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에게 상처를 입힌 죄로 노예로 팔려간 토르핀 카를세프니를 사들인 대지주. 덥수룩한 수염과 우락부락한 전형적인 노르드 전사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중장년 남성이다.
가족 관계론 늙은 아버지 스벨켈과 상당히 쌀쌀한 아내, 그리고 토르길과 올마르라는 두 아들와 작중 나오지 않았지만 시집간 딸[1]을 두고 있고 소유하고 있는 여자 노예인 아르네이즈와는 내연의 관계다. 두 아들 중, 큰 아들 토르길은 크누트의 종사단에 속해있는 전사고 둘째 아들 올마르는 전쟁과 전사에 대해 야릇한 환상을 품고 있지만 나약하고 찌질한 농촌 청년이다. 젊은 시절엔 전장에서 자신의 무기가 박살나면 주먹으로 상대방을 박살 내는 철권의 사나이로 이름을 떨쳤다는것을 전장에 나갔던 큰아들이 돌아오면서 동생에게 알려줬다[2].
보통 노예 신분의 주인공과 대지주 캐릭터가 만나면, 노예인 주인공이 악덕 대지주에게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주인공은 대지주에게 착취를 당하고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하는 관계로 묘사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케틸의 첫인상은 그의 험상궂은 외모와 선입견이 겹쳐 그다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2부 도입부분의 토르핀의 꾀죄죄한 거지꼴 때문에 더더욱 그런 선입견이 가중된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케틸이 보여주는 모습은 악덕 대지주가 아니라 공정하고 관대한 선인이다.
작중에서 케틸이 노예 계급인 토르핀과 에이나르를 대하는 모습은 소작농과 대지주의 관계에 가깝지, 작중에서 가축으로 취급받는 노예 취급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케틸은 본인이 사들인 노예들에게 노동을 통해 노예 신분을 벗어날 기회를 준다.[3] 이 사람의 노예들 중 노동으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선례가 이미 있는 것으로 보면, 이 사람은 정말 공정하고 착한 사람이 맞다. 특히, 파텔처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고도 케틸의 농장에서 보수를 받는 '고용인' 신분으로 계속 일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노동에 대한 보상과 생활의 윤택함은 확실하게 보장 해주는듯.
자신의 농장에서 식량을 훔친 남매가 잡히자 심문하면서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코 끝을 붉히고 눈물을 글썽하는 모습을 보이고, 원래의 규칙대로 팔을 자르자고 주변 인물들이 주장하는 와중에 그 남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남매를 고용해서 그의 농장에서 일을 시키는 걸로 봐주려고 한다.[4][5] 케틸 본인은 남매에게 그 외의 형벌을 내리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주변 인물들이 본보기를 위해 최소한 매질이라도 해야 한다고 완고하게 버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몽둥이로 10대 치는 걸로 넘어가 준다.[6] 케틸 본인이 주저하자 마침 집에 와 있던 큰아들이 케틸 대신 형벌을 내리지만, 토르길이 몽둥이로 애를 끔살낼 기세로 옆구리를 패대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며 막는다. 결국 케틸 본인이 직접 때리는데, 아무래도 가장으로서의 위상이 있어서 약하게 때리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토르길처럼 애를 죽일정도로 매질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 예상된다. 그 아이는 나중에 헛간에서 누이동생에게 간호를 받는데 먹을 것이라든지 일단 치료를 받게 했으니 살긴 산 모양이다. 시대 배경만큼이나 텁텁하고 황량한 인물들이 난무하는 이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선인.
사실 이 인물은 위에서 언급한 '철권의 사나이'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애초에 저 '철권의 사나이'는 사실이 아니고[7], 노르드의 문화에서 약한 남성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근엄하고 강한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본성은 유약하고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는 착한 사람이다. 그의 내면을 아는 것은 아르네이스뿐이다.[8]
해럴드 왕이 아프다고[9] 해서 문병하러 수도로 가는데, 날짜가 늦어 그만 왕이 죽고 나서 1주일 뒤에야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대신 새 왕이 되기 위해 덴마크에 와 있는 크누트에게 인사를 하는데, 올마르 때문에 망신을 당한다. 문제는 그가 떠나기 전에 토르핀과 에이나르가 숲을 전부 개간한 모습을 보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너희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는데,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정통파 사망 플래그다. 결국 76화 마지막 장면에서 크누트가 "안됐지만 희생양이 되어줘야겠어. 모든 건… 만백성의 평화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며 본인의 계획을 위해 케틸을 제거할 의향을 비춘다.
