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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23:37:44

정치교수

폴리페서에서 넘어옴
1. 개요2.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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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olifessor
정치(Politics) + 교수(Professor)의 합성어이다. 보통은 정치교수보다는 영어인 폴리페서가 더 많이 사용된다. 국내에서 쓰이는 현대 사회의 신조어 중 하나로, 교수정치에 기웃기웃하면서 정계 입문을 노리느라 자기 본분을 잊게 된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단 교수, 학자가 단순히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발언, 행적이 많아 평가가 엇갈린다고 해서 모두 이런 소리를 듣는건 아니며, 교수는 초·중·고등학교 교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일단 공무원이 아닌 만큼 앞선 교사들 만큼의 학생들 앞에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교수들 중에는 특정 정치인의 선거캠프에 합류하는 것은 물론 정책 고문을 맡거나 자신의 전공 분야 관련 정책에 관련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등 정치권에 노출이 잦은 사람이 많고, 이런 사람들도 강의, 연구 등 본업에서도 업적이 충실하면 그냥 활동적인 교수다. 오히려 이런 사람은 교수로서 강의, 연구, 사회적 공헌까지 모두 충실한 모범적인 사례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정치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일이나 행사를 몇 번 맡아서 했다는 정도로는 정치교수라고 불리지는 않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특정 분야에 많은 공부와 연구를 한 교수 같은 명망 있는 인물이 본인의 전공 분야, 학문에 한정해서 지식과 경험 등을 토대로 세상 돌아가는 정치, 정책, 행정 등에 목소리를 내거나 기여하는 것은 사회와 나라 발전에 분명 도움이 되는 것이다.[1]

평소에 연구실적도 꾸준히 내서 학계에서 평판도 좋고,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평가도 괜찮은 교수라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공공연히 밝히면서 대외활동을 많이 하고, 그 인연으로 공직을 맡거나 정치인이 된다고 해서 곧바로 정치교수라는 멸칭이 붙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있는데, 이분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엄청난 연구성과를 쌓아올리는 와중에 꾸준히 자신은 민주당 지지자라고 공공연히 밝히면서 민주당 정치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런 인연으로 실제 클린턴 대통령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그뒤에 세계은행 부총재까지 올랐다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람은 그 누구도 정치교수라고 비아냥대지 않는다.
문제는 교수의 본업인 전공 연구나 대학 강의는 뒷전이고, 오직 출세만을 위해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경우다.
즉 핵심은 강의나 연구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여부이다.

이런 정치교수의 특징이자 가장 대표적인 폐해가 바로 이런 외부 활동에 미쳐서 강의를 때려치는 것이다. 교수 이름을 보고 수업을 신청했더니, 무슨 행사 때문에 바쁘다면서 갑자기 휴강이 된다. 아니면 느닷없이 학기 중에 무슨 장관이니 연구원장이니 하는 자리를 맡았다거나 선거에 출마한다면서 "XX교수님의 사정상 이번 학기 수업은 다른 분으로 대체되었습니다"라는 공지와 함께 다른 교수나 급하게 섭외된 시간강사가 들어온다.[2][3] 보통 이런 떔빵은 당연히 서열이 제일 낮은 초짜가 맡게 되어 있다. 교수면 다행이고 보통은 보따리 시간강사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학생들에겐 그야말로 민폐 그 자체. 그나마 학부 과정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대학원 과정에서 연구생이 있는데 이런 짓을 한다면 그 교수는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학계에선 학자로서의 생산적인 성과를 보이질 않으니 민폐가 된다. 물론 이런 교수들도 종종 단행본 같은 걸 쓰기도 하지만, 자기 분야와는 상관없는 내용인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김동길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20년 넘게 재직하면서 1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지만, 전공인 사학 저서나 연구논문은 단 한편도 없었고, 전부 수필집이었다.[4] 이게 잘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고 정치권에도 진출했지만, 학계에서 활동을 한 흔적은 없다. 연구성과가 부족해도 대학원에서 제자들을 잘 키웠다면 박수를 받았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5][6] 이런게 바로 전형적인 정치교수의 행태.

우리가 사는 현실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계열에선 선거철에 본인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후보 쪽에 정책을 제시하는 교수들이 상당히 많다.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성과를 현실정치에 응용해서 성과를 내보고 싶은 것이라면 긍정적[7]이지만, 아무런 학문적 기반이 없이 입만 털어대는 삼류들도 많다는게 문제. 그리고 이런 삼류들이 바로 정치교수이다.

대학 입장에서도 껄끄러운데, 교수가 학교에는 없고 학교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니 골치아프다. 그러다가 교수를 아예 관두고 정치권으로 떠나면 괜찮은데, 이런 인간들은 대부분 보험으로 교수 자리는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몇년 동안 휴직 신청만 계속 해놓고 밖으로 도는 최악의 경우도 있다. 한편 한창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교수를 영입하는 것이 자기 대학교 홍보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도리어 모셔오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걔네들이 정계에 골인하면 대학 강단에 더 머무르려고 할지....

