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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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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수 이전2. 실업 농구 시절3. KBL 출범 후4. 은퇴5. 국가대표 경력6.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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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수 이전

파일:허재 백일사진.jpg
파일:허재 유치원 졸업 사진.jpg
강원도 춘천시에서 군인 출신의 아버지 허준(1929~2010)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1] 서울로 이사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허재는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 활동으로 농구를 시작해 악착같은 성격과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금세 재미를 붙이며 대회에서 결승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지만 우승하지 못한 농구부가 불과 1년만에 해체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회에서 기질을 발견한 이철호 선생과 그의 적성을 알아 본 아버지의 권유를 받고 상명초등학교로 전학 간 이후부터 매일 공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특히 반포초등학교와의 전국초등학교농구대회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생애 처음으로 결승 버저비터를 터뜨려 역전승을 거두는 활약을 보였다.

파일:용산고 농구부 선수단.jpg
이후 양문의 감독[2]이 이끈 농구 명문 용산중학교에서 주전으로 기용[3]되어 1학년 때에는 전승, 2학년 때에는 판정분규로 인한 몰수게임으로 2관왕, 3학년 때에는 전승을 거두었다. 용산고등학교에서는 3년 동안 차세대 특급 가드로 주목받으며 1학년 때 유재학이 버틴 경복고등학교와의 종별선수권에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는 제18회 쌍용기 대회 결승전에서 휘문고등학교를 상대로 뛰어난 득점력과 어시스트에 힘입어 예선 패배를 설욕한 끝에 3관왕을 달성함과 동시에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2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4]

용산고 시절부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 만큼 전국구 스타였다. 송도고에 다녔던 강동희가 회고하길 용산고가 경기를 할 때에는 허재의 소녀팬들이 아이돌 콘서트장 이상으로 운집했었다고 했다.

파일:중앙대 시절의 허재와 정봉섭 전 감독.jpg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각 대학에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으나, 정봉섭 감독[5]이 허재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고, 아버지의 의사로 1984년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6][7] 중앙대 농구부에서 허재 기수는 허재 하나였는데,[8] 그 이유가 허재가 워낙 특급 에이스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 동기들의 시기, 질투를 많이 받았었고 그래서 정봉섭 감독은 대학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일부러 허재 학년에는 허재 하나만 받았다고 했다.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팀 분위기 속에서 온갖 테크닉을 익히고 만들어냈고 이렇게 쌓아올린 것들은 농구대잔치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9] 당시 1984-85 농구대잔치에 처음 참가한 허재는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여러모로 놀라운 활약을 했고,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1985-86 농구대잔치에서는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결승전까지 이끌고 현대전자를 상대로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 선수 최초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10]했지만, 이충희의 고득점과 현대 선수들의 폭력 농구, 편파 판정이 더해지며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패배하였다.[11] 1986-87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신입생 강동희가 입학하면서 김유택과 함께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가 결성되었고, 슈팅가드 쪽으로 바꾸며 다시 한번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다시 현대에게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때에도 현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이 가해졌다. 이 당시엔 심판이 두 명이었는데 훗날 한기범이 말하길 현대는 심판 포함 7명이 뛰었기 때문에 중앙대가 절대 우승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김유택도 없고 한기범도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 포지션을 맡으며 자신이 참가한 대학농구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고,[12] 한 대회에서는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다.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의 정봉섭 감독이 이전 시즌에 있었던 심판들의 편파판정에 불만을 품어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었고 이로 인해 '허재가 없는 농구대잔치는 관중이 줄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다.

파일:88olympic hur jae.jpg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에서는 핸드볼의 손미나 선수와 함께 선수 대표로 선서를 하는 영예도 누렸다. 당시 훤칠한 외모에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선수였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원래는 허재 혼자 선정되었으나 성평등 차원에서 손미나 선수도 함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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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업 농구 시절

당시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씩을 불러대며 허재[13]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1988년 입단했다. 당시 기아는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정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도 우승을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14]

1988-89 시즌부터 1992-93시즌까지 농구대잔치 5회 연속 우승을 하는 등 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다.[15] 허재의 화려한 플레이에 매료되어 이충희, 김현준의 슈팅 위주 농구가 빠르게 저물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다. 유재학이 은퇴하고 강동희가 입단한 후에는 허재, 강동희, 김유택을 일컫는 허동택 트리오가 계속해서 기아 왕조를 구축해 나갔다.

