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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허 (위수)와 시가지 전경
다오커우진의 구도심
1. 개요
滑县영어 Hua County
허난성 안양시의 현. 신샹시, 푸양시 사이 평원의 웨이허 우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만명이다. 시가지 서부에는 황하의 지류인 다공-진디 강이 지난다.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현 치고 많은 편이다. 안양시에 속하긴 하지만 안양보다는 동북쪽의 푸양시나 서북쪽의 허비시가 더 가깝다.
옛 지명은 활대 (滑臺)로, 중세 시기 연주의 치소이자 적위의 수도로 번영했다. 삼국지 시기에는 백마 (白馬)로 불렸고, 관우와 안량이 격돌한 곳이다. 여러 하천과 운하가 지나는 황하 북안의 평야에 위치한 덕에 허난성 제일의 곡물 생산지이고, 곡물 정제 및 화학/전자 공업도 발달하였다. 특산물로 궁중에 진상되었던 닭고기 구이인 다오커우 카오지 (道口烧鸡)가 있다.
시가지 서부에 다오커우 고진 (道口古镇) 및 서가촌의 성벽을 포함한 대운하활현단 (大运河滑县段), 동남부에 명복사탑 및 구양서원 유적이 있다. 랴오청과 신샹시를 잇는 지정고속철이 시가지 동북쪽 외곽의 화쉰역 (滑浚站)을 지난다. 북쪽의 쉰현과 7km 거리로 워낙 가까워 역을 공유하는 것이다. 출신 인물로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를 지키려 한 총리 자오쯔양, 수당교체기의 군웅 적양, 당대의 재상 노회신, 청대 백련교 반란 지도자 이문성, 중일전쟁기 팔로군 지휘관 호청산 등이 있다.
2. 역사
옛 영제거 대운하의 일부인 위하
3황 5제 중 하나인 전욱의 수도였다고 전해진다. 주공단의 8번째 아들이 활백 (滑伯)으로 봉해졌고, 그 후예들은 활씨 성씨를 취하였다. 그들이 황하 강변에 성을 쌓고 활대 (滑臺)라 칭하니, 지명으로 고착화되었다. 동주 시기까지 있던 활국 (滑國)은 진나라 (晉)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626년 진나라 (秦)의 진목공이 정나라 공격에 실패한 후, 활국에 화풀이를 하여 일대를 파괴했다가 진양공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춘추시대 말엽에는 위나라 (衞)의 수도인 조읍 (曹邑)이었고, 진나라의 통일 후 동쪽 15km 지점에 백마현 (白馬縣)이 설치되어 동군 (東郡)에 속했다.
관도대전 시기 인근 백마파 (白馬坡)에서 조조 휘하의 관우가 원소 휘하의 안량을 격파하고 동군 태수 유대를 구원했다. 조위 건국 후 226년, 조조의 아들 조표가 백마왕에 봉해져 232년 초왕으로 이전될 때까지 유지했다. 서진 시기 백마현은 복양국 (濮陽國)에 이어 복양군 (濮陽郡)에 편성되었다가, 306년 사마의의 종손 사마등이 봉해진 연현 (현 옌진현) 기반의 동연국 (東燕國)에 귀속되었다. 다만 이듬해 사마등이 신채왕으로 전임되며 동연군 (東燕郡)이 되었다.[1]
2.1. 중세
당대인 826년에 세워진 명복사탑
시자촌에 약 25m 가량 남아있는 옛 성벽
5호 16국 시기 동연군은 315년 전조, 319년 후조가 정복하였다. 335년, 동연군은 낙주 (洛州)로 이관되었다. 다만 359년, 일대를 정복한 전연에 의해 연주로 환원되었다. 369년, 환온의 북벌 시에 동진령이 되었지만 이듬해 전연의 구원에 나선 전진이 일대를 얻었다. 비수대전 후, 384년에 사현과 유뢰지의 북벌로 재차 동진령이 되었다가 387년 정령부의 수령 적료가 차지하였다.
이듬해 적료는 활대를 수도로 하여 적위 (翟魏)를 건국했고, 390년 유뢰지가 활대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392년, 후연이 적위를 멸망시키고 일대를 차지한 후 연주 및 예주 (豫州)에 편성되었다. 399년, 북위가 정복한 후에는 동연군을 폐하고 동군 (東郡)에 귀속시켰다. 다만 이때 동군의 치소가 활대성으로 정해졌다. 한편 현재의 웨이허는 조위 ~ 수당시기에 걸쳐 대운하의 일부인 영제거를 이루었고, 백마현은 그 거점 도시로 번영했다. 수나라 시기인 596년, 동군은 활주 (滑州)로 개편되었다.
2.2. 중근세
다오커우 고진의 풍경
명나라 시기인 1370년, 백마현이 폐지되어 활주에 직속되었다가 1374년 활주마저 활현 (滑縣)으로 강등되었다. 청나라 시기인 1725년, 활현은 위휘부 (衛輝府)에 소속되었다. 19세기 초엽 백련교도의 난 당시 활현은 주요 전장 중 하나였다. 1813년, 현지인 팔괘교 지도자 이문성이 봉기하여 활현을 장악하고 지현과 순검을 죽인 후 '대명천순'을 칭했다. 산동의 정도, 조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북경에서는 임청의 천리교도들이 황궁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문성은 모병을 위해 휘형으로 향했다가 청군에 포위되자 분신하였고, 활현도 이듬해 함락되어 성을 지키던 이문성의 부인 역시 자결하였다.
2.3. 현대
화쉰역
신해혁명 후 1914년, 활현은 예북도 (豫北道)에 속하다 1928년 하남성 제3행정획전구에 편성되었다. 1949년에는 현 시완지촌 (西万集村)에 있던 현정부가 현재의 다오쿠진 (道口镇)으로 30km 가량 이전되었다. 당시 핑위안성 (平原省) 푸양전구 (濮阳专区)에 속하던 화현은 1952년 하남성 푸양전구를 거쳐 1986년 안양시로 이관되었다.
3. 구양서원 (欧阳书院)
구양수 석상과 서원
당나라 시기의 문학가 구양수가 활주 통판을 지낼 당시의 관저로, 화방재의 경우 그가 직접 지었다 한다. 구양수의 대표작인 추성부가 지어진 곳으로, 송대에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다만 중일전쟁 시에 일본군에게 파괴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1] 한편 사마등은 업성에서 석륵과 급상의 군대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