간통을 저지르는 이들이 이 중에서 나오고 땅의 자손에서 갈라진 여인들은 남자보다는 여자에 관심을 가지며 동성애를 하기도 한다.[23] 반면 해의 자손에서 갈라져 나온 남자들의 경우 남자와의 교류를 갈망하며 소년일 때에 남자 애인을 찾아다니는 훌륭한 이들도 이들 중에서 나온다. 누군가는 그들을 불결하다 여기지만 이들이야말로 용기있고 사내다운 이들인데, 자라고 나서 나라의 중책을 맡은 이들은 항상 이 중에서 나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소년들은 자라고 나서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소년애를 즐기며 자신과 비슷한 것을 가까이 한다.[24]

그런데 훌륭한 이든 비천한 이들 자신의 진짜 반쪽을 만나면 친애와 사랑에 압도되어 서로에게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이들은 번식이나 쾌락 등의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갈라지기 전의 온전한 정신을 되찾길 갈망할 뿐이다. 이 욕망은 너무나 강해 만일 헤파이스토스 신이 반쪽으로 갈라진 너희의 몸을 다시 온전히 붙여주겠다고 제안한다면 이를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온전함에 대한 추구에 붙은 이름이 사랑, 즉 에로스이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였다. 하지만 신들에게 불경함을 보였다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불경을 저질렀다가 다시 반으로 갈라져 한 발로 껑충거리며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서로에게 경건함을 권유하고 에로스의 인도에 순종해야 한다. 그 신의 은총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소년 애인을 얻을테니 말이다. 남자의 예시를 들었으나 이는 인간의 기원과 본성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여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 본성에 걸맞는 애인을 찾는 것이야 말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며 그것의 원인 노릇을 하는 신을 찬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신들에게 경건한 모습을 보일 때 에로스는 이를 흡족히 여겨 우리를 옛 본성으로 돌려주고 행복을 찾아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에게 자기 연설을 우스갯소리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남은 두사람, 즉 소크라테스와 아가톤[25]의 연설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에뤽시마코스는 연설이 훌륭했다면서 꼬투리잡지 않겠다고 단언한다. 그리고는 연설들이 다 훌륭해서 만일 남은 둘이 사랑이라는 주제에 능숙하지 않았다면 걱정했을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2.3.3.5. 막간: 소크라테스의 걱정
소크라테스는 아가톤도 말을 잘 할것이 분명하니 자기는 할 말을 만들어내기가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한다. 아가톤은 연설 직전에 자신을 과대평가시켜 혼란하게 만드려는 것 아니냐며 소크라테스의 과도한 칭찬을 일축한다.[26] 소크라테스는 극장에서 자신의 연극을 펼칠 때에도 주눅들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 그렇게 쉽게 혼미에 빠지겠냐 하지만 아가톤은 소수의 분별력 있는 사람이 극장에서 비극을 관람하는 다수의 대중보다 무섭다고 반박한다.[27]

소크라테스는 이 자리의 우리도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에 가깝다고 한 다음 자연스럽게 평소의 문답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우선 아가톤에게 소수의 훌륭한 이들 앞에서 추한 일을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냐고 묻자 아가톤은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 앞에서 추한 일을 하는 것은 수치스러워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파이드로스가 이 때 눈치있게 끼어들어 아가톤에게 지금 여기서 대답을 계속하면 끝나지 않을테니 이만 문답을 멈추고 에로스 찬미 연설을 이어가자고 권유한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와 대화 나눌 기회는 많을테니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연설을 시작한다.
2.3.3.6. 아가톤의 연설
앞서 말한 사람들은 모두 에로스 그 자체를 찬미하기보다는 그 신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좋은 것을 나열했을 뿐이다. 원래 찬양을 할 때는 찬양 대상이 어떤 자인지를 밝힌 다음에 그것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을 찬양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나도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가 준 선물들을 찬미하겠다.

에로스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행복한 신이다. 우선 그는 파이드로스가 말한 바와는 달리 신들 가운데 가장 젊은 신이다.[28] 그 신이 늙은 것을 미워하고 피하려 드는 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에로스는 젊은이들과 늘 함께하는데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과 친하다는 옛 속담[29]이 잘 들어맞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시오도스파르메니데스가 전해주고 파이드로스가 자기 연설에서 인용한 태초의 에로스 이야기는 에로스가 아니라 아낭케(필연)에 의해 일어난 것임이 분명하다. 친애와 평화를 관장하는 에로스가 태초의 신들 가운데에 존재했으면 서로를 거세하고 결박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젊을 뿐만이 아니라 갸냘프고 곱기도 한데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호메로스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테 여신의 갸냘픔을 묘사하며 그녀가 단단한 땅이 아닌 무른 사람의 머리 위로 걸어다니기 때문에 아테의 발이 곱다고 표현했는데 에로스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무른 것인 인간들의 성품과 영혼 속을 걸어다니며 살고 있다. 에로스는 단단한 성품을 지닌 영혼과 만나면 떠나버리고 무른 성품을 지닌 영혼 속에 자리잡고 산다. 즉 그는 가장 무른 것들 속에 있는 가장 무른 것들과 자기 전부를 계속 접촉하고 있으니 갸냘플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형태가 유연하기도 하다. 그는 영혼 속으로 은연중에 뚫고 들어가 그 영혼을 완전히 둘둘 휘감을 수 있는데 단단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균형잡히고 유연하다는 또다른 큰 증거는 바로 그가 가진 우아함이다. 에로스는 꼴사나움과 늘 멀리하고 꽃들 사이에서 지낸다.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남아있으나 에로스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은 그만 이야기하고 그의 덕에 관해 말해볼까 한다.

