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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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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8대 국왕
예종 | 睿宗
파일:예종창릉.jpg
창릉 능침
출생 1450년 1월 23일[1]
(음력 세종 32년 1월 1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즉위 1468년 10월 1일[A] (18세)
(음력 세조 14년 9월 7일)
한성부 수강궁 중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사망 1470년 1월 9일[B] (향년 19세)[4]
(음력 1469년, 예종 1년 11월 28일)
한성부 경복궁 자미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능묘 창릉(昌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58년 1월 9일[5] ~ 1468년 10월 1일[A]
(음력 1457년, 세조 3년 12월 15일 ~ 세조 14년 9월 7일)
조선 제8대 국왕
1468년 10월 1일[A] ~ 1470년 1월 9일[B]
(음력 예종 즉위년 9월 7일 ~ 1469년, 예종 1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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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황(晄)[9]
부모 부왕 세조
모후 정희왕후
형제자매 4남 1녀 중 3남
배우자 장순왕후 (1460년 혼인 / 1462년 사망)
안순왕후 (1468년 왕비 책봉)
후궁 공빈 최씨, 상궁 기씨, 후궁 이씨
자녀 2남 2녀 (3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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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 ~ 1463)
장녀 - 현숙공주(顯肅公主, 1464 ~ 1502)
차남[10][11] -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 ~ 1525)
차녀 - 혜순공주(惠順公主, 1468 ~ 1469)
- 대군(미상)
종교 유교 (성리학)불교
명조(明照) / 평남(平南)
군호 해양대군(海陽大君)
전호 경안전(慶安殿)
묘호 예종(睿宗)
시호 조선: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 양도(襄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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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대군 시절2.2. 대군에서 세자가 되다2.3. 세자가 된 이유2.4. 재위 기간
3. 기축대전4. 직접 쓴 글과 시5. 평가6. 가계
6.1. 조상6.2. 배우자/자녀
7. 기타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8대 국왕.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는 황(晄), 자는 명조(明照) 혹은 평남(平南)이다.

세조정희왕후차남으로 태어나 부친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海陽大君)'으로 봉해졌으며, 형 의경세자요절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조 말년에 대리청정을 수행하다가 세조 사망 하루 전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재위 1년만에 갑작스럽게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다. 타살로 생을 마감한 단종을 제외하면 조선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자연사 기준으로는 가장 단명한 왕이며, 더불어서 인종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짧은 왕이기도 하다.[12]

2. 생애

2.1. 대군 시절

1450년 1월 23일(세종 32년) 수양대군낙랑부대부인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53년(단종 원년)에 아버지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1455년(세조 원년)에 아버지가 사촌형 단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자 왕자가 되어 해양대군[13]에 봉해졌다.

세조가 쿠데타인 계유정난으로 즉위한 뒤에도 원래 그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맏형 의경세자[14]보다 12살이나 어린 데다가 의경세자는 여러모로 유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457년(세조 3년) 9월에 의경세자가 만 19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세조단종을 죽이자 그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이라는 야사도 있으나 실제로는 의경세자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2.2. 대군에서 세자가 되다

해양대군은 1457년(세조 3년) 12월에 세자가 되었고 1460년(세조 6년)에 한명회의 딸 한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했는데 당시 예종은 11세였고 아내인 세자빈 한씨는 16세였다. 그런데 혼인한 다음 해 세자빈 한씨가 회임[15][16]하여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세자빈 한씨1461년(세조 7년) 11월 30일 인성대군을 낳고 며칠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고 인성대군 또한 얼마 살지 못하고 3세의 나이에 풍질로 죽었다. 삼년상을 마친 후 1463년(세조 9년) 새로 세자빈을 맞이하지 않고 한백륜의 딸 한씨를 간택 후궁으로 들여 사실상 세자빈의 예우를 해주었다. 그리고 세자가 13세가 되던 해에 세조는 문종의 선례를 들어 세자를 조계에 참여하게 해 국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게 했다. 세조가 죽기 하루 전인 1468년 9월 7일 부왕의 양위를 받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세조는 아들이 즉위하고 다음날 9월 8일에 승하했다.

