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와 두번째는 옛 코리칸차의 재현도, 세번째는 코리칸차의 유구 위에 지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쿠스코 |
영어 | City of Cuzco | |
스페인어 | Ciudad del Cusco | |
프랑스어 | Ville de Cuzco | |
국가·위치 | 페루 쿠스코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3년 | |
등재기준 | (iii)[1], (iv)[2] | |
지정번호 | 273 |
영어: Coricancha
스페인어: Coricancha
케추아어: Qorikan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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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코리칸차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한복판에 있던 신전이다.태양신 인티를 모시는 대신전이자 잉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였으며, 제국 곳곳에서 가져온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잉카 제국 시기 코리칸차의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순금으로 빚은 라마와 알파카 상들이 들어차있었다. 게다가 금으로 만든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꽃 등 각종 식물들을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들을 꾸며놓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침입하고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히면서 잉카 제국이 쇠락하며 코리칸차의 부도 모두 약탈당했다. 콩키스타도르의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형제인 후안 피사로에게 코리칸차를 넘겨주었고, 후안 피사로는 그 안에 있던 보물들을 모두 긁어내어 금괴로 주조한 다음 모조리 스페인으로 보내버렸다.
이후 가톨릭 선교사들은 기존의 태양신앙을 억누르기 위하여 상징적인 의미로 코리칸차를 허물고 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었다. 현재까지 쿠스코 한복판에는 이 산토 도밍고 성당이 있고 그 아래에 일부 코리칸차 유적을 복원해놓았으며, 때문에 현대 페루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이다.
2. 파괴 이전
코리칸차는 대략 1200년 경 즈음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인티칸차[4]였다. 이후 쿠스코 왕국은 시간이 흐르며 힘을 키웠고, 파차쿠티 황제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파차쿠티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그만 초가집 정도에 불과했던 인티칸차를 황금으로 도배하다시피 만들고[5] 대대적으로 증축하면서 개건하였으며, 이때부터 황금을 의미하는 '코리', 신전을 의미하는 '칸차'가 합쳐진 코리칸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성기 시절 코리칸차에는 700여 장의 두꺼운 순금판이 벽에 붙어있었다. 각 금판들에는 태양의 신 인티, 달의 여신 마마퀼라, 천둥의 신 일라파, 그리고 각종 별의 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황금으로 옥수수와 감자 등을 만들어 번쩍거리는 밭과 정원들을 만들었고, 황제는 매년 이 곳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순금 옥수수를 '수확'하면서 신에게 풍요를 기원했다. 정원 옆에는 역시 금으로 빚은 라마와 알파카, 기니피그, 콘도르, 퓨마 등 다양한 동물들의 조각상들이 놓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 코리칸차에는 약 4,000여 명들의 사제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코리칸차는 수도 쿠스코의 가장 중심지이자 모든 도로들이 뻗어나가는 도로원점이기도 했다. 또한 죽은 황제들의 시신을 미라로 방부처리하여 순금 망토와 마스크 등으로 치장한 후 이 코리칸차 내부의 지성소에 안치하였으며, 각종 축제가 있을 때마다 미라를 데리고 나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며 숭배했다. 잉카인들은 미라를 통해서 죽은 황제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예언자를 앞에 두고 황제의 미라에게 국정에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했다.[6]
코리칸차는 여타 잉카 제국의 건물들과 비슷하게 투박하게 다듬은 돌들을 모양대로 맞추어서 쌓아올려 지었고, 그 위에 짚이나 풀 등을 엮어 지붕을 얹었다. 벽을 이루는 돌들 사이사이에 접착제를 쓰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서 오히려 기본적인 내진설계가 가능했다고 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돌들은 자기들끼리 흔들리다가 지진이 멈추면 알아서 원래의 자리로 쏙 들어갔고, 덕분에 건물 자체가 한꺼번에 흔들려 붕괴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코리칸차는 크게 4개의 건물이 한 정원을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이 태양, 달, 별, 천둥의 신들에게 봉헌된 모습이었다.[7]
모든 건물들은 말그래도 황금으로 떡칠이 되어있었고, 개중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했던 건물은 당연히 태양신 인티의 성소였다. 인티에게 바쳐진 방 안에는 인티를 상징하는 얼굴이 그려진 거대한 원반 모습의 순금 신상이 모셔져 있었고, 이 신상은 하지 때의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을 수 있도록 교묘한 위치에 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번쩍거리는 순금 신상에서 반사된 빛은 정확히 황제가 앉는 자리로 모였고, 이는 마치 황제가 후광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고. 또한 코리칸차를 둘러친 두터운 벽은 회색빛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벽 맨위는 순금으로 만든 큼직한 벽돌들을 쌓아 마무리했다.
