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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45:20

황보관

황보관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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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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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7)
감독 대행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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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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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3)
조영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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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6)
박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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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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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황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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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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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3)
감독 대행
김진규
(안익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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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기동
(김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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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K리그1 우승 / : 코리아컵 우승 / : AFC 챔피언스 리그 엘리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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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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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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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Korea Football Association
파일:황보관.jpg
<colbgcolor=#00145a><colcolor=white> 이름 황보관
皇甫官 | Hwangbo Kwan
[1]
출생 1965년 3월 1일 ([age(1965-03-01)]세)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신장 178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학력 대구침산초등학교 (졸업)
계성중학교 (졸업)
계성고등학교 (전학)
서울체육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84 / 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2])
세종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3])
소속 <colbgcolor=#00145a><colcolor=#ffffff> 선수 유공 코끼리 (1988~1995)[4]
오이타 트리니타 (1995~1997)[5]
감독 오이타 트리니타 (1999 / 코치)
오이타 트리니타 U-18 (2000~2003)
오이타 트리니타 (2004 / 코치)
오이타 트리니타 (2005)
오이타 트리니타 (2010)
FC 서울 (2011)
행정 대한축구협회 (2011 / 기술교육국장)
대한축구협회 (2011~2014 / 기술위원장)
대한축구협회 (2014~2021 / 기술교육실장)
대한축구협회 (2021~2024 / 대회기술본부장)
국가대표 37경기 10골 (대한민국 / 1988~1993)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 감독3.2. FC 서울 감독
4. 행정가 경력5. 비판 및 논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現 대한축구협회 대회기술본부장.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고 선수 시절에는 꽤 성공적이어서 오이타 트리니타에서는 J리그 발족 후 실업 리그에 있던 구단을 J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공헌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도 활동했지만 FC 서울 감독으로써 매우 실패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구단의 사무국 직원 및 행정가로 활동했다. 일본에서 프런트로 활동했을 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대한축구협회 행정가로 나서기 시작했다.

2. 선수 경력

1965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대구침산초등학교,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축구부가 해체되자 서울체육고등학교로 전학해 1984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84학번)[6][7]를 졸업한 뒤 1988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고 같은 해 K리그 신인상을 수상해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도 뽑힌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당시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90년 6월 17일 우디네[8]에서 열렸던 24강 본선 조별 리그 2차전 스페인전 전반 43분에 프리킥 기회를 얻어 최순호의 볼을 받아찼는데, 무려 114km/h의 캐넌 슛을 넣었다. 이후로 황보관 하면 캐논 슛, 캐논 슈터 하면 황보관일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이 때 상대 골키퍼가 바로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안도니 수비사레타였다. 이 골은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골이자, 이탈리아 월드컵 베스트 골 5에 선정됐으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나이지리아의 선데이 올리세가 시속 120km/h의 중거리 슛으로 스페인을 격침시킬 때까지 역대 월드컵 최고 시속 골 기록을 유지했다.

1994년 유공 시절 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K리그 통산 7번째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1995년 일본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에 이적하여 활약하고 1998년에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 감독

은퇴 후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유소년 구단 코치, 수석 코치의 커리어를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전임 감독이 지휘봉을 놓자 2005년에 감독으로 승진했다.

시즌을 1/3 가량 치른 시점까지는 중위권으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이후 팀이 12경기 연속 무승이란 극심한 부진에 빠지자 시즌 중 사임했다.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의 유소년 육성부장, 부사장, 이사 등 구단의 프런트로 일하면서 커리어를 좀 더 쌓은 후 2010년에 재차 감독을 맡았으나 이때는 오이타가 J2리그로 강등된 후라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고 시즌 후 다시 물러났다.[9]

오이타 구단의 부사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는 K리그와 J리그를 통합해야 양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10]

일본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1군 감독으로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유소년 육성에는 좋은 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거만 보아도 그가 상대적으로 지도자보다 프런트 쪽에 잘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FC 서울 감독