2.3. 세자가 된 이유

사실 예종의 승계는 왕위 계승의 법칙인 종법제에서 어긋나는 형태였다. 원래 종법제에서는 적장자가 일찍 죽을 경우 계승권은 적장자의 적장자에게 가게 된다. 즉, 의경세자가 사망했으므로 그 다음은 의경세자의 장자인 월산대군이 계승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세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월산대군세손으로 책봉하고 계승권을 주는 대신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을 세자로 임명하였다. 월산대군에게 정신병과 같은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다면 모를까 기록에서 그런 언급이 나온적은 없으며, 나이조차도 월산대군과 예종은 겨우 4~5살 차이였다.

세조가 가 아닌 차남(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본인 생전에 선왕으로 물러나면서까지 왕위 계승을 속행한 것에 대해선 본인부터가 어린 조카에게 왕위를 찬탈했던 선례가 있으니만큼 자기 자식도 동일한 상황에 몰릴게 아닌가 우려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즉 지 아들이 제 2의 수양대군에게 죽게 두기 싫다거나 그외 여러 이유로 제 2의 수양대군을 만들 바에야 차라리 차남에게 그냥 왕위를 줘버렸다는 것. 상술한대로 종법에 어긋난 행위이긴 했으나 생전 세조는 권력을 확실히 휘어잡았으면서 동시에 신하들과의 관계도 썩 좋은편이기에 사소한 잡음이 있긴 하였으나 큰 반발은 없이 세조의 뜻대로 왕위 계승이 진행되었다. 세조는 이전부터 의경세자와 그 가족들을 매우 총애했고 세자의 장례식도 후하게 치르는 한편 을 나와 사가에서 생활하는 세자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때문에 '주상세자를 홀대하고 차남을 총애해서 승계했다'라는 식의 뒷말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후대(소현세자-효종)에 비슷한 왕위 계승권 문제 때문에 발생한 예송논쟁이 예종 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배경의 차이 때문.

2.4. 재위 기간

예종은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성년이 되기 전인 19세에 즉위하면서 세조의 정실이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년이 되고 친정을 하는 예종을 본 정희왕후는 얼마 안 지나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당시 예종의 나이는 거의 성년이었고 수렴청정을 한 전례가 없어서 조선에서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 치세의 정희왕후로 기록되었다. 세자 시절에는 총명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특별히 개진하지 않고 얌전히 지낸 덕분에 혼자서 정사를 주도하지 않고 여론을 존중하는 왕이 될 것으로 기대가 자자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예종은 신하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짧은 재위 기간 내에 벌어진 '남이의 옥사'로 인해 사극에서 항상 찌질한 왕으로 등장하며, 등장하더라도 금방 죽어 성종, 연산군이 차례로 왕이 되는 징검다리 군왕으로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인종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최단 기간의 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사람을 형틀에 매다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까이기도 했지만, 법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모양. 그가 내린 교서를 참고해보자. # 재위 말년에 세조는 옛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측근 위주의 구공신(舊功臣)들과 이시애의 난 이후 새로 등장한 신공신(新功臣)들을 서로 견제하여 구 공신들의 성장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미 세조 말년 구 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자들을 신 공신으로 세웠다가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원상제를 도입한 것만 봐도 이미 남이구성군 이준[17]과 함께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로 분류되어 있었다. 예종은 강경책을 택한다. 구 공신들이 올린 대행대왕의 묘호(신종)를 물리고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고집해 관철시켜 구 공신들을 억제했고 신 공신의 대표인 남이, 강순 등을 일시에 죽여버림으로써 신 공신을 박멸하려 했다.