케틸 가문을 반역죄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려는 크누트의 계획에 따라 크누트의 부하들이 케틸의 둘째 아들을 도발하고, 열받은 둘째 아들 올마르가 결투를 벌여 크누트의 부하를 살해하면서 계획은 성공했다. 다만 실력이 형편없는 올마르의 본 실력으로 이긴게 아니라, 크누트의 직속 부하가 둘째 아들과 싸우던 전사의 눈에 몰래 은화를 던져 순간적으로 그의 자세를 흐트러트린 것.
하지만 케틸의 장남 토르길이 올마르를 죽이려 나선 나머지 병사 4명을 모조리 처치하고, 케틸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후속부대의 병사들까지 홀로 다 썰어버리면서[10] 크누트는 케틸 부자를 잡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산전수전 다 겪고 눈치빠른 토르길이 후속부대 지휘관은 바로 죽이지 않고 고문하면서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게 했다. 즉각에서 케틸의 재산을 노리고 한 짓이라고 한 걸 알아차리자 케틸은 절망했지만, 토르길은 흉폭한 미소와 같이 웃으면서 왕을 상대로 싸우게 됐다는 사실에 전혀 겁먹지 않고 강한 상대와 싸우게 됐다고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케틸이 크누트를 알현하기 전에 시장에서 토르핀을 찾는 레이프 에이릭손을 만나 자신에게도 토르핀이라는 이름의 상처투성이 노르드 노예가 있다고 말을 해준 인연을 통해, 케틸 일가는 레이프 에이릭손의 배를 타고 크누트의 손에서 벗어나 탈출에 성공한다. 탈출시켜주는 조건은 싣고 있는 짐을 시가의 3배로 사주는 것과 토르핀을 넘겨주는 것.
하지만 크누트는 직속 부대인 종사단 32명과 종사단 대장 울프, 플로키가 지휘하는 욤 전사단 70명 등 백 명이 넘는 병력으로 케틸의 농장을 공격하러 나섰다. 케틸 쪽에서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뱀이 이끄는 용병 14~5명에 큰아들 토르길 정도. 토르길은 엄청 강하고 전형적인 노르드 전사지만, 문제는 그런 급의 상대가 100명 넘게 온다는 것. 게다가 가르잘이 일으킨 탈출소동으로 뱀의 부하들 5명이 죽어버려 전력이 격감했다. 토르핀이 작정하고 싸우면 도움이 되겠지만, 방어를 위한 싸움조차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상태.
크누트에게 죽을 뻔한 덕에 완전히 멘붕을 해버렸는데, 집에 돌아오자 자신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아르네이스가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가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흑화 했다. 그리고 아주 맛이 간 얼굴로 몽둥이를 들고 아르네이스를 죽어라 두들겨 팬다. 그녀가 뱃속에 주인님의 아기가 있다고 간청할때도 "그걸 어떻게 믿지? 날 배신하고 달아난 주제에! 죄다 나를 버리고 가는 주제에 믿으라구!"라고 하며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미치도록 두들겨 팼다. 결국 뱀이 몽둥이를 잡으며 막았지만, 결국 아르네이스는 그 후유증으로 나중에 죽고 만다.[11][12] 이후 케틸은 창고에서 옛날에 쓰던것으로 예상되는 검을 꺼내들곤 아무리 왕이라도 자신에게서 훔치려드는 도적놈은 스스로 벌을 주겠다는 독백을 하며 끝난다.
하지만 흑화를 하며 보여주던 패기가 무색하게 케틸과 농부 민병대는 머릿수에서의 유리함(350명)에도 불구하고 1열 횡대로 늘어선 전열의 욤 전사단(70명)에게 탈탈 털리며[13], 농사짓던 이들에게 무장시키고 수만 많아봐야 별 상대가 되지 못하는걸 증명했다. 크누트 측 8명이 죽는 동안 122명이 사망. 생환한 부상자를 제외한 숫자다. 부상이 악화되어 곧 죽을 마을 사람들이나, 작중 뱀(2명)이나 토르길이 죽이는(2명) 장면이 나오는 전사들을 계산하면 더 처참한 교환비다. 아마 나머지 4명도 전부 뱀이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남은 병력은 전투 중에 도망쳐버리고 케틸은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는 그런 추태를 보이면 빚을 탕감해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케틸에게 붙잡힌 남자는 왕의 명령이 부당해도 따를 수 밖에 없고 힘이 곧 정의다라면서 세상 사람들은 댁보다 더 강한 사람을 따를 것이라 하자, 케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놔준 뒤 곧 적의 공격을 받는다.
