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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22:59:26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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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
Παρμενίδης | Parmenides
출생 기원전 515년경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1]
사망 기원전 445년경
직업 철학자, 시인
학파 엘레아 학파 (창시)

1. 개요2. 출생 및 행적3. 사상
3.1. 『자연에 관하여』3.2.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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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철학자. 엘레아 학파의 대표.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창시자. "형이상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논리적으로만 따졌을 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되는, 세상의 모든 "운동과 변화"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그의 존재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 개념과 논리의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냈다.

2. 출생 및 행적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 사람인 퓌레스의 아들이다. 그는 빛나는 가문 출신인데다가 부자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에게서 배웠으나 그를 추종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생몰년도를 추측해볼 때 파르메니데스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가 되기에는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크세노파네스가 백발 노인이 되었을 때 파르메니데스는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크세노파네스는 90세 이상을 살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과연 파르메니데스가 지식욕을 가졌을 시기 엘레아에 있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크세노파네스가 함께 연구를 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사제관계인지 얼굴만 좀 아는 사이인지 아예 본 적은 없는지 자세한 것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어쨌든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에는 크세노파네스의 영향이 보이며 고대인들은 제자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주장을 시로 표현했던 것도 시인인 크세노파네스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가난했지만 인품이 훌륭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아메이니아스를 추종했다고 한다. 아메이니아스가 죽었을 때, 파르메니데스는 이 사람을 모시는 사당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정확한 생몰년도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플라톤의 저작 『파르메니데스』에서 그는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젊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는 묘사가 있다. 이 묘사가 맞다면 그는 기원전 515년 생이 되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3. 사상

3.1. 『자연에 관하여』

『자연에 관하여』라는 단편 서사시가 전해진다.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많이 전해진 편이지만 완전한 원본은 아니고 다른 책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분량이 대략 150행 정도 된다. 도입부와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론은 다시 '진리편'과 '의견편'으로 나뉜다. 도입부에서 '나'는, 태양의 딸들이 이끄는 마차에 타서 어느 커다란 문에 도착한다. 그 문은 밤의 어둠이 낮의 밝음으로 바뀌는 길목에 있으면서, 정의의 신 디케가 그 문을 지키고 있다. 태양의 딸들이 디케를 부드럽게 설득시키고 이윽고 그 문이 열리자, 문 뒤에서 이름 모를 여신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여신은 이렇게 말한다. "자, 그대는 모든 것들을 배워야 한다. 설득력 있는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과, 그 속에는 참된 확신이 없는 필멸자[2]들의 의견을." [3]

진리편에서 여신은 '사유를 위한 탐구의 길'이 '있다'의 길과 '있지 않다'의 길로 나누어진다고 구분하면서, '있다'의 길은 사유를 위한 설득의 길이지만 '있지 않다'의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면, 애초에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하거나 탐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유하거나 탐구하기 위해 가정하는 '있다'란 대체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에서 있어진다(=생성)'거나 '있는 것이 없어진다(=소멸)'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생성, 소멸하는 운동과 변화는 '논리적'으로 봤을 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즉, '있다'는 말의 의미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고 나갔을 때, 변화나 운동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다(estin)'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하나'라서 나뉘지 않고, 변화하지 않아 흔들림 없는 것." 이렇게 논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를 상정해야, 비로소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했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를 상정해야 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이후 플라톤이데아론으로 구체화된다.)

의견편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의견편은, 실제 자연의 '변화와 운동'을 보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필멸자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4]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건 논리적 정의에 따라서 그러한 것이고, '감각'에 따라서는 '여럿'인 것이 있다고 상정하면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나누어지는 원리로 그(파르메니데스)가 자연의 생성 소멸과 운동을 설명하였다고 전한다.

3.2.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르메니데스』 편이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와 논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점차 바꾼다.

4. 여담


[1] 현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벨리아.[2]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는 '가사자'(可死者)로 번역되어 있다. '가사자'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좀 더 자주 쓰이는 단어인 필멸자로 대체한다.[3] 진리의 심장은 '진리편'을 가르키고, 필멸자의 의견은 '의견편'을 가르킨다.[4]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p.303에서, 플루타르코스가 자연학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5] 그렇다고 헤라클레이토스=변화, 파르메니데스=불변 의 공식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그들의 대표되는 입장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