예종 스스로는 기민한 직감력과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부지런하고 엄한 상사. 그러다보니 세자 당시부터 병조판서로 벼락 출세한 남이를 위험하게 생각했다. 아버지 세조남이를 지나치게 총애한 면도 있지만 남이 자신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구성군 이준을 아버지 세조가 총애하자 견제하는 말을 하다 세조에게 누구와 의논했느냐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병조판서 남이를 의산군 겸사복장으로 강등시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후에 유자광남이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자 심문 끝에 죽였다. 흔히 유자광남이를 모함하기 위해 남이가 지은 시의 '미평국(나라를 편안케 못하면)' 부분을 '미득국(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바쳤다고 하나 이는 야사이며 남이가 실제로 역모를 꾀하거나 평소 조정에 큰 불만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유자광은 그 기회를 잘 포착한 것 뿐이다. 각설하고 당시 지지부진할 수 있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작업을 강행한 것도 역시 예종이다. 나쁘게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는 독한 찌질이였고 좋게 말하면 남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노력형이었다. 아버지 세조는 탈법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정당성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 배를 탄 사이인 공신들과 벗을 하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지지를 굳건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의존해야 했지만, 그의 아들인 예종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굳이 신하들과 벗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예종은 승하하기 직전에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승하가 임박한 시기부터 갑작스럽게 연이어 문안을 받는 등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예종은 자신의 병에 관한 징조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예상대로 예종은 즉위하고 15개월이 지나서 족질로 승하한다. 2000년대에 역사학자들이 추측한 정확한 사인은 지병인 족질로 발에 세균이 침투하면서 연조직염으로 발전하고 연조직염이 악화되어 일어난 패혈증. 패혈증의 증상으로는 신체가 세균으로 점령당하고 조직에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서 피부가 멍이 든 것처럼 청색으로 변하거나 괴사하는 것인데 실제로 예종이 승하한 시기는 겨울이라 시신이 부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예종의 시신은 사망하고 2일이 지나 염습을 하던 도중에 변색되었다. 예종이 친히 설명한 것처럼 족질은 유년기부터 자신을 괴롭힌 피부병이자 고질병이다.

예종실록(睿宗實錄)》은 기축년(1469년) 11월 28일 (薨)하였다고 적고 있다.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살펴보면 당시 예종의 죽음에 왕실과 신료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 신숙주는 예종 사후에 대비를 만난 자리에서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聖上)의 옥체(玉體)가 미령(靡寧)하다[18]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예종의 죽음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비 정희왕후 역시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하였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고 놀라움과 슬픔을 함께 표출했다. 대비도 예종의 병이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 바다.[19] 이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살설도 있는데, 예종이 죽기 전 자을산군(훗날 성종)을 불러 같이 수라를 들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배후에서 예종의 형수이자 자을산군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손을 썼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낮다. 만일 자을산군과 수라를 든 뒤 죽었다면 분명 자을산군수빈 한씨가 의심받게 될 것이 뻔하다. 수빈 한씨가 어린 자기 아들에게 삼촌의 수라에 독극물을 타넣으라고 했을리도 없으며 만일 수빈 한씨가 궁인을 시켜 수라에 독을 넣었다면 자기 아들까지도 독에 중독될 위험이 있었다. 일단 비사는 아무도 모른다지만 예종 독살설은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죽었을 때 나이는 만 19세로 조선의 역대 국왕 중에서 타살이 아닌 이유로 사망한 인물 중 가장 단명한 왕이다.[20] 예종 스스로는 강력한 위기 의식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때문에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일들을 억지로라도 이끌면서 심신이 퍽 지쳐있었던 듯 하다. 예종도 효종처럼 사망 플래그가 있었다. 죽기 2달~3달 전에 궁을 지키던 갑사 둘이서 새벽에 까치가 울자 "까치가 밤에 울면 그 집 주인이 황천길 간대" / "어? 그런데 이곳의 주인은 누구야?"/ "주상 전하잖아. 보라고, 곧 위태로워질 거야"/ "그럼 누가 임금 되는데?" / "영순군(광평대군의 외아들)이 있잖아"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걸 동료 1명이 밀고해버렸다. 이들을 국문한 후 갑사 둘을 대역죄로 능지하고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고도 고변하지 않은 셋을 참수해 사흘 간 효수했다. 원상들은 영순군도 처벌하자고 했으나 예종이 영순군을 강력히 보호해 피해를 입지 않았다. # 이 일이 있은지 몇 달 뒤 예종은 사망했다.

파일:attachment/예종/Example.jpg

예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창릉(昌陵)으로 안순왕후와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창릉은 화마라도 꼈는지 유난히 화재를 많이 겪었는데, 인조 때 1년의 시간을 두고 2번(1625년, 1626년)이나 봉분이 타는 화재를 겪기도 했고, 영조 때는 정자각이 불에 타서 정자각을 재건하기도 했다. 고종 때인 1896년1901년에도 봉분이 불에 탔다고 한다.