3. 성당
산토 도밍고 성당[8] | 성당 내부의 중정 |
아무튼 후안 피사로와 그 일당들은 금을 약탈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도 함께 헐어버리고 남은 건물을 간이 성당으로 개조했으며,[9] 코리칸차는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후 잉카 저항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쿠스코가 거의 전소하다시피 폐허로 전락하자 스페인 식민정부는 쿠스코를 식민풍으로 새롭게 짓기로 결심했고, 가톨릭 선교사들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코리칸차의 석벽 폐허 위에 성당 건물을 지었다.[10]
멕시코에서 건너온 도미니코회의 수사들은 새로운 성당의 이름을 '산토 도밍고 성당'으로 지었고, 1610년에 첫 건물이 완공되어 축성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물이 1650년에 일어난 쿠스코 대지진으로 무너지자[11] 1680년에 새로운 성당이 또 지어졌는데 이 건물이 바로 현대 쿠스코에 남아있는 건물이다.
18세기에는 바로크풍의 종탑이 새로 지어졌고, 이후로는 별다른 개축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현재까지 쭉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산토 도밍고 성당은 바로크풍과 스페인 식민풍이 혼합된 오래된 성당으로, 총 3개의 신랑(身廊)이 있다. 또한 내부의 제단은 은으로 도금되어 있으며, 성당 내부 곳곳은 화가들이 그려놓은 오래된 성화들로 가득하여 꽤나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4. 기타
- 코리칸차 유적은 현재 쿠스코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적들 중 하나이다. 입장료는 15 페루 솔로, 약 5달러(한화로는 5~6,000원 정도)이다. 입장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고, 일요일에는 아침 9시에서 정오까지만 운영한다.
- 현재 성당 내부에 일부 코리칸차의 석벽을 복원해놓았다. 성당의 골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금 복원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지어진지 800년이 넘은 유적이니 한번쯤 볼만하다.
- 아직까지도 예배를 올리는 성당이기 때문에 사진촬영은 금지되어있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형제. 피사로 일당이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제국의 보물들을 약탈할 때 코리칸차 신전과 그 속의 재산들을 분배받았다.[4] '인티'는 태양신의 이름, '칸차'는 신전이라는 뜻의 케추아어이다.[5] 잉카인들은 황금의 특유의 빛깔 때문에 태양을 상징하는 금속이라고 믿었다.[6] 이 미라들은 스페인 식민기에 코리칸차에서 끌어내려져 리마의 한 병원에 보관되다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미라들을 꺼림칙하게 여긴 스페인 총독이 태워버렸다는 것.[7] 참고로 옆에는 작게 창조신 비라코차를 모신 사원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종교와 달리 잉카인들은 창조신과 최고신이 일치하지 않았다.[8] 스페인 식민풍과 바로크 양식이 뒤섞여있다.[9] 참고로 이 것이 페루에 지어졌던 첫 성당이다.[10] 이전 지배자들을 몰아낸 후, 그들의 종교 건물을 완전히 부수지 않고 그 위에 그대로 자기들의 양식대로 차곡차곡 성당을 짓는 스페인의 방식은 세비야 대성당에서도 보여지는데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로 무어인들을 몰아낸 후 모스크 위에 성당을 지었기 때문. 오히려 이쪽이 원조다.[11] 희한하게도 스페인 교회가 지은 성당 건물은 무너졌는데 잉카인들이 지은 코리칸차 유적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