1990년에는 태업과 항명 파동으로 당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이 당시 농구대잔치 때 허재는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김유택은 간통 사건으로 출전 정지 상태였고, 유재학은 무릎 부상으로 빠졌었고, 강동희는 입단 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재는 팀을 위해 병원에서 나와 몸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에서도 농구대잔치에 출전해 한기범, 정덕화 등과 함께 팀을 우승시켰다. 방열 감독은 그런 허재에게 감동을 받아 울먹이며 방송 인터뷰까지 했었다. 얘기가 나왔던 대회는 바로 뒤에 있었던 코리안리그인데 허재는 농구대잔치 후 다시 입원하였었고, 김유택은 여전히 출전정지 상태였고, 한기범은 경기 중 부상을 입었었다. 강정수, 강동희[16]가 분전하였지만 주축 멤버들이 없다 보니 우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선수들이 일부러 태업했다거나 허재가 태업을 주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허재가 선배들도 많은데 자신이 항명을 이끌 위치도 아니었다라고 말을 한 일도 있다. 방열이 기아 감독을 그만 둔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항명 파동과는 별개로 방열 前 감독도 허재가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유재학이 MVP를 받은 일[17]로 비롯된 기아자동차 내의 연세대와 중앙대 파벌 싸움의 결과물이라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때의 일은 그냥 잠시 분위기만 안 좋아졌을 뿐이었고 후에 방열 감독이 그만 둔것은 기아 구단과의 문제였다고 허재가 인터뷰를 통해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간 파벌싸움은 흔한 일이었다. 다른 팀이나 국가대표에서도 고려대와 연세대 출신끼리의 파벌싸움이 흔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약팀과 경기할 때는 새벽까지 술을 먹고 경기한 적도 많았는데 이 시절의 허재에 대해 변명하자면 그에겐 라이벌이 없었다. 대부분의 국내 선수보다 한두단계 위였고 우승도 밥먹듯이 하면서 목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놀아버렸다. 더구나 연고대 판인 농구계에서 연고대가 아닌 중앙대, 현대-삼성이 아닌 기아자동차 선수란 이유로 항상 협회와 언론은 허재 죽이기 기아 죽이기에 나섰었고 경기 때마다 상대팀에게 폭력성 파울을 당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었다.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 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94 농구대잔치 에 불거져 나왔고,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강정수가 감독을 맡은 모교 중앙대 농구부에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만다. 당시 대회 전 국제대회에서 기아 선수들이 혹사한 여파가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들이 처음 대중에게 노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낸게 이 대회였다.

파일:1994-1995 농구대잔치 MVP를 수상한 허재와 정은순.jpg
그러나 허재는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맹활약을 통해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과 결승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2승 1패의 상황에서 삼성에게 뒤지고 있던 4차전 후반 말미 허재는 5분간 홀로 17득점을 퍼부우며 삼성을 격파, 우승을 차지하였고 MVP를 수상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다. 허동택 트리오의 위용을 다시 회복한 대회였는데, NBA에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불스가 다시 우승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파일:농구대잔치에서 고대와 맞붙고 있는 허재.png
파일:attachment/500hdt_0.jpg
1995-96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다.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 이끄는 고려대가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상무는 이상민을 필두로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18] 상대적으로 적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기아에는 기존의 허동택 트리오 외에 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고, 멤버들의 부상과 체력저하에도 불구하고 리그 3위권을 유지하며 조용히 플레이오프를 기다리며 역시 강팀의 위용을 드러냈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 2차전에서 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했고,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격파,[19] 결승에선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까지 격파하며 다시 한번 우승을 거두었다.[20][21]

파일:attachment/jae.jpg
이런 상승세가 독이 되었을까, 1996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 뺑소니 후 운전자 바꿔치기를 저질러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다. 직전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음주 파동을 일으켜서 6개월 자격정지를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허재는 선수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1996-97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다.[22] 영구징계가 몇 년 후 풀리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선수자격 정지는 아마농구 선수로서의 자격 정지였기에 프로농구 선수로서는 그냥 뛸 수 있었다.

3. KBL 출범 후

파일:허재의 1억 2천만원 연봉 계약과 관련된 기사.png

프로 원년인 1997년, 허재는 연봉 1억 2천만원으로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계약을 맺고 포인트 가드부터 스몰 포워드 역할까지 해내며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최인선 감독은 팀에서 영향력이 큰 허재를 길들이고 싶어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게 된 나래의 경우 팀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제이슨 윌리포드가 부상을 입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는데, 이 챔피언 결정전 최종전에서 최인선 감독은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냈고, 관중들의 허재 연호속에도 불구하고 코트 위에 서지 못했다.[23] 하지만 플레이오프에 들어와서 기아가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것은 동양과의 4강전이었는데 허재를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던 5차전에서 동양과 접전이 이루어지자 결국 허재를 2쿼터에 기용해 점수차를 벌려 리드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감독은 허재를 3쿼터에선 다시 벤치에 앉혀두었는데(...) 동양이 턱밑까지 추격해오자 4쿼터에 다시 허재를 기용, 승리하게 만들었다. 허재는 두 쿼터만 뛰고도 35득점을 올려 수훈갑이 되었고 기아는 결승 진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즌에 허재는 스포츠서울이 주관하는 프로농구 대상에서 Best5 스몰 포워드 상을 수상하였다.

