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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야구)

홍문종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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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우승엠블럼V1.jp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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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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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0ad67> 1982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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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홍문종
(198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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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0)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37번}}}
양상문
(1987~1988)
홍문종
(1989)
김경기
(1990~1992)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번}}}
양승관
(1982~1989)
홍문종
(1990)
정문언
(1991~1992)
}}} ||
파일:attachment/hmj3.jpg
홍문종
洪文宗 | Hong Moon-Jong
일본명 [ruby(徳山, ruby=とくやま)] [ruby(文宗, ruby=ふみむね)] (도쿠야마 후미무네)
출생 1954년 11월 11일 ([age(1954-11-11)]세)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쿠노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코우고쿠고[1] - 리츠메이칸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76년 드래프트 2라운드 (크라운라이터)
소속팀 크라운라이터-세이부 라이온즈 (1976~1980)
롯데 오리온즈 (1981~1983)
롯데 자이언츠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1989~1990)

1. 개요2. 선수 경력3. 근황4. 연도별 주요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재일교포 前 야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1976년 일본프로야구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팀 내에서는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성장하기를 기대했지만, 2군에서는 1979년에 도루왕을 차지할 정도로 활약을 하고도 1군에서는 이우민으로 보일 정도로 제대로 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렇게 기회를 살리지 못하다가 1980년 오프 시즌에 전력 외 통보를 받았고,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하였다. 그런데 1983년까지의 기록을 합산해서 보면 44경기 42타수 1안타 0.024, 홈런 0, 타점 0으로 형편없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매우 부진했다.

2.2. 롯데 자이언츠와의 계약

이때 한국 롯데 쪽에서 일본 롯데에게 선수 수급을 요청하게 되고, 그때 한국 롯데로 건너온 선수가 박덕용과 홍문종이다. 그 당시 홍문종의 나이가 30살이었지만 계약금, 연봉 모두를 합쳐 4천 8백만원이나 지급했을 만큼 한국 롯데는 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줬다.

1984년 이전까지 롯데는 외야수 부족과 함께 적당한 1번타자감이 없어 크게 곤란을 겪던 팀이었다.[2] 홍문종은 그러한 롯데의 고질적인 문제 2개를 한 번에 해결해 준 선수였다.

2.3. KBO 리그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4)
파일:attachment/hmj1.jpg

홍문종의 롯데 시절 가장 유명했던 순간은 입단 첫해인 1984년의 9타석 연속 고의사구인데,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2연전은 9월 22일과 23일 부산에서 벌어졌다. 롯데를 1984년 한국시리즈의 파트너로 점 찍은 삼성은 그 악명높은 '저주기 경기'와 동시에, 홍문종 원천봉쇄까지 진행하여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만수의 타율은 0.340으로 요지부동이었는데, 홍문종이 0.339까지 추격하여 이만수와는 1리(0.001) 차에 불과했다. 그러자 이들 두 경기에 이만수는 졸렬하게 절대 나오지 않고 백업포수[3]가 대신 나와 경기를 해야만 했다. 동시에 홍문종이 나오면 타석에 들어서는 족족 무조건 고의사구로 걸러서 타율을 굳히게 했다. 결과는 이만수가 트리플 크라운을 받게 되었지만, 비난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도루왕 타이틀을 놓쳤는데, 그 당시 도루왕 경쟁에서는 해태의 김일권, MBC 청룡이해창이 있었다. 가장 앞서 나간 것은 이해창(36개)이었다. 그러나 9연속 볼넷으로 출루를 많이 하게 된 홍문종이 도루 3개를 추가하며 이해창과 같아졌다. 이때 다른 팀들이 반대급부로 김일권(41개)의 도루를 방치하여 홍문종과 이해창은 타이틀을 놓쳤다.[4]

비록 홍문종은 타격과 도루 모두 아쉬운 2위에 머물러서 타이틀은 얻지 못했지만 1984년에 타점과 홈런까지 포함해서 4개 타이틀 모두 10위권안에 드는 흔치않는 진기록을 만들어 냈다.[5]

홍문종은 주무기인 도루 말고도 타점에서도 강세를 보였는데 첫해는 둘째치고 타율이 2할 6푼으로 뚝 떨어진 2년차때도 타점 만큼은 5위에 랭크될 정도로 득점권 타율이 높은 선수였다. 그래서 3번 타자로도 많이 나오곤 했다. 그러나 첫해 맹활약한 이후 한국에서의 나머지 6년간 도루부문에서 꾸준히 높은 순위를 기록할 뿐 다시는 그런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뛰어난 외야수비 덕분에 롯데에서 5년, 그리고 태평양으로 팀을 옮겨서 2년을 더해 7년이나 한국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올라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나름 팀의 우승에 기여했는데, 3차전에서 삼성 선발진의 두 축의 하나[6]였던 김시진이 홍문종의 타구에 복숭아뼈를 맞아 조기 강판된 것이 그것. 근데 김시진은 1차전에 부진한 모습을 보여서 의욕이 앞섰던 나머지 자신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타구를 막으려고 발을 갖다 댔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이후로, 야구 팬들이 아는 대로 김시진의 가을 야구는 한 번도 순탄한 적이 없다.

