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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00:32

필리스 슐래플리

미국의 사회운동가
필리스 스튜어트 슐래플리
Phyllis Stewart Schlafly
파일:필리스슐래플리.jpg
출생 1924년 8월 15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사망 2016년 9월 5일(향년 92세)
미국 미주리주 러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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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프레드 슐래플리(1949년 결혼~1993년 사망)
자녀 슬하 6명[1]
학력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B.A.)
레드 클리프 칼리지 (정치학 / M.A.)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J.D.)
정당

1. 개요2. 생애
2.1. 성평등헌법수정안 반대 운동
3. 성향
3.1. 여성 정책
4. 평가5. 선거 이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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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보수 성향 운동가, 정치인. 성평등헌법수정안 반대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1924년 8월 15일,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학창 시절에는 가톨릭 여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을 일찍 진학하여 1945년에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다음해에는 미국 기업 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연구원이 되었고, 공화당의 클러드 베이크웰 하원의원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는 등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1952년 일리노이 주 24구에 공화당 연방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하나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패한다. 같은 해의 대선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아닌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을 후보로 지지했다.

1957년에는 남편과 함께 쓴 "American Bar Association's Report on Communist Tactics, Strategy, and Objectives"이 반공주의 자료로 유명해졌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인종분리와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보인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때 같은 일리노이 24구에 연방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정통보수 배리 골드워터를 후보로 지지하기 위해 공화당 내 중도파 넬슨 록펠러 비판서 "A Choice Not An Echo"를 출간했다. 록펠러 공화당원들은 부패했으며 지나치게 세계주의적이라는 이야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0대의 나이에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한 경험을 언급하기도 했다. 배리 골드워터가 대선후보가 된 것은 이 책의 기여가 컸다는 주장이 있다. 비록 본선에서는 참패했지만.

1967년, 공화당의 여성조직인 전국 공화당 여성 연맹의 위원장 선거에 나섰으나 캘리포니아의 글래디스 오코넬에게 패배했다. 당시 현직 위원장이자 이후 델라웨어 주 재무장관을 역임하게 되는 도로시 엘스턴은 공개적으로 오코넬을 지지했다고 한다.

1970년 일리노이주 23구에 연방하원의원 후보로 재출마하나 근소한 차이로 당선에 실패했다. 계속되는 낙선 탓이었는지 다시는 선출직에 도전하지 않았다.

1977년에는 전미여성회의 집회에 대한 맞불 집회에서 페미니즘현대자유주의를 반대하고 '가족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치의 시작을 알렸다. 1만 5천 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역사가 마조리 J. 스프루일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걸쳐 이와 같은 공화당의 사회정책을 우경화시키려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성평등헌법수정안 반대 운동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을 참고하자.

2005년,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 앤서니 케네디[2] 대법관을 탄핵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워싱턴 대학교에서는 슐래플리가 그 해 졸업식에서 명예 학위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녀의 행적과 성향으로 일부 재학생과 교수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혔지만,[3] 워싱턴대에서는 학위 수여가 슐래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며 그녀의 삶이 미국 사회에 광범위한 논쟁을 일으켜 모두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학위를 수여했다. 2008년 5월 16일에 열린 졸업식에서는 전체의 3분의 1가량 되는 학생들이 등을 돌려 학위 수여에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슐래플리는 그들이 대학을 졸업할 만큼 성숙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학생들을 '루저'라고 비난했고, 연설도 하지 않았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신은 공화당원이기에 존 매케인을 지지하겠다며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는 말만 잘하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존 매케인에 대한 생각을 묻는 러시 림보에게는 매케인이 문제가 있어도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오바마케어 반대와 전통적 가치를 역설하며 여성 후보인 미셸 바크먼(Michele Bachmann)을 지지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그가 당선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월에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2.1. 성평등헌법수정안 반대 운동

Section 1. Equality of rights under the law shall not be denied or abridged by the United States or by any State on account of sex.

Section 2. The Congress shall have the power to enforce, by appropriate legislation, the provisions of this article.

Section 3. This amendment shall take effect two years after the date of ratification.
제1절
법에 따른 권리의 평등은 성별을 이유로 미국 정부나 주 정부에 의해 부정되거나 제한될 수 없다.