파일:허재 떠나나 못떠나나.png

파일:허재 기아 조건 복귀.png

97-98 시즌을 앞두고 5월 23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FA로 풀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하겠다고 요청[24]했지만 구단의 승인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입장이었고 최악의 경우 임의 탈퇴나 은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기아의 경우 팀의 간판 선수인 허재를 추호도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를 겪으며 농구단을 1순위로 매각하려고 했었는데 허재가 없으면 비싼 값에 매각할 수 없단 이유에서였다. 허재는 이후에도 개인 훈련과 해외 경기 불참 등으로 여러가지 일이 겹쳐졌지만 모기업인 기아그룹이 7월 15일에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엄청 괴로워했고 농구단이 매각될 위기에 처해지자 어려운 상황에 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팀 복귀를 결정하면서 트레이드 사건은 64일만에 종결되었다.[25]

파일:허재 부산 기아시절.png

파일:허재기아시절.jpg

그렇게 작년 시즌보다 좋은 성적으로 팀을 우승시키려고 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챔피언결정전 상대인 --트리오와 조니 맥도웰이 버틴 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허재는 LG와의 4강 경기 중 오른손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26] 다리와 허리에 부상이 있던 상태에서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27]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고, 기아의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28][29] 결국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이 챔프전의 경우 협회가 기아의 연승을 막기 위해 현대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파 판정을 하도록 만들었었다. 1, 2차전에서 기아가 승리를 거두자 똥줄이 탄 협회가 3차전부터 심판들에게 편파 판정을 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대해 당시 뉴스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기아의 최인선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이것에 대해 확인 사살시켜주었다. 만약 편파 판정이 없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파일:허재 KBL 최초로 준우승팀에서 MVP로 뽑혔다.jpg

하지만 챔피언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허재였는데, KBL에서 챔피언 결정전 MVP가 준우승팀 선수 중 나온 일은 이 때가 유일하다.[30][31]

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허재가 올린 스탯은 다음과 같다.
경기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1차전 29 5 6 5
2차전 30 2 11 5
3차전 21 3 5 0
4차전 27 3 1 5
5차전 17 8 3 2
6차전 22 3 6 4
7차전 15 6 13 4

허재는 한국 나이 34살, 전성기가 지나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던 나이에 이런 기록을 올렸다.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이런 허재의 모습을 보고선 '마치 상처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라고 썼을 정도.

파일:정인교와 트레이드 공동기자회견 후 악수하고 있는 허재.jpg

파일:원주 삼보 시절의 허재.jpg

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나래 블루버드로 이적했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 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자신의 힘으로 이룬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다.[32]

파일:external/www.kbl.or.kr/150617_001k.jpg

파일:허재_우승컵을 들다.jpg

파일:2002-03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뒤 그물을 자르는 허재.jpg

2002-03 시즌에는 김주성의 입단과 데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탁월한 게임 리딩과 더불어 공격 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 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전 시즌 우승팀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상대로 5차전[33]에서 마르커스 힉스와 루즈볼을 다투다가 갈비뼈 부상[34]으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에 붕대를 감고 벤치로 돌아간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되자 그 충격으로 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지만, 마지막 6차전에서 갈비뼈 부상때문에 벤치에만 있었다가 경기종료 1.3초를 남기고 팬들의 "허재" 연호 속에 코트에 서며 마침내 우승을 맞이했다.[35] 그 덕분에 시상식에서 트로피, 상금 2백만원, 백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았고, 대상을 수상하였다.

우승 직후 구단에서 허재에게 1년 더 선수 생활을 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고, 1년 계약을 연장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4. 은퇴