에로스는 완력을 행사해 불의를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고 모든 일에 자발적으로 봉사한다. 법은 자발적 동의를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는 정의에 관한 절제를 지니고 있기도 한다. 어떤 쾌락도 사랑, 즉 에로스보다 강하지는 않다. 즉 에로스는 어떠한 쾌락과 욕망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이들을 지배할 수 있다. 에로스는 아레스보다도 용기있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로스가 아레스를 봍잡는다. 가장 용기있는 아레스 신을 지배할 수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용기있기도 하다.

정의, 절제,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니 이제는 지혜를 논할 차례이다. 에로스는 남도 시인으로 만들 정도로 지혜로운 시인이다. 에로스와 접촉하는 자는 원래 창작 영감을 관장하는 무사 여신들과 접점이 없었더라도 훌륭한 시인이 되곤 한다. 즉 에로스는 시가 기술에 있어 지혜롭다. 또, 모든 생물의 생산 역시 에로스의 지혜에 의함이다. 에로스는 이 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에 있어서 지혜로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그 기술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아닌 이는 그늘에 가리게 된다. 아폴론은 궁술과 의술, 예언술에 있어서, 무사 여신들은 시가 기술에서,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 기술에서, 아테나는 직조 기술에서,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들을 조종하는 데에서 에로스의 제자이다. 에로스가 태어나기 이전 아낭케(필연)가 왕 노릇을 할 때에는 이 세계에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에로스가 태어나고 신들의 스승이 된 뒤로는 세계가 아름답고 질서있게 바뀌었다.

에로스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기에 비슷한 다른 것들, 즉 아름답고 훌륭한 일의 원인이 된다. 운율을 넣어 말해보자면 인간들 사이에는 평화를, 바다에는 바람없는 잔잔함을, 바람들의 안식을, 또 근심 속에 잠을[30] 만드는 자가 에로스이다. 그는 낯설음을 비우고 친근함을 채운다. 그는 오늘 우리와 같은 모임을 모으고 축제, 가무, 제사에서 인도자 노릇을 한다. 부드러움과 호의를 선물로 주고 사나움과 적대를 제거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에로스를 우러러보고 신들은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받지 못한 이는 질투한다. 그는 사치, 우아, 호화, 매력, 연모, 갈망의 아버지이다. 훌륭한 자들을 돌보고 나쁜 이들에게는 그리 하지 않는다.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훌륭한 인도자인 에로스를, 우리는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며 따라야 한다.

아가톤의 연설이 끝나자 참석자 모두가 환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에뤽시마코스에게 자기 걱정이 사실 아니었냐며 묻는다. 에뤽시마코스는 아가톤이 잘 한 것은 사실이나 소크라테스 역시 그 못지 않게 잘 할 것이라 믿는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연설이 현란하고 단어와 구절이 아름답다며 자신은 이렇게 할 자신이 없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이 말 잘하는 고르기아스의 머리를 자기에게 들이밀어 돌로 만드려 하지 않았나 의심된다고 하며[31] 자신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설을 잘 할거라고 자신만만했는데 사실이든 아니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32]을 알아챘다면서 그럼에도 자기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자기 방식대로 진실만을 이야기할텐데 괜찮겠냐고 한다. 파이드로스가 괜찮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연설 시작 전에 아가톤과 몇가지 문답을 나누고 싶다고 부탁한다. 파이드로스가 이 역시 동의하자 문답이 시작된다.
2.3.3.7. 소크라테스의 연설
2.3.3.7.1.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문답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 먼저 드러내고 그 기능을 이어 말한 아가톤의 연설 순서를 호평하고 그렇지만 분명하지 않아 말해줘야 할 것이 있다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아가톤이 말한 에로스가 어떤 것에 관한 에로스인지, 아니면 에로스에게는 그 대상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는 지를 먼저 묻는다.[33] 아가톤은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것임이 맞음을 시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어떤 것에 대한 것이라면 에로스는 그 대상을 욕망하지 않겠냐고[34] 묻고 아가톤은 물론 욕망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욕망하는 이는 그 대상을 가진 상태에서 욕망하는지, 안 가진 상태에서 욕망하는지를 묻는다. 아가톤은 안 가진 상태에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큰 이가 크기를 바라고 힘이 센 이가 세지기를 바랄 수 없듯 결핍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필연 아니냐고 묻고 아가톤은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이는 건강한 이가 건강함을 바라고 힘이 센 이가 세기를 바랄 수 있다고 주장하나 이는 '나중에도' 그것을 계속 보존한 채로 갖고 있음을 열망하는 것이니 결국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열망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아가톤은 이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데 아가톤이 방금 한 연설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고 추함에 대한 건 아니라고 이야기했는데 누군가가 결여하고 있고 가지지 않은 것을 갈망하고 사랑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았냐고 묻는다.[35] 아가톤이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니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다시 묻는다. 아가톤이 이에도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아직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아가톤은 결국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다.[36]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좋은 것이 아름답기도 하다는 점에 동의하냐는 것이다. 아가톤이 동의하자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결여한 에로스는 좋은 것도 결여하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아가톤은 백기를 들고 선생님 말이 다 옳다고 시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반론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하며 문답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2.3.3.7.2. 연설 본내용: 에로스의 본성
언젠가 내가 만티네아 출신의 지혜로운 무녀 디오티마[37]에게 들은 에로스 관련 이야기를 주욱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아가톤이 했던 대로 에로스가 누구이고 어떤 자인지를 이야기 한 다음, 그의 기능들을 이야기하는 순서로 이야기하겠다.