제2절
합중국 의회는 적절한 입법에 의하여 본 조를 시행할 권한을 가진다.

제3절
이 수정조항은 비준일로부터 2년 후에 발효된다.

성평등헌법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이란 미국 수정헌법 19조에 위와 같은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다. 슐래플리는 전통적인 성역할 강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반대 운동에 나섰다.

슐래플리는 "STOP ERA" 캠페인을 주도했다. STOP은 멈추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특권을 그만 빼앗아라(Stop Taking Our Privileges)"의 약어였다. 그녀는 ERA가 기혼 여성이 남편에게 의지할 권리, 화장실에서의 안전을 위한 성별 분리, 전시 징병 면제 같은 (대부분) 기존 사회에서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전근대적 논리로 인해 여성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저런 주장 때문에 성평등헌법수정안이 좌초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많은 이혼녀들은 사회 보장 혜택도, 위자료와 같은 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고 자신의 직업에 종사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나 진보진영은 ERA 비준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 계층에게 신경쓰는 인물은 별로 없었다. 슐래플리는 이 계층을 공략했다. 그녀는 ERA가 젊은 직장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라며 남녀가 기계적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으면 직업능력이 없는 중년 가정주부들의 이익이 침해될 것이며 이혼 시의 위자료 같은 법적 보호가 사라지고 이혼 시 어머니에게 양육권을 우선 부여하는 관행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취약계층의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지원이 남성이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결과적으로는 남성에 유리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것들은 실제로 노동자 계층 여성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이었다. 일리노이주에서는 집에서 만든, 즉 가정주부의 상징인 빵, 잼, 애플파이 등을 캠페인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1972년 3월 ERA가 발의되고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ERA는 정식 헌법 조항이 되기 위해 38개 주 중 28개 주에 의해 이미 비준된 상황이었다. 슐래플리의 반대 운동 이후로 7개 주가 ERA를 비준했지만 다른 5개 주가 비준을 취소하게 되었다. 비준 취소가 법적 효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논쟁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35개 주만 비준해 ERA는 수정헌법으로 확정되지 못했으며 2020년대까지도 민주당의 주도로 추진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RA의 실패는 여성운동에 꽤 큰 타격을 주었다.

더 다양한 삶의 방식과 결정권을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을 마치 전통적 삶을 선택한 개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세력이 있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3. 성향

신보수주의자들과도 함께 활동했지만, 정치적으로 고보수주의로 분류된다.

안보 전문가였던 슐래플리의 대외성향은 비타협적이었고 고립주의적이었다. 유엔을 경멸하다시피 했고, 빌 클린턴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반대[4]나 가입을 위해 필수적인 법 개정 자체가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WTO 참여 반대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 연합에도 부정적이었다. 또한 냉전 시대에는 전력 약화를 들어 소련과의 무기 감축 협정을 반대했다.

사법적극주의적인 대법관들을 'activist court'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activist court'란 보수 진영에서 진보적인 판결을 비난할 때 주로 쓰는 조어다.

이민을 반대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 공화당에서 멕시코 등의 국가 출신 라틴계들을 지지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그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며 그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리라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공화당이 신경써야 할 유권자들은 백인이라고 했다.

3.1. 여성 정책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기반한 안티페미니스트였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 있어서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5] 따라서 결혼에 있어서 남녀의 역할도 달라야 했고[6]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는 '본성적으로' 가정에서의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가족주의자로서 자녀를 직업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며 전통 가정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가장 큰 성장과 만족을 주는 곳이기에 오히려 근대 이후 여성 권리에 대한 가장 핵심적 업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가족의 가치는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미래의 시민이 될 아동에게는 도덕을 교육할 온전하고 안정된 가정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그녀에 따르면 아내나 어머니 외의 다른 직업이 여성에게 더 만족감을 준다는 것은 터무니없었다. 노동시장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가정을 부양하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기도 하고[7], 무엇보다도 성별 임금격차가 개선되면 여성이 정규직으로서 평생 노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명백하게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결혼한다는 것은 배우자와의 성관계에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부부강간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8]

낙태에 반대하며,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상 최악의 판결이라고 평했다.

