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0:54:20

표훈대덕

표훈에서 넘어옴
신라십성
新羅十聖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아도 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 ||


表訓大德

1. 개요2. 경덕왕과의 일화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승려로써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 하늘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과 관련한 일화로만 알려져 있지만, 승려로써도 신라 화엄종의 종조(宗祖) 의상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들을 계기로 해서 신라에서 화엄종은 본격적으로 지방[1]에서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복사에서 의상으로부터 화엄경과 함께 그 가르침을 요약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배우고, 화엄일승법계도의 "부동한 나의 몸이 곧 법신(法身) 자체의 뜻이다(不動吾身卽是法身自體之義)라는 구절에 대해
我是諸緣所成法
諸緣以我得成緣
以緣成我我無體
以我成緣緣無性
나는 여러 연(緣)으로 이루어진 존재,
여러 연들이 나로써 하나의 연을 이루었다.
연으로 이루어진 나이기에 체(體)가 없고
나를 이룬 연에도 성(性)이 없다.

라는 '오관석(五觀釋)'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를 지었으며[2] 이 오도시로 스승 의상으로부터 법을 인가받게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 14년(674년) 또는 의상대사가 입적한 성덕왕 원년(702년)을 기점으로 혜공왕이 태어난 경덕왕 17년(758년) 이전까지[3] 표훈이 생존해 있었다고 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 사람 향년이 아흔은 넘는다. [4]

표훈이 서라벌로 온 것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이 자신의 전생, 그리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불사(석굴암)와 불국사를 짓게 되면서였는데,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5]이 석불사와 불국사를 지어서 의상의 제자인 신림과 표훈을 각각 불국사와 석불사의 주지로 청해서[6]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표훈은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보면 신라 화엄종의 흐름과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종조 의상의 시대만 하더라도 서라벌에서 그렇게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화엄종이 표훈의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서라벌에서 자리를 잡고 이후 주요 교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8세기 서라벌에서는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연기(緣起)[7]와 황복사-불국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표훈 이렇게 두 계열이 서라벌에서 활동하던 화엄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부교수 임영애에 따르면 화엄경 이해에 있어 당의 화엄종 승려 법장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원효대승기신론소도 중시했던 연기에 비해 표훈은 의상처럼 화엄경만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다소 교조적인 입장이 더 강했다고 한다. [8]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때와 예종 때에 민간에서 소장하면 안 되는 도참서적으로 팔도의 관찰사들에게 수색 및 수거를[9] 명령한 책 가운데 표훈의 이름이 들어간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나(세조실록) 표훈천사(表訓天詞)(예종실록, 성종실록) 등의 책이 나온다. '하늘과 왕래했다'라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의 인물이라 아무래도 그의 이름에 가탁한 도참, 방술 서적들이 조선 시대까지 꽤 많이 돌아다녔던 모양.[10]

금강산표훈사부산범어사[11] 표훈이 세운 사찰로 전해진다. 한편 일본에는 신라 황룡사의 승려 표원(表員)이 저술한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이라는 화엄경 논서가 전해지고 있는데, 743년 이전에 저술되어 751년 이전에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기존에 이 화엄경문의요결문답의 저자 표원이 표훈과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는데, 정작 엔랴쿠지에서 발견된 완전본에는 의상의 화엄론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어서[12] 정말 표원이 표훈과 동일인물이면 자신의 스승인 의상을 이렇게 비판할 수 없다는 지적에 따라서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13]

2. 경덕왕과의 일화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서[14] 김순정의 딸이었던 왕비 삼모부인(毛夫人)을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삼아서 출궁시키고[15] 서불한 김의충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로 맞았다고 한다. [16] 물론 만월부인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에 왕이 하늘과 통하는 신통력으로 이름높던 표훈에게 "짐에게 아들이 없으니 하늘의 상제(上帝)께 부탁해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했다. 표훈이 천궁(天宮)에 올라갔다 와서 아뢰기를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했다"고 대답했다. 경덕왕은 거듭 표훈에게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표훈대덕이 하늘에 올랐을 때, 상제로부터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하늘과 인간은 본래 가벼이 왕래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표훈 그대가 지나치게 자주 드나들며 하늘의 기밀을 누설하고 있으니 이후로는 다시 하늘에 오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표훈은 이를 경덕왕에게 전했고, 경덕왕의 대답은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것이었다.