2010년 12월 28일, 재계약에 실패한 넬루 빙가다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K리그 우승으로 한껏 기대치가 높아진 FC 서울 팬들에게는 아무리 J리그에서 유소년 육성으로 나름대로 검증을 받은 인물이라고 해도, 사실상 쌩신인 감독 수준 취급이었고 게다가 그 전에 언급된 K리그와 J리그 통합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도 있어서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반면 정조국, 김진규 등 고참들의 이적으로 팀 전력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할 시점이 닥치긴 했지만 몰리나, 김동진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하고, FC 서울 정도 되면 팀 리빌딩 중이라도 하위권으로 밀려날 일은 없으리라고 믿으면서 기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처럼 신임 감독을 바라보는 구단과 팬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달랐고, 황보관 체제는 시작부터 온갖 잡음에 시달렸다.

아래는 황보관이 취임한 후 사임하기 전까지 FC 서울이 치른 경기와 결과다.

아챔에서 3라운드까지는 선방했으나, 4라운드 홈 경기에서 나고야에 맹공을 퍼붓고도 0:2로 완패를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사실 21세기 들어 K리그 판도 자체가 디펜딩 챔피언 자체를 쌈싸먹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남 일화가 몰락한 이후 K리그는 3연패는커녕 감히 어느 팀도 2년 연속 우승을 장담하지 못할 만큼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리그가 되어 버렸다. 2011년 7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FC 서울은 물론이고 과거 '아시아의 깡패'로 명성을 날리던 울산 현대도 중하위로 쳐졌다. 우승 경쟁자로 예상되던 수원은 4위이고 2010년 준우승 팀 제주는 6위. 반면 리그 선두는 작년 9위였던 포항.

하지만 2010 시즌 우승 팀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FC 서울 팬들에게는 7경기 동안 딱 한 번 이기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임은 자명하다. 그 당시 차두리우루사 CF BGM으로 쓰이던 간 때문이야를 개사한 "관 때문이야" 노래를 부르거나(마침 이름이 관 1글자라서 더욱), 초호화 외국인 선수단 F4에 황보관 감독이 Alt 라는 드립을 쳐댔다.

일견하기엔 감독 하나 바뀌면서 팀을 거하게 말아먹은 듯 하지만, 사실 바뀐 것은 감독 뿐만 아니라 스쿼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 시즌 우승의 주역이었던 정조국, 김진규, 김한윤팀의 구심점이 되어 줄 고참이 대거 이탈했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12]

7라운드 광주 원정 경기에서 총력전을 폈으나, 최약체로 평가받던 신생 팀 광주의 카운터 한 방에 무릎을 꿇었다.[13] 결국 다음 날인 4월 26일 최용수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이로써 FC 서울 구단 사상 최초로 시즌 도중 사임한 감독이 되었으며, K리그 최단 기간 재임 감독[14]이라는 불명예도 함께 안게 되었다.[15]

그 때문에 감독 시절 별명은 맨날 진다고 해서 항복왕이었다[16]. 그래도 그나마 업적이라고 부를 부분이 있다면, 훗날 K리그 챌린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전으로 거듭난 문기한의 능력을 미리 알아보고 1군에 데뷔시켜서 경험치를 쌓아줬다는 것 정도. 다만 문기한이 주전으로 자리 잡고 포텐을 터뜨린 것은 서울을 떠난 뒤의 일이었음으로 사실상 이룬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4. 행정가 경력

4.1. 대한축구협회

FC 서울 감독직을 사임하고 한 달이 지난 2011년 5월 25일, 대한축구협회의 기술교육국장으로 선임되어 행정가 경력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은퇴한 후 프런트로 많이 일했고 '지도자보다 프런트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서 선임한 것으로 보인다. 다들 역시 행보관은 감독 말고 행보관을 해야 한다며 반기는 평.

대구 FC이영진 감독이 2011 시즌을 마치고 해임된 후 황보관 국장을 후임 감독 후보군에 올려두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서는 축협의 H국장이라고 나왔지만, 대구 출신의 H국장이면 황보관밖에 없다. 거기다가 변병주 감독의 퇴진 후 새 감독을 뽑으려 할때도 감독 후보군에 올랐던 사람이 황보관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나온 바로 다음 날, 대구 FC는 브라질 올림픽대표팀 수석코치 출신의 모아시르 페레이라를 새 감독에 선임함으로써 K리그 팬들의 뒷통수를 시원하게 때렸다.