나는 아가톤이 방금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 즉 에로스는 위대한 신이고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디오티마에게 했다. 그러자 디오티마는 방금 내가 한 논박 그대로 나를 논박해 에로스가 아름답지도 좋지도 않다고 가르쳐주었다. 내가 디오티마에게 그럼 에로스는 추하고 나쁜거냐고 물으니 그녀는 불경한 소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며 아름답지 않은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추하고 지혜롭지 않으면 다 무지하다고 생각하냐며 반론했다. 그리고 지혜와 무지의 중간엔 옳은 의견이나 이유는 제시하지 못한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려주며 에로스 역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중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중간에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래도 에로스는 위대한 신 아니냐고 묻자 디오티마는 지혜로운 자들은 에로스가 위대하기는 커녕 신이라는 점 조차 부정한다고 반박했다. 모든 신은 행복한데, 즉 좋음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방금 동의했듯 에로스는 좋음과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고 그녀에게 그렇다면 에로스는 필멸자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당치도 않고 불멸자와 필멸자 그 중간에 있다고 답해주었다. 내가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인간과 신 사이를 이어주는 다이몬[38]이라고 답했다. 예언술, 제사, 마법 등을 행할 때 신이 인간과 직접 섞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다이몬들이 신들과 인간들을 중계해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다이몬에 관한 앎을 지닌 이는 신령하고 어떤 기술이든간에 다이몬과 관련 없는 기술을 지닌 이는 미천한 재주꾼일 뿐이라고 했다.[39] 다이몬들은 종류가 아주 많은데 에로스도 이 중 하나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렇다면 에로스의 부모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녀에 따르면 에로스는 메티스(계책)의 아들 포로스(방책)와 페니아(가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포로스는 넥타르에 취해 제우스의 정원에서 잠이 들었는데 구걸하러 잔치에 찾아온 페니아가 자신에게 방책이 없음을 알고 포로스의 곁에 동침하여 아들 에로스를 낳았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자신과 생일이 같고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포로스(방책)와 페니아(가난)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으로 인해 에로스는 늘 고움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고 거칠고 맨발에 집이 없는 운명에 처했다. 그는 가난하기에 땅바닥에서 하늘을 지붕삼아 잠에 든다. 어머니 가난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살고 아버지 방책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움과 좋음을 얻을 계책을 항상 꾸민다.

그는 불사자도, 필멸자도 아니기 때문에 방책을 잘 갖추고 있을 때에는 전성기를 누리며 살고 어떤 때에는 죽어가다가 아버지의 본성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계략은 늘 조금씩 새어나가기에 아예 지혜롭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본성을 유지한다. 신들은 이미 지혜롭기에 지혜를 욕망하지 않고 무지한 이들도 지혜가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모르기에 무지한 자신에 만족해 지혜를 욕망하지 않는다.[40] 에로스처럼 지혜를 갈망하는[41] 이는 지혜로움과 무지함 사이에 있는 이 일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는데 그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에로스라고 착각한 것이 분명하며, 사랑받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고 복되었지만 사랑하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디오티마는 말했다.
2.3.3.7.3. 사랑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내가 에로스의 본성에 대해 깨닫고 그 다음으로 디오티마에게 인간들에게 에로스가 하는 기능에 대해 묻자 그녀는 안그래도 바로 가르쳐주려 했다면서 누군가가 '무엇 때문에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것인지', 혹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인지'를 물었다고 가정해보자고 말했다. 내가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자 그녀는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는 무엇이 있게 되느냐고 물었다. 내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디오티마는 질문을 바꿔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인지'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좋은 것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는 무엇이 있겠냐고 물었고 이번에는 대답이 떠올랐기에 나는 그에게 행복이 있을거라고 답했다. 디오티마는 그렇다면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자는 무엇을 위해 그러기를 바라는지를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바람과 이 사랑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되어 모두가 좋은것들을 갖기를 원한다 여기는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42] 그러나 디오티마는 그럼 모두가 다 사랑을 한다 하지 않고 어떤 이는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는 안한다고 우리가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했다.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이는 우리가 잘못 탐구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사랑의 어떤 한 형태만 떼어서 그것만 사랑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들에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내가 그 다른 것들이 어떤 것인지 묻자 그녀는 창작을 예시로 들며 어떤 기술로 인한 것이든 있지 않은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것을 창작이라고 부르고 이걸 해내는 이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냐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가와 관련된 창작을 하는 이만 작가라고 부르고 다른 창작을 하는 이는 음악가나 조각가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로 돈벌이를 통해서이든 체력단련을 통해서이든 혹은 지혜 사랑을 통해서이든 비록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은 일일지라도 좋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사랑이라고 그녀는 설명해주었다. 디오티마는 그러면서 서로의 반쪽을 찾아다니는 행위만이 사랑은 아니라고 하였다.[43] 디오티마는 사랑이 반쪽에 대한 것도 전체에 대한 것도 아니라 (그것이 반쪽이든 전체이든 간에) 좋은 것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좋은 것이 자신들에게 있음에 대한 것이라 정의내릴 수 있는데 그녀는 거기에 더해 늘 있기를 갈망해야 된다는 말을 붙여야 되지 않느냐고 했고 나는 거기에 동의했다. 즉 사랑은 좋은 것이 자기 자신에게 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2.3.3.7.4. 사랑의 기능: 출산의 비유
디오티마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내렸으니 사랑의 기능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할 수 없기에 지금 배움을 청하고 있는 거라고 답했고 이에 그녀는 몸에 있어서,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라고 사랑의 기능을 정의해주었다. 그녀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몸으로, 영혼으로 임신하고 있고 때가 무르익으면 우리 본성은 출산을 갈망한다. 출산이란 필멸자인 생물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다.[44] 그런데 추한 것 안에서는 출산할 수 없고 아름다운 것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출산은 조화한 것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데 추한 것은 신적인 모든 것과 조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출산에서는 칼로네(아름다움)이 모이라(운명)이고 에일레이티이아(필요한 때 오는 자)이다. 이 때문에 임신한 것이 아름다움과 가까울 때는 즐겁게 이완되어 자식을 낳는다. 반대로 추한 것과 가까울 때는 낳지 못하고 태아를 안에 가진 채로 고통스럽고 버거운 상태로 남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해서 부풀어 오른 이는 자신의 산고를 줄이기 위해 아름다운 것에 관한 흥분으로 가득차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사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조금 잘못되어 바꿔야 한다고 시인했다. 사실 사랑은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속에서 낳는 것과 관련한 것이라는 것이다. 필멸자가 불멸을 갈망하는 것은 필연[45]이기에 사랑이 낳음에 관한 것임도 당연하다.