이 부분은 작품의 주제의식에 비추어 상당히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케틸 자신은 지역의 세력가로써 그리 나쁜 인물이 아니고, 오히려 거칠고 난폭한 노르드 사회 기준으로는 충분히 선량하고 공정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보다 악랄하고 불공정한 다른 세력가 밑에 있는것보다는 훨씬 지내기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이 관계는 힘(금력)을 통한 지배이기에 지배당하는 처지에 있는 입장에서는 달갑게만 받아들일수는 없는 것이고, 나름의 불만도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케틸에게 돈을 빌린 남자가 그 때문에 케틸이 요구하는 대로 싸움터에 나와야 했던 것처럼, 케틸 역시 상대가 왕이라는 이유로 그가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힘(권력)의 정의임을 지적하는 부분이다. 작중 케틸이나 하프단 같은 인물이 보여주는 "사회 구조 차원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선량한 인물"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인 것.[14]
참고로 크누트 자신은 케틸의 생포를 명하였기에 옆에 있던 울프가 "저희 놈들 중 하나가 케틸의 목을 날려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생포하라고 하지 않았나 하고 책망한 뒤 전투종료를 명령한다.
근데 이 아저씨 명줄이 의외로 질긴지 몇 화 뒤에 부상을 입은 채로 등장한다. 뱀이 구출해서 데리고 도망. 결국 토르핀이 크누트와 협상을 잘 해준 덕에 목숨을 건졌고 자신의 농장 역시 잃지 않았다. 하지만 크누트와의 전투에서 죽은 소작농들의 가족들에게 보상을 해주느라 자신의 농장 재산은 반으로 줄었고, 케틸 본인 역시 아르네이스를 잃은 슬픔과 크누트와의 전투에서 받은 멘탈 붕괴가 겹쳐서 왕성한 노동 의욕을 잃고 은거하며 지낸다. 다행인 점은 철부지 같던 바보 둘째아들 올마르가 정신을 차려서 바람직하고 건실한 농장주로 성장해서 농장은 큰 문제 없이 돌아갈듯 하다. 애초에 크누트 측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빼앗을 예정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농장 절반이라도 건진 건 크게 남는 장사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과거설정이 일부 추가되었다. 젊었을 때 같은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는데, 그 여인이 인근에서 세를 불려나가던 한 유력자의 눈에 들어버렸다. 아버지인 스벨켈은 심사숙고 끝에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여인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인근 유력자의 결혼식날, 그 유력자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유력자는 물론이고 그 여인까지 목숨을 잃고 말았다.
[1] 둘째고, 올마르가 막내라고 한다.[2] 정확히 말하면 전쟁과 전사에 대한 애매한 환상을 가진 올마르를 자극하기 위해 케틸에 대한 소문을 상기시켜준 것에 가깝다. 철권 케틸의 명성 자체는 농장 주변에도 이미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 나온다.[3] 만약 이 사람이 악덕한 대지주 캐릭터였다면 신분 세탁을 떡밥으로 삼아 착취만 하다가 마지막에 오리발을 내밀어 주인공을 절망의 늪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4] 농장의 경리를 맡고 있는 파텔이 팔을 자르자는 의견에 반대하며 일을 시키자는 의견을 내놓는 데 파텔의 의견에 반색하는 모습을 보면 파텔이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입장을 잘 이해해 그런 의견을 내놓은 것을 알 수 있다.[5] 농장에서 일을 시키는 것은 마땅한 처벌이지만, 부모를 잃고 살길이 막막한 남매에게는 식사와 주거, 그리고 안전을 보장하는 케틸의 농장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큰 혜택으로 볼 수 있다. 케틸의 성격을 고려하면 남매가 죄값을 치를만큼의 노동을 끝낸 이후에는 고용인으로 고용되어 적합한 보상을 받으며 노동을 할 가능성도 높다.[6] 여기서 도둑질 자체에 대해서는 일단 벌을 줘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합리성이 있기는 하다. 일단 남매(오빠) 입장에서는 도둑질을 했는데 특별히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동생과 함께 먹고 살 길이 열리게 되면 잘못에 대해 벌은 받지 않고 득만 본 셈이 되니 범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도 있고(그리고 만약 다음에 또 도둑질을 하다 붙잡혔을 때, 상대가 케틸만큼 마음씨 좋을거라는 보자은 전혀 없다.), 농장 주변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케틸 농장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힌 애가 별다른 벌을 안 받았다더라' 라는 소문이 퍼져 케틸이 만만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 이후 토르핀이 구드리드에게 말한 '노르드 사회에서 복수의 의미'(복수의 공포가 있기에 사람들이 함부로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이다)처럼 모순과 부조리가 있는 세상에서는 힘(폭력)을 통한 균형이 필요할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장치이기도 한 셈.