2011년 11월 10일 이회택 전 기술위원장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장으로 취임했다. FIFA 랭킹 10위까지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2011년 12월 8일 대한축구협회는 조광래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감독 임명 해임권을 쥔 기술위원회가 소집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높으신 분들끼리 밀실 행정 논란이 불거졌다.관련 기사 2012년 2월 해임된 조광래 전 감독이 남긴 인터뷰에서 이 밀실 행정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단 재임 기간 내내 협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잘린 뒤 앙금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관련 기사

정몽규 제52대 축구협회장이 당선되고 난 후에도 전 대한축구협회 집행부들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현재는 정몽규충견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대한축구협회에서 주도한 일이 모두 실패로 귀결났음에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오명을 달고 다니고 있다. 대강 요약만 해봐도 이렇다.
한마디로 굵직한 사건 사고에는 항상 그가 엮여 있었다.

5. 비판 및 논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홍명보호가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기술위원회 역시 책임론이 불거졌다. 여기에 현행 기술위원회가 사실상 허울뿐인 기구로 전락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관련 기사

2014년 7월 3일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도 홍명보 감독이 유임하고 심지어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 누구 한 사람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붉은 악마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황보관 위원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관련 기사

2014년 7월 10일 결국 홍명보 감독과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때 황보관 위원장 역시 동반 사퇴한다는 보도가 돌기도 하였으나, 대한축구협회는 아직 황보관 위원장의 거취는 결정된 바 없다고 일단 부인했다. 축구협회는 황보관이 2014 브라질 월드컵에 대한 백서작업을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라지만 월드컵을 말아먹은 사람이 반성과 결산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지적이 많다. 오죽 사람이 없으면 물러날 사람이 반성과 결산을 할 정도로 축구협회 행정이 유치하냐는 비판도 쏟아진다.

축구 팬들 사이에서 음모론에 따르면, 정몽규 회장이 축구계 사정에 밝지 못한 점을 이용해서 몇몇 친목질 종자들이 회장 주변에 인의 장막을 구축하고 황보관을 데려다가 바지사장처럼 기술위원회에 앉힌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홍명보, 허정무 사퇴 이후 축피아의 핵심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찍혔다. 국내 축구 기사는 물론 해외축구 기사에도 달리며 심지어는 다른 종목, 심하면은 스포츠와 관련없는 기사에서도 댓글에 출몰하는 수준으로 찍혔다. 심지어 황보관이 물러나고 새로운 기술위원장으로 이용수가 선임되었다는 소식에서도 황보관을 사퇴시키라는 여론까지 나왔을 정도.

2017년 기준으로도 기술교육실장으로 여전히 대한축구협회에서 활동 중이다. 심지어 2015 호주 아시안컵 기간에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슈틸리케호) 지원팀장으로 활동했다. 쿠웨이트전을 앞두고 손흥민이랑 몇명이 감기몸살로 인해 쿠웨이트전을 출전을 못했는데,[17] 당시 대표팀 주치의흉부외과 출신이라고 하는 걸 보면 팀 닥터를 잘못 뽑은 것이 맞다. 해당 기사를 보면 확실히 대표팀 의료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2017년 9월 14일, 다른 축협 임원들과 함께 횡령 배임 혐의로 입건되었다는 기사가 떴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기사