3. 기축대전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이듬해(1469년) 한명회는 《병술대전(丙戌大典)》의 재검토를 건의하여[21] 새해가 되기 전에 완성한다.[22][23] 이렇게 1468년에 완성하여 세조의 영전에 고하고 이듬해1469년부터 시행했는데 이를 《기축대전(己丑大典)》이라 한다.[24]

따라서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육전(六典) 전체가 사실은 예종의 치세에 최초로 완성되고 반포가 결정되었으나 반포하기 한달전에 예종이 급사해 최종본 완성의 업적은 조카 성종이 이어 받았다.[25] 참으로 운이 없다고 할수도 있지만 예종때 완성된 기축[26]대전 자체를 예종의 독자적인 업적으로 평가할 몇가지 이유는 있다.[27]

첫째로 『기축대전』에서는 [28] 『병술대전』의 조문을 적지 않게 수정, 보충, 삭제했다는 점이다. 『예종실록』 6권에는 "영의정 한명회가 『경국대전』에서 개정해야 할 사항을 초록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기축대전』이 완성되기 석 달 전인 1469년(예종 1년) 6월의 기사이므로 여기에서 『경국대전』이라고 한 것은 분명 『병술대전』을 가리킨 것이다. 물론 이 기록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병술대전』의 조문이 『기축대전』에서 수정이 가해진 것만은 의심할 바가 없다.

또 『예종실록』 6권에는 "임금이 상정소에 지시하기를 '송사를 심리하는 관청에서 대ㆍ중ㆍ소의 사건을 정한 기한 내에 처결하지 못하면 사유를 자세히 적어서 보고하게 하고, 처벌하는 데에 대한 문제를 『대전』에 보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도 『기축대전』이 완성되기 석 달 전의 기사로서 여기에서 말한 『대전』이란 것은 앞으로 편찬될 『기축대전』을 가리킨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기축대전』에서는 『병술대전』의 조문들이 수정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조문들이 보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조문들은 삭제되기도 하였다. 『성종실록』 11권의 다음 기록을 보자.

"근래에 중앙과 지방에 도적이 많아져서 소나 말을 잡는 자가 많으므로 꼭 중한 형벌을 적용하여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구(舊)대전』의 절도 조항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절도죄를 두 번 범한 경우에는 대사령 이전의 일이라도 관계없이 교형에 처한다. 소나 말을 훔친 경우에 주모자는 교형에 처하고, 추종자와 남의 소와 말을 죽인 자는 장형 100대와 유형 3,000리에 처한다. 자기 소나 말을 사사로이 잡은 경우에는 장형 100대와 도형 3년에 처한다. 내막을 알면서 그 고기를 먹은 경우에는 장형 70대와 도형 1년 반에 처한다. 병들어 죽었으나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채 각을 뜨고 가죽을 벗긴 자는 장형 100대에 처한다.' 종전에는 본 형조에서 이 법을 적용해 왔지만 요즘 내려보낸 준수해야 할 조목들에는 상기의 각 조문들이 없습니다. 법령이 너무 허술하여 도적들이 징계받을 길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도적이 없어질 때까지 옛 법전의 규정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 『구대전』이란 것은 새로 만든 『기축대전』에 상대하여 종전의 『병술대전』을 가리킨 것이다(제2장 1절 참조). 이 기록을 통하여 '절도'에 관한 처벌규정이 『병술대전』에는 독립적인 항목으로 크게 올라 있지만 『기축대전』에는 이것이 전부 삭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문들을 보면 '절도'라는 항목의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절도 일반에 대한 규정은 한마디로 싣고 주로 소와 말의 도살에 관한 처벌규정을 밝히고 있다. 『기축대전』의 편찬자들은 『병술대전』의 조문들 중에서 일반성이 없이 개별적 현상을 놓고 법제화한 조문들을 일반성을 띠도록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이 조문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기축대전』은 『병술대전』과는 달리 설정된 항목들이 포괄적이며 일반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대전 편찬자들은 영세불변의 법전을 만들려고 시도한 만큼 『대전』의 항목을 될수록 포괄적이며 일반성을 띠게 설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병술대전』은 그렇게 설정되지 못하였다.

