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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22:37:28

장성 황룡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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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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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황룡촌 전투
長城 黃龍村 戰鬪
동학 농민 혁명의 일부
파일:1582456923251.jpg
기간
1894년 음력 4월 22일 ~ 4월 23일
장소
조선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원인
동학 농민군의 봉기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파일:조선 국기(1893).svg 조선 파일:척왜양창의.svg 동학 농민군
지휘관
파일:조선 국기(1893).svg 홍계훈
파일:조선 국기(1893).svg 이학승
파일:조선 국기(1893).svg 원세록
파일:조선 국기(1893).svg 오건영
파일:척왜양창의.svg 전봉준
파일:척왜양창의.svg 손화중
파일:척왜양창의.svg 김개남
전력
300명 6~7,000명
결과
동학 농민군의 승리
영향
전주부성 함락
피해규모
100여명 50여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말5. 여담6. 창작물

파일:external/donghak.or.kr/img0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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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장성 황룡 전적.jpg
장성 황룡 전적
1894년 음력 4월 22~23일 양일간 전라도 장성군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 전투가 벌어진 황룡촌은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소재지인 월평리 일대이다. 이 고을은 서쪽에 황룡강이 흐르고 남동쪽은 못재 고개, 북동쪽으로는 장성읍과 맞닿아 있다.

2. 배경

1894년 3월 전봉준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은 무장에서 기포를 선언하였다. 보국안민을 구호로 내건 농민군은 난의 시발점인 고부를 비롯한 호남의 고을들을 휩쓸었고, 전라감사 김문현이 보낸 전라 감영군을 황토현에서 격파하였다.

난이 격해지자 조정은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진압을 명했다. 한성부를 지키던 장위영의 신식 병력들과 강화도의 신병들을 규합한 정예부대인 경군 1,000명 중 약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서해를 돌아 전라도 군산에 상륙하여 금구를 거쳐 남하했다. 하지만 황토현 전투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그 중 2~300명이 도망쳐버렸다. 홍계훈은 예상보다 거대한 농민군의 군세에 지레 겁을 먹어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조정에 추가 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청군을 부르자고 건의했다.

농민군은 황토현의 승리 이후에도 아직 전주의 경군과 싸우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주를 공격하는 대신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후방을 정리하고 기반을 다졌다. 농민군은 정읍, 고부, 흥덕, 고창, 무장, 영광을 돌아다니며 부호와 수령들을 처단하고 군대를 정비하며 수를 늘렸다. 4월 16일이 되자 농민군은 영광에 3~4천명 정도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함평으로 내려가 저항하는 군사들을 제압했다.

농민군이 전라도를 장악하려 하자 홍계훈은 무장에 병력을 일부 파견하여 농민군의 동태를 살피고, 전라감사를 통해 순창, 담양, 광주, 나주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조정은 4월 16일 강화심영 400명을 증파하기로 결정했고 홍계훈은 4월 18일 드디어 전주를 떠나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함평을 장악한 농민군은 홍계훈에게 흥선대원군의 재집권과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전봉준은 결전이 임박하자 군을 나누어 나주와 장성으로 진격시켰다. 덕분에 영광에 도착한 경군 부대는 거기에서 발이 묶였고, 주력은 장성으로 향해 홍계훈을 놀라게 했다. 홍계훈은 뒤늦게 장성으로 방향을 틀어 농민군의 뒤를 쫓았다.

3. 전개

4월 23일 홍계훈은 장성에 도착하자 장위영 대관(壯衛營 隊官)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 등에게 친군심영(親軍沁營)[1] 병력 300명을 주어 동태를 살피라고 명했다. 홍계훈의 경군은 유럽에서 수입한 모슬총(마우저 소총), 극로백(크루프 포), 회선포(개틀링 기관총), 회룡총(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등으로 무장한 신식 군대로 이전에 상대한 전라 감영군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반면 농민군은 점령한 고을에서 무기를 긁어모았지만 여전히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경군이 도착했을 무렵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의 장터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학승이 이를 발견하고 크루프 포를 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삼봉으로 올라가 학익진을 펼쳐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농민군은 경군보다 화력은 떨어졌지만 인근 지리에 밝았다. 농민군은 고지에 있는 점을 살려 경군의 화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장태였다.
파일:external/social.ktcu.or.kr/U82549_14162120625.jpg
전북 정읍 동학 농민 운동 기념관에 전시된 장태
파일:황룡촌 전투.jpg