2021년 정몽규 회장의 3선 성공 후 내부인사 개편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황보관이 대회기술본부장을 맡아 올림픽 대표팀을 지원하는 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는 KFA가 스스로 규정을 어긴 것인데 KFA 국가대표축구단 운영규정 제12조 4항을 보면 ‘협회는 필요하다 판단되면 각급 대표단에 단장을 선임한다. 단장은 협회 임원 중에서 선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단장으로서 덕망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황보관이 얼마나 덕망과 능력을 갖췄는지는 모르지만 임원은 아니다.[18] 이에 축구팬들은 규정까지 어겨가며 이용수와 함께 슬금슬금 축협 자리에 기어들어오는 적폐들의 행태에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올림픽 대표팀 김학범 감독이 선수 선발에서 잡음을 매우 심하게 내면서 폭주하고 있음에도, 황보관은 이를 전혀 중재하지 못하면서 올림픽 대표팀의 불균형한 스쿼드 명단에 대해 문제 제기 없이 K리그나 A대표팀의 희생을 강요하는 무리한 퍼주기 식 지원만을 감행했다. 또 주요 대회마다 동행하며 김학범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던 테크니컬스터디그룹(TSG) 위원[19]도 출입증 부족으로 도쿄 현장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본선에서는 졸전 끝에 8강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6-3 대패를 당하며 스스로 무능함을 증명해 버렸다.

이후 김판곤 사임 이후, 이용수와 함께 다시 협회로 돌아왔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중에 밝혀진 기사에 따르면, 파울루 벤투 감독은 1월부터 기술위원회나 협회와 단절하고 모든 훈련과 일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비록 이용수는 2022년을 끝으로 물러났지만 차기 대표팀 감독의 선임 과정에서 마이클 뮐러 전력강화위원장이 계약기간도 모르고 있었고,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대표팀으로 부임하는데 네임밸류를 중시하는 정몽규 회장의 성향을 떠받들기나 하던 황보관이 가장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국축구의 암덩어리 역할을 여전히 톡톡히 해내고 있는 중이다.[20]

게다가 대한민국 축구를 뒤집어놓은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사건이 터졌을 때 이사진 대다수가 물러났음에도 정몽규와 함께 자리를 지켜 축협의 철밥통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클린스만 선임 이후로도 대표팀 감독 업무를 뒤로 한 채 개인일정을 소화하는 클린스만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대표팀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있다. 2023년 상반기에는 K리그 감독들과 클린스만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코칭 스태프들과의 간담회를 추진했지만 클린스만 감독이 개인일정을 이유로 고사해서 모두 실패했으며, 벤투호와의 연속성을 위해 유일하게 유임된 마이클 김 코치를 보직 변경을 빌미로 쫓아내는 모양새를 만들어 벤투호의 유산과도 단절됐다. 특히 대표팀 전략강화위원회 소속 기술위원들은 마이클 김 코치의 퇴단을 8월 31일 보도를 통해 알았으며, 그 며칠 전인 28일에 있었던 전략강화회의에서 마이클 뮐러 위원장과 함께 남자 성인 대표팀에 대한 안건이 나오는 것조차 막아버렸다고 한다.영상

결국 이러한 일련의 잡음이 쌓여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 대회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한 끝에 전력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고,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클린스만 감독은 이내 미국으로 떠나가 버리며 여론은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이에 현 기술본부의 실세로 평가받는 황보관에 대한 책임론도 만만치 않게 나오는 중이며, 정몽규 협회장이 그 대신 마이클 뮐러를 경질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황보관 역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 아시안컵 대회 기간 중 선수단의 내분이 있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고, 이를 축구협회가 되려 신속하게 인정하고 선수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사태에 대해 국내 축구 전문 기자들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그 또한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다는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 나왔다. 팬들의 반응은 역시 그럴 만하다라는 반응....

2024년 5월 10일자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벤투식 축구가 아닌 관리형 축구를 기술리포트로 발표하려다 올림픽 예선 탈락의 여파로 발표가 유보되었다고 한다. 매니지먼트 유형 감독들이 자리를 잃어가는 현대 축구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구식적인 방식을 당당히 기술리포트에 실어서 발표하려 했다는 사실에 욕을 미친듯이 먹고 있다.[21]