『병술대전』에서 현재 알려진 항목으로는 '국폐(國幣)', '과전체수(科田遞受)', '요역(徭役)', '제품관리반록(諸品官吏頒祿)', '승인추핵(僧人推劾)', '비하매존장(卑下罵尊長)', '절도(竊盜)', '노비결송정한(奴婢決訟定限)'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현존 『경국대전』과 같은 것은 '국폐'와 '노비결송정한' 두 항목뿐이고 그 나머지 '승인추핵'이나 '제품관리반록' 등과 같은 항목은 개별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상대로 설정한 것으로서 일반성을 띠지 못하였다. 이런 항목들은 『기축대전』에서 시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자료를 통하여 『기축대전』에서 설정한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돈녕부(敦寧府), 고신(告身)
고과(考課), 연분등제(年分等第)
제과(諸科), 봉사(奉祀)
장권(奬勸), 경외관회좌(京外官會坐)
포폄(褒貶), 금제(禁制)
공천(公賤), 은전대용(銀錢代用)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축대전』에서 현재 알려진 항목은 상기의 12개 항목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연분등제' 항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존 『경국대전』의 항목과 같고 각 항목이 포괄적이며 일반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기축대전』이 항목 설정에서 『병술대전』의 부족한 점을 많이 시정했으며 『대전』의 기본 틀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축대전』은 항목 설정뿐 아니라 조문의 내용에서도 현존 『경국대전』과 일치하는 것이 적지 않다. 형전만 보더라도 '용률(用律)' 항목이나 '은전대용'과 같은 항목은 항목 안의 전체 조문들이 똑같으며 기타 '금제(禁制)', '수금(囚禁)' 항목의 일부 조문도 일치한다. 이는 『기축대전』에서 통일법전으로서의 『경국대전』의 기본 틀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4. 직접 쓴 글과 시

손수 쓴 교서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내고 임금을 두어 백성을 다스리게 한 것은 제멋대로 욕심을 내어 자신을 봉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잘것없고 매사에 어두운 사람으로서 일찍이 선조의 공업(功業)을 계승하여 총명이 사리를 비추지 못하고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고 큰 공업을 길이 보전하고자 한다. 만약 여러 신하들이 생각이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른바 임금에게 통하는 문이 만 리보다 더 멀다는 것이다. 정사(政事)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백성의 고락(苦樂)을 내가 무슨 연유로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너희 신료들은 모두 나의 뜻을 본받아 각각 자신의 직책을 삼가서 시행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
열성어제[29]
1469년 음력 12월 11일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도 나오는 글이다.

5. 평가

아버지 세조가 공신들을 적절히 솎아내지 않고 우대하여 공신들의 위세가 높았으나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고 강한 왕권을 휘두른 것에 감명받아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 와중에 장인이자 권신인 한명회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에 항상 한명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다닌다. 예종 사후에 왕위를 둘째 조카인 성종이 이어받았으며 성종도 한명회의 사위라는 것이 한명회가 살해했다고 의심받는 근거인데, 사실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근거는 없다.

또한 강력한 왕권을 기본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러한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배짱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예종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오래 살아 즉위 직후로부터 10년 넘게 왕위에 있었다면 아버지인 세조보다 훨씬 나은 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중적으론 유자광의 모함에 억울한 남이를 죽였다는 야사 때문에 쪼잔하고 의심 많은 왕이란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다만 아버지를 지나치게 칭송한 점 때문에 윤리적인 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물론 충=효 개념이 강한 시대고 효성이 지극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버지가 그 때 당시 민중들과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로 끔찍한 패륜을 저질렀는데도 아버지를 지나치게 찬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에게 '세조'라는 묘호를 주었는데 원래 세조의 묘호는 신종, 예종, 성종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던 것을 세조로 고치고[30] 시호도 굉장히 길게 바친다.[31] 세조라는 묘호가 본래 세종보다도 더욱 뛰어난 명군에게 바치는 묘호임을 감안하면, 예종은 효성이 필요 이상으로 지극했던 나머지 의도치 않게나마 할아버지에게 고인드립을 저지른 셈이다. 그리고 예종이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버린 탓에 후대 조선에서는 '조'를 남발하게 된다.[32]

6. 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예종
(睿宗)
<colbgcolor=#fff3e4,#331c00> 세조
(世祖)
<colbgcolor=#ffffe4,#323300> 세종
(世宗)
태종
(太宗)
원경왕후
(元敬王后)
소헌왕후
(昭憲王后)
청천부원군 심온
(靑川府院君 沈溫)
삼한국대부인
안씨
(三韓國大府人 安氏)
정희왕후
(貞熹王后)
파평부원군
윤번
(坡平府院君 尹璠)
윤승례
(尹承禮)
창녕 성씨[33]
(昌寧 成氏)
흥녕부대부인
이씨
興寧府大夫人 李氏)
이문화[34]
(李文和)
충주 최씨
(忠州 崔氏)