전술한대로 아직 대한민국은 대학 교수가 갖는 학문적 위상 및 사회적 존경도가 높고[8], 특히나 우리 사회 모든 것을 아울러서 정책에 반영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정치권에서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 대학 교수들의 자문을 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학자들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는 건 물론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정책 개발을 통한 사회 공헌이 아닌, 교수직이 정치무대 진출을 위한 통로로 악용되고 이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쓰는 것이 문제시 되고 있다.[9]

대개 교수에게 정치교수라는 멸칭은 그가 갖는 정치성향과 반대편에서 붙여주는 경우가 많다. 반면 그와 같은 편인 집단에서는 양심 있는 지성, 책임 있는 지식인 등으로 미화시키는 편. 따라서 정치교수의 리스트는 결국 각자의 정치성향에 달려 있는 셈이며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즉, 진영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 예컨대 김상조교수나 표창원 전 교수 같은 경우에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지지자들은 정치교수라고 주장했지만 또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은 그보다 더 명예로운 표현으로 부르곤 했었다. 그 중에서 표창원의 경우는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실제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회의를 느껴 스스로 관둔 케이스. 게다가 김상조, 조국 교수도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입각했다. 당연히 그 반대 사례도 존재할 수 있다.

비슷한 신조어로는 언론과 자주 접촉하면서 카메라 마사지를 받는 것을 즐기느라 학술 및 교육·연구 활동을 하지 않는 방송교수(telefessor)가 있다. 접두사가 비슷한 다른 것으로는 언론인 버전의 폴리널리스트(polinalist), 연예인 판의 정치연예인(politainer)이 있다.[10] 심지어 목사 버전의 폴리패스터(polipastor)도 있다. 쉽게 말해 정치목사 대표적으로 전광훈이 있다.

2. 유형

2.1. 아첨과 곡학아세로 출세

대통령과 정계 주요 인사들의 용비어천가를 부르면서 열심히 그들을 빨아주는 유형.

이런 정치인들도 자기네 주장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여 권위를 얻을 필요가 있고, 교수들도 차후 정계진출을 노릴 경우 이들과의 인맥을 쌓아야 하므로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발생한다.

물론 모든 친 정부 교수들이 다 정치교수라고 할 수는 없는데,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해서 소신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퇴출 운동으로 유명한 지구화학자이자, 환경운동가였던 클레어 패터슨이 있다. 그가 납 중독의 위험성을 알리고 납을 산업 전반에서 퇴출시키는 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지지하고 지원을 해준 이들이 바로 미국 정부의 고관들과 거물급 정치인, 군 장성들이었다. 그래서 패터슨은 자신이 공론화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해준 정부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당시 그는 석유 산업의 큰 손들인 여러 대기업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기 때문에[11], 이 경우는 곡학아세가 아닌 소신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2.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상아탑 속에서 정치판 돌아가는 꼴을 보다못해 박차고 나와서 자기가 한 번 해 보겠다고 나서거나 추대 받는 유형.

이들이 가진 장점이라면 기성정치인에 비해 때가 덜 묻었기에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사명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치적으로 "순진" 하기에,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가진 상대적 강점과 정치적 잠재력들을 여기저기 다 나눠주고 빨아먹힌 뒤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조심해야 할 최대의 장벽은 바로 표절 시비인데, 연구부정행위 항목에도 나오지만 표절시비 자체가 의혹을 통해 프레임을 씌우기는 쉬우면서 대응하기는 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절대 신선하다는 이유만으로 무명인사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

이들이 자주 잊는 문제는, 비유하자면 자신이 정계에 뛰어들면서 정치라는 무대가 시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한창 공연 중인 정치 무대에 자신이 난입해서 기존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살벌한 음모와 야합, 배신과 타협이 오가는 정치판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호감은 호감대로 깎이고 괜히 프레임만 덧씌워진 채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쓸쓸히 마이너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에게 놀라는 것도 잠시뿐, 기성 정치인들은 곧 그 신인이 자기 편인지 아니면 적인지를 확실히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신인을 적이라고 판단했다면, 이런저런 의혹과 누명을 씌워서 고립시키거나 퇴출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12][13] 그리고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없듯이 자신의 노선이 옳은 행보를 보이는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이다. 행정경험이 없어 현실파악도 못하고 자신의 학설이 검증도 되지 않았는데 프로모토로 실험하는 매드사이언티스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고가 오면 허둥지둥하는 등 일처리가 섬세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만일 여도 야도 다 싫은 사람들을 대변하겠다? 그러면 여야 합작으로 공공의 적이 된다. 유권자의 표라는 파이를 나누는 데 있어서 어찌됐든 기성 정치인들은 기득권층이고, 이들은 자기 밥그릇을 빼앗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나마 이쪽 저쪽 중 한쪽에 붙기라도 하면 도움을 얻을 수라도 있겠지만, 아예 제3의 노선을 표방한다면 생존 난이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자신만의 마스터플랜과 정치적 비전, 이상, 목표를 명확히 하면서 기성 정치계가 관심갖지 않은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한편, 그 목표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적임자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음을 어필하는데 성공해 단기간에 커다란 세력을 모으는 데 성공하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 단지 학문하던 사람이 이렇게 기민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아서 문제일 뿐.