장태는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이어붙인 것으로, 원래 병아리를 기르기 위한 일종의 둥지같은 것이었다. 대충 죽부인의 대형화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동학군은 이 장태 속에 짚을 넣고 밖에 칼을 꽂아 관군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굴렸다. 당황한 관군들은 총과 포를 위를 향해 쏘며 진격했지만 관군이 쏘는 총탄은 전부 장태에 박힐 뿐이었다. 신식 무기가 무력화되자, 수적으로 열세인 심영병들은 강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이들을 뒤쫓아 반격했다.

대관 이학승은 경군이 패주하자 후미에서 싸우며 아군을 엄호했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크루프 포와 개틀링 기관총, 신식 소총 다수를 노획하였다.

4. 결말

장성 전투는 농민군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승전 소식을 듣고 수많은 농민들이 농민군에 가담했으며, 경군의 사기를 꺾었다. 무엇보다 전주성의 병사들을 죄다 홍계훈이 끌고 나왔기 때문에 장성 전투의 패배로 더 이상 전주 함락을 막을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농민군은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여 4월 27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장성에서 패배하고 전주성을 내준 홍계훈은 농민군의 뒤를 쫓아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5. 여담

파일:external/www.cha.go.kr/1627288.jpg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

6. 창작물


SBS 드라마 녹두꽃 16화에서 다루었다. OST와 함께 나름 비장하게 그려지긴 했는데, 고증에서나 연출에서나 여러모로 아쉬웠다.

일단 관군이 게베어 1871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당시 게베어는 중앙의 친군영이 주로 사용했으며, 동학군 진압을 위해 나선 심영병들은 레밍턴 롤링블럭을 주력으로 사용했다.

전투 상황의 묘사에 있어서도 사실과 다른 점이 너무 많다. 드라마에서는 동학군과 심영병들이 평탄한 강변에서 맞붙는 것으로 묘사하였으나, 전술했듯이 실제로는 동학군이 고지를 차지한 상태에서 심영병들이 위로 진격하면서 전투가 일어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저런 평지에서 장태를 굴려 봐야 제대로 된 돌격이 될 리도 없으며, 관군의 소총 사격에 장태가 관통되는 묘사도 있어서 이럴거면 뭐하러 장태를 굴리는지 의문이 들 정도.

거지떼가 크루프 야포 포신에 물을 부어 무력화시키는 것도 실제와는 다른 야사를 따른 것이며, 그 묘사도 다소 어설프고 작위적이다.[3]

무엇보다도 당시 관군 지휘관은 장위영 대관이었던 이학승이었지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학승이 먼저 도망치는데, 실제 이학승은 제일 후미에 남아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명량의 배설 매국노 만들기도 그렇지만 극본작가의 수준이 미달일 경우 캐릭터들을 입체적으로 만들 역량이 없어 특정 캐릭터에 선한 면 악한 면을 모조리 몰아넣는 평면화 패턴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


[1] 강화도에 위치하던 친군영(親軍營).[2] 덤으로 영국군은 당시 줄루 제국에 반발하던 여러 흑인 부족들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음에도 이들이 같은 흑인끼리 손잡고 덤빌까봐 믿지 못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돕던 이들이 총기를 달라고 하는 걸 거부했다가 더 당했다. 나중에는 흑인들도 백인처럼 같이 전쟁 치러서 흑인끼리 다 친하게 지내는 걸 느끼며 총기를 대거 제공하면서 다른 전투에선 물량, 장비로 앞선 영국군이 지리적과 온갖 현지 정보를 이들 다른 흑인민족 도움을 받자 이후론 줄루 제국군을 아주 학살했다.[3] 현지에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관군에게 징발되어 밥을 짓던 할머니가 몰래 대포에 물을 부어 고장을 냈다고 한다.