롯데의 재일 한국인 신분 선수들 중 가장 활약이 뛰어났고, 첫 해의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줬던 홍문종은 1988 시즌을 마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태평양 돌핀스에 이적하여 활동했다. 1990년 시즌을 마치고 태평양에서 방출된 후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홍문종과 연락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7][8]

3. 근황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론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귀신같이 연락이 끊겼다고 하며, 어디에서 뭘하고 사는지 아는 야구 관련 인물이 없을 정도이다. 다른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 몇몇이 지금도 소소하게나마 근황이 알려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4 롯데 100 360 .339
(2위)
122
(1위)
25 7 11 53
(4위)
62
(1위)
36
(3위)
50 .539
(3위)
.420
(2위)
1985 107 393 .260 102 23 2 11 58
(4위)
42 16 42 .412 .331
1986 103 387 .274 106 20 3 3 29 46 39
(2위)
46 .364 .349
1987 108 415 .287 119
(5위)
19 4 7 49 59
(2위)
25
(3위)
45 .402 .356
1988 87 319 .279 89 13 3 4 25 46 22 37 .376 .3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태평양 114 381 .241 92 15 3 6 31 60 16 41 .344 .314
1990 74 179 .235 42 6 1 1 14 23 7 36 .296 .363
KBO 통산
(7시즌)
693 2434 .276 672 121 23 43 259 338 161 297 .398 .353

5. 여담

대구 지역에서 활동 중인 동명이인의 성우가 있는데, 대구MBC에서 평일 아침 8시 30분에 방송하는 "달구벌 만평"을 진행하기 시작한 해가 1984년이다. 우연히도 홍문종이 한국프로야구에서 뛰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마구마구에서는 성명권 문제로 인하여 본명이 아닌 '홍영종'이라는 가명으로 선수카드가 등록되어 있으며, 마구마구 모바일에서는 ‘홍민재’라는 가명으로 선수카드가 등록되어 있다.

6. 관련 문서


[1]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흥국고등학교다.[2] 심지어 육상선수 서말구를 주루코치 겸 대주자로 쓰겠다고 영입할 정도였다.[3] 송일수가 이틀 연속으로 선발출장했고, 백업으로는 손상대를 기용했다. 경기 자체를 져주기로 한 이상, 타이틀 방어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주전 포수가 나올 상황은 아니었다.[4] 이 도루왕 경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해창이다. 사실 후기리그 내내 도루왕 경쟁은 홍문종이나 김일권 밀어주기의 연속이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일이 겹쳐 일어나서 그렇다. 첫째는 삼미의 장명부 vs 김진우 집안싸움. 둘은 1선발-주전 포수 관계였음에도 사이가 진짜 안 좋았는데, 장명부가 홍문종의 도루왕 타이틀을 밀어줄 요량으로 견제를 게을리해서 홍문종에게 2경기 5도루를 내주었고, 그걸 본 김진우는 김일권을 밀어줄 생각에 도루저지를 안 해버려서 김일권에게 2경기 7도루를 내준다. 두 번째는 삼성의 이만수 트리플 크라운 만들기+삼성의 져주기 게임(후기리그 롯데 우승시키기)+해태의 져주기 게임(후기리그 롯데 우승 저지-OB 우승시키기). MBC는 일정이 이미 종료된 상황에서, 삼성은 롯데와 마지막 2연전을, OB는 해태와 마지막 2연전을 하게 되었는데, 홍문종은 9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출루해 이 중 3도루를 추가하지만, 김일권은 승리를 가져간 OB의 방치 속에 2경기 6도루를 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가져간다.[5] 그나마 안타 수는 많아서 지금이라면 최다안타상을 수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상이 제정되기 이전이라 상을 받지는 못했다.[6] 나머지 한 명은 김일융.[7]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이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코치로 영입하려고 연락을 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8]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 제작팀 역시 일본창구를 통해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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