디오티마에게 이런 가르침을 받던 중 어느 날, 그녀는 이런 사랑과 욕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냐고 물어왔다. 모든 짐승들이 낳기를 욕망할 때는 전부 병에 걸려 사랑에 애타는 상태가 되는데, 우선 서로 함께 섞이는 것에 관해, 그 다음에는 태어난 것기르는 것에 관해 그런 상태가 되는 이유를 아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이야 추론과 판단력에 의거해 이러한 일을 한대지만 다른 짐승들이 본성적으로 이러한 상태가 되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사랑의 본질, 즉 사랑이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출산과 관한 것이라는 점을 알면 어려울 것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필멸자의 본성은 항상 불사를 갈망하는데 이는 생겨남오래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사람의 몸을 이루는 조직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소멸하고 영혼을 이루는 성격, 성품, 의견 역시 살면서 끊임없이 변한다. 앎 역시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데 사실 모든 필멸하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해가며 자기 자신을 보존한다. 그렇기에 필멸자들이 불사를 위해 자신의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정말로 그러냐고 물었는데 그러자 그녀는 어조를 가다듬어 완벽한 소피스트들처럼 말하며 나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그녀는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만 잘 살펴보아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자기 이름을 떨치길 원하는 이들은 불사의 명성을 쌓는 것에 대한 사랑에 의해 끔찍한 상태에 처한다. 그들은 명예를 제 자식보다 소중히 여기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슨 위험이든 감수하려 든다. 자신들의 덕에 대한 불멸의 기억을 낳길 바라지 않는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몸에 있어서 임신한 자들은 여인들에게 향해[46] 자손을 낳아 행복을 찾는 이들이다. 반면에 영혼에 있어 임신한 자들은 사리분별과 덕을 낳는다. 시인, 장인을 비롯한 모든 창작자들 역시 자신이 지닌 덕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리분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절제와 정의이다. 어려서부터 절제와 정의를 몸에 지닌 이는 나이가 차면 출산하기를 욕망해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니는데 훌륭한 영혼을 만나면 그 영혼에 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자신이 지닌 것을 낳는다.덕을 낳는 자와 아름다운 자는 태어난 미덕을 함께 양육하며 자식을 공유하며 양육하는 이들보다 더 중대한 공유와 확고한 친애를 얻는다. 육체적인 자식보다 더 아름답고 불사하는 자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육체적인 아이보다는 이런 아이를 갖길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메로스헤시오도스자식들, 리쿠르고스[47]솔론자식들을 부러워한다고 그녀는 말했다.[48]
2.3.3.7.5. 사랑의 사다리
그 이후, 그녀는 사랑 이해의 최종목표인 최고 비의를 알려주었다.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는 이는 젊을 때는 아름다운 몸을 향해 가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몸을 사랑하고 그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한 몸의 아름다움이 다른 몸의 아름다움과 형제지간임을 깨닫고 모든 몸을 아름답게 여기는 종적인 사랑으로 나아가 한 몸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몸의 아름다움보다는 영혼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야 한다. 겉으로는 아름답지 않더라도 영혼은 훌륭한 이를 신경써주며 그들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줄 이야기를 산출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법과 행실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몸에 대한 아름다움이 사소하다고 여길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 행실 다음은 앎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여기까지 도달한 이는 여러 종류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한 사람이나 하나의 행실에 붙잡혀 노예 노릇을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게 된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와 사유를 낳을 수 있게 된다.

에로스의 인도 하에 아름다운 것을 차례차례 올바르게 바라보며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은 본성적으로 아름다운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된다. 그것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으로, 어떤 자에게는 아름다워보이나 다른 이에게 추해보이지도 않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이것의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얼굴이나, 자연물, 짐승 속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것 자체가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만으로 늘 단일 형상으로 있는 것으로 다른 모든 아름다움들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는 아름다움의 본질 그 자체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생성하거나 소멸할 때도 이것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불멸한다.

누군가가 올바른 소년애를 시작으로 사다리를 올라와 이 아름다운 것을 직관하기 시작할 때, 그는 궁극적인 끝점에 다다랐다 할 수 있다. 그는 한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두 사람에서 아름다운 몸들로, 몸에서 행실로, 행실에서 배움으로, 그리고 배움에서 가장 궁극적인 배움, 즉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차근차근 올라가 결국 아름다움 그 자체를 깨닫게 된다. 만일 인간에게 살 가치가 있다면 이런 삶을 위해서 일 것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한번 보게 되면 황금이나 화려한 옷, 아름다운 소년들과는 차원이 달라 지금은 영원히 그것만 바라보면 행복할 것만 같은 것들이 필멸 속의 허접스레기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덕의 모상이 아닌 참된 덕 그 자체를 산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된 덕을 낳아 키웠을 때 신의 친애를 받고 불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디오티마가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이다. 나는 그것에 완전히 설득되었고 다른 이들도 설득하려 시도한다. 진리로 향하는 길에 협력할 자로 에로스, 즉 사랑보다 더 나은 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에로스를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스스로도 내 힘이 닿는 한 모든 노력을 들여 에로스의 능력과 용기를 찬미하려 한다.
2.3.3.8. 알키비아데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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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의 등장. 왼쪽에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는 이가 알키비아데스고 중앙의 황금 월계관을 쓴 인물은 아가톤이다.