학자인 레베카 클래치는 슐래플리와 같은 사회보수주의자들은 위계질서가 있는 사회를 바람직하다고 여기기에 남녀의 위치가 달라도 그것을 불평등으로 보지 않고 그 존재를 부인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 정도면 미국의 70~80년대 종교 계열 우파 중에서는 온건한 것이기도 하고..

4. 평가

슐래플리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가족주의, 안티페미니즘, 반동성애주의, 사회보수주의, 전통주의, 각종 종교근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다만 슐래플리는 여성의 모든 권리나 사회 진출을 일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반페미니즘 저서에서조차도 여성의 교육과 취업 선택권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고 언급했고, 동시대의 여성 정치인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호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적 가치를 지키자는 그녀의 활동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장 성평등헌법수정안이 부결되어서 노동계층 가정주부 여성의 삶이 나아졌는가? 악화되었다. 슐래플리와 같은 사회보수주의기독교 우파들이 세운 정권이나 다름없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했고, 그로 인해 슐래플리가 말하는 대로 임금노동 대신 가사/돌봄노동을 하던 여성들이 정부에게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또한 백인 여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던 흑인 여성들은 희대의 선동인 '복지 여왕(The Welfare Queen)'[9]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슐래플리와 같은 이들이 불러온 사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백래시(도서)를 읽어보자. 문서만 봐도 좋다.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자면 가족보호법(Family Protection Act)이 있다. 성평등교육의 근반이 되는 연방법들을 없애고, 모든 스포츠와 학교 활동에서 남녀를 분리시키고, 결혼과 모성이 여학생에게 적합한 직업이라고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하고, 비전통적인 역할을 맡는 여성을 담은 교과서를 사용하는 모든 학교에 연방의 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을 남편으로부터 보호하는 모든 연방법을 폐지하고, 여성의 생명이 위험하더라도 낙태를 금지, 피임 정보 검열, 동일임금법 폐지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가족보호법이 실제로 통과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 중 일부는 현실화되었다. 레이건은 실제로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만든 가정폭력청을 폐지했으며, 낙태와 일부 피임의 전면 금지를 위한 헌법 개정안(소위 'Human Life Amendment')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낙태의 경우 현재까지도 2019년 앨라배마나 2021년 텍사스 낙태 금지법 논란 등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 위해 열심히 입법하고 있는 사안이다.

무엇보다 슐래플리 자신은 매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았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5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일리노이 24구

63,778 (35.20%) 낙선 (2위)
196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55,620 (27.79%)
197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일리노이 23구 77,762 (46.04%)

6. 여담


[1] 앤드류 슐래플리 포함[2] 로널드 레이건이 지명해 보수 대법관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2015년에는 동성결혼 합헌 판결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고 명판결문을 남기는 등 마냥 보수적인 행보만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3] 14명의 로스쿨 교수들은 슐래플리가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자라고 비판했다.[4] 정작 훨씬 빈번하고 폐해가 컸던 닉슨, 레이건, 아빠 부시 등 공화당 정권의 공작이나 개입에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5] "Social conservative women believe in a strict division of gender roles as decreed by the scriptures. Gender is envisioned as a hierarchal ordering with God and Christ at the top, followed by men, and then women.[6] "If marriage is to be a successful institution, it must have an ultimate decision maker, and that is the husband."[7] 즉 가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8]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한국도 부부강간 개념을 인정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살인 등 다른 범죄는 모두 성립하는데 성범죄만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피해자를 성노예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9] 수십 개의 위조된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있어 각종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부당하게 수령하여 호화를 누리는 흑인 여성. 로널드 레이건이 1976년 대선 과정에서 언급해 유명해진 말로 원래 실존 범죄자 린다 테일러를 겨냥한 말이지만 잘못 알려졌거나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뒤섞여서 실제 테일러와는 다른 가공의 인물(...)이 되어버렸다.[10] 사족으로, 한 유저가 이 컨서버피디아에 앤드류 슐래플리가 게이라고 조롱하는 반달을 벌인 바 있다(...).#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