[7] 사실 '철권의 사나이 케틸' 자체는 실존하는 인물이었고, 나이든 노르드 전사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기는 했다. (구전되는 이야기의 특성상 과장이 섞였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게 이 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이었고, 이 인물은 그의 위명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 심지어 남의 위명을 이용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뱀이 크누트왕의 욤 전사단을 상대로는 숫적 우위가 있어도 상대가 안 된다고 조언했을 때에도 '철권의 케틸을 얕보지 마라'고 허세를 부리기까지 한다. (물론 어차피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울 결심을 한 상황이니 자기 부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계속 허세를 부린 것일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적당히 허세를 부리면 통할수도 있는 평시와는 달리 자신과 일족의 목숨이 달려있는 진짜 전쟁에서 저런 허세를 부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고, 심지어 뱀-로알드-는 진짜 철권 케틸을 아는 인물이기에 그가 남의 위명을 사칭하고 있음을 뻔히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케틸 자신은 뱀이 자신의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8] 케틸은 아르네이즈와 단 둘이 있을때는 징징거리고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약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는 나중에 파국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쨌건 케틸에게 아르네이즈가 가징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상대이긴 했음을 보여주는 것.[9] 실은 크누트의 독살이다.[10] 사실 노르드식 사고방식으로는 토르길의 행동이 전사로써 별 문제 없는것은 맞다. 올마르와 근위병(종사)의 결투는 일단은 어찌됐건 올마르의 승리(병사의 죽음)으로 끝났는데 동료이던 다른 병사 4명이 결투의 결과에 불복하고 올마르를 다구리치려 달려들었으니 토르길 역시 올마르의 형 입장에서 싸움에 끼어들 권리가 생기는 것. 물론 엄밀히 말하면 결투 자체는 크누트의 법으로 금지된 상태였지만 이 법에 대해 토르길이 보인 "그딴 법 누가 지키냐" 는 토르길의 입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럽사를 보면 19세기까지도 결투는 공공연히 이뤄졌고, 결투 금지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즉 신사(전사)라면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 스스로 갚아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유럽의 상식이었고, 특히나 전사 문화가 강했던 노르드 사회에서 이 상식은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11] 다행히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버린건 아니라 자신들의 자유를 노동으로 산 토르핀과 에이나르는 예정대로 레이프 에이릭손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아르네이스에겐 과도한 집착을 보여주며 넘겨주길 거부했다. 하지만 토르핀과 에이나르는 그녀를 두고 갈 수 없었고, 케틸일가가 전투에 나서 집을 비운 사이에 레이프가 그녀를 살 만한 돈을 두고 몰래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애석하게도 아르네이스는 집에서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고, 그녀를 좋아했던 에이나르는 전투 뒤에 부상을 입고 뱀에게 업혀 돌아온 케틸을 죽이려 덤벼들었으나 토르핀이 막았다.[12] 단, 약속대로 토르핀과 에이나르를 해방시켜준 것은 꼭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약속은 지킨것이라기보다는 미친듯이 분노하고 흥분한 상황에서 모든 관심이 집착의 대상인 아르네이스에게 쏠리고, 그 반작용으로 토르핀과 에이나르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져 레이프가 데려가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장 작중 대사부터가 그 둘은 알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13] 후열의 종사단은 나설 기회도 없었다.[14] 이외에도 케틸의 경우 아르네이즈 폭행 및 살해로도 독자들에게 두고두고 까인다. 그리고 아르네이즈 문제 역시 비슷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케틸 자신도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에는 아르네이즈를 그리워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누가 봐도 도저히 옹호가 불가능한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지만, 정신이 나가버린 권력자가 잔인하고 잘못된 행동을 벌일 때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것. 즉 이 역시 '일방적인 권력을 가진 자의 선량함에 기대 이뤄지는 정의'가 가지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