게다가 "벤투식 축구 대신 관리형 축구"라는 말도 파울루 벤투 감독 체제에서 추구했던 프로액티브(능동형) 축구를 안 하고 리액티브(수동형) 축구를 하겠다는 소리를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관리형 축구이니 뭐니 말장난이나 지껄이고 앉았다는 평이 많다.
[1] 황씨 성에 이름을 '보관'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정확히는 황보(皇甫)가 성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영천은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이다.[2] 석사 학위 논문: 여가활동유형과 주관적 여가경험의 관계에 관한 연구(1992. 2).[3] 박사 학위 논문: 축구영재성의 상대적 중요도와 횡단적 발달 경향성(2015. 2). 지도 교수는 KBS 축구 해설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이용수.[4] 171경기 44골[5] 54경기 27골[6]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울대학교도 1년에 2명씩 체육 특기자를 선발한다.관련 기사 주로 수영 선수들이 많이 뽑혔는데 특이하게도 황보관은 축구 선수임에도 이 입학 전형을 통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7] 황보관 외에는 축구 해설위원으로 이름을 날린 이용수와 강신우가 몇 안 되는 서울대학교 출신 축구 선수다.[8] 우디네세 칼치오의 연고지[9] 오이타 트리니타는 원래 J2리그에서 시작해서 J리그로 승격한 팀이다. 더구나 승격 이후 줄곧 중하위권을 찍다가 결국 2009년 경영난에 빠지자 J리그 사무국에 자금 융자를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주축 선수들의 유출로 나락에 빠진 전형적인 시민 구단 테크를 밟으며 강등 당했다. 때문에 일부 넷상에서 '황보관이 말아먹었다'는 식의 주장은 2ch 등에서의 악질적인 인신공격을 여과없이 수입한 것이다. 실상 오이타는 2008년 한해 반짝 4위를 기록한 게 최고 성적이다. 오이타의 J리그 성적은 14/16('03) 14/16('04) 11/18('05) 8/18('06) 14/18('07) 4/18('08) 17/18('09)이었다. 게다가 2013년에는 홈 17경기에서 4무 13패를 기록하면서 시즌 홈 무승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10] 인터뷰 내용 중에서 K리그보다 J리그가 더 우세하다는 듯한 언급도 했는데, 2007년과 2008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라와 레즈감바 오사카가 연속으로 우승해서 해당 인터뷰 시점인 2009년 초반에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2009년과 2010년 포항 스틸러스성남 일화 천마 두 K리그 팀들이 연속으로 아시아 챔피언에 올라 그 발언이 무색해졌다.[11] 혹자는 이 승리를 놓고 본프레레 국가대표 감독이 2004년에 독일을 상대로 거둔 3:1 승리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시 최강희 감독의 전북을 상대로 어떻게 이렇게 이겼는지 의문이 드는 경기였지만, 그때 전북은 유독 서울을 못 잡았기에 크게 놀랄 결과는 아니다.[12] 서울은 야심차게 몰리나까지 영입하며 최고의 외국인 선수 진용을 갖췄지만, 일각에선 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몰리나, 제파로프, 데얀 셋의 장단점을 짜맞춰보면 서로 엇박자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실제 이런 우려가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13] 광주는 전 라운드 홈경기에서 전북에 6:1로 대패했었다.[14] 1월 3일 ~ 4월 26일. 총 110일이었다.[15] 일각에선 겨우 7경기를 치르고 사임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서울 팬들은 '더 일찍 사임했어야 한다'며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16] 풀네임인 황보관과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한 멸칭.[17] 이는 선수들의 몸관리에 실패한 것인데, 독감에 걸린 선수에게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벌금을 내게 하는 구단도 많은데, 이것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18] KFA 조직도에 따르면 임원은 회장, 부회장, 전무·분과위원장, 이사를 의미한다.[19] 황보관의 취임 전까지 주요 대회 리포트를 작성해 누구보다 당시의 U-23 선수들을 잘 알고 코칭스태프를 도울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20] 여담으로 이 비슷한 시기에 동갑내기인 허재도 데이원 사태로 농구계 공공의 적이 되었고 데이원 제명 이후 KBL에서 제명되었다.[21] 덕장에 매니지먼트 유형으로 거론되는 카를로 안첼로티도 전술 칼럼을 기고했던 지장이었으며, K리그에서도 관리 원툴에 불과하던 김상식 감독이 전북을 대차게 말아먹은 사례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