파일:2003-2004 시즌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허재의 기자회견.jpg
2004년 3월 8일, 하루 전에 진행되었던 인천 전자랜드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휴가로 골프를 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중이었다.[36] 그런데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구단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골프 예약을 취소하고 KBL 회관을 찾아 기자회견장에서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으러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37][38]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지은 허재는 갑작스런 은퇴 발표에 아쉬우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평소에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쳤던 모습은 없어 지켜본 농구팬들은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39]
파일:허재와 김기열 전 원주시장.jpg
등번호 9번, TG삼보에서 영구결번되었다.[40][41]
트리오가 있던 전주 KCC 이지스와 챔피언 결정전에서 6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4월 10일에 있었던 운명의 7차전을 앞둔 가운데 은퇴 소식에 눈물을 흘린 팬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고, 프로에선 세번째로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주었다. 주전[42]으로 뛰면서 마지막까지 힘을 다 쏟아 부었지만 경기 막판에 점수차가 전주 KCC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끝내 통합우승을 하지 못했다.[43][44][45]
파일:허재의 은퇴식에 참석한 영화배우 박중훈.jpg
하프타임 때 허재의 은퇴식에 참석한 영화배우 박중훈.
파일:은퇴 경기가 끝나고 행가래를 치는 허재.jpg
“굿바이, 허재”
2004년 5월 2일, 한국 농구역사상 처음으로 허재의 은퇴경기가 치악체육관에서 열렸다.[46] 체육관 주변은 마지막 무대를 보려는 기다림에 은퇴를 아쉬워하거나 축하 글귀들이 담긴 팬들의 플래카드가 분위기를 더욱 더 한껏 고조시켰고, 체육관 스탠드에는 3천여석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꽉 찬 가운데 한국 농구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웅의 아름다운 퇴장을 지켜보기 위한 열기도 엄청 뜨거웠다. 장윤창, 여홍철, 이진택 등 각계 각종 스포츠인들과 용산고-중앙대 동기인 영화배우 박중훈[47], 감독이었던 최명룡, 신선우 등도 관전한 이날 경기에서 화이트팀은 중앙대 정봉섭 전 감독이, 블루팀은 용산중고 양문의 전 코치가 감독을 맡았다. 전반에 화이트팀, 후반에 블루팀 유니폼을 입고 풀타임을 소화한 허재는 땀이 맺히고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며 52득점(3점슛 10개 포함), 4어시스트, 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경기 종료 버저가 울리기 전 후배인 서장훈, 김주성, 김영만의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덩크슛을 꽂아 넣었으며 끝난 뒤에는 관중석에서 종이비행기가 축포처럼 날아들어왔고, 후배들의 헹가래를 받은 뒤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가운데 허재를 오랫동안 보고 싶어했던 수많은 팬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행복하면서도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며 30년간의 농구생활을 끝으로 코트와 이별을 고했지만 허재라는 이름은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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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지 하루 뒤, 팬클럽 차원이 아닌 개인 팬들이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은퇴 축하보다 선수 생활을 마친 허재를 위해 일간스포츠에 전면광고를 게재하기로 했다. 신문에는 농구 골대 그물 커팅 사진[48]이 실렸고 광고비 모금에 참여한 회원들의 이름이 실린 "안녕, 나의 영웅""고맙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농구를 사랑한 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에게서 들어야 할 신화(神話)는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려함이 아닌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팬들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위해 광고를 게재한 최초의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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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는 팬들의 광고에 감동을 받아 점프볼 잡지에 "30년 농구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선물은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준 팬 여러분이었습니다." 라는 글로 시작되는 감사의 답 광고를 게재했다. 한국 농구사에 선수와 팬의 아름다운 스토리로 남아 있고, 다른 운동과는 사뭇 다른 농구팬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정글의 법칙에서 밝힌 후일담으로는 은퇴식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울지도 않았다고 했다. 팬들이 펑펑 우는 모습에 자기라도 울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5. 국가대표 경력

1984년에 열린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에서 허재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결승전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대회 MVP로도 뽑혔다.[49]

대학생 때부터 성인 국가대표로 발탁[50], 강동희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인트 가드를 맡았다. 포인트 가드를 맡는 한편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까지 맡기도 했으며, 장신인 팀을 상대로도 위력적인 돌파를 잘 선보였다. 88 올림픽 당시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활약한 건 당시 활약이 동영상으로 돌면서 나름 농구팬들 사이에 알려진 편.

강동희가 국가대표가 된 이후로는 슈팅 가드 자리에서 뛰었으나 포인트 가드와 스몰 포워드도 겸하였었다.

허재는 아시아 대회에서 맹활약한 선수지만, 성인 대회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전적이 좋지 않다. 85 ABC 대회와 88 올림픽 대회를 제외하고는 중국과 맞붙는 족족 모조리 패배를 거듭했다. 그렇다고 허재의 실력을 폄하하면 안 되는 것이 아시아 최강인 중국을 상대로 한국의 승률 자체가 원래 높지 못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들은 허재, 강동희의 가드진은 최강이지만 센터진이 문제라고 했었다. 즉, 센터 싸움에서 밀려 진다는 것.[51] 중국에서는 항상 허재에게만 더블팀을 붙였을 정도로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다. 더불어 국가대표로서 중국과의 경기에서 2승 이상 거둔 선수는 근 30년 동안 통틀어봐도 많지 않고, 허재가 뛰었던 85 ABC 및 88 올림픽에서는 중국에게 2승을 거뒀는데, 특히 85 ABC 준결승전은 역대 중국전 승리 중 전후반 개별 스코어 모두 앞선 완벽한 승리로 평가받으며 중국을 꺾고 올라간 85 ABC 결승전의 경우 당시 상대였던 필리핀은 미국 흑인 용병 둘을 포함시킨 변칙적인 팀이었다. 그런 미국 흑인 용병 둘이 모두 뛰던 필리핀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분패했던 것. 그리고 94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는 중국에게 앞서고 있었는데 허재에게 털리던 후웨이동이 허재를 가격하였다. 허재가 실려나가자 리더를 잃은 한국 선수들은 우왕좌왕하다 결국 중국에게 역전패를 당했다.[52] 또 95 ABC 결승전에서는 중국에 87:78로 패배하여 준우승을 기록했음에도 MVP를 수상한 점을 보았을 때 허재가 아시아권에서 톱 클래스의 선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1999년에는 35살의 나이에도 중국에서 선정한 아시아 올스타에 선발되었었다.

아시아 대회에서의 활약상에는 못 미치지만 세계 대회에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인 편인데 일부 대회를 제외하곤 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을 남겼고 9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미국 NBA 오퍼를 받기도 했다. 해당 기사 물론 NBA 오퍼를 받은 것과 NBA에서 적응을 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만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

그리고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 순위 결정전에서 이집트를 상대로 54점을 올린 기록은 FIBA 농구 월드컵 역사상 개인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로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자료 1 자료 2 자료 3

하지만 부진했던 경기도 많다. 이는 비단 허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이 그러하다.