소크라테스가 연설을 마치자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이에 매료되어 칭찬하는데 아리스토파네스만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49] 그렇지만 갑자기 바깥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났고 아가톤이 노예들을 시켜 살펴보라고 하자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알키비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키비아데스는 머리에 화관과 머리띠를 두르고 피리부는 소녀와 다른 추종자들의 부축을 받고 들어와 자신을 연회에 끼워 줄 것인지 아니면 아가톤에게 화관만 전달해주고 가면 될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두르고 있는 머리띠는 잔치에서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운 이에게 둘러주겠다며, 자신이 술에 거하게 취했지만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회 참석자들은 알키비아데스를 흔쾌히 들여보내준다. 알키비아데스는 아가톤에게 화관을 씌워주려고 머리띠를 풀다가 순간 눈이 가려 소크라테스를 못알아보고 그대로 지나가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앉았다.

아가톤이 노예들에게 알키비아데스의 신발을 벗겨주고 침상으로 안내하라고 명령하는데 동시에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뒤늦게 알아보며 놀라서는 역시 선생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다며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거 아니냐고 한다. 그리고는 소크라테스의 자리가 아가톤 바로 옆임을 알고는 힐난하는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하게 된 후로는 아름다운 사람을 한번이라도 쳐다보거나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며 아가톤에게 혹시 알키바데스가 완력을 쓸지도 모르니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알키비아데스는 화해란 없다며 일축하면서도 추궁은 나중에 할테니 우선 머리띠를 선생님께[50] 둘러드려야겠다고 하며 머리띠를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두른 후 자리에 앉았다.

알키비아데스는 다들 정신이 멀쩡한 것 같다고 자기가 분위기를 주도할테니 어서 마시자고 재촉한다. 그러자 에뤽시마코스[51]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아무 것도 안하고 노래만 하겠냐고 물어왔고 알키비아데스는 에뤽시마코스에게 인사한 후 훌륭한 의사양반인 자네가 시키는 것을 하겠다고 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지금까지 잔치 참석자들이 차례대로 에로스 찬미 연설을 했다면서, 연설을 한 다음 소크라테스에게 시키고 싶은 것을 하나 명령하는고 소크라테스는 또 다음사람에게 명령하고 그렇게 순서대로 하는건 어떻냐고 제안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술취한 이의 연설이 멀쩡한 이의 것과 결이 같겠냐고 툴툴댄 다음에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자신 외에 다른 이를 찬양하면 그 대상이 신이든 가만 안둘 거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반발하지만 에뤽시마코스는 원한다면 에로스말고 소크라테스를 찬양해도 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황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그저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일축한다. 소크라테스도 말하려는게 진실이라면 오히려 권장해야 할 바라고 납득하고 알키비아데스가 본격적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2.3.3.9. 알키비아데스의 연설
나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모상을 통해 찬양하고자 한다. 그분은 실레노스 신상과 매우 비슷하다. 피리를 들고 있는 그 신상을 양쪽으로 열어젖히면 그 안에 신들의 조각상이 드러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사튀로스 중에 하나인 마르쉬아스[52]와도 닮았다. 외모에 관한 한 선생님 본인도 이에 반론을 제기 못할 것이다.[53] 그렇지만 그분은 다른 점에서도 이들과 닮았다.

선생님은 방자하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피리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리와 음악을 통해 사람을 신들리게 하는 마르쉬아스와는 달리 선생님은 음악 없는 이야기만으로 사람을 꾀어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이가 이야기 할때에는 아무리 달변가여도 별 볼일 없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자지러지고 신들리게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심장이 뛰고 눈물이 흐르곤 한다. 이는 페리클레스나 다른 훌륭한 연설가들의 말을 듣고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나는 내가 그분의 말에 홀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세이렌을 피하듯 귀를 막고 도망나오곤 한다. 선생님은 내가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아테네 사람들의 일을 하려 한다고 동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 앞에만 서면 나는 유독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선생님의 이러한 면모를 많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점에 있어서도 그분은 놀라운 면모를 지녔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겉으로 봐서는 아름다운 이들에게 쉽게 홀리고 가까이 하려 하기도 하고, 모든 것에 무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보이지만 사실 그분은 정말로 실레노스 조각상 같기에 볼품없는 겉껍데기 안에는 절제로 가득 차있다. 그분은 사실은 어떤 아름다운 이도, 부유한 이도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시하며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상대로는 딴청을 부릴 따름이다.