동국대학교 최연식 교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표훈이 왕래했다는 '천궁'의 정체가 실은 석불사 즉 석굴암이었다는 해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표훈이 신림이 주석하던 불국사에 머무르면서 무언가의 기원 또는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석불사에 방문하던 것이 '천궁을 오간다'로 윤색되어 전해졌다는 것이다. # 서울대학교 남동신 교수도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기리며 지은 석굴암은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죽어 오른 천상 세계이자 석가모니 부처의 여덟 가지 이적의 하나인 도리천위모설법(忉利天爲母說法)[17]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자 그 무대인 도리천 즉 천궁(天宮) 그 자체로써 구현된 결과물이라고 해석하였다.

이후 표훈이 전한 대로, 만월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아 건운이라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자 건운은 여자로 태어났어야 할 것을 남자로 태어난 바람에 여자아이처럼 비단 주머니 차고 놀기를 좋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태자가 8살 때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어린 태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곧 혜공왕이다. 실제로 신라 역사에서 혜공왕이 즉위한 뒤부터 혼란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삼국유사는 더불어 표훈 이후로 신라에는 성인(聖人)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표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음을 생각하면 이후 신라에서 화엄종을 포함해 교종 안에서 이렇다 할 인물이 나오지 않고, 교종 불교가 신라에서 슬슬 기를 쓰지 못하고 그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흥륜사에 모셔져 있었다는 신라십성 가운데 연도가 가장 후대인 인물이 표훈이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2] 해당 시는 화엄일승법계도의 고려 시대 주석서인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 실려 있다.[3] 불국사와 석굴암의 단월(창건 발원자)인 김대성이 경덕왕 19년(760년)에 황복사에서 표훈에게 화엄경을 배웠다고 하는 전승까지 생각하면 그보다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4] 동국대학교 김복순 교수는 표훈이 의상의 직계 제자라기보다는 의상의 제자인 상원이나 진정(眞定)으로부터 배운, 다시 말해 손제자일 것이라고 보았다(김복순, 『신라화엄종연구』, 민족사, 1990, p.54). 의상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하는 것보다는 의상의 제자에게서 배웠다고 하는 게 해석이 좀 더 합리적이고 매끄럽게 되기는 한다.[5] 김대성 즉 김대정은 경덕왕 4년(745년) 5월부터 동왕 9년(750년) 1월까지 4년 7개월간 중시(中侍) 즉 재상을 맡았다.[6] 김대성 본인이 760년(경덕왕 19)경 황복사에 머무르고 있던 표훈을 찾아가 화엄경을 배우기도 했다.[7] 현재 한국의 국보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을 발원, 제작한 인물이며, 구례 화엄사의 개창조이기도 하다.[8] 임영애는 동아시아 밀교의 비로자나불 불상의 수인 가운데 하나인 지권인(智拳印)이 표훈 계열의 화엄종 승도들에 의해서 창안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임영애의 논문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참조.[9] 몰수는 아니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진신고하게 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다른 책으로 대신 바꿔 주거나(세조 때) 아예 공직자면 관직을 높여주고, 평민이나 천민은 면포 50필을 주는(예종, 성종) 식의 보상은 해 줬다. 하지만 숨겨 두고 내놓지 않다가 발각되면 가차없이 처형했다.[10] 심지어 신라 진성여왕 때의 인물인 왕거인(王居仁)에 대한 기록까지 '도참서'로 수거 대상이었다.[11] 범어사사적기 말미에 "나라에 표훈 대덕이 있어 그 유사를 썼는데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有國表訓大德書其遺史爲後世龜鑑)"라는 구절이 있어서 표훈이 범어사에 다녀갔던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12] 해석학에 있어서는 오히려 신라의 원효나 당의 화엄종 승려 법장의 제자 혜원(慧苑)의 학설이 중시된다. 실천론에 대해서는 후기 지론학자인 정영사(靜影寺)의 혜원(慧遠)과 늠사(懍師)의 학설이 주로 인용되고 있는데, 이 '늠사'가 누구인지도 학자들이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13] 다만 범어사에서는 아직도 표원이 표훈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인지 홈페이지에 표훈의 저술로 화엄경문의요결문답이 올라와 있다. #[14] 옥경의 길이가 8촌(24cm 정도)이었다고 한다.[15] 이후 경덕왕 13년(754) 황룡사 대종을 주조할 때 시주로 이름이 등장한다. 황룡사 대종이 주조되고 4년 뒤에 혜공왕이 태어났다.[16] 사량부인 폐위에 대해 당대의 대귀족이었던 김순정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7] 석가모니 부처가 성도한 뒤에 하안거를 즈음하여 도리천(忉利天)에 올라, 그곳에 왕생한 자신의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 설법을 행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 도리천을 주재하는 최고 천신이 바로 제석천(인드라)이며, 이 경우 표훈이 경덕왕에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요청하고 표훈에게 "앞으로는 천상으로 드나들지 마라"고 명한 상제는 도교의 옥황상제가 아니라 불교의 제석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