다만 허재의 54점 기록 덕분에 그나마도 1990년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를 117-115로 이기며 겨우 1승이라도 거두고 이집트를 제치며 15위를 기록하면서 꼴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세계 대회에서는 한국 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도 늘 패배를 거듭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심지어 중국도 90년 월드컵 조별 예선 및 순위 결정전에서 호주와 유럽, 베네수엘라에게 두들겨 맞고 겨우 이집트와 한국을 이기며 한국 다음인 14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허재 이후 국제 대회에서 정영삼의 반짝 활약 외엔 허재만큼 위력적인 돌파로 팀의 숨통을 열어준 선수가 없었다. 1994년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와 앙골라를 이겨본 뒤로 1998년, 2014년 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하면서 1승을 거두고 있지 못하다가 2019년에야 1승을 거뒀다. 만만해보이던 앙골라에게도 2014년 참패를 당했을 정도이니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 농구의 수준이 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후에는 김선형이 국제 무대에서 특유의 스텝과 속도를 이용한 돌파로 톡톡한 역할을 해줬고, 연차가 쌓인 후에는 주전 가드로 경기 조율을 하면서도 슬래셔 역할을 해냈다.

6.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아무도 없다. 그나마 기술적으로는 허재뿐이다.
- 제럴드 워커[53]

그는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54]였다. 이미 중앙대 시절부터 농구계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신동파-이충희, 김현준의 뒤를 이은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중앙대의 농구대잔치 준우승, 기아 왕조를 이끌며 80년대와 90년대를 지배한 최고의 선수였으며 사실상 한국 농구 대표팀 최후의 에이스 스코어러이다.[55] 미국인 선교사 길레트에 의해 1907년 한국에 농구가 들어온 이래로 100년이 넘는 한국농구 역사에서 허재와 같은 플레이를 한 한국 사람은 거의 없다싶이 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허재는 전성기 시절 기준으로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유로스텝이라고도 하는 지그재그 드리블에 순간적인 스핀 무브에 크로스오버까지 온갖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썼다. 80년대 후반에 이미 스텝백을 구사하였다.[56]

또한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른손을 잘 썼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좌우 어디로도 돌파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돌파한 후 양손을 사용해 어느 방향으로든 레이업을 올려 넣었으며, 높은 점프 후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그만의 특기.

그러다보니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잡자마자 순간 단독 속공으로 치고나가면 두세명의 수비수가 있어도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패스의 경우 돌파 능력과 연계해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빼주는 패스부터 해서, 인사이드로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패스, 속공 상황에서 빠르게 앞으로 찔러주는 패스까지 각종 패스도 훌륭했다. 특히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가 좋은 동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딱 맞춰서 빈 공간에 빠르게 넣어주는 패스가 일품. 이러다보니 패스와 드리블 능력 때문에 슈팅 가드로서가 아니라 포인트 가드로서의 허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은퇴 직전까지도 팀 내에서 가장 패스 잘하는 선수는 허재였다.

한편 운동 능력을 살려 위로 확 솟구치는 듯이 쏘는 점프슛부터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풀업 점퍼 등 각종 슛에서도 출중했다. 게다가 역대 가드 포지션의 선수들 중 최고의 포스트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업 기술이 웬만한 센터보다도 좋았을 정도. 은퇴 직전에 이르러서도 포스트업으로 손쉽게 득점을 해내기도 했다. 은퇴 직전 즈음 되면 계속 포스트업을 할 체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엄청난 능력이라고 봐야한다.

거기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움직임도 탁월했고, 항상 호흡을 맞춰 온 강동희김유택이 찔러 준 패스를 받아 백도어 플레이를 해내거나 같은 팀의 스크린을 이용해 빠져나온 후 슛을 넣는 전형적인 슈터 플레이에도 능했다.

특히 스틸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일대일 수비와 상대 패스의 맥을 읽고 중간에 끊어내기를 잘했으며, 상대팀에서 모처럼 리드를 잡았나 하는 시점에서 공격 성공에 이은 스틸로 단번에 네다섯 점을 득점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순식간에 뒤집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기술들을 떠받친 게 허재의 신체 조건이었다. 188이란 키는 2000년대 기준으로도 슈팅가드로서 작다 할 수가 없었는데 허재가 대학 다녔을 무렵만 해도 180대 후반의 인사이더가 흔했다. 즉 허재의 대학 시절로 치면 센터를 봐도 되는 키였던 셈.

물론 허재 이전에도 신동찬이란 190대 포인트가드가 한국에 있었고 허재 이후에도 일단 은희석이나 기타 몇몇 선수 등 포인트가드에서 슈팅가드에 걸쳐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없었던 건 아니나, 허재는 비슷한 덩치의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점프력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57] 거기다 원래 탄탄했던 몸에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더 붙여서 힘까지 좋았다. 그런데도 유연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지나친 술, 담배로 인하여 30대 중반부터는 운동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는 했었다.