나는 그분 속에 있는 진지함을 한번 목도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나의 꽃다운 청춘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고 믿으며 그분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거란 기대에 가득찼다. 그랬기에 그분과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진득한 소년애 관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분은 늘 하던대로 대화를 나누고 하루를 보내다 떠났다. 이후 나는 운동을 함께 하자고 권했지만 역시 진전을 보지 못했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으니 나는 선생님을 육탄으로 덮쳐보자고 결심하고 식사에 초대했지만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떠나셨다. 나는 다시 한번 선생님을 초대하며 이번에는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밤이 깊을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 떠나시려 할 때 너무 시간이 늦었다고 말하며 붙잡았다. 그분은 결국 내 옆 침상에서 주무시게 되었고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살무사에게 물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때 나는 지혜 사랑에 속하는 이야기들에 두들겨 맞고 물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지혜 사랑을 겪어본 적 있을테니 빠짐없이 듣게 해주겠다. 나는 그분에게 내 속마음을 전하기 위해 선생님을 흔들어 깨웠다. 그분은 주무시지 않고 계셨다. 그러자 나는 선생님이야 말로 나와 소년애를 나눌만한 사람이다, 훌륭한 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며 선생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니 선생님께 살갑게 대하고 싶고 그렇지 못한다면 수치스러울 거라고 마음을 고백했다. 선생님은 딴청을 부리며 네가 자신에게서 본 아름다움이 실존한다면 네 아름다움보단 훨씬 월등할 것이 분명한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흥정하면[54] 자기가 손해보는 것 아니냐며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리고는 사실 자신이 아름다움을 가진 것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며 자기는 무지한 이일 뿐이라고 다시 단언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내뱉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분은 이 일에 관해서든 다른 일에 관해서든 무슨 일이 가장 좋은지를 숙고하며 행동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 말에 그분이 상처입었다고 지레짐작하고는 외투로 선생님을 덮어드리고 같은 침대에 누워 껴안은 채로 온 밤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분의 방자함과 오만함은 나의 아름다움이 별 것 아니라 여겼는지 온 밤이 새도록 손을 대지 않았고 나는 가족들과 잤던 밤과 별 차이 없는 밤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무시당했다 여겼지만 한편으론 이분의 절제와 용기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그분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분의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다.

언제 한 번은 나와 선생님이 같이 포티다이아로 출정할 일이 있었는데, 보급이 끊겨 밥이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그분만은 태연했고 보급이 잘 들어와 잔치가 벌여졌을 때도 그분만큼 제대로 즐긴 이는 없었다. 선생님은 술을 잘 드시려 하지 않았지만 한번 드실 때에는 주량으로 모두를 이겨버렸다. 그분은 전장의 혹한도 놀랄정도로 잘 견디셨다. 다른 이들이 옷을 껴입고 신발 위에 가죽을 덧대는 와중에 선생님만은 평소에 입던 외투에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다니셨다. 어느날 새벽에는 그분이 사색에 빠져 자리에 서 계셨는데 그대로 다음날 새벽까지 그대로 계셔 사람들이 감탄했다. 전투에서는 내가 다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을 뺀 다른 모든 이들이 상처입은 나를 구해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그 전투에서 상을 받았는데 사실 그 상은 선생님이 받아야 마땅하다. 델리온에서 패배하였을때 다른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데 그분만은 침착하게 아군과 적군을 살피며 걸어 그 기세에 적군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고 생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찬양할 때 다른 이에 빗대어 찬양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선생님만큼은 매우 독특해 비교할 만한 옛 사람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실래노스와 사튀로스들과만 비교가 가능하다. 누군가가 사튀로스의 가죽을 뒤집어 쓴 선생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는 매우 우스워 보이지만 그 속을 열어젖히고 들어가보면 신적인 지성과 덕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렇기에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찬양한다. 한편으로 나는 내가 불만을 가진 부분까지 섞어 말했다. 그분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기만하고는 정작 본인이 소년애인 노릇을 하곤 한다. 그러니 그분께 유혹당하지 말고 조심하길 바란다.
2.3.3.10. 종장
참석자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솔직한 연설에 웃음을 터트린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사실 맨정신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면서 연설이 교묘한게 사실 고의적으로 자신과 아가톤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한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자 하고 아가톤은 이를 받아들여 알키비아데스가 우리 사이에 앉은 것도 사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함이 아니냐며 소크라테스 옆자리로 다시금 침상을 옮기려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화를 내며 자신이 계속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앉아있으면 안되냐고 애원한다. 소크라테스는 방금 내가 찬미받았듯 이번엔 자신이 아가톤을 찬미할 차례라며 이를 거절하고 아가톤은 약삭빠르게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이때, 술에 취한 이들이 갑작스레 연회장에 많이 몰려와 아가톤의 집은 북새통이 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잔치는 술판이 되어버렸고 에뤽시마코스와 파이드로스를 비롯한 몇몇은 회장을 떴다. 아리스토데모스는 그대로 잠이 들어 날 밝을 무렵에야 잠에서 깼는데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 소크라테스만이 희극과 비극이 같은 기술인지에 관해 계속 떠들고 있었고[55] 얼마 안가 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이 잠에 빠지자 소크라테스는 자리를 떠 그대로 평소처럼 하루를 시내에서 보내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갔다고 한다.[56]

2.4. 여담

심포지온의 구성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면, 일곱 명의 연사가 돌아가면서 사랑을 찬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지혜에 대한 사랑' 혹은 '불멸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완벽한 것이라는 아가톤의 말에 대해, 누군가는 오직 그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것만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에로스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 즉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것이 영원할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에로스라는 것은 불멸을 결핍한 자들이 불멸에 대한 사랑을 품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영원하고 불멸한 것, 이념 혹은 지혜(sophia)만이 진정한 사랑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곧 지혜를 사랑하는 것(philo-sophia)이고 철학자는 에로스를 품은 자라는 플라톤의 사유가 심포지온의 주제를 이루며, 이는 일곱 사람의 연설을 거치며 에둘러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심포지온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설 다음으로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연설의 내용일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런데, 인간은 본디 네 팔과 네 다리가 달린 생물이었으며 그들은 강하고 뛰어난 존재들이었기에 마침내 신들마저 공격하게 되었다. 그에 분노한 제우스는 그들을 번개로 내리쳐 현재의 여자와 남자로 쪼갰으며, 만일 다시 신을 공격한다면 한 번 더 번개를 내리쳐 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한 다리로 걷도록 만들겠다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 에로스의 본질이라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말한다. 이 이야기는 이후로도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현대에 창작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뮤지컬 헤드윅의 메인 테마인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을 꼽을 수 있다.