6.2. 배우자/자녀

7. 기타

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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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월 14일.[A] 율리우스력 9월 22일.[B] 율리우스력 1469년 12월 31일.[4] 단종 다음으로 요절한 군주다.[5] 율리우스력 1457년 12월 31일.[A] [A] [B] [9] 이황과 이름 발음이 같다. 다만, 여기는 본관이 경상북도 청송군을 관향으로 두고 있는 진성 이씨다.[10] 장남 인성대군이 요절했기에 실질적인 장남이다.[11] 그러나 제안대군의 작은할아버지이자 예종의 삼촌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했다.[12] 인종은 8개월(1544년 11월 ~ 1545년 7월) 동안 재위했다.[13] 군호는 경상남도 남해군의 옛 지명인 해양군(海陽郡)에서 따왔다.[14] 사후 덕종(德宗)으로 추숭됨. 인수대비의 남편이자 월산대군, 성종, 명숙공주의 아버지.[15] 인성대군이 태어난 해가 1461년이니 예종의 나이 12세 때 이미 아버지가 된 것. 과거에는 지금보다 평균적인 2차 성징 시기가 늦었지만 그것은 농업 생산력이 지금보다 낮아 음식이 풍족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영양 부족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왕족이나 귀족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영양 과잉으로 오히려 성조숙증이 나타날 수 있었고 예종도 그런 경우인 듯하다. 만 13세로 사망한 신성군도 딸이 있었고 중국 남제의 초대황제 소도성이 13살때(당시 평민) 아들 무제를 봤고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본 나이가 15세경이고 네오프톨레모스가 장남 몰로소스를 본 나이는 그보다도 적은 10세 전후(높게 잡아도 예종 또래 정도이다.)였음을 보면 불가능한 나이는 아니다.[16] 출산이 1461년 11월로 기록되었으니, 1460년이 아닌 1461년 2월쯤에 임신시킨 것이고, 또한 예종이 1월생임을 고려하면, 만 11세가 되고 바로 임신시킨 것이니, 그래도 현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은 아니고 초등학교 6학년 정도에 연상의 부인인 장순왕후를 임신시켰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15세 이전에 혼인한 왕자나 세자의 합방 시점은 의원들이 검사와 논의를 하여 결정되었으므로 뭔가 가능하다는 징조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보통은 빨라도 15세 정도가 첫 합방이었다. 장순왕후가 5살 연상으로나이 차이가 상당하긴 하나 합방이 매우 빠르기는 하다.[17]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차남. 예종과는 사촌간이다. 영의정까지 되었지만 결국 역모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갔다.[18] 병 때문에 편하지 못하다.[19] 쉽게 말하면 예종이 매일 나를 찾아와 안부를 묻기에 심각한 병은 아니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죽어버려 놀랐다는 취지이다.[20] 타살 포함 모든 경우를 치면 단종이 해당하며 예종은 2번째이다. 단종과 함께 만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 둘뿐인 조선의 왕이다.[21] 영의정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국전(國典)은 모름지기 일찍 정해서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을 하나로 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제 상정(詳定)을 마치지 못하여 육전(六典)을 반포하지 못하니, 빌건대 속히 상정하소서. 승문원은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서를 오로지 맡고 있으므로, 익히는 바 한어(漢語)·이문(吏文) 등의 일은 그 벼슬에 오래 있지 아니하면 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부정자(副正字)에서 박사(博士)까지 있어 차례로 천전(遷轉)하고 특별히 구임(久任)하지 않았으며, 또 한어를 강하고 이문을 짓게 하여 그 재주가 정(精)하면 올리고, 그렇지 못하면 해가 비록 오래 되었을지라도 올려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권장하고 힘썼는데, 삼관(三館)252)((註 252)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의 세 기관을 말함. 문필(文筆)과 교육(敎育)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음.)의 법이 한 번 폐지되자 바꾸어 나가고 번갈아 들어와서 사람이 오래 있을 계책이 없으니, 오로지 업을 익히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예전 법을 세우소서." 하니, (예종 1년 윤2월 23일)[22] 상정소 제조(詳定所提調)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어 바치니, 최항·김국광에게 각각 매(鷹子) 1련(連)씩을 내렸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이 아뢰기를, "《대전》은 세조(世祖)께서 가장 유의(留意)하신 일이니, 비록 종묘(宗廟)에 두루 고(告)하지는 못할지라도, 청컨대 영창전(永昌殿)에는 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가 우리 나라의 법제(法制)가 번거롭고 자세하다 하여 6전(典)으로 고쳐 정하고, 고금의 법을 참고하여 세절(細節)을 버리고 강령(綱領)을 두어서 간략하게 하였다. 