운동 능력만 치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치면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여럿 있는데, 키와 운동 능력과 힘의 조화로는 허재가 성인 농구계에 등장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이후 허재급이라 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다. 그런 하드웨어에 최고의 기술이 겸비되었으니 저런 활약을 했던 것.[58]

거기다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이 몸과 기술을 이끌었다. 권투선수 생활을 한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식 단련을 받은 탓에 마치 헝그리 복서같은 정신력과 독기가 길러졌고,[59] 패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독기는 허재가 선수 생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90년대 초의 나태함 이전에는 연습 벌레로도 유명했다. 양손 드리블을 제대로 하겠다고 한쪽 손을 묶어놓고 연습을 하는 기행에 가까운 연습도 했고,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연습만 하기도 했다. 술먹고 들어오든 놀다 들어오든 그날 분 연습은 꼭 해야 잠이 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각종 기술들도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NBA 비디오 등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갔고, 그외 여러 기술들도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 익혀나간 게 많았다. 그야말로 노력하는 천재란 말에 걸맞은 모습.

이러다보니 한국 농구에서 서장훈과 함께 농구를 모르는 사람도도 알만한 인물로 유명하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야구와 축구가 강세이며, 농구의 관심도는 슬램덩크나 NBA가 보급된 이후에 위의 두 스포츠보다 낮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도 알 정도로 유명인사다. 특히 은퇴 후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가 올라간 서장훈과는 달리 허재는 현역 시절 오로지 농구만으로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떨칠 정도로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다. 서장훈은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경기 방식을 비난하는 안티 팬들이 있었으나, 허재는 경기 내용으로 비판할 건수가 아예 없는 완전체라 안티 팬들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수준이었다.