설령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제3의 정치세력으로 안착하는데 성공한 경우에도, 이후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목표인 '여야를 전부 타도하는 것'을 달성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물론 대놓고 제3의 위치를 표방하면서 기존 여야를 전부 타도하는 것을 대의로 내걸었으면서도 최종적으로 집권하는데 성공했던 이런 사례가 있긴 하니까, 그의 정당이 했던 방식을 벤치마킹해서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는 쪽에 붙어 암약하면서 다른 한쪽을 완전히 조진 다음, 자신들을 만만하게 봤던 이들에게 방심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끔 만들어주는' 식으로 어떻게 가능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집권한들 결국 21세기 버전의 살라자르밖에 더 되겠는가?


[1]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대학 교수가 갖는 학문적, 사회적 위상은 대단히 높아서, 학문적이나 정치적인 상황에서 교수 개인 혹은 교수 집단이 시국선언이나 성명문을 통해 입장을 전달하는 것은 그 메시지의 파급력이 결코 낮지 않다.[2] 선거는 법으로 일정이 정해져 있는데도,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이건 정치교수들이 자기가 공천을 받을 지 확신이 없어서 사전에 휴직 혹은 사직을 안하기 때문이다. 일단 신청만 해놓고, 공천에서 떨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학교에 나오고 공천이 되면 그제야 학교에 휴직 통보하고 바로 유세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정말로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나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고, 그저 자기 욕심에 미쳐 사는 인간들이 벌이는 짓거리다.[3] 기성정당들도 이런 행태를 부채질하는데, 비밀리에 공천신청을 받아주거나, 엄연히 강의중인 교수를 인재 영입이란 명분으로 흔드는 짓거리를 한다. 이 때문에 양대 거대정당의 경우 각 지역구별 당내 예비 후보자는 보통 언론에 보도되는 것보다 훨씬 많다.[4] 그나마 자신의 박사 논문 주제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소개한 대중 교양서가 한 권 있다. 문제는 사학과 교수였음에도 에이브러햄 링컨을 소개한 대중 교양서 한 권이 끝이다.[5]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국내 대학의 수준도 낮았고, 연구환경도 척박했기에 교수들에게 따로 연구성과를 요구하지도 못했다. 그저 외국에서 배워온 최신 이론을 학생들에게 잘 전수해서 제자를 많이 키우는게 최고의 성과였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김동길 정도로 학계 활동 없이 밖으로만 돈 경우는 매우 드물다.[6] 이런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시작된 BK21 사업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2000년대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대로 연구실적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된다. BK21 사업이 대학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그래도 대학의 분위기를 바꾸는게 크게 일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7] 위에서 언급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이런 경우로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갈 시점에 이미 미국 경제학계에선 "언제가는 노벨상을 받을 인물"로 여겨지던 슈퍼스타였다.[8] 실제로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말했듯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의 교수의 위상과 존경도는 절대적으로 높다. 한 생애를 학문연구에만 몰두해온 사람들이니…[9] 자신이 강의하는 소속 대학의 타이틀을 이용하기에 해당 학교와 학생들이 한데 묶여 억울하게 정적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애초에 교수와 학부생은 처한 입장이 다르다. 교수에게 소속 대학이란 심하게 말하면 본인의 직장일 수 있지만, 학부생에게 소속 대학은 평생 남을 모교이기 때문이다.[10] 다만 이쪽은 정치교수나 폴리패스터에 비해선 그리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다. 이쪽은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정치 참여 연예인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계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뚜렷한 정치 성향을 나타내거나 정치적 발언을 한다면 정치연예인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국에선 아예 연예인 출신 대통령도 있고, 우크라이나는 정치 풍자 드라마 찍다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선거에 뛰어들어 대통령에 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사례가 있다.[11] 친정부 인사라고 해서, 무조건 친기득권 성향이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정부가 진보 성향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상태라면, 친정부 인사들의 대다수는 오히려 기득권과 싸우는 입장이 된다.[12] 더욱이 정치권에서 정치교수를 영입하는 이유는 그들의 전문 지식을 정책에 반영하고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거의 없고 정치교수가 가지는 대중 호감도 및 영향력을 단순히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교수들이 이론적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각 부처에서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20년 이상 실전에서 업무를 맡아본 실무진들의 노하우 및 업무능력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실무진들의 이론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실무진들은 현장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줍잖은 이론지식 들이밀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정치교수들을 아니꼽게 보게 되며, 정치교수들은 이상과 현실의 벽에 갇혀 별다른 성과도 못내고 여론의 비판만 받다가 다시 상아탑(?)으로 복귀하곤 한다.[13] 각 부처의 장관 및 고위직을 정치인들이 맡는 것 역시 자신의 부처의 실무는 전문 관료들에게 일임하고 정부가 각 부처에 요구하는 아젠다(거시적 목표)의 추진력을 높이고 불협화음을 해소하기 위함이 크다. 특히 정부의 관심이 높은 재정/경제, 과학/기술 관련 부서들에 정권 실세 정치인들이 장관으로 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