대화편 내에서 고대 그리스 소년애와 관한 묘사가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이로 인해 동성애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은 소크라테스[57]와 플라톤 대화편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우도 존재하나 이런 거부감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여부와는 별개로 소년애 관련 서술은 당시에 실제로 성행했던 것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며 진짜 동성애와도 차이가 크다.[58] 이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년애에 대한 통찰은 당대의 문화적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랑하는 이'[59]를 연애 관계에서 주도적인 이(구식 이성애 연애관으로는 남자), 소년 애인을 수동적인 이(구식 이성애 연애관으론 여자)로 해석하면 모든 시대에 걸쳐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은 중세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향연을 소개, 라틴어로 번역하며 한 해석에서 유래되었다. 실제 향연의 내용은 (나쁜 사랑과 아름다운 사랑을 구별하는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처럼) 육체적 사랑을 천대하는 듯한 부분도 존재하나[60] 플라톤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소크라테스의 연설 부분에서는 정신적 사랑이 더욱 숭고하긴 하나 육체적 사랑 역시 이를 향한 과정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랑의 사다리) 현대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플라토닉 러브와 실제 플라톤 철학은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는 해석이 대세이다.

플라톤 대화편 중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대화편 중 하나로 손꼽히며 플라톤 답게 치밀한 구조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크라테스 연설이 핵심 내용이지만 다른 이들의 연설도 비중이 상당히 큰데, 파이드로스가 에로스의 덕을 찬미하며 시작하고, 파우사니아스가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를 구별하고, 에뤽시마코스가 에로스와 관련된 논의를 우주의 원리와 형이상학으로 끌고 오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를 설화적으로 재해석하고, 아가톤이 말만 번지르르한 소피스트식 연설로 비판거리를 제시해 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 이 모든 밑밥이 통합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아름다운 연설이 끝나 사람들이 고양된 가운데 알키비아데스의 등장으로 연회장이 다시 현실로 굴러떨어져 원환적 구성을 이룬다.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플라톤이 스승에게 바치는 찬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리고 아폴로도로스와 글라우콘이 등장하는 틀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를 애호해 술도 멀리한 이들의 이야기가 1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고 아직도 향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그 외 심포지온