물론 90년대 본인의 행실 문제로 비판을 받았었고, 그 시절을 미화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연세대의 돌풍과 용병의 등장이 연거푸 이어진 선수 말년에 다시금 기아를 우승으로 이끌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보여준 투혼과 TG시절에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는 말년의 노장이라기에는 의심이 갈만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본인의 평가를 다시금 뒤집어 내었다. 스포츠서울, 중앙일보 기자를 지낸 허진석은 허재를 가리켜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이자 악동'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허재의 농구 인생에 이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1] 2021년 9월 22일 방송된 호적메이트에서 형과 9살 차이 난다고 밝혔다.[2] 허재가 용산중고 재학 당시 지도했던 은사였다. 이후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중앙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지냈다. 2021년 TV는 사랑을 싣고의 허재 편에서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내비쳤는데, 여전히 엄격하고 호통이 크셔서 허재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2022년 11월 12일 별세했다.[3]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으며 1학년 때는 유재학전창진이 주전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교체선수로 출전했다.[4] 당시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는 한기범, 김성욱, 김유택 등이었다.[5] 중앙대학교 농구부의 대부이자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1980년대 초중반 중앙대가 전성기를 달린 데에는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자주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추계연맹전을 마친 뒤 강정수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중앙대 운동부를 총괄하는 체육부장을 맡으면서 다소 이른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났다.[6] 당시 중앙대학교에는 연습장이 없어 용산고등학교 체육관을 사용했었다.[7] 아는 형님에서 밝힌 바로는 대학 입학할 당시 어디 학과를 선택할지 고민했다가.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려 했으나 연극영화과에 문전박대를 당하고 체육교육과로 진학했다.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안성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8] 여담으로 허재와 동기인 사람은 축구 황보관, 배구 최천식이고 유도 김재엽과는 절친이다.[9] 중앙대 농구부는 허재를 위해, 그가 입학할 무렵 저학년은 팀 연습 끝난 후 개인연습을 하고 고학년이 뒷정리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는 계속해서 중앙대 농구부의 전통이 되었다.즉, 허재의 2년 선배들은 4년 내내 뒷정리를 했다[10] 이 허재의 트리플더블 기록은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2012년 들어 대한농구협회가 지난 시절의 기록들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11] 한편 이 결승은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 막판에 우두커니 서서 경기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니.[12] 허재가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빠졌던 대회에서 중앙대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었다.[13] 1983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까지 받아 군 문제도 깔끔했던 탓에 인기가 더 좋았다.[14] 밴드 백두산 항목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하희라와 함께 국어책 읽기로 MC를 보는 모습이 나오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선수 대표로서 선수 선서를 하는 등의 것들이 그런 인기를 보여주는 예.[15] 유재학이 부상으로, 김유택이 간통 사건으로 빠졌던 1989-90 시즌에도 우승했다. 강동희는 입단 전이었다.[16] 기아에 입단 후 처음 출전했던 대회였다.[17] 이때 MVP는 허재가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허재는 가장 큰 형인 한기범이 받길 바랐었다. 그럼에도 방열 감독은 자신의 학교 후배인 유재학을 MVP로 추천하였고, 이 때문에 당시 협회로 왜 허재가 MVP를 받지 못했느냐며 농구팬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었다.[18] 당시 고려대와 상무의 기세가 워낙 강하다 보니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19] 오히려 전 시즌인 94-95 4강전에서 고려대는 기아와 매경기 일보일퇴의 접전을 벌였으나, 이 해에는 3차전은 너무 일방적으로 기아에 참교육을 당하며 무너져 정규시즌 1위의 실적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20] 1차전은 그야말로 참교육의 끝판이었는데, 전반 초반 30점차까지 벌어지기도 했다.[21] 이 대회는 유독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자 허동택 트리오 모두 체력 문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펄펄 날아다녔다. 허재는 4차전에서 우승 축포로 하프라인에서 버저비터까지 넣었다.[22] 여기에다 김영만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기아는 0승 7패로 창단 후, 처음으로 꼴찌를 기록했다.[23] 훗날 밝혀지길 허재를 기용하지 않았단 이유로 최인선 감독은 기아 단장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한다. 최인선 감독은 2022년 한 인터뷰에서 이때 당시 자신이 '감독'이 아닌 '선생' 노릇을 했다며 허재를 기용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24] 교체멤버로 뛴 것에 대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고 무엇보다 이런 모습으로 선수 생활을 끝낼 수가 없어 명예회복을 하고 싶어했다.[25] 참고로 정상화 노력에 합류해 주고 싶다는 뜻에서 기아그룹에 2천만원을 내기도 했다.[26] 물론 허재가 독보적이었다뿐이지 다른 선수들도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다. 예를 들어 김영만은 꾸준히 20점 넘게 득점하여 허재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골밑도 클리프 리드와 김유택이 분전하여 열세이긴 해도 완전히 밀리지는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27] 맥도웰의 팔에 부딪혀 부상당했다.[28] 이 당시 기아는 현재의 현기차와 다르게 국민기업, 국민차란 이미지가 강했고(실제로 주주 대부분이 근속한 자사 직원들이었고 임원진들 파워가 약하고 실무진들의 힘이 강했던 기업이다.)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많은 사랑을 받던 기업이었다. 그랬던 구단이 IMF사태가 터져 기업 자체가 오늘내일 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농구단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려줘서 기아자동차 임직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경기장은 연속 매진. 언론 보도의 비중도 농구가 야구보다 많았던 몇 안되는 사례다.[29] 이러다보니 허재가 오른손에 한 깁스가 정말 부상당한 게 아니라 페이크로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허재는 당시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장기간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거기다 페이크고 아니고를 떠나서 깁스를 하면 당연히 맨손보다 공 다루기가 크게 불편해진다. 실제로 뼈가 골절되었고, 당시 방송에서도 엑스레이 사진을 내보냈었다.[30] 여담으로 NBA에서도 파이널 MVP가 준우승 팀에 나온 경우는 1969년 제리 웨스트 이외에는 단 한명도 없다. 