개국(開局)한 지 5,6년에 겨우 형전(刑典)·호전(戶典)의 2전(典)을 이루고, 이때에 이르러 6전이 다 성취되었는데, 그 형전·호전은 거의 다 세조의 어제(御製)이다. (예종 1년 9월 27일)[23] 2000년대 초반 학습 만화책에서 이것을 잘못 해석해 '예종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다.'고 나온 적이 있는데 당연히 잘못된 정보이다.[24]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은 경인년985)(註 985)(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정월 초1일부터 준행하라." 하였다. (예종 1년 11월 16일)[25] 성종 즉위 후 1470년에 다시 한번 교정을 마치고[51][52][53] 이듬해(1471년)부터 시행하기로 했으며[54] 이를 《신묘대전(辛卯大典)》이라 했다. 조문을 좀 더 개수하여 1474년 2월 1일[55]부터 쓸 수 있도록 《갑오대전(甲午大典)》을 완성했고[56] 1485년 1월 1일[57]까지 최종 검토를 거쳐[58][59] 《을사대전(乙巳大典)》이라 했고 이것이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이라 불리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최종 완성본이다.[60][26] 예종이 못보고 죽은 반행예정년도는 경인년이고 완성년도가 기축년이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축대전과 달리 기축대전 이후의 성종때의 세개의 대전수정판은 완성년도를 기준으로 명칭을 삼는것이 아니라 반행년도를 기준으로 명칭을 삼는다. 기축대전은 기축년 당해 9월 27일에 완성되었고 역시 당해 11월 16일에 이듬해인 경인년 정월 1일부터 준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12일 후에 예종은 사망한다.[27] 조선시대 국가 통치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 노사신 저 등,윤국일 역주,홍기문 감수,김석형 감수 여강출판사 2001-08-01[28] 세조때의[29] 강진숙 번역본[30] 본래 묘호 작명 법칙 상 세조는 개국에 준하는 업적을 남긴 묘호다. 자세한 것은 세조 항목 참조.[31] 조선조에서 보통 왕에게 바치는 시호는 8글자에 간혹 후대 왕이 특별히 몇글자 더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32] 바로 전 왕조인 고려와 비교해보면 고려엔 '조'로 끝나는 왕이 태조 왕건밖에 없다.[33] 창녕부원군 성여원의 딸이다.[34] 창왕의 모후인 근비 이씨의 조카로, 창왕의 이종사촌형이다.[35]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실록에서 언급만 될 따름이다. "(중략) 또 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의 을 취하여 2남과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1남은 먼저 죽었고, 세조(世祖)께서 이미 위(位)를 전하에게 전하시고, 명하고 봉하여 비(妃)로 삼았다. (중략)" -《예종실록》2권, 예종 즉위년 11월 28일 1번째기사[36] 태상왕이 명하여 소훈(昭訓) 한씨(韓氏)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에 소훈이 임신하여 달이 차서 그 아비 한백륜(韓伯倫)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곧 위사(衛士)를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였다. - 《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9월 8일 갑자 5번째기사[37] 새로 태어난 공주(公主)가 병으로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를 혜순(惠順)이라 하였으며, 나이 20이 못되어 졸하였으므로 거애(擧哀)하지 않았다. -《예종실록》, 예종 1년 8월 5일 병진 1번째기사[38] 사헌 감찰(司憲監察) 이의생(李義生)의 첩(妾)의 딸을 뽑아서 동궁(東宮)에 들이었다. -《세조실록》세조 9년 12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39] 《성종실록》성종 16년 5월 5일 갑인 1번째기사[40] 예종(睿宗)의 상궁(尙宮) 기씨(奇氏)가 졸(卒)하였다. 승정원에게 전교하기를,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졸하였는데, 악(樂)을 듣는 것은 불가함이 없겠는가? 오는 17일 거둥 때에 고취(鼓吹)를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후략) -《성종실록》성종 20년 3월 16일 3번째기사[41] 단종실록세조실록에는 김종서, 황보인, 안평이 단종을 끌어내리고 안평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기록됐지만, 이는 계유정난이 정당한 행동이였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42] 예종은 인수대비를 형수의 예로서 대하고 자신의 조카들과도 잘 어울리지만 인수대비는 예종을 속으로 원망하면서 내내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43] 극 중 인수대비는 자신의 사촌오빠 한치형에게 나이 차도 고작 4살밖에 안나고 해양대군이 월산군처럼 어린 아이인건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월산군이 세손이 되지 못하냐고 서운한 속을 털어낸다.[44] 극 중 인수대비는 남편 의경세자가 죽기 전까지 누구보다도 시아버지 세조를 가장 존경하고 믿고 따랐다.