소크라테스 대화는 소크라테스 사후에 상당히 유행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 외에도 심포지온이라는 소크라테스 대화를 쓴 사람들이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쓴 것이 전해진다.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잘 모른다.[61]
[1] 문과생이라면 일반사회나 정치 수업 시간에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은 여자, 외국인, 어린이, 노예를 포함하지 않는 성인 남성을 말한다.[2]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 유물들 중에는 침대에 누워 잔치를 즐기는 이 심포지온 장면을 그린 회화가 많다. 드러눕는 건 아니고 비스듬히 누웠다. 참고 그림[3] 대부분 유실되고 일부만 남았다.[4] 소크라테스는 평소 자신을 잘 꾸미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5] '훌륭하다'는 그리스어로 아가톤이라 하기 때문에 훌륭한 연회라는 부분을 아가톤의 연회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훌륭한 자들은 더 못난 자들의 연회에 자진해 간다'는 속담을 소크라테스가 자기 나름대로 바꾼 것이다.[6] 에뤽시마코스의 옆자리이다.[7]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함을 자처했다.[8] 에로스는 태초의 카오스 바로 직후에 태어난 신이라는 전승과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존재하는데 파이드로스는 전자를 채택했다.[9]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했고 이성애보다 더 숭고하다고 여기기도 한 소년애는 나이 많은 이와 소년 애인에게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대가로 소년 애인을 사회적으로 후원하고 교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10] 실제로 이러한 발상으로 테베에서 동성애자로 구성된 신성부대가 창설되었으나 이는 향연 저술 이후 시기로 추정된다.[11] 즉 성과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12]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가 오래된 신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나 파이드로스와는 달리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연관성, 즉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는 전승 쪽도 인용하고 있다.[13] 고대 그리스에선 번식 목적의 이성애보다 순수 사랑 목적의 소년애를 더 숭고히 여기는 관념이 존재했다. 여성보다 남성을 더 훌륭하게 여겼기에 여성을 사랑하는 것 보다는 남성을 사랑하는 것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14] 아테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세계의 결혼 관습은 보통 자유연애를 용납하지 않고 철저히 가족들 간의 혼약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수한 사례이지만 스파르타의 경우 아예 결혼까지 국가에서 통제하였다.[15] 소년애 관계에서 소년 애인은 나이든 상대에게 후원받을 뿐 아니라 교양과 기술을 교육받기도 했다.[16] 이 구절은 사랑을 다룬 초기 대화편 <뤼시스>에 나온 구절이다. 향연의 논의도 뤼시스의 연장선 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체크해 둘 만 하다.[17] 히포크라테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은 몸 속 여러 기운과 성질들의 균형이 깨진 것을 병으로 보고 균형 회복을 통한 치료를 꾀했다.[18] 실제 그리스 신화 속 무사 여신들의 묘사와는 해석이 좀 다르다. 파우사니아스의 아프로디테 구분과 엮기 위해 에뤽시마코스가 무리해 억지 해석하는 장면으로 여기는 것이 중론.[19] 당대 천문학은 점성술과의 구분이 희미했다. 의술에서 그러했듯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자리잡히기 전이다보니 자연의 조화가 깨지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관념이 팽배하기도 했고.[20] 질서의 에로스와 비슷하지 않은 것들끼리의 친애 등 에뤽시마코스의 연설 내용을 비꼬는 의도이다.[21] 이 또한 천상의 무사와 범속의 무사를 구분한 에뤽시마코스의 연설을 비웃는 것이다.[22] 이를 안드로규노스(Androgynous)라고 부른다. 여러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된 이야기이다.[23] 플라톤 대화편을 넘어 고대 아테네 문건 중 유일하게 레즈비언을 언급하는 부분이나 비하적 뉘앙스가 존재한다.[24] 비슷한 것끼리 서로 친하다는 구절 역시 <뤼시스>에 등장한다.[25] 원래라면 다음 연설자는 에뤽시마코스 옆자리의 아리스토데모스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리스토데모스의 존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자 아리스토데모스(와 저자 플라톤)이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연설자 목록에서 뺀 것이다.[26] 어떻게 보면 상대방의 대응과 생각을 엿보려는 소크라테스의 화법을 알아채고 자기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생각해 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27] 이는 여러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오는 주장으로 주로 민주주의 비판을 위해 사용된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역으로 활용해 논쟁에 이용한 것이다.[28] 에로스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전승이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는 전승이든간에 어린 소년 신으로 묘사되곤 한다.[29] 전술했듯 <뤼시스>에 등장하는 구절이다.[30] 아가톤의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이 즉흥시가 완전히 플라톤의 창작인지, 아니면 실제 아가톤을 패러디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학자들은 이 구절 안에서 호메로스의 영향력을 발견하였다.[31] 고르기아스고르곤 자매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이용한 언어유희로, 아가톤의 연설이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처럼 말만 번지르하고 오류가 많다는 점을 비꼬는 발언이다.[32] 그리스어로 봉헌하다와 갖다 붙인다는 같은 단어(anatithenai)를 이용한다.[33] 교묘한 말솜씨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묻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에로스인지 어머니에 대한 에로스인지를 묻는 게 아니라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해 아버지이고 형제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형제인 것 처럼 에로스는 무엇에 대한 에로스인지를 묻는 거라고 부연설명한다.[34] 후술되어있듯, 사실은 에로스(사랑 그 자체)가 아닌 사랑하는 이가 욕망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35]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가지지 않은 '누군가'를 에로스로 해석한다면 에로스가 과연 아름다운지에 관한 논의의 시작점이 되고 실제로 그렇게 내용이 흘러간다. 다만 '누군가'를 에로스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로 해석하면 논파가 가능하기에 플라톤이 의도적으로 사랑(에로스)과 사랑하는 이를 모호하게 표현해 논의를 전개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36] 전술했듯, 소크라테스가 사랑하는 이 대신에 사랑 그 자체를 끼워넣었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가톤의 이러한 답변은 너무나 무기력하다.[37] 실존인물설, 작품 속 소크라테스가 문답식 화법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라는 설, 저자인 플라톤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실존인물이더라도 플라톤 철학으로 소크라테스를 가르치는 대화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데에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38]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여러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마음 속에 신령(다이몬)이 존재해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마다 목소리를 내 이를 막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한다.[39]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올바른 지혜와 말재주꾼에 불과한 소피스트들, 특히 아가톤의 배후에 있는 고르기아스를 비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40] <메논>에 등장하는 메논의 난제와 매우 유사한 주장이다.[41] 지혜도 아름다운 것에 속하기에[42] 소크라테스는 늘 보편적 선이 있다고 믿고 이를 찾는 것을 갈망해왔다.[43]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보니 대화편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와 실제로 대화를 한 게 아니라 연설을 위해 대화를 지어냈다는 심증을 주는 부분이다. 혹은 대화편 속 모든 내용을 플라톤이 의도적으로 창작해 배치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44] 생물들이 번식을 통해 대를 이어 그 존재를 한 개체의 죽음 이후로도 유전자를 이어나감을 표현한 것이다.[45] 성욕을 비롯한 번식 관련 욕구가 사후에도 대를, 즉 유전자를 잇기 위함이라는 점과 들어맞는다.[46] 자식은 아버지에게서 나고 어머니의 자궁은 10개월동안 이를 기를 뿐이라는 관념의 영향이 보인다.[47]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48] 즉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 훌륭한 창작물을 남기는 것. 미덕을 공유하고 가르치는 것 역시 불멸을 추구하며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 사랑의 일환이다.[49]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 디오티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내용 일부를 인용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진짜로 디오티마에게 연설을 들은게 맞는지 의심한다고 볼 수도 있다.[50] 즉 알키비아데스가 생각하는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이는 소크라테스이다.[51] 초반에 절주 분위기를 주도한 이들 중 하나이다.[52] 그리스 신화 속 피리의 발명자.[53] 실레노스와 사튀로스는 우스꽝스러운 반인반수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납작코에 올챙이배 두터운 입술을 가져 이들과 닮았다.[54] 소년애 관계는 성적인 육체관계와 교양, 후원의 거래 형식을 띄었다.[55] <이온>에서 비슷한 논의가 등장한다.[56] 이로써 화자 아폴로도로스와 원출처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도 끝을 맺는다.[57] 실제로 알키비아데스와 소년애 비슷한 관계를 유지했다.[58] 참고로 플라톤은 말년에 저술한 <법률>에서 동성애를 포함해 번식 목적 이외의 성관계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다보니 플라톤의 동성애관 관련해선 의견이 분분하다.[59] 소년 연인을 후원하며 성적인 대접을 제공받는 나이든 이[60] <파이드로스>에서도 마차의 비유로 속된 육체적 사랑과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대비한다.[61] 물론 학계에서는 연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