더욱이 NBA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KBL보다 훨씬 더 길다. 2014-15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거론되기는 했었으나 역시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준우승팀에서 결승전 MVP가 나오는건 드문 경우다. 여자농구에서는 WKBL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 정은순이 결승전 팀 패배에도 불구하고 MVP를 받은 적이 있다. 종목은 다르지만 K리그에서 준우승팀 출신의 MVP는 안정환이 있긴한데 이 경우는 우승팀 수원의 핵심 공격수인 샤샤가 결승전에서 핸드볼로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31] 2021년 1월 5일에 방송된 MBC 에브리원 비디오 스타에서 KBL 최초로 준우승한 팀에서 MVP를 받았음에도 기쁘지 않은 나머지 MVP 트로피와 꽃다발을 경기장에 둔 채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이 돼서야 트로피를 간신히 찾았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32] 프로 출범 전에는 선수들 몸 관리가 되지 않아 30살이면 노장 소리를 듣고 30대 초반이면 은퇴를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허재는 그 은퇴했어야 할 33살의 나이에 프로 출범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33] 당시 오리온스 입장에선 계시기 작동 오류로(일명 잃어버린 15초) 승리를 도둑맞고 천추의 한이 남은 경기였다.[34] 갈비뼈를 지탱하는 연골이 부러졌다.[35] 당시 6차전 경기에서 1쿼터를 24:3으로 뒤지며 말도 안 되게 몰리자 갈비뼈 골절에 등에 구멍을 뚫고 진통제를 맞은 상태로 벤치에 있던 허재가 나가겠다며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자 전창진 감독이 조금만 참으라고 말렸다고 했다.[36] 원래 정규리그가 끝나면 모든 팀이 3~4일에서 길어도 1주일 정도 휴식기에 들어가 모든 선수들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팀에 합류해 시즌 마무리 훈련이나 플레이오프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을 한다.[37] 농구코트에 서거나 턴오버를 해도 기록이니 은퇴하지 말고 계속 선수로 뛰어 달라는 팬의 만류도 있었지만 이르지는 못했다.[38] 하지만 이를 두고 은퇴를 기획했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인 전자랜드전에서 문경은의 3점슛 밀어주기에 일조했다는 비판여론이 나오면서 이를 모면하기 위해 허재의 은퇴를 기획했다고 주장했으나, 일부 언론은 은퇴 제기에 그렇지 않다고 했다.[39] 하지만 스포츠 스타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국내 프로 스포츠계가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면서 마지막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 것도 문제였다. 은퇴 기자 회견이 끝난지 하루 뒤에 나온 신문 기사에서 허재가 이번 시즌 끝으로 은퇴한다는 것이 농구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허재가 언제 은퇴를 하고 나서 향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도 자세하게 알려지지도 않았다.[40] 허재를 프로농구 현역 선수 중 첫 영구 결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프로농구에서 현역 생활을 하고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된 선수는 김유택이고, 두번째는 김현준이다.[41] 전주 KCC의 이상민은 경기 전 영구결번이 되는 걸 보고 마음이 착잡한 선배 허재에게 우승을 줘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42] 원래는 앤트완 홀이었으나, 전창진 감독의 배려로 출전했다.[43] KCC 신선우 감독의 바셋 편법 임대는 KBL 역사상 최악의 꼼수 트레이드로 비난 받았고, 이때 바셋을 데려오면서 모비스로 보냈던 선수가 양동근이다.[44] 이미 승부가 결정났는데도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리기도 전에 벤치를 떠나 라커룸에서 담배를 피웠고, 회식이 끝난 뒤에는 우승을 챙기지 못한 채 서운해 하는 후배들로부터 작별의 헹가래를 받고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45] TG삼보 후배들은 허재에게 우승을 선물하지 못했다는 슬픔에 라커룸에서 울었다고 한다.[46] 당시 처음에는 허재의 지명도를 감안하기 위해 잠실실내체육관을 고려했다. #[47] 항상 단축수업을 하다 장충체육관에 가서 응원할 수 있었다는 폭소를 자아냈고, 자신의 모교가 항상 우승만 하는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또 자유투는 어색한 폼으로 시도했지만 2차 시도는 성공하면서 오랜 친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48] 제작 당시 허재의 사진 선정을 놓고 상당히 고민을 했는데, 팬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허재가 코트에서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진이나 2002~2003 시즌 챔피언 결정 최종 6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 코트에 들어온 허재가 갈비뼈 통증을 참으며 미소를 띠는 모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은퇴하기 전 우승한 뒤에 미소를 지으며 그물을 자르는 게 화려하고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이유로 그물 커팅으로 결정되었다.[49] 이때의 금메달로 병역 면제를 받게 되었다.[50] 1987년도에는 국가대표 중 유일한 대학생이었다.[51] 한국이 아시아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에는 홈콜 이점을 누리거나, 중국의 에이스 선수들이 불참하거나 컨디션이 극악이었을 때 뿐이다.[52] 후에 문경은이 말하길 허재가 빠져 한국이 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병역 혜택을 못 받아서 아쉬웠다고 했다.[53] 당시 KBL에서 활동하던 중 NBA 재진출을 선언하자 기자들이 "NBA에 통할만한 한국선수가 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참고로 당시 허제나이가 33살, 다른 선수들이라면 이미 은퇴할 나이였고 운동선수로써도 황혼기에 접어들 나이였다.[54] 물론 중 하나라는 주석을 달았지만 허재의 선수시절을 견줄 한국 선수는 다른 포지션의 서장훈 정도뿐이다.[55] 허재를 끝으로 용병들이 등장하는 KBL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은 국제무대에 내세울만한 국내 선수가 사라졌다. 물론 잠깐 정영삼, 김민구, 방성윤과 같은 선수들이 등장하며 이목을 끌었지만 말그대로 잠깐이었다. 허재와 같이 십여년 동안 중국과 같은 아시아 강팀들의 집중견제를 받는 에이스는 허재 이후에 사실상 없다.[56] 현재에도 고급 기술로 통하는 것들을 기술의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았던 시대에 자유롭게 썼었고 이 때문에 중계진들은 '묘기'라고 표현했었다.[57] 농덕 사이에서는 허재가 덩크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로 말이 많은데, 대학 시절에는 분명히 가능했고 연습 때 직접 본 사람들도 많다. 또한 사진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농구 대통령 소리 듣는 사람이 젊었을 때 덩크가 안 될 정도의 피지컬이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58] 비슷한 유형의 선수로 국내 농구는 아니지만 슬로베니아의 에이스이자 NBA 마이애미 히트의 주전 포인트 가드 고란 드라기치가 허재의 플레이스타일, 신장, 몸무게 그리고 왼손잡이인 것까지 나름 유사했다.[59] 이후에도 중앙대 시절 때 경기에서 질 때마다 의기소침해 있던 허재를 중앙대 선배들은 물론 예전에 졸업한 중앙대 출신 OB들에 심지어 연, 고대를 제외한 타 대학 선배들까지 몰려와서(...) "시합에 진 것도 그렇지만 졌다고 기 죽어있는 건 더 꼴보기 싫다"라며 마구 갈궈댄 게 독기를 제대로 길러냈다. 중앙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대학 선배들까지 굳이 찾아와서 허재를 갈군 이유는 당시 반 연, 고대정서가 팽배했던 농구판에 허재는 그 연, 고대 구도를 박살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만들 급의 유망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재가 활약해서 중대가 연대나 고대를 이기면 타 대학선수들이나 그 출신 농구인들이 굉장히 기뻐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