[45] 본래 선왕의 친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위를 계승할 때는 선왕의 양자로 입적되는 것이 관례였다. 성종 본인도 그렇게 해서 자신의 숙부 예종의 양자가 된 것. 훗날 성종은 자신의 친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숭시켜 주어 친어머니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격상시켜 주었다.[46] 엄연히 '대왕대비'였던 사람이 죽었는데도 며칠 동안 질질 끌면서 상복도 입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결국 최측근 신수근의 간곡한 설득으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기는 했어도 부실하게 치러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아예 인수대비의 빈전에다 올리는 에 침까지 내뱉어버린다.[47] 인수대비가 세자빈이었던 시절 불리던 이름[48] 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 인물.[49] 조윤선 청주대학교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장희흥 대구대학교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 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 시대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50]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김유신의 아역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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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전지하기를, "새로 정한 《대전(大典)》이 비록 원상(院相)의 수교(讎校)를 거치었으나 오히려 착오가 있을까 두려우니, 이극돈(李克墩)·최호원(崔灝元)·김유(金紐)로 하여금 다시 교정하게 하라." 하였다. (성종 1년 4월 6일)[52]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교정(校正)하여 올렸다. (성종 1년 10월 27일)[53] 명하여 《대전(大典)》 교정청(校正廳)의 당상 낭청(堂上郞廳)을 불러서 이들을 먹이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성종 1년 11월 5일)[54]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새로 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아직 반포하지 못한 조건(條件)을 오는 신묘년780)(註 780)(신묘년 : 1471 성종 2년.) 정월(正月) 초하루부터 준용(遵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년 11월 8일)[55]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오는 갑오년882)(註 882)(갑오년 : 1474 성종 5년.) 2월 초1일부터 행용(行用)하라." 하였다. (성종 4년 11월 14일)[56]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찬(改撰)하여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였는데, 《대전》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던 것을 이름하여 속록(續錄)이라 하였다. 모두 72조(條)였는데, 아울러 반포하였다. (성종 5년 1월 2일)[57]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새로 교감(校勘)한 《대전(大典)》은 오는 을사년1110)(註 1110)(을사년 : 1485 성종 16년.) 정월(正月) 초 1일부터 시작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5년 12월 4일)[58]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감교(勘校)한 뒤에는 《대명률(大明律)》의 예(例)에 따라 경솔하게 어지러이 고치지 못하게 하고, 고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법을 세워서 논죄(論罪)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합니다." 하였다. (성종 15년 4월 8일)[59]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전일 내가 감교청(勘校廳)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교정(校定)을 마친 뒤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와 재상(宰相)들이 당부(當否)를 참고하게 하였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그 첨가하여 기록한 것은 다 《속전(續典)》에서 따온 것이므로 곧 선왕(先王)께서 이미 시행하신 법인데, 재상들이 각각 소견을 고집하여 논의가 어지럽게 된다면, 《경국대전》이 어느 때에 정하여지겠는가? 참고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겸교청에 묻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5년 6월 29일)[60] 대전 감교청(大典勘校廳)에서 일을 끝마쳤음을 아뢰니, 당상관(堂上官) 홍응(洪應) 등에게 필단(匹段) 1필(匹), 낭청(郞廳) 등에게 녹비(鹿皮) 1장(張)씩을 하사